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형

?width=120 (클럽별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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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겸
(강원 FC)
남기일
(광주 FC)
손현준
(대구 FC)
김태완
(상주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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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홍
(FC 서울)
서정원
(수원 삼성 블루윙즈)
김도훈
(울산 현대)
이기형
(인천 유나이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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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래
(전남 드래곤즈)
최강희
(전북 현대 모터스)
조성환
(제주 유나이티드)
최순호
(포항 스틸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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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유나이티드 감독대행
이기형 (李基珩 / Lee Ki-Hyung )
생년월일1974년 9월 28일
국적대한민국
출신지전라남도 화순군
포지션수비수
등번호6번
신체조건181cm, 78kg
별명캐논슈터, 말
학력신림중-정명고-고려대
프로 입단1996년 수원 삼성 블루윙즈
소속팀수원 삼성 블루윙즈 (1996~2002)
성남 일화 천마 (2003~2004)
FC 서울 (2004~2007)
오클랜드 시티 FC (2007~2010)
지도자FC 서울 코치 (2011,2013~2014)
FC 서울 2군 코치 (2011.7~2012)
인천 유나이티드 수석코치 (2015~2016)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대행 (2016~)
국가대표47경기 6골
인천 유나이티드 역대 감독
김도훈
(2015~2016
이기형
(2016~ )
-

캐논슈터
이기는 형

1 소개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로서 포지션은 수비수이다. 현재 전임 감독인 김도훈을 대신하여 K리그 클래식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대행을 맡고 있다.

2 선수 경력

2.1 어린 시절

전라남도 화순군 출생으로, 3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시골 동네에서 논이든 밭이든 넓은 터만 있으면 공을 차고 놀았다. 형들과 어울릴 때도 어느 정도 상대가 될 정도로 운동능력이 좋은 꼬마였다. 축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안타까운 가족사 때문이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모님이 병으로 돌아가셨고, 친척에게 의탁하기 위해 8살이 되던 해 6남매가 서울로 상경하였다. 그리고 서울 상경 후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찾아오게 되는데 은로초등학교 4학년 우연히 체육대회에 출전하여 달리기 우승을 차지했고, 이를 지켜본 축구부 코치가 축구선수가 되라고 제안한 것이다. 서울로 올라와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을까 걱정하던 큰형도 이기형의 결정에 찬성하였고, 본인도 큰 고민은 하지 않았다거 한다. 이를 계기로 이기형은 축구선수 생활을 시작하였다.[1] 뛰어난 축구실력을 바탕으로 중,고교 모두 체육특기생으로 진학하였고, 정명고 2학년 시절 청소년 대표에 뽑힌 이후로 태극마크는 늘 그의 가슴에 붙어있었다. 이러한 실력을 바탕으로 이기형은 축구명문 고려대학교에 진학하였고, 95년 애틀란타 올림픽 예선전에서 발군의 기량을 보여주었다. 이에 이기형을 눈여겨보던 신생팀 수원 삼성은 그에게 계약금 1억 5천만원이라는 당시로써는 거액을 안겨주며 수원 삼성과 계약했다.

2.2 수원 삼성 블루윙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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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삼성의 창단 멤버가 된 이기형은 입단 첫 해에는 올림픽 대표팀 동기인 박충균과 경쟁이 예고되기도 하였으나, 저돌적이고 활발한 플레이로 단숨에 김호 감독이 아끼는 자원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활약은 계속 이어져 1998년과 1999년 수원의 K리그 2연속 우승의 핵심 멤버로 활약하게 되었고, 2000년 잠시 부상으로 주춤하기도 하였으나, 금세 컨디션을 회복하고 2002년까지 수원 오른쪽 수비를 담당하였다.

2.3 성남 일화 천마

"수원과 성남에서 정말 강한 팀을 많이 경험했죠. 그중에서도 가장 강했던 팀을 하나 고른다면 성남에서의 첫해, 그러니까 2003년이에요. 그때 선수와 전술 등 모든 게 가장 강했어요. 지금 저와 함께 생활하시는 김도훈 감독님부터 정환이 형, 신태용 감독님, 데니스, 김대의 같은 선수가 다 한 팀에 있었죠. 경기에 나가면 거의 이기는 식이었어요. 지금 전북이 비슷한 수준으로 가고 있지 않나 싶어요."

