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근

오서 「장고제갈보전(張顧諸葛步傳)」
장소#s-2고옹제갈근보즐

파일:Attachment/제갈근/he is a donkey novel.jpg
얼굴이 길다
諸葛瑾
(174 ~ 241)

을 얻었고, 을 얻었으며, 를 얻었다. - 세설신어
子瑜神交如漆如膠(자유신교여칠여교) : 자유(제갈근의 자)의 훌륭한 사귐은 옻이나 아교처럼 끈끈하고

誠實金石群議徒淆(성실금석군의도효) : 성실함은 쇠나 돌 같아서 여러 사람의 의론이 분분하구나

- 《도상삼국지(图像三国志)》

1 개요

삼국시대 오나라의 대신. 낭아군 양현 출신. 는 자유(子瑜)

제갈량제갈균의 형, 제갈각, 제갈교, 제갈융의 친아버지.

2 생애

2.1 오나라의 중재자

제갈근은 어릴적 낙양에서 유학했고 어려서 친어머니를 잃고도 계모를 효성으로 모셨다. 전란을 피해 장강 이남 양주로 피난했는데 효행과 학문으로 이름을 얻게 되어 손권의 매형에게 천거되어 출사했다. 손권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아 노숙과 동급의 빈객으로 대우받았다.

손권은 그의 막료들 중 제갈근을 각별히 신임했다고 한다. 장소처럼 꼬장꼬장하게 나오거나, 고옹처럼 마음에 안 드는 사안에는 입을 다물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방식과는 달리, 언제나 듣는 이의 기분을 해치지 않게끔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설득조로써 논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고 한다. 항상 당당한 풍격을 지녔으면서도 온후한 성격을 갖고 있어 다른 인간관계에서도 원만함을 유지했다.

손권이 오군태수 주치에게 원망을 품은 것을 풀어 주었으며,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손권이 교위 은모(殷模)에게 죄를 내리려던 것도 용서하게 만들었다. 훗날 우번이 직선적인 성격으로 쫓겨났을 때에도 제갈근만은 우번을 위해 손권을 달랬었다.

2.2 ·의 외교관

(연의에서는) 제갈량이 적벽대전 전에 손권을 설득하기 위해 노숙과 함께 오나라에 왔는데, 이때 손권이 공명을 맞이하기 전에 그를 맞이한 사람이 바로 제갈근이었다. 제갈근이 왜 먼저 날 보러 오지 않았냐 묻자 공명은 "지금은 공무중"이라고 답했고, 제갈근은 이에 수긍하였고, 일이 끝나면 자신을 보러오라며, 다른 나라의 신하를 대하는 예를 올리고 돌아갔다.

215년에 손권이 제갈근을 촉에 사신으로 보내 유비와 호의 관계를 맺게 했는데, 제갈근은 공사구분을 엄격히 해서 유비에게 출사한 동생 제갈량과 만나게 되었는데 공무의 예로 응대할 뿐 사사롭지 않았다고 한다.

유비가 서천을 차지하자, 형주 반환을 요구하는 사자가 되어 찾아갔는데, 유비가 '서량의 땅까지 손에 넣으면 돌려주겠다며 핑계를 대었고, 때문에 양국의 사이가 험악해졌으나, 노숙의 중재로 이와 같은 불화는 수습되었다. 뒤이어 조조가 한중으로 밀고 내려와 정세가 불안해지자, 다시 동맹을 공고하게 다지는 사자로써 촉으로 다녀왔다.

이후 관우를 목표로 토벌에 종군했으며, 여몽이 죽은 뒤에는 대신하여 남군태수의 자리를 맡았다. 관우의 죽음 이후 유비가 동오를 향해 진군하자, 강화를 위해 서찰을 전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유비가 동오를 향해 진군하여 제갈근이 사신으로 보내졌을 때 당시 제갈근이 유비와 내통하고 있다는 참언이 돌았으나, 손권은 그를 신임하여 다음과 같이 논설했다.

"자유가 나를 등지지 않는 것은 곧 내가 자유를 저버리지 않음과 같다. 일찍이 내가 제갈량의 재주를 눈여겨보아 자유더러 그를 설득해 보라 했을 때, 자유는 자신이 나를 저버리지 않음같이 제갈량도 유비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즉 내가 어찌 자유를 의심하겠는가?"

이와 같은 인간적인 면모로써 손권은 제갈근을 깊게 신뢰한 것이다.[1]

2.3 강릉 전투

이릉 전투 이후 222년 좌장군과 공안독 그리고 가절에 임명되었으며, 가 공격해 오자, 반장과 함께 남군을 구원했다. 이때 제갈근과 양찬은 하후상이 이끄는 위군을 보고 속수무책이었으나 부하인 반장이 싸우지 말고 기다릴 것을 진언하자, 이를 일임하여 전력을 온존했다. 강릉에서 공격받는 주연이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손권이 그를 원망할 정도였으나, 결국 상황이 불리해진 위군이 먼저 퇴각했다.

