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임종인(林鍾仁) |
출생일 | 1956년 8월 28일 |
출생지 | 대한민국 전라북도 고창군 |
본관 | 부안 임씨 |
정당 | 무소속 |
배우자 | 이덕주 |
자녀 | 슬하 1녀 |
1 개요
17대 국회의원 (안산시 상록 을) 을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인, 변호사이다.
2 경력
1956년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면에서 태어났다. 고창중학교, 전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4년에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여 1978년에 졸업하였다. 이후 군법무관 시험에 합격하여 중령으로 전역 후 변호사가 되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2007년 한미 FTA의 타결을 전후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서민과 중산층을 뒤로하고 사실상 재벌과 특권층을 옹호해왔다"고 비판하며 탈당했다. 열린우리당 이 대통합민주신당으로 전환된 와중에도 합류하지 않고, 무소속으로 독자노선을 걸었다.
이듬해인 2008년 4월의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 [2]
2009년 재보궐선거에서 시민사회진영 단일후보로 추대되어 안산 상록을에 출마하였으나, 아쉽게 민주당 김영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3] [4] [5]
그 후 한동안 정치활동이 없다가 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에서 정동영 후보의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권신당 후보로 출마할것이라 밝혔다. # 그러나 결국 국민의당 등에도 참여하지 않고 국회의원 선거에 불출마하였다. 더불어민주당 소속으로 안산시 상록구 을 선거구에 출마한 김철민 후보를 지지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으나, '평소 친분이 있던 김철민 후보의 초청을 받고 선거 사무소를 방문했을 뿐 공식적인 지지활동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3 여담
- 민주당 계열 정치인들 가운데 진보 성향 색체가 특히 강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이라크 파병 반대, 사병 월급 30만원 인상 주장, 신자유주의 노선 반대, 한미 FTA 반대 단식, 기업형 대형 슈퍼마켓 규제법 발의, 론스타의 외환은행 불법·헐값 인수·매각 사태 해결 국회 결의안 촉구, 재벌 개혁 및 삼성그룹 사태 관련 이건희 회장 수사 촉구 등이 대표적인 사례. 당연히 진보측에게는 "소신있는 정치인"으로 높이 평가받았지만, 보수 진영에게는 "과격", "반미" 등의 악평을 들었다.
- 제17대 국회의원 당시 국회 국방위 소속이었지만, 줄곧 군축 지향적인 주장을 계속했다. 국정감사에서는 송영무 해군참모총장에게 대형함정을 만들 예산으로 참수리 고속정을 뽑는 게[6] 더 효율적이지 않냐는 질의를 하여 큰 파장을 가져왔다.# 실제 17대 국회의원 임기내내 노무현 정부의 핵심정책이던 대양해군 건설을 비판하고 연안해군론에 입각한 주장을 계속하였다. 반면에 2006년 4월 일본의 독도 인근해역 측량 시도를 놓고 한일 양국간 물리적 충돌 우려가 고조될 때는 뜬금없이 "군사적 대응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에 "해군력 강화는 발목 잡더니 무슨 위선이냐?"는 밀덕들의 비판만 받았다. 일부 밀덕들은 "내부의 적" 취급을 하면서 창씨개명해서 '하야시 카네히토' / '린종런' 제독으로 부르기도 할 정도. 이외에 국내영공방어중심론, 선제군축론, 제주해군기지 반대, 대체복무, 병사월급 현실화 주장[7] 등으로 국내 언론과 정치권, 밀리터리계 사이에서 항상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 당시 민주노동당과 비제도권 진보진영에선 자신들 보다 더 진보적이라고 평가하였다. 심지어 열린우리당 내에서도 "민노당으로 가지, 왜 여기 있냐?"는 소리를 종종 들었다는 후문. 이 때문에 임종인이 열린우리당을 탈당하자 민주노동당에 입당할 것이란 소문이 돌았지만, 이에 대해 임종인은 '그런(민주노동당식) 방식으론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 난 거기로 안간다.' 라며 선을 그었다.[8]
- 2011년 2월 7일 저녁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 출연하여 합동법률사무소 김앤장에 대해 강도높은 비판을 가하였다.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할 때, 김앤장이 그 모든 과정을 디자인한 것 등에서도 볼 수 있듯이, 김앤장은 여태까지 우리나라의 이익에 반하여 외국투기자본을 법적으로 대리하면서 어마어마한 수익을 올리는 식으로 급성장해왔다는 점, 변호사 자격도 없는 전직 고위공무원들을 고문으로 초빙하여 탈법적 로비창구 노릇을 해왔고 그러한 식으로 한 해 수천억의 이익을 취해왔다는 점 등이 그 근거였다.
- ↑ 공천탈락해 무소속으로 출마했냐는 오해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
- ↑ #
- ↑ 초반에는 25%의 지지율을 보이며 1위를 달리고 있었으나, 민주당과의 후보 단일화가 결렬되고 투표일이 다가오며 사표방지심리가 작용하면서 15%의 득표로 낙선하였다.
- ↑ 여론조사
- ↑ 다만, 이때 사회진영 지지자들이 김대중 = 이명박이라는 주장을 하면서 유권자들의 반발을 사게되고, 구민주계에 속하는 김영환 측의 지지율이 올라가는 상황도 있었다.
- ↑ 정확하게는 오사급 / 코마급과의 가격 대 성능비 비교였다.
- ↑ 최소 25만원을 제시하였다.
- ↑ 당시는 이미 NL계(자주파)가 당대표와 사무총장, 정책위원장 등 지도부를 싹쓸이하고 당을 제멋대로 운영하던 시점이었다. 반대로 PD계(평등파)가 대다수였던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 등 국회의원단은 이런 자주파의 독선에 반대해서 역시 지도부와는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임종인은 이런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으니, 당연히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국회진출을 경계하던 보수언론쪽에서도 이런 모습을 조롱하면서 별거 아니다식의 기사가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