수원에서 7년째 뛰던 2002년 말, 수원과의 계약이 만료됐다. 양측은 연봉 문제로 조금씩 갈등을 겪던 중이었다. 이기형은 당시 연봉 제시액이 본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기대에 못 미쳤다고 밝혔다. 당시엔 자유 계약 대상자라도 K리그 규정에 따른 이적료가 있었다. 그런 가운데 성남이 그를 영입한다.[2]

성남에서 보낸 2년은 순탄한 편이었다. 주전급으로 뛰며 무난하게 K리그 우승과 K리그 리그컵 우승을 한 번씩 달성했다. 하지만 김학범 코치가 감독으로 올라가던 해, 성적 부진으로 인해 선수단에 찬바람이 불었다. 마침 FC 서울에서 영입 제안이 왔다. 김학범 감독도 수락했고 성남을 떠나 서울로 이적한다.

2.4 FC 서울

이후 시즌 종료와 함께 어린 선수들의 중심을 잡아 줄 베테랑 수급이 시급하다고 여긴 FC 서울이 이기형을 영입했다. 하지만 이장수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후 전술적 견해 차이로 갈등을 빚었고 본인의 기량도 줄어들어 출장 기회가 줄어들었다. 2005년에 16경기 밖에 출전을 못하였고 이것은 2006년에도 이어져 2005년과 비슷한 경기 수를 출전하였고 K리그 리그컵[3] 우승에 기여했으나, 세간의 평가는 지난 시즌과 비슷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장수 감독의 계획에도 이미 제외된 상태였다. 결국, 시즌 종료와 함께 팀을 나갔고, 그것이 K리그에서 보낸 마지막 시즌이었다.

2.5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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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2년 계약을 마친 후 K리그 중하위권 구단으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연봉을 깎아가며 국내에 남기보다는 외국의 축구를 경험하고 싶었다. 원래 A리그웰링턴 피닉스 입단을 추진하였으나, 협상 단계에서 좌절되고 말면서 뉴질랜드의 오클랜드 시티로 전격 이적하였다. 오클랜드 시티에 입단한 이후로 세미 프로였던 뉴질랜드에서 월등한 기량을 자랑하며 적지 않은 나이에도 노익장을 과시하는 활약으로 정규 주전으로 출전하였으며, 리그 우승이 이바지하고 FIFA 클럽 월드컵에도 출전하여 도움을 기록하는 등의 활약을 보인 뒤 2010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최종 은퇴하게 되었다.

3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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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데뷔하여[4] 축협은 올림픽 대표팀을 타국 A대표팀과 맞붙는 대회에 참가시켜 실전 경험을 쌓게 했다. 이기형은 21세의 나이에 칼스버그컵과 다이너스티컵을 소화하며 대표 선수로 첫발을 뗐다. 그중 다이너스티컵에서 일본을 상대한 결승전은 화제를 모았다. 전반 26분 이우영이 코너킥을 땅볼 패스로 내줬고, 후방에서 달려들던 이기형이 골대와 약 30m 떨어진 곳에서 쭉 뻗는 슛을 날려 골망을 찢을 듯 흔들었다. 4번째 A매치에서 터진 데뷔골로 이기형의 오른발은 뭇 사람에게 알려졌다. 이기형은 이날 한 골을 더 넣어 2-2 동점을 만들었으나 한국은 승부차기 끝에 우승을 놓쳤다.
47경기 6골로 꽤 많은 출장 기록을 갖고 있지만 정작 A대표로서 남긴 족적은 다이너스티컵 이후 희미하다. 대회 본선마다 불참했기 때문이다. 1998 프랑스 월드컵 예선 때 붙박이 라이트백으로 뛰며 강한 인상을 남겼지만 정작 본선 명단엔 들지 못했다. 차범근 감독이 자신을 외면한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다고 한다.[5]

2002 한일 월드컵 역시 정상 컨디션이었다면 참가할 수 있었지만 거스 히딩크 감독 초창기에는 십자인대 부상에서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십자인대 부상은 원래 6개월 만에 나을 수 있었지만 지나치게 의욕적으로 재활 훈련을 하다 무리하는 바람에 수술에 들어갔고, 그렇게 6개월씩 두 번 회복기간이 연장돼 결국 일년 반 동안 그라운드를 떠나 있었다.

