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 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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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평 윤씨의 종문(宗紋). '윤(尹)' 자가 들어있다.

성씨파평 윤씨(坡平 尹氏)
관향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시조윤신달(尹莘達)
집성촌황해도 황주군, 송화군
평안북도 운산군 위정면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전라남도 함평군 해보면
경상북도 예천군 유천면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면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인구(2015년)770,932명

1 개요

경기도 파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파주는 본래 고구려 장수왕 때 파해평사현이었는데, 조선 태조 때 서원군과 파평현을 병합하여 원평군이라 하였다. 1461년 파주목으로 승격하였고, 1895년 이 되었다.

파평윤씨의 시조는 윤신달이다. 그는 고려 태조(왕건)를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 창업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에 올랐다. ‘조선씨족통보’와 ‘용연보감’ 등의 문헌에 따르면, 윤신달은 파주 파평산 기슭에 있는 용연지라는 연못 가운데에 있던 옥함 속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그가 태어날 때 겨드랑이에 81개의 비늘과 발에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었고, 손바닥에는 윤(尹)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성을 윤(尹)으로 하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는 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에 기여하였으며, 그 공으로 벽상삼한익찬이등 공신으로 삼중대광태사의 관작을 받아 후손이 그를 시조로 받들고 본관을 파평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포항시 기계면에는 파평윤씨 시조 윤신달의 묘와 재실인 봉강재가 있다. 관향인 파주가 아닌 경주에 시조의 묘가 있는 것은 윤신달이 동경(지금 경주)대도독으로 30여년간 재임하다 이곳에서 일생을 마쳤기 때문이다. 한 문헌에 의하면 고려 2대왕인 혜종이 윤신달을 경계하여 동경대도독에 임명한 후 죽을 때 까지 중앙으로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지방 호족을 견제하기 위한 기인제도로 인해 윤신달의 아들 윤선지는 윤신달이 동경대도독으로 부임한 이후 임지에서 졸할때까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본인 또한 고려개국공신이었음에도 관직을 역임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혜종이후 경종에 이르는 4대 50여년간 벌어진 호족 숙청 기간 동안 몸을 보전하기 위해 은거한 것으로 보인다.

윤신달의 5세손에는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은 윤관이 있다. 그는 고려 선종 때 합문지후와 좌사낭중을 지내고, 여진정벌에 원수가 되어 17만 대군을 이끌고 출전, 함주와 영주 등 9지구에 성을 쌓아 침범하는 여진을 평정하였다. 그 공으로 벼슬이 수태보 문하시중 판병부사 상주국 감수국사에 이르렀고, 7형제를 낳아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그래서 파평윤씨에서는 윤관을 중시조로 삼고 있다.

파평윤씨 족보에 따르면 시조 윤신달부터 5세손 윤관까지 전부 단계로 내려오고 있다. 즉 윤관은 5대 독자이자 모든 파평윤씨는 윤관의 후손이라는 말이 된다. 시조로부터 윤관까지 세계를 내려가면 윤신달-윤선지-윤금강-윤집형-윤관이 된다.

윤관 장군의 영정. 윤관 장군은 문신이지만 별무반을 편성하여 지금의 함경도와 간도 일대를 점령하고 동북 9성(함흥·길주 등)을 쌓았다.

파주라는 명칭도 파평윤씨 가문 때문에 생긴 명칭이다. 세조는 계유정난 이후 점차 시국이 안정됨에 따라, 정변 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세조비 파평윤씨(정희왕후)의 고향인 원평도호부를 파평윤씨에서 '파'자를 따와 파주목으로 승격하였다. 그리고 할머니(태종비, 여흥 민씨)의 고향인 여흥 또한 여주목으로 승격하였다.

윤관의 7형제는 다시 아랫대로 내려가면서 수십 파로 분파되었다. 윤관의 큰아들 윤언인의 손자 윤위는 남원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남원백에 봉해졌다. 그 이후 후손들을 남원윤씨라고 불렀다. 윤위의 손자 윤돈 또한 함안에서 난을 진압하여 함안백으로 봉해졌다. 그 이후 윤돈의 큰 아들 윤휘보의 후손들은 함안윤씨로 분파되었고 윤돈의 나머지 세 아들의 후손들은 남원윤씨로 세계를 이어갔다. 현재에 이르러 이 두 성씨는 유래가 명확하므로 각각 파평윤씨 함안파와 남원파로 합본되었다. 연산군의 어머니로 유명한 제헌왕후 (폐비윤씨)가 함안 윤씨이다. 남원윤씨로는 효종-숙종 연간 남인의 거두였던 백호 윤휴가 있다.