조진과 하후상 등이 강릉에서 주연을 포위하고, 주중(州中)을 나누어 점거하니, 제갈근이 대병을 이끌고 구원했다. 제갈근이 성품이 넒고 급하지 않아, 도리를 미루어 보고 계획을 맡기니, 끝내 기복 화복(禍福)이 생길한만한 술책은 내지 않고, 병사들이 오랫동안 해이해지지 않으니, 손권이 이것을 존경하였다. 봄물이 날 때쯤에 반장 등이 상류 물가에 성을 쌓고 제갈근은 부교를 띄워 진공하니, 조진 등은 퇴각해 패주하였다. 비록 큰 공훈은 없었지만, 또한 군대와 경내를 보전한 것을 공으로 삼았다. - 오록
위나라 장수 하후상 등이 남군을 포위하고, 선봉 부대 3만 명을 나누어 부교를 만들고 백리주를 건너왔다. 제갈근과 양찬이 함께 병사를 모아 구원하러 달려갔지만, 그 사태에 대처할 바를 몰랐고, 위나라 병사들은 날마다 끊임없이 건너고 있었다. 반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위나라의 기세는 방금 흥성하기 시작했고, 강물은 또 얕으므로 그들과 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병사들을 인솔하여 위로부터 상류로 50리 되는 곳까지 가서 갈대를 수백만 개 베어 커다란 떼를 만들어 물의 흐름을 따라 불을 놓아 부교를 전소시키려 했다. 떼 만드는 작업이 막 끝나 강물이 가득 찬 것을 보고 띄우려고 할 때에 하후상이 이것을 알고 병사를 인솔하여 물러났다. 반장은 말에 올라 육구까지 내려가서 막았다. - 반장전

강릉 전투에 대한 기록은 대개 제갈근을 그 주체로 하고 있으나 제갈근전 주석의 오록과 반장전을 살펴보면 이 전투를 실질적으로 지휘한 것은 반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제갈근은 위군을 보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태였고, 전면전을 피해 전력을 보존하고 계책으로 하후상을 물러나게 한 것은 모두 반장에게서 나온 것이다.

2.4 말년의 안습한 군사 활동

226년 조예가 사망하자 손권의 명을 받고 양양의 사마의서황을 공격했으나 패한다. 반장을 안 데려가서 그런가?

손권이 칭제하자 대장군과 좌도호 그리고 예주목에 동시에 올랐으며, 234년 제갈량의 북벌에 호응하여 육손과 더불어 강하로 나아갔다. 이때 육손은 손권에게 상황을 보고하는 서신을 보냈는데, 그 서신을 전하는 사자가 위군에게 붙잡혔다. 위군은 군사 기밀을 얻었기 때문에 첩보전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하였고, 이를 파악한 손권은 군대를 회군시켰다. 이때 제갈근은 최전방에 있었는데, 유독 육손만이 군대를 물리지 않았고, 제갈근과 더불어 전방을 사수했다. 제갈근은 육손에게 퇴각할 것을 권하였지만, 육손은 제갈근의 다급한 서신을 받고도 아무런 추가 명령을 내리지 않고 도리어 여유로워 하였다. 이에 답답해진 제갈근이 직접 육손의 막사에 방문했을때, 육손은 군을 바로 퇴각시키면 적의 공세에 큰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설명해주었고, 이를 깨달은 제갈근은 육손의 명을 따라 마찬가지로 여유를 부리며 퇴각 준비를 하여 피해없이 군을 퇴각시켰다.

241년에 전종이 작피로 북벌을 감행했을 때, 번성을 공격한 주연과 함께 양동으로 조중지역을 약탈했다. 하지만 위나라의 호질이 불리한 전력임에도 번성을 잘 지켜냈고, 작피에서 전종이 패하면서 전황이 악화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마의가 원군을 이끌고 오자 조중 방면의 오군은 그대로 퇴각했다.

번성 전투 이후 241년을 넘기지 못하고 병사했다.

3 가족 관계

동생은 제갈량제갈균. 공적인 자리에선 제갈량을 사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다만, 서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집안끼리 연락을 터놓고 살았고, 나중에는 자식을 일찍 보지 못한 제갈량에게 둘째 아들인 제갈교를 양자로 보내기도 했다.

제갈근은 아들 제갈각이 지나치게 재주를 드러내는 것을 두고 '저대로 두면 장차 집안을 망치고 말 것이다' 라 염려했는데 이는 훗날 그대로 맞아 떨어져 한당, 보즐처럼 호부견자 케이스를 타고 말았다.

제갈근 사후 제갈각은 손권이 죽은 후에 정권을 장악했지만 잦은 실정으로 민심을 잃고 손준에게 주살되었다. 그리고 제갈각의 삼족이 멸족되고[2], 제갈근의 막내 아들 제갈융은 약을 먹고 자살했으며, 그 세 아들도 주살되자 제갈근의 대는 끊기고 말았다.

그러나 이전에 자식이 없던 제갈량이 제갈근의 차남 제갈교를 양자로 데리고 갔는데 제갈교는 요절했지만 외아들 제갈반을 남겼다. 결국 손준이 병사하고 뒤를 이은 손침이 주살되자 오나라로 돌아와서 제갈근의 대를 이었다.