2004 아시안컵도 예선은 주전으로 소화했으나 오만 쇼크로 별다른 족적은 남기지 못했고, 역시 본선행엔 실패했다. 2003년 10월 네팔을 7-0으로 대파할 때 2골을 넣은 것이 이기형의 마지막 A매치였다.

4 플레이 스타일

공격형 풀백으로 명성이 높았던 선수였다. 수비적으로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강한 힘을 바탕으로 한 중거리 슈팅과 중거리 프리킥에 특출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캐논슈터. 1999년 올스타전에서 123km, 2002년 올스타전에서 138km를 기록하며 최고의 캐논슈터상을 받기도 하였다.

5 지도자 경력

5.1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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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2010년 뉴질랜드에서 공부를 마치고 2011년부터 FC 서울의 코치로 부임하였으며, 코치직과 2군 코치직을 2014년까지 수행하게 되었다. 이후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으로 부임한 김도훈의 부름을 받아 수석 코치로 임명되었다.

5.2 감독 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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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는 형

2016년 부진 끝에 김도훈 감독이 사임하면서 감독 대행으로 임명되었다.
9월 10일 FC 서울과의 경기에서 감독대행 데뷔전을 숭리로 장식하여 탈꼴지에 성공했고 수원 삼성과의 경기에서 극적인 무승부를 거두었다.

감독대행 자리에 오를때 스플릿 라운드 전까지 3승 2무를 해내겠다고 약속한걸 그대로 지켰다. 그리고 스플릿 라운드에서도 2승 1무를 거둬 대행부임이후 5승 3무를 기록, 이름에 빗댄 "이기는 형"이란 별명을 얻었다.

6 여담

  • 2002년 K리그 올스타전에서 기록한 138km 캐논슛 기록은 아직까지 K리그 올스타 역사상 최고속 기록으로 남아있다.
  • 1999년 8월 25일 포항 스틸러스와의 홈경기에서 이기형은 천당과 지옥을 동시에 경험해야 했다. 당시 수원은 팀을 이끌던 외국인 선수들이 부상과 경고누적 등으로 모두 결장하는 바람에 국내선수들로만 팀을 꾸려야했고, 전반 박태하고정운에게 연속골을 허용한데 이어 전반 29분 이기형이 상대의 승리를 확정지어주는 듯한 골을 자신의 골문에 집어넣어 0-3이 되고 말았다. 패배의 예감이 수원을 감쌀즈음 수원의 저력이 발휘되며 서정원과 이병근의 연속골을 집어넣으면서 극적으로 3-3 동점을 만든 뒤 후반 35분. 이기형이 30m 거리에서 대포알같은 슛을 터트려 4-3 역전극의 대미를 장식했다.

7 수상

  • 2002년 스포츠투데이 - 푸마코리아 선정 7월의 베스트11 (DF 부문)
  • 수원 삼성 블루윙즈
    • K리그 (우승 2회) (1998년, 1999년)
    • K리그 (준우승 1회) (1996년)
    • 대한축구협회 FA컵 (우승 1회) (2002년)
    • 대한축구협회 FA컵 (준우승 1회) (1996년)
    • K리그 리그컵 (우승 4회) (1999년-아디다스컵, 1999년-대한화재컵, 2000년, 2001년)
    • 대한민국 슈퍼컵 (우승 2회) (1999년, 2000년)
    •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 (우승 2회) (2001년, 2002년)
    • 아시아 슈퍼컵 (우승 2회) (2001년, 2002년)
  • 성남 일화 천마
    • K리그 (우승 1회) (2003년)
    • K리그 리그컵 (우승 1회) (2004년)
    • AFC 챔피언스리그 (준우승 1회) (2004년)
  • FC 서울
  • 오클랜드 시티 FC
    • 뉴질랜드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 1회) (2008-09 시즌)

8 참고

이기형, 전설의 오른쪽 수비수
  1. 출처
  2. 마침 애틀랜타 올림픽 트레이너 출신인 김학범 성남 코치와 인연이 있었다. 김학범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성남으로 가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김학범은 차경복 감독과 잠시 상의하더니 한 시간 만에 “와라”라는 답신을 보냈다고.
  3. 당시는 하우젠컵.
  4. 당시 축구협회는 올림픽 대표팀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5. 충격을 받은 이기형은 대회를 시청하지 않았고, 이웃집의 환호성 소리도 듣기 싫어 한동안 산속에 틀어박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