윤관의 다섯째 아들 윤언식의 후손들은 윤언식의 증손자 윤은형이 덕산군에 봉해짐에 다라 덕산군파로 불려지고 있다. 이외 나머지 파평윤씨의 분파인, 문정공파(文定公派) 신녕공파(新寧公派) 대언공파(代言公派) 봉록군파(奉祿君派) 판서공파(判書公派) 야성파(野城派) 전의공파(典儀公派) 소정공파(昭靖公派) 원평군파(原平君派) 소도공파(昭度公派) 판도공파(版圖公派) 소부공파(小府公派) 태위공파(太尉公派) 등은 6남 윤언이의 후손들이다. 이들 가운데서 후손인 판도공파(版圖公派)와 소정공파(昭靖公派)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윤관의 다른 아들은 출가하거나 후손이 전해져 오지 않고 있다. 그리고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고려시대에 문벌 귀족의 자제들이 출가하는 것은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대각국사 의천은 왕족 출신이다.

여담으로 파평윤씨의 대부분(90%)은 소정공파(昭靖公派)와 판도공파(版圖公派)로 다른 성씨 본관의 파에 비해 한쪽 파(派)에 많이 쏠려 있는 편이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모두 22만1477가구 총 71만 394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인구가 많은 만큼 전국적으로 많이 분포하고 있지만 충청도와 경상도 쪽에 인구 거주밀도가 높다. 반면 전라도에서는 생각보다 많이 안 산다. 전라도에 사는 윤씨는 남원을 본관으로 하는 남원 윤씨나 해남을 본관으로 하는 해남 윤씨인 경우가 많다.[1] 특히 전라남도에는 파평 윤씨보다 해남 윤씨들이 더 많다.[2]

2 번성

파평윤씨는 조선시대 들어와 가문이 크게 번성하면서 명문세도가의 반열에 올랐다.(이미 고려시절부터 문벌귀족 15가문을 시작으로 권문세족 안에서도 재상지종 9가문의 명문가였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5명[3]의 왕후를 배출했으며, 수많은 과거급제자와 고관대작들이 나왔다. 그중 중종 대에서는 파평윤씨에서 두 명의 왕비(장경왕후와 문정왕후)가 나와 한 가문에서 대윤과 소윤으로 갈려 싸우는 비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판도공파의 파조는 윤승례인데, 그는 시조 윤신달의 13세손으로 윤척의 아들이다. 윤승례의 아들이 세조의 장인인 윤번이고, 윤번의 딸이 정희왕후(세조 비)이다. 판도판서공파는 윤승례의 아들 대에서 제학공파 부윤공파 정정공파로 갈라진다. 그중 정정공파에서 두 명의 왕비가 나와 대윤과 소윤의 싸움이 빚어졌다.

윤승례의 아들 윤번은 세조의 장인이고, 윤번의 맏아들인 윤사분은 우의정, 둘째인 윤사균은 예조판서, 셋째인 윤사흔이 우의정이 되어 형제간에 정승을 지냈으며 7∼8대에 걸쳐 국구부원군과 공신부원군, 정승 판서와 당상관들이 배출되어 조선시대 최고의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듯이 윤사분과 윤사흔 두 집안에서 각각 중종의 왕비(장경왕후, 문정왕후)가 배출되어 왕실 및 왕위계승을 놓고, 대윤과 소윤으로 갈라져 싸우는 비극이 일어났다.

윤사균의 손자인 윤여필의 딸이 중종의 제1계비인 장경왕후이고, 그의 오빠가 윤임이다. 장경왕후는 세자를 낳고 곧바로 죽었다. 장경왕후의 뒤를 이어 윤사균의 동생인 윤사흔의 증손 윤지임의 딸이 제2계비로 책봉되어 문정왕후가 되었다. 먼 친척뻘인 고모와 질녀가 같은 왕비가 된 것이다.

