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의 목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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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마을의 수호신으로 믿어지는 목조상. 전국적으로 퍼진 것은 생각보다 오래 되지 않아, 조선 시대에 본격적으로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20세기 초에는 장승이 없는 마을이 오히려 없을 지경이었던 듯. 돌하르방의 경우 조선 후기 장승문화가 건너가 제주도 자체 모습으로 변경된게 아닌가 하는 학설도 존재한다.
영어로는 Village ward 또는 Totem pole로 번역할 수 있다. 한국 전통 문화의 산물이기에 'JANG-SUNG' 혹은 jangseung으로 직역해도 옳다.
처음 볼 땐 좀 그렇지만 은근히 보면 볼수록 모에하다(?). 비슷한 기능을 하는 구조물로 솟대도 있다. 다만 솟대는 모에미려하지만 험상궂진 않다.[1]
1.1 의미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과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 있으며, 마을마다 직접 깎아 만들기 때문에 마을마다 모양이 달랐다. 악귀를 쫓는 효능이 험상궂고 해학적인 얼굴이 선호되며, 나무뿌리 쪽이 머리가 된다. 보통 마을 입구에 세우지만, 길에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 이정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마을의 수호신에서 나그네의 수호신으로 역할이 확장된 것이다.[2] 신격이 낮은 하위신이지만, 그런 만큼 민생들과 밀접한 신이기도 하다.
한국 신화에서는 무조신 바리공주의 남편들이 장승들을 관리하는 신으로서 부임 받는 설화가 많다. 신화적인 의미에서 한국의 장승들은 인간세상(마을)의 경계를 수호하는 역할이므로, 바리데기가 이승(인간세계)과 저승(신의 세계)을 이어주는 역할을 맡을 때, 바리데기의 남편은 두 세계의 경계 혹은 길을 수호하는 신에 대응한다는 해설이다. 전승에 따라, 바리데기의 남편은 산신이나 용신이나 객사한 여행자를 돌보는 신이 되는 전승도 있는데, 역시나 장승들이 지닌 역할로도 치환가능하다.
민화에 따르면, 장승들끼리는 전국적인 네트워크 사회가 구축되어 있어, 지나던 길손에게 굴욕[3]을 당한 장승이 대방장승(임금장승)에게 고소를 넣으면, 사안을 평가한 장승위원회의 판결로 해당 가해자에게 수많은 질병 류의 벌을 내렸다. 그 예로, 변강쇠가 장승으로 장작을 만들자 팔도장승회의를 열어 500가지의 조선의 질병으로 변강쇠를 죽였다는 민담이 있다.[4] 장승에게 해코지를 했던 가해자는 질병에 걸린다는 뜻인데, 그 병을 낫게 하려면 막걸리와 북어대가리를 갖다 바치고, '장승님 제가 잘못했어요!' 하고 빌면서 장승귀를 잡고 입을 맞추면 병이 낫는단다.
서울 장승백이(장승배기)의 장승은, 성묘하러 화성(華城)에 가던 정조가 지세가 거칠고 한낮에도 어두워[5] 길을 지키기 위해 세운 것으로, 왕이 세운 것이기 때문에 대방장승으로 불린다는 얘기가 있다. 일단 근처에 대방동도 있고.[6] 참고로 서울의 그 장승배기의 장승은 옛 시흥군(상도동)과 옛 과천군(노량진동)이라는 두 고을의 경계에 있던 것이다.
1.2 현대의 장승
지금도 종종 장승을 수공업으로 만드는 장인들도 있는데 엄청 돈을 많이 번다거나 그렇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수익이 나온다고. 아직도 장식물로서 수요가 많아서 주문이 꽤 있다고 한다. 과거에는 나무나 돌로 만들던 것이 콘크리트나 철물로도 제작되는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관리하기가 쉬우니.
일본 사이타마현의 코마(高麗)역 앞에 있는 장승.
일본에도 몇 군데에 있는데, 쇼군효(장군표, 将軍標)라고 부른다. 대체로 현대에 들어와서 세운 것으로, 쓰인 글귀도 동일하다. 일본의 쇼군효로는 코마 신사에 있는 것이 특히 유명한데, 민단에서 세운 것으로 원래는 나무였으나 파손되어서 2005년에 돌로 다시 만들었다.
