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젊은 시절
사망하기 1년전 모습
장 클로드 뒤발리에(Jean-Claude Duvalier)
(1951년 7월 3일 ~ 2014년 10월 4일)
아버지와 더불어서 이미 최빈국이던 아이티를 더욱더 최빈국으로 만들고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전세계에서 손꼽히는 최악의 독재자 중 한명
베베 독(Bébé Doc) 또는 베이비 독(Baby Doc)이라는 별명들로 불리며, 아이티의 독재자였던 프랑수아 뒤발리에의 뒤를 이어서 아이티의 제33대 대통령을 지낸 중미 카리브해 섬나라인 아이티의 세습 독재자이다. 15년간 집권하다가 대통령자리에서 쫒겨났지만 뻔뻔하게 아이티로 돌아와 재판 중에 사망했다.
2 아이티의 대통령
그는 19세에 아버지인 프랑수아 뒤발리에가 당뇨 합병증으로 사망하면서 후계자로 지명되어 대통령이 되었다. 이건 북한의 독재자 김정은이 30세에 세습된 것을 감안하면 세습된 독재자 중에사도 가장 어린 나이에 세습돤 것이다. 이후 15년간 집권하며 반정부 인사에 대한 납치와 고문, 암살을 실시하다가 1986년 민중 봉기로 권좌에서 축출되어 프랑스로 망명했다. 여러 자료들에 의하면 이러한 독재정치로 뒤발리에 부자의 집권 기간 동안 아이티에서는 무려 3만명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수백여 명의 정치범들이 악명 높은 아이티의 ‘포트 디망슈(Fort Dimanche)’ 교도소와 ‘죽음의 트라이앵글’로 불리는 교도소들에 수감되었고 목숨을 잃어야 했다. 뒤발리에 정부는 독립적인 신문사와 라디오 방송국을 폐쇄시켰으며, 기자들은 구타를 당하고, 고문당하거나 투옥되는가 하면, 강제로 해외로 떠나야 만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의 아버지 프랑수아 뒤발리에의 뒤를 이어서 집권한 그는 아버지가 조직한 ‘통통 마쿠트(Tonton Macoutes)’를 이용하여 수많은 범죄들을 저질렀는데 그의 통치 아래 수천여 명의 아이티인들이 고문당하고 목숨을 잃었으며, 수만여 명이 망명을 떠나야 했다. 또한 외국 투자자들을 위해 살인적인 저임금(시간당 11센트) 정책을 고수했다.
결국 이러한 독재정치, 프랑수아 뒤발리에와 아들 장 클로드 뒤발리에로 이어지는 1957년부터 1986년까지 30년간의 독재 기간 동안 이미 나락으로 떨어진 아이티의 경제는 더욱더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 독재자들의 집권기간 동안 아이티의 대외 부채는 무려 17배나 증가했을 정도다, 그러나 더 놀라운 사실은 아이티의 국가 부채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이 스위스 은행 계좌에 있었다는 점이다. 결국 이즈음부터 아이티에서는 진흙으로 만든 빵이 등장했고 그 유명한 진흙쿠키도 이 때 등장한 것이었다.
이런 뒤발리에 부자의 막장정치로 인해 아이티의 산업기반이 붕괴되면서 아이티의 국민들은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팔아야 했고, 결국 무분별한 벌목이 시작되었다. 울창하던 숲에 있던 나무가 97%나 잘려서 해외로 수출되었고 아이티에는 약 3% 정도의 나무만이 남아 있다. 문제는 이러한 무분별한 벌목이 아이티의 자연피해를 입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라는 점이다. 똑같이 허리케인이 아이티와 쿠바를 강타해도 쿠바는 큰 피해가 없는 반면에 아이티에서는 해마다 수천 명씩 사망자가 발생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무차별적인 벌목 때문이다. 심지어 훗날 엄청난 피해를 입힌 아이티 대지진의 피해가 컸던 이유 중 하나는 이러한 무차별적인 벌목이 원인이였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그 와중에도 부정부패가 엄청나서 아이티의 인구 6백만 중에서 무려 80%가 연간소득 1백 30달러로 살아갈 정도로 가난했지만 그러나 국부의 50%이상은 5%미만의 뒤발리에 일가와 그 추종자들이 마음껏 사용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이티 국민의 절반이상이 실업자가 되었으며, 아이티의 문맹율은 무려 90%나 될 정도였다.
3 몰락
그러다가 1985년 11월 28일 고나이브시에서 시위를 하던 대학생 3명이 아이티군의 총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자 독재정치와 경제난에 고통받던 국민들은 이에 항의하며 대대적인 반정부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민생고의 해결과 노동자의 봉급을 인상하자는 경제문제 때문에 시위를 시작했지만 뒤발리에가 통통 마쿠트와 군대를 동원하여 무자비한 진압작전을 실시하자 시위는 폭동으로 바뀌었다.