문정왕후는 아들 경원대군을 낳은 뒤로 동생인 윤원형을 끌어들여(소윤)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을 중심으로 한 일파(대윤)와 정치적 암투를 벌였다. 이를 대윤과 소윤의 싸움이라고 한다. 대윤과 소윤의 싸움은 문정왕후의 아들이 왕위(명종)를 계승함으로써 소윤의 승리로 끝났으나, 소윤 역시 문정왕후가 죽자 몰락하였다. 결국 대윤과 소윤의 싸움은 파평윤씨 판도공파의 몰락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소정공파는 윤승례의 형 윤승순의 아들인 윤곤의 후손이다. 윤승순은 공민왕 때 요승인 신돈의 살해를 모의하다 발각되어 유배되었다가, 신돈이 주살된 후 풀려나 응양군 상호군이 되어 왜국의 침입을 막아냈다. 창왕 때는 권근과 함께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 명나라의 명에 의해 공양왕을 즉위케 하고 판도판서를 역임했지만, 공양왕이 폐위되자 은거하였다.

윤곤은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李芳遠, 태종)을 도와 좌명공신에 책록되고 이조판서를 지냈다. 그의 손자 윤호는 성종의 장인으로서 딸이 성종비인 정현왕후(貞顯王后)이다. 그 후 그는 돈령부영사를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윤곤의 후손 중에는 성종 때 영의정을 지낸 윤필상이 있다. 그는 문종 때 추장문과에 급제했다. 이시애의 난에 도승지로 왕명을 신속하게 처리하여 우참찬에 특진하였다. 성종 때 영의정에 오르고 부원군에 봉해졌으나,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윤씨의 폐위를 막지 못하였다는 죄로 진도에 유배되고 사약을 받았다.

그의 증손인 윤현은 명종 때 호조판서를 지내고, 선조 때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돈령부영사에 이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이밖에 소정공파의 윤사로는 세종의 딸 정현옹주와 결혼하여 영천군에 봉해지고, 세조 즉위년 좌익공신에 책록되고 좌찬성, 중추부영사에 이르렀다.

파평윤씨 출신 중 일제에게 작위를 받은 사람은 없다. 조선귀족 명단을 살펴보면 종종 윤씨가 눈에 띄기는 하나 파평인은 아니다. 파평윤씨가 윤씨중 제일 인구가 많다보니(전체 윤씨 중 약 75%) 좋은 쪽이던 나쁜 쪽이던 윤씨라면 무조건 파평 윤씨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일부러 적는다. 후손으로서 자부심을 가질 일이기는 하나, 엄밀히 따져보면 조선 초, 중기와 달리 후기에는 가문의 영향력이 떨어졌던 것이 주된 이유가 아닌가 한다. 아무래도 당시에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면 -나중에 작위를 반납하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작위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하버드대 故 와그너(Edward Willett Wagner) 교수와 전북대 故 송준호 명예교수[4]가 추진했던 와그너-송 프로젝트[5]에 따르면 조선 시대 과거 급제자들 중 전주 이씨, (신)안동 김씨 & 권씨[6] 다음으로 많은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고 한다. [7]

3 속설

윤신달과 윤관을 거치며 명문가의 반열에 올라선 파평윤씨 가문에서는 ‘잉어’를 먹지 않는 전통을 갖고 있다. 그것은 시조인 윤신달이 연못의 옥함에서 나왔을 때 81개의 비늘이 나 있었다는 것과 윤관이 적에게 쫓길 때 잉어의 도움으로 탈출했다는 전설 때문이다. 그래서 파평윤씨에서는 자신들이 잉어의 자손이며 또한 선조에게 도움을 준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잉어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실제로도 아직까지 어느 정도 지키는 집도 있다. 위 사실을 아는 대부분의 집은 엄격하게 금지하진 않아도 그렇게 지키기 힘든 것도 아니니 그냥 안 먹는다. 어차피 우리나라에서 잉어는 억지로 찾아 먹지 않는 한 먹기 힘든 음식이다. 가끔 산모 보양용으로 먹는 잉어탕 정도나 남아 있을까 잉어 요리가 거의 없다시피 해서 생활에 큰 지장은 없다. 또한 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할 때는 조상님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실 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다만 중국에서는 요리재료로 종종 쓰인다. 거래처와 식사를 하는 경우 등 가끔 잉어가 상에 오르는 경우가 있는데, 대충 알아서 처신하자.