1.3 사건사고
- 당나무, 선돌 등과 함께 지역신앙의 구체적인 상징물이라 반달들의 우상파괴의 대상에 포함된다. 장승 네트워크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훼손문제가 많은데, 장승백이의 대방장승도 방화를 당한 적이 있고, 현재도 지하여장군이 철복대를 두르고 있는 형편.[7] 문화재 파괴는 엄연한 범죄니 가차 없이 신고하자. 특히 이런 짓은 특정 종교 신도들이 우상이라고 딴지를 걸며 벌어지곤 하는데, 한 대형 빌딩 앞에 수공업으로 만든 장승을 세우려고 하는데 그 업체 간부가 이런 말하다가 사장에게 자네가 믿는 종교 십자가도 우상이네, 라는 비아냥거림을 듣고 데꿀멍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 또한 연세대 장승부부 사건이라 하여, 조국통일염원의 상징으로 연세대 도서관 앞에 세워져 명물이 되었던 장승부부가 교내 기독교 신도들의 반발로 엔진톱 등으로 테러를 당한[8] 유명(…)한 사건이 있었다. 인터넷이 보급되기 이전이라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적어도 당시 교내(校內)에서는 굉장한 격론이 일었던 사건이다. 학생회 측은 ‘그렇게 보기 싫었습니까?’ 등의 대자보로 개탄했지만, 당시 교목(校牧)[9]을 비롯한 기독교계 교수들은, ‘방법이 잘못됐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옳은 일을 했다’라고 종교적 신념을 내세우면서, 잘못된 방법이라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2 삼국시대 오나라의 인물
張承
(178 ~ 244)
삼국시대 오나라의 인물로 자는 중사(仲嗣)이며, 장소의 장남으로 장휴의 형이며 손화의 장인이다.
어려서부터 학문과 재주가 뛰어나 제갈근, 보즐, 엄준등과 친하게 지냈으며, 능통이 사망하자[10] 손권의 명에 따라 그의 애도문을 지어 새겼다. 219년에 손권이 표기장군이 되자, 서조연이 되었다가 장사 서부도위가 되었으며, 평산적을 토벌해 1만 5천명의 병력을 얻었다가, 유수도독[11], 분위장군이 되면서 도향후에 봉해져 부곡 5천명을 거느렸다.
234년에 합비, 신성을 공격할 때 손소와 함께 광릉, 회양으로 진군했으며, 236년, 아버지 장소가 죽었을 때 장승은 이미 제후였기 때문에 차남인 동생 장휴가 장소의 작위를 이었다고 한다. 240년에 여대가 80살이 되어 무창으로 돌아오자 편지를 보내, "그대는 육손과 함께 주공단, 소공석[12] 급의 인물입니다" 라고 칭찬을 했다.
245년에 67세의 나이로 사망해 시호를 정후라 하면서 아들 장진이 후사를 잇는다.
장승은 사람됨이 굳세고 충직하면서도 인물에 대한 평가를 잘해, 채관과 사경 같은 자들을 어릴 때부터 발탁했으며, 채관은 커서 위위까지 사경은 예장태수까지 승진한다.
제갈각이 어릴 때부터 뛰어난 재주로 여러가지 일화로 이름을 떨쳤는데, 장승은 그 어린아이를 상대로 말싸움을 해서 제갈각을 이긴 전력이 있다(…). 초딩를 상대로 설전에서 이긴 아저씨
처음에 장승의 아내가 죽었을 때, 장소는 제갈근의 딸을 장승의 배필로 삼으려고 했으며, 장승도 그 계획에 찬성했지만, 장승이 제갈근보다 4살 정도밖에 안 적어 제갈근이 싫어해서 어려워졌다.
그렇지만 손권이 권유해서 결혼에 성공하게 되어, 제갈근의 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은 손화에게 시집가는데, 이로 인해 장소 일족은 손화파가 되었다.
손화와 결혼한 제갈근의 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은 253년에 제갈각이 죽을 때 삼족을 멸했기 때문에, 그때 같이 처형되었다. 장승은 엄준과 함께 관중, 계로에 대해 논의한 적이 있다고 한다.
2.1 미디어 믹스
삼국지 12,13 |
삼국지 시리즈에 등장하나 사람들은 이 자가 장소의 아들인지 모른다. 일러스트의 괴리감 때문인 듯. 능력치가 딱히 좋은것도 아니라서, 잡아서 죽여놓고 보니 장소랑 원수지게 돼서 놀라는 사람도 꽤 있다. 다만 수명이 아버지 장소처럼 길다는 점으로 쓸만하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76/72/74/77. 연사와 누선을 보유한 괜찮은 장수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75/68/75/68/72로 능력치 총합만 보면 준수하지만, 모든 능력치가 어중간하고 소속이 오인지라…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77/70/75/73/74로 전체적으로 상향되었으며, 극/노/수군의 적성이 A에 특기는 수장이다. 모든 능력치가 어중간하고 특기가 애매하지만, 수명이 오나라 장수 중에서는 길기 때문에 발전시킬 여지는 있다.