사태가 긴박해지자 뒤발리에는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서 1986년 1월 31일 30일간에 걸친 계엄령을 선포했으나 폭동은 전국으로 확산됐고 아이티인 70여명이 사망했다. 반정부 데모를 주도한 세력은 학생과 지식인, 그리고 가톨릭 세력이었다. 특히 지난 1983년 요한 바오로 2세가 "나는 그대들과 함께 있다"고 말하며 뒤발리에의 독재정권을 비난하자 아이티인들은 80%가 카톨릭 교도였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들은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게 되었다. 게다가 1986년 1월 말에는 카파티엥 성당의 일요일 저녁 미사에서 한 신도가 "아바, 뒤발리에"(뒤발리에, 물러가라)를 외치자 모두 이 구호를 합창하면서 뒤발리에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1985년 10월 식량난에 항의하는 폭동이 발생했다 상황이 점점 악화되자 미국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뒤발리에에게 선거 실시 등 개혁을 요구했다. 근데 뒤발리에는 “종신대통령제인데 선거는 무슨 선거냐”며 코웃음을 쳤지만, 결국 시위가 격화되자 버틸 수 없던 뒤발리에는 1986년 2월 미국과의 타협으로 6인 평의회에 전권을 이양한다는 조건으로 미 공군비행기로 망명길에 오를 수 있었다. 그 뒤 민과 군의 대표로 구성된 6인 평의회가 아이티를 통치하게 됐다.
또한 미국이 뒤발리에에게 인권 탄압을 중지하라는 요구도 뒤발리에의 몰락에 일조했다. 1985년에 5천 4백만 달러를 지원한 미국은 올해에는 원래 원조액인 5천 2백만 달러를 주려했지만 뒤발리에가 저지르는 인권탄압을 빌미로 약 7백만 달러 이상을 삭감하겠다고 통보하자, 경제난에 시달리는 국민들의 불안은 더욱 가중돼었던 것이 시위의 원인 중 하나였다. 미국은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견제하기 위하여 뒤발리에 부자의 독재 정권을 여러면으로 지원해주었다. 그러다가 장 클로드 뒤발리에가 실각하자 로널드 레이건 정부는 미국에 존재하는 아이티인들의 반발을 고려하여 뒤발리에의 미국 망명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뒤발리에에게 프랑스로 가는 것을 제안했고, 프랑스는 뒤발리에를 불법 체류자 신분이라는 조건으로 뒤발리에의 귀국을 승인했다.
1986년 2월 7일 아내와 함께 도망치는 뒤발리에. 도망치는 사진인데 여유가 느껴진다.
(michele bennett) 1950년 1월 15일-
뒤발리에는 재임 기간 동안 미국에서 지원해준 해외 원조 자금을 빼돌려서 이 돈으로 엄청난 수준의 비자금을 마련하고 사치를 했으며, 뒤발리에의 스위스 은행 비밀 계좌에다가 엄청난 양의 돈을 빼돌린 것으로 확인되는데 그 금액은 가장 적은 금액이 300~800만 달러 정도 또는 1억 달러가 넘어갈 것이라는 추정치까지 있었는데 결국 그는 아이티 외채보다 많은 9억달러를 챙겨 프랑스로 망명해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렸다고 한다. 장 클로드 뒤발리에의 아내 미셸은 틈나는 때마다 프랑스 파리나 뉴욕의 보석상에 들러서 고급의상과 보석들을 쇼핑했는데 그 금액이 엄청난 수준이였으며 아이티 국민들은 물론 외국인들도 비난했을 정도였다.
심지어 훗날 권좌에서 쫒겨나서 프랑스로 망명할 당시에도 미국이 제공해준 화물기에다가 자신의 사치품들을 가득 실었는데 고가 미술품과 각종 보석과 루이뷔통 핸드백으로 비행기가 가득 찼을 정도라고 한다. 1980년 결혼식 당시에는 프랑스에서 매우 비싼 옷을 사들이고 자신의 전용 미용사도 데려왔는데, 당시 뒤발리에의 결혼식에 퍼부은 돈은 불꽃놀이에만 10만 달러가 들었고 총 금액은 무려 300만달러였다고 하며 이로 인해 그는 기네스북에 최고 호화 결혼식이라는 영광(?)을 얻으며 등재됐다. 여담으로 망명생활을 하는 중인 1990년 뒤발리에는 아내 미셸 베넷과 이혼했다.
4 귀국과 최후
그는 아이티에서 국민들에게 쫒겨나서 해외로 망명해서도 호화로운 생활을 하다가 2010년에 일어난 아이티 대지진이 일어난 다음 해인 2011년 1월에 아이티에 귀국했다. 귀국 이유가 참으로 가관인데 귀국한 이유가 "아이티 재건을 돕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뻔뻔하군! 물론 저건 개드립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고 사실은 아이티의 권력을 얻기 위해서 아이티로 다시 돌아왔다는 의견이 거의 지배적이다.
그러나 집권 기간 저지른 수많은 범죄 혐의로 인해서, 그리고 뒤발리에가 독재를 할 당시 목숨을 잃은 희생자 가족들과 인권단체들의 제소로 그는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 어쨌든 2013년에는 법정에 섰으나, 다음해에 자택에서 편하게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2013년 3~5월에 걸쳐, 8명의 피해자가 뒤발리에 측 변호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법정에서 증언을 했지만 법정은 뒤발리에가 형을 받는 것을 거부하는 갓처럼 보였으며 이렇게 질질 재판을 끌어서 끝내 그가 죗값을 받지 못하게 했다.
뒤발리에가 사망하자 그와 법정 다툼을 하던 휴먼라이츠워치는 그가 사망하자 "재판을 질질 끌어온 아이티 사법부의 무능 때문에 독재자를 생전에 처벌할 기회를 놓쳤다"고 말했으며, 휴먼 라이츠 워치의 리드 브로디는 "뒤발리에가 재판을 받기 전에 죽음으로써 수백여 정치범의 처형 등 반인도 범죄에 대한 심판의 기회가 사라진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자료. 그의 장례식은 성대하게 치뤄졌는데 1990년 그와 이혼했던 아내 미셸과 그의 두 아들이 장례식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