2세 윤선지의 이름을 피휘하기 위하여 나이드신 파평윤씨 분들은 '선지국', '선지 해장국' 대신에 '쇠피국', '쇠피 해장국' 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참고로 이 부분을 쓴 필자는 그냥 '해장국'이나 상황에 따라 '국'으로 대충 얼버무린다. 피휘 하자고 남들 안 쓰는 '쇠피'를 쓰자니 너무 유난 떠는 것 같고, 피휘를 안 하자니 어려서부터 들어온 할아버지, 아버지의 말씀을 어기는 것 같아 괜히 찔려서이다인용 오류: <ref></code> 태그를 닫는 <code></ref> 태그가 없습니다이 임명되었을 때, 많은 파평 윤씨들은 그가 파평 윤씨가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미친 알아차렸다고 한다. 가문에서 가장 유명할 뿐만 아니라 모든 파평 윤씨의 조상이 되는 윤관의 이름을 자기 자식에게, 설령 한자가 다르더라도, 그렇게 지어줄 후손은 없기 때문이다.</ref>.

파평윤씨 집안에 전해저 오는 것으로 금강산 명칭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시조 윤신달의 손자이자 중시조 윤관의 조부인 윤금강은 틈만 나면 금강산(당시 풍악산 혹은 개골산)을 찾았다고 한다. 조회마저 빼 먹을 정도라 주변에서 걱정이 많았다고 한다. 금강산을 너무 좋아해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건국 후 한참 호족들을 대상으로 한 숙청이 활발하던 때라 정치적인 일에 연루되기 싫어 그랬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윤금강이 워낙 금강산에 자주 출몰하다보니 그의 주변에서 윤금강이 그 산의 주인이라 하여 금강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것이 점차 주변에 퍼져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금강산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를 근거하는 문헌은 찾을 수가 없으니 굳이 우기지는 말자.[8]

김삿갓의 시 중에 '욕윤가촌(辱尹家村)'이라는 시가 있는데, 말 그대로 윤씨가 많이 살던 어느 윤가촌을 욕하는 시다. 김삿갓이 그 마을에서 푸대접을 받고 마음이 상해 썼다고 한다.

東林山下春草綠[동림산하춘초록] : 동림산 아래에 봄풀은 푸른데

大丑小丑揮長尾[대축소축휘장미] : 큰 소 작은 소가 긴 꼬리 흔드네.
五月端陽愁裡過[오월단양수리과] : 오월 단오에는 근심속에 지냈는데
八月秋夕亦可畏[팔월추석역가외] : 팔월 추석을 어찌 넘길지 두렵도다.

소 축(丑)자에 꼬리를 더하면 윤(尹)자가 되는 것을 가지고 파자를 통해 까는 것이라고 한다. 뭐 저 윤가가 파평 윤씨라는 근거는 없지만 일단 인구가 제일 많고 사실 세간에서는 윤씨는 거의 다 파평 윤씨로 인식하는 경향도 있고 하니 제일 가능성이 크긴 하다. 뭐 저걸 가지고 윤씨들은 다 그렇다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김삿갓이 겪은 에피소드 중 하나일 뿐이니 그러려니 하자. 진짜 제대로 조사하면 어디 윤씨인지 나오긴 하겠지만...

파평윤씨 여자는 기가 세다는 속설이 있다. 당연히 속설은 속설일 뿐이니 일반화 시키지는 말자. 조선시대 가장 강력한 권한을 휘두른 왕비인 문정왕후가 파평윤씨이다보니 이런 속설이 퍼진 것이 아닌가 한다.

4 기타

모 정치인이 박근혜 정부 참여에 대한 자신의 의사를 번복하면서 윤봉길 의사의 존함을 '문중 할아버지' 운운하며 언급하여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다. 당시 윤봉길 의사 유족측에서 상당한 불쾌감을 보였는데 이는 당연한 것이다. 일단 윤봉길 의사는 해당 인물의 문중 할아버지라고 하기가 어렵다. 각 집안마다 경우가 다르겠지만, 보통 문중 할아버지라고 하면 본인의 직계 조상이거나, 촌수가 좀 있더라도 비교적 가까운 선대에서 분파되어 최소한 시제 정도는 같이 지내는 집안에서 본인보다 최소 두 항렬 위인 사람을 말한다. 윤봉길 의사는 판도공파고 해당 인물은 판도공의 조카인 소정공 윤곤의 후손이다. 둘 다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 사람이므로 아무리 적게 잡아도 최소한 17대는 내려 왔을 것이다. 촌수로 아무리 적게 잡아봐야 34촌. 사실은 그 이상이 될 가능성이 훨씬 크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누가 굳이 윤봉길 의사의 후손이냐고 물어봐도 '같은 파평 윤문이지만 아주 오래 전에 분파되어 현재 왕래는 없습니다.' 정도로 대답하는 것이 맞다.