삼국지 12에서는 잘렸다가 파워업키트에서 전작에서 매력만 삭제된 능력치로 다시 부활했는데, 병종은 창병에 전법이 전공격강화라서 제법 괜찮은 장수가 되었다. 여담으로 요상한 버그가 있는데 여포토벌전 시나리오에서 손책으로 플레이 하다가 보면 이 인간이 비정상적으로 봉록을 자꾸 가증해달라고 한다. [13] 이상하게 생각되어서 에디터로 살펴보니까 임관년도가 자그마치 서기 100년 으로 나와있었다. 후한초기 인물이라 카더라 다른 시나리오에서는 정상적으로 197년 정도로 나온다.
3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張承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하내군 무수현 출신으로 자는 공선(公先)이며, 형제로는 형인 장범, 동생인 장소가 있다. 한나라에서 조부 장연은 사도, 아버지 장연은 태위를 지냈으며, 장전의 아버지이다.
방정과에 초빙되어 의랑에 제수되어 이궐도위로 영전했으며, 동탁이 정권을 장악하자 동탁을 주살하기 위해 군사를 모았다가, 동생 장소가 군사가 적거나 훈련도 되지 않은 농민들을 가지고 상대한다는 이유로 성공하기 힘들다고 하면서 때를 기다려 행동하라고 하자, 그 말을 받아들여 인수를 풀어놓으면서 샛길로 몰래 고향으로 돌아갔다. 형 장범과 함께 양주로 피난했다가 원술이 예의를 갖추어 초청하자 형 장범은 질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장승을 대신 보내 원술을 만나게 했는데, 원술이 자신의 세력이 강함을 과시하면서 제환공, 진문공, 한고조의 예를 들면서 참칭할 의사를 밝히자, 장승은 그 일은 세력의 크기가 아닌 백성들의 인덕에 달렸다고 해 원술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고 한다.
조조가 기주를 공격하고자 할 때, 원술은 조조가 피폐한 병졸 수천 명으로 10만이나 되는 대군에게 발악을 한다고 하자, 장승은 조조가 천자를 끼고 있어 백만 군중이 있더라도 대적할 수 있다고 했으며, 원술이 유쾌하지 않은 표정을 짓자 곧 원술을 떠났다. 조조가 기주를 평정한 후에 사신을 보내 장범을 찾았지만, 질병 때문에 이번에도 장승이 조조를 만났으며, 장승은 위나라가 건국될 때 승상참군좨주와 조군태수를 겸임했다.
정치와 교화를 시행하다가, 조조가 서쪽을 정벌하려고 할 때 초빙해 참군사가 되었는데, 장승은 장안에 도착하자 병으로 사망했다.
- ↑ 솟대가 가진 정확한 의미는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성역으로서의 상징물이며, 후대에는 풍요의 기원을 담는 대상으로서 장승과 기능이 비슷하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새 조형물은 풍요를 상징한다고 하니, 사람에 따라 애착이 갈 수 있을 지도.
- ↑ 본래 역할에 따른 다양한 이름과 지역색을 가지고 있었으나, 점차 장승으로 통합되어 왔다. 지역에 따라선 아직 법수, 벅수라는 이름도 사용하고 있다.
- ↑ 노상방뇨, 징검다리 대용 등
- ↑ 다만 변강쇠도 대단한 게 처음에는 한두 가지로는 전혀 통하지 않았고, 점점 질병이 늘어나도 어느 정도 멀쩡한 모습을 보였다. 점점 병마에 지쳐갔지만 말이다.
- ↑ 지금이야 뻥 뚫린 도로와 주택가지만, 당시엔 시흥(금천)과 과천이라는 두 고을의 경계가 될 만큼 험하디 험한 고갯길이었다. 그리고 근처에 살피재라는 고개도 있다.
- ↑ 일단 대방동의 유래는 번대방이라는 옛 이름이다.
- ↑ 2012년 하반기에 천하대장군 및 지하여장군 모두 새롭게 교체되었다.
- ↑ 수험생들 중에서도 모르는 학생들이 많은데, 연세대는 기독교계열 학교로, 채플(chapel), 즉 예배도 의무적으로 수강해야만 한다.
- ↑ 기독교 계열의 학교에서 종교교육을 맡는 목사. 학생들은 교수목사라는 뜻으로 알고 있는 경우도 있다.
- ↑ 능통은 사망년도는 217년 또는 237년 등으로 갈리는데, 자세한 것은 능통 항목 참조.
- ↑ 노숙의 아들 노숙이 자라자 유수도독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알았다고 한다.
- ↑ 연나라의 시조인 주 왕조의 인물.
- ↑ 원로격인 정보,황개,한당,주치 같은 장수들보다 훨씬 더 많이 달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