이용희(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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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龍熙
1931년 6월 10일 ~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종교불교다.

2 생애

1931년 충청북도 옥천군 안남면 심청리에서 태어났다. 대전사범학교(공주교육대학교에 흡수)를 졸업하였다. 대전사범학교 재학 중 6.25 전쟁이 일어나자 사병으로 자진 입대하였다가 중간에 갑종간부후보생 제11기 장교로 임관하였다. 이 때 몸에 박힌 포탄 파편은 지금도 제거하지 못하고 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충청북도 옥천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신각휴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같은 해 연말 치러진 지방선거의 충청북도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충청북도의회가 해산되면서 박정희에 대해 분노하고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충청북도 옥천군-보은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박정희 대통령의 처남인 민주공화당 육인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김대중계 정치인이 되었으며 김대중과 내외문제연구소를 설립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신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역시 민주공화당 육인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주류인 범 유진산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김선우에 밀려 신민당 공천을 받지 못하자 무소속으로 충청북도 영동군-옥천군-보은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육인수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4년 9월 신민당 김영삼 총재 체제가 출범하자 한병채, 김인기, 진의종, 김재광, 한영수와 신민당에 복당하였다. 1977년 신민당 원내부총무에 임명되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철승계인 최극과 신민당 복수공천을 받아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육인수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약 두 달 동안 모진 고초를 겪고 풀려났다. 같은 해 정치규제를 당하였다가 1984년 해금되었다. 정치규제 기간에는 진로주조 고문을 역임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선 직후 민주한국당을 탈당하여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다. 김녹영의 별세로 공석이 된 야당 몫의 국회부의장 선거에 동교동계의 지원으로 출마하였으나 비 동교동계, 비 상도동계인 김옥선 등의 반대로 조연하에게 밀려 탈락하였다. 1987년 신한민주당을 탈당하여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였다가 다시 통일민주당을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평화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김명섭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에 절차상의 이유로 선거 무효 소송을 제기해서 승소하였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989년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도 출마하였으나 이번에는 민주정의당 나웅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충청북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민주연합 주병덕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충청북도 보은군-옥천군-영동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민주연합 어준선 후보에 밀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충청북도 보은군-옥천군-영동군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심규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한나라당 심규철 후보에 설욕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2006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행정자치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6년부터 2008년까지는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다.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를 지지하여 보은군에서 호남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정동영이 이명박을 제치고 1위를 기록하게 만들었다. 그만큼 지역구에서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하자 자유선진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2년 초 통합민주당의 후신 민주통합당에 복당하여 지역구를 아들 이재한에게 물려주었으나, 이재한은 19대와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박덕흠 후보에게 연거푸 패하였다.

3 선거 이력

연도선거종류소속정당득표수(득표율)당선여부비고
1960제5대 국회의원 선거
(충청북도 제6선거구)
무소속7,702 (19.2%)낙선(2위)
1960지방선거 (충북도의회 영동군 제1선거구)민주당-[1]당선
1963제6대 국회의원 선거
(충청북도 제6선거구, 옥천군-보은군)
민주당7,291 (10.5%)낙선(3위)
1967제7대 국회의원 선거
(충청북도 제4선거구, 옥천군-보은군)
신민당29,143 (35.3%)낙선(2위)
1971제8대 국회의원 선거
(충청북도 제4선거구, 옥천군-보은군)
신민당28,216 (37.6%)낙선(2위)
1973제9대 국회의원 선거
(충청북도 제3선거구, 옥천군-보은군-영동군)
무소속23,483 (18.7%)당선(2위)
1978제10대 국회의원 선거
(충청북도 제3선거구, 옥천군-보은군-영동군)
신민당29,365 (21.7%)당선(2위)이후 신민당 입당
1985제12대 국회의원 선거
(충청북도 옥천군-보은군-영동군)
민주한국당22,143 (16.3%)당선(2위)이후 탈당하여
신한민주당 입당
1988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영등포구 을)
평화민주당31,337 (28.6%)낙선(2위)
19898.18 재선거
(서울 영등포구 을)
평화민주당35,089 (29.8%)낙선(2위)
1995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충청북도 지사)
민주당168,209 (24.5%)낙선(2위)
1996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충청북도 보은군-옥천군-영동군)
새정치국민회의22,968 (24.5%)낙선(3위)
2000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충청북도 보은군-옥천군-영동군)
새천년민주당24,792 (27.4%)낙선(2위)
2004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충청북도 보은군-옥천군-영동군)
열린우리당36,991 (50.0%)당선(1위)18대 총선 직전 공천 탈락으로
2008년 3월 자유선진당 입당
2008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충청북도 보은군-옥천군-영동군)
자유선진당30,790 (43.8%)당선(1위)2011년 12월 탈당하여
민주통합당 입당
  1. 기록 부재로 확인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