그리고 실제로 윤봉길 의사의 직계 후손이라 하더라도 공적인 자리에서 조상의 함자를 함부로 언급하는 것은 후손의 도리가 아니다. 전통을 준수하는 집안에서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이 본인의 잘못된 행실로 인하여 조상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이다. 조선 후기로 들어서면서부터 의미가 많이 훼손되었지만, 집안에서 자꾸 조상의 행적 운운하는 것은 그것을 자랑으로 삼고 어디가서 이득을 취하라는 것이 아니라, 평소 몸가짐을 바로해서 이런 훌륭한 조상들 이름에 먹칠하지 말라는 것이다.

반대로 조상의 행적을 왜곡하는 것 또한 철저히 경계한다. 조상 얼굴에 금칠하려다가 똥칠한다는 말이 있다. 물론 자손된 입장으로서는 좋은 점만 기록에 남기고 싶어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이런 것도 정도가 있다. 가령 공이 있다면 이를 세세히, 기왕이면 좋은 쪽으로 기록하고 과가 있다면 완곡한 표현을 쓰거나 '오해로 공을 모함하는 사람이 있어 죄를 받았다' 정도로 언급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하지도 않은 고위 관직을 역임했다고 하거나, 과거에 급제하지도 않았는데 급제했다고 하는 등 사실을 왜곡하는 것은 오히려 조상을 모욕하는 짓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나는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조상이 부끄럽기 때문에 과거에 급제했다고 왜곡했다'라는 의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면, 조상은 내가 이 세상에 있게한 그 자체로 이미 공경을 받을 존재인 것이지 무슨 권력이 있었기 때문에, 유명한 분이었기 때문에 모셔야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 집안과 전혀 왕래가 없던 사람이 본인의 정치적 소신을 바꾸는 핑계중의 하나로 직계 할아버지 함자를 언급하는 것은, 후손된 입장에서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남의 집안일에 굳이 끼어들어 모 정치인은 윤봉길 의사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던 사람 말은 무시하자.

5 실존 인물

5.1 역사 인물

5.2 현대 인물

  1. 해남 윤씨는 파평 윤씨 다음으로 2위, 남원 윤씨는 3위. 참고로 4위는 해평 윤씨인데 해평 윤씨는 같은 성자을 공유할 뿐, 파평 윤씨와는 시조부터가 다른 이본이다.
  2. 다만 남원 윤씨는 모두 파평 윤씨에서 갈라져 나왔기 때문에 파평 윤씨 문중에서는 범 파평 윤씨로 간주하기는 한다. 이들 본관 성씨를 가진 이가 파평 윤씨로 입적할 경우에는 대개 입적이 아닌 환적으로 간주된다. 해남윤씨는 파평윤씨와 일절 관련성이 없다.
  3. 함안윤씨였던 폐비윤씨도 합본했기 때문에 파평윤씨로 보아야 할 것이다.
  4. 여담이지만 송준호 교수는 생전에 남긴 저서가 꼴랑 1권 뿐이고 그것도 학회에 발표한 논문을 모은 논문집이지만 한문으로 기록된 한국사, 중국사 원사료 해독 능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고 한다. 오만하고 콧대높은 도올 김용옥조차도 그 능력을 인정하여 감히 송 교수 앞에서는 함부로 아는 척을 할 엄두를 못냈을 정도.
  5.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들의 출신 배경 및 그 행적과 업적을 종합적으로 추적하는 거대 프로잭트였다.
  6. 안동 권씨는 안동 김씨에서 갈라져 나왔다.
  7.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운영하는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http://people.aks.ac.kr/index.aks)에 따르면,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는 전주이씨 866명, 안동권씨/(신)안동김씨 526명, 파평윤씨 424명 (함안, 남원윤씨 포함)이다
  8. 한자는 둘다 "金剛"으로 똑같기는 하다. 이와는 별도로 윤금강의 증손이자 윤관의 여섯째 아들 윤언이도 금강거사라 불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래저래 금강산하고는 얽힌 것이 많은 듯 하다.
  9. 남원 윤씨(이쪽도 파평 윤씨의 한 분파.)의 분파인 함안 윤씨이다.여담이지만 남원 윤씨나 함안 윤씨 둘다 파평 윤씨의 분파임이 확실해져서 최근 다시 합본되었다.
  10. 소정공파 37대손이라고 트위터에서 언급한 바 있다.
  11. 투수타자 모두 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