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준

1 조선 중기의 유학자 겸 의병장

안방준(安邦俊)

1573(선조 6)∼1654(효종 5).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자 문신이며, 임진왜란 때는 의병장으로도 활동했다. 박광전[1],박종정, 정철[2], 성혼조헌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3]

광해군 때 이이첨(李爾瞻)이 그 명성을 듣고 기용하려 하였으나 거절, 1614년(광해군 6) 보성 북쪽 우산(牛山)에 들어가 후진을 교육하였다. 그뒤 학문 연구에 주로 치중하였고 관직은 호조참의에 이르렀다. 신독재 김집과 함께 송시열, 송준길이 등장하기 직전의 서인세력의 정신적 지주였다. 김육대동법의 주요 반대자의 한사람이다.

본관은 신 죽산(竹山)[4], 자는 사언(士彦), 호는 은봉(隱峰), 우산(牛山), 빙호자(氷壺子)이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전라남도 보성군 출신으로, 보성에 사는 안씨들은 거의 다 이 사람의 후손이라고 보면 되겠다.[5] 또한 보성읍에는 안방준의 호 중 하나인 '우산'을 딴 우산리가 있으며, 여기에는 안방준을 기리는 대계서원이 있다.

1.1 생애

1.1.1 성리학 수학

1573년(선조 6) 전라남도 보성군 보성면 오야리(梧野里[6]에서 진사 안중관(安重寬)의 아들로 태어나 아들이 없이 일찍 죽은 숙부 안중돈(安重敦)에게 입양되었다. 박광전(朴光前)의 문하에서 배우다가 박종정(朴宗挺)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성리학을 배웠다. 특히 매부인 박광전은 퇴계 학파를 계승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송강 정철을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 교육받으면서 동시에 1590년 서울에 있던 중봉 조헌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은 뒤, 다시 경기도 파산(坡山[7])에 가서 그의 스승격인 우계 성혼(成渾)을 찾아가 그의 문인이 되었다.[8]

1.1.2 임진왜란

일찍부터 절의를 숭상하여 정몽주조헌을 사표로 모시고 가장 숭배, 이들의 호를 한자씩 빌어 자기의 호를 은봉이라 하였다.[9]

을묘왜변의 명장인 경주정씨 판관 정승복(鄭承復)의 딸과 결혼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첫 스승이자 매부인 박광전과 함께 보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뒤 임진왜란이 끝나자 관직에 나가지 않고 보성에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한 뒤 실권자 이이첨(李爾瞻)이 그의 명성을 듣고 등용하려 하였으나 거절하고 1614년(광해군 6) 가을 승주군 우산(牛山[10]로 들어가 은둔, 숨어살면서 후진 교육에 힘썼다.

1.1.3 인조 반정 이후

1623년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지지성명을 발표하고 자신과 평소 친하게 지내며 교유가 깊던 친구인 공신 김류(金瑬)에게 글을 보내 당쟁을 버리고 인재를 등용하여 공사의 구별을 분명히 할 것을 건의하였다.[11] 이후 김류에게 호현상의(好賢尙義)의 기풍 진작, 편당(偏黨) 조정, 인재등용과 선공후사, 오랑캐의 침략에 대비할 것 등을 당부하는 서신을 보냈으나 모두 수용되지 않았다. 그뒤 조정에서 동몽교관[12],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 등을 제수하였으나 거절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이후 초야에서 학문 연구와 후학 교육에 정진하다가 정묘호란병자호란 등 국난이 일어날 때마다 의병을 일으켰다. 스승의 한사람인 조헌을 추모하여 《항의신편 抗義新編》을 편찬한 바 있고, 서인의 이귀(李貴)는 이를 보물이라며 격찬하고 이를 자신의 돈을 지원하여 영인, 간행, 중외에 반사(頒賜)할 것을 인조에게 건의하였다.

1.1.4 현실 정치에 참여

인조 후반에 전생서주부·찰방·좌랑 등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거듭 상소하여 시정(時政)을 논하였으나 현실과 부합되지 않은 내용이 많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한 이때부터 대동법을 주장한 김육키보드 배틀에 본격 나서게 된다. 효종이 즉위한 뒤 좌의정 조익(趙翼)의 천거로 사헌부지평, 장령 등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비로소 조정에 나갔다.

효종초 지방의 유일(遺逸)을 초치 등용하려 하였을 때 선우협(鮮于浹)·최온(崔蘊)·조극선(趙克善)·권시(權諰)·이유태(李惟泰) 등과 함께 천거되었다.