4 외모

정사에는 풍채가 당당했다고 적혀 있으나 세설신어에는 얼굴이 길쭉해 당나귀노새와 닮았다[3]는 묘사가 있는데, 그 때문인지 이에 얽힌 맏아들 제갈각의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한번은 손권이 제갈근의 얼굴이 긴 것을 보고 놀려먹으려고 나귀 한 마리를 끌어와서는 머리에 "제갈자유"라고 썼는데, 자유가 제갈근의 자이니 얼굴이 나귀만큼 길다는 뜻이었다. 물론 군왕의 장난이기에 제갈근은 쓴웃음만 지었고 좌중에선 폭소가 터졌다. 이 때 제갈각이 그 4자 밑에 "지로"라고 써서 6자, 즉 "제갈자유지로(제갈자유"의 나귀")[4]"라고 써서 아버지를 구했다. 이에 사람들이 감탄했고 손권은 그 나귀를 제갈근에게 하사했다.

5 평가

삼국지연의에서는 촉과 오 사이 외교관 노릇으로 동분서주하면서도 정작 제대로 거두는 성과가 없어 상당히 안습한 분위기로 묘사된다. 형주를 찾으러 가서는 유비와 제갈량의 연극에 놀아나고 관우에게는 대뜸 폭언부터 듣고 그 아들 관평에게는 목까지 달아날 뻔 하는 등 험한 꼴을 몇 번이나 겪은 것에 비하면 받아든 결과는 대부분 협상 결렬 내지 일방적 파기(...).

사실 이 사람도 연의의 이같은 묘사 때문에 굉장히 과소평가된 인물 중 하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제갈량의 형이자 실속없는 외교를 하는 사람으로 아는데, 그게 아니라 제갈근이 나섰을 때는 이미 관우의 죽음과 형주 문제로 촉, 오 두 나라의 외교상황이 파국으로 치달아 수습이 힘든 상태였다. 가령 형주 반환 문제는 사실 유비가 말 그대로 약속을 어긴 것이며, 제갈근과 노숙은 최대한 예의를 갖춰가며 외교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이릉대전 때는 제갈량의 간언을 무시할 정도로 이미 유비의 오나라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한 상태였으니 황제이자 유비의 조카인 헌제가 파촉에 있었다고 가정하고 전쟁 중지하라고 황명(皇命)이 내려와도 못 막을 전쟁을 제갈근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도리어 이 사람을 쓰고도 실패했다고 봐야 할 정도로 오나라 입장에선 최후의 외교카드 중 하나였다.

이 사람은 요즘으로 보자면 한 국가의 외교관으로서는 독보적인 위치를 자랑하는 외교 전문가이며, 그 동시에 정무에도 뛰어난 문관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정치적으로도 적을 만들지 않고 모두에게 온후하게 대하는 훌륭한 정치인이기까지 했다. 비록 동생의 그늘에 가려져 있지만 제갈근도 엄청난 인물인 것은 확실하며 대장군과 동시에 중요한 요직인 예주목과 좌도호를 겸임한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제갈균 안습.

군사 분야에서는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다. 강릉전투는 승리했고 공을 인정받았으나, 사실상 반장의 공이나 다름이 없었고 제갈근 본인은 그야말로 두 손 놓은 상태였다. 양양에서는 패전했고, 육손과 함께 퇴각할 때도 매우 두려워했다고 하니 꽤나 안습.

다만 자신의 한계를 알고 뛰어난 부하, 동료들과 의견을 조율해 그들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모습에서는 당대의 문사로서의 면모를 볼 수 있다. 리더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며 유능한 부하에게 주도권을 넘겨주는 것은, 그러면서도 조직이 와해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5] 따라서 제갈근은 본인의 군재 자체가 뛰어난 무관은 아니었지만 군주, 동료, 부하들의 의견을 조율해 올바른 결정을 내릴 줄 아는 훌륭한 사령관으로 봐야할 것이다.

6 미디어 믹스

  1. 다만 한편으로는 동오의 정권은 토착 호족 세력의 입김이 강해서 외지 출신인 제갈근을 더 미덥게 여긴 게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2. 제갈각의 장남 제갈작은 손권의 후계 문제에 말려들어 질책을 받은 제갈각이 직접 독살, 차남 제갈송은 약을 먹고 자살, 막내 아들 제갈건은 모친과 위나라로 달아나다가 잡혀 살해.
  3. 최훈의 삼국전투기에서는 아예 곰돌이 푸의 친구 '이요르'로 그려줬다.
  4. 이문열 삼국지 등에서는 이걸 제갈근의 노새라고 하기도 하는데, 노새는 고자다. 아무리 군주라고 해도 아들 있는 곳에 노새드립치면 장난으로 안 끝난다. 무엇보다 '나귀 로(驢)'자는 '노새 라(騾)'자와는 전혀 다른 글자다.
  5. 참고로 관우과 아들인 제갈각이 바로 이걸 못해서 패망했다. 전쟁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