그러나 김자점하고도 친하게 지낸 탓에 1652년(효종 3) 지평으로 있을 때 김자점에게 보낸 왕복서찰이 있다 하여 김자점의 패거리로 몰려 이를 변명하는 상소를 하였다. 그해 5월 효종에게 상소하여 대동법을 반대하면서 김육(金堉)을 선조조의 유성룡(柳成龍)과 비유하며 그들이 나라를 그릇된 길로 오도한다며 그를 비난하였다.[13]

80평생을 주로 초야에서 보내면서 시종 성리학에 침잠하였다. 들어오고 나갈 때를 명확히 하였지만 학문적 경향과 처세, 처신에 있어서 상기(尙氣)의 병폐가 있었다고 한다. 일찍이 정철, 조헌, 성혼 등 서인계 인사를 추종한 데서 정치적 성향은 서인편에 섰다.

1.2 평가

일찍이 성리학에 전념하여 김인후 사후 호남지방에서 저명한 유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그는 지기(志氣)가 강확하고,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14] 절의를 숭상하여 정몽주조헌을 사표로 모시고 가장 숭배, 이들의 호를 한자씩 빌어 자기의 호를 은봉이라 하였다.
인조반정공신인 김류, 김자점, 이귀와 비공신인 산림 학자 김집, 성문준(成文濬[* 스승 성혼의 아들이다.), 송시열, 송준길 등과 친교가 있어 서인집권하에서는 호남지방을 대표하는 학자로 조정에 여러번 학문적 능력이 뛰어나다며 천거되었다.

1691년(숙종 17) 호남인 출신 남인인사 정무서(鄭武瑞) 등의 공격으로 그를 모신 사우(祠宇)가 한때 철거되었다. 그는 정철과 함께 남인의 주적으로 낙인찍혀 서인과 남인정권의 소장(消長)에 따라 포폄되기도 하였다.[15]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전라남도 보성군 보성읍의 대계서원(大溪書院), 화순군 동복면의 도원서원(道原書院), 화순군 능주면의 도산사(道山祠) 등지에 제향되었다.

1.3 작품

많은 시와 저서를 남겼다. 그의 시문은 《은봉전서》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편저로는 임진왜란 때 《진주서사(晋州敍事)》를 기술한 것을 비롯하여 《항의신편(抗義新編)》《이대원전(李大源傳)》《호남의록(湖南義錄)》《삼원기사(三寃記事)》《사우감계록 師友鑑戒錄》《혼정편록(混定編錄)》《매환문답(買還問答)》 등을 저술하였는데, 이 글들은 임진왜란의 의병사와 당쟁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기묘유적(己卯遺蹟)》 《노랄수사(老辣瀡辭)》 등은 당쟁사에 대한 연구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의 글과 시문(詩文)은 특히 인척이면서, 서인에 속한 원균에 대한 극딜이 강렬한 《은봉전서(隱峰全書)》에 수록되어 있다.

2 당나라, 신라 사람

당나라 사람으로 신라에 이주한 이원의 아들로, 구 죽산 안씨의 시조이다. 무려 1200년의 연대차이가 발생하는 동명이인이다.
  1. 그의 매부이자 퇴계 이황의 孫弟子였다.
  2. 관동별곡과 속미인곡의 그 송강 정철이다.
  3. 처음 접한 학문은 이황의 학문이고 첫 스승 박광전은 그의 매부였지만 성혼조헌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본격 서인이 된다.
  4. 순흥 안씨의 분적본 중 하나로, 시조가 다른 죽산 안씨가 또 있기 때문에 보통 구 죽산과 신 죽산으로 구분한다.
  5. 의병장 안규홍(安圭洪)도 안방준의 후손이고, 심지어 닭죽 사건의 주범이자 친일파였던 안용백(安龍伯)도 안방준의 후손으로, 보성에 안용백 동상이 있는데 동상 받침에 있는 글에서 안방준의 11세손이라고 자랑스럽게 밝히고 있다(...). 조상은 항일, 후손은 친일
  6. 지금의 전남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7. 경기도 파주의 별칭이다.
  8. 성혼의 문하에서 그는 이름있는 친구들을 사귀는데 뒤에 인조반정의 공신인 김류, 이귀, 김자점, 반정에는 참여하지 않지만 저명한 성리학자인 김집 등을 만난다.
  9. 은봉이라는 호는 정몽주의 호 포은(圃隱)과 조헌의 호 중봉(重峯)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10.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우산리
  11. 그러나 모두 무시당했다.
  12. 어린이를 가르치는 지역 스승으로 각 군현에 배치되었다. 지금의 공립초등학교 교사와 동급
  13. 김육은 서인이었다. 그러나 유성룡이 남인이었기 때문에 남인에게 원수가 되어 꼴통으로 낙인찍히게 됐다.
  14. 이때문에 김육과 크게 싸웠다.
  15. 그러나 그가 심하게 공격했던 인물은 남인이 아니라 서인 김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