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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브의 국가 및 지역 | |||
대(大)앤틸리스 제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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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루바 (네덜란드) | 퀴라소 (네덜란드) | 네덜란드령 카리브 | 트리니다드 토바고 |
목차
1 개요
아이티의 국가정보 | ||
국기 | ||
공식명칭 | 아이티 공화국(République d'Haïti, Repiblik Ayiti) | |
면적 | 27,750㎢ | |
인구 | 10,110,019명(2015) | |
인구밀도 | 350명/㎢(2011) | |
수도 | 포르토프랭스 | |
정치체제 | 이원집정부제 | |
대통령 | 조슬레름 프리베르(Jocelerme Privert) | |
임기 | 2016년 2월 14일 ~ 2021년 2월 14일 (예정) | |
총리 | 에넥스 장 샤를(Enex Jean Charles) | |
임기 | 2016년 3월 25일 ~ | |
명목 GDP | GDP | 87억 9700만 $(2015) |
1인당 GDP | 830$(2015) | |
GDP(PPP) | GDP | 114억 $(2011) |
1인당 GDP | 1,164$(2011) | |
수출 | 4억 달러(2008) | |
수입 | 20억 달러(2007) | |
선진국여부 | 개발도상국 | |
지니계수 | 0.592(2001) | |
실업률 | 2/3 이상(2002) | |
공용어 | 프랑스어, 아이티 크레올어 | |
종족구성 | 흑인 95%, 흑백혼혈 5% | |
국교 | 없음 | |
화폐단위 | 아이티 구르드(Gourde haïtienne, G)[4] | |
국가(國歌) | 드살린의 노래(La Dessalinienne) | |
모토 | 자유, 평등, 박애(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 |
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
IT 강국
카리브해의 중앙에 있는 히스파니올라(Hispaniola)섬[5] 서부에 위치한 국가. '아이티'는 히스파니올라 섬의 선주민인 타이노인 말로 '산이 많은 땅'이라는 뜻이며, 이름 그대로 국토의 3/4이 산이다. Haïti라는 국명도 이를 불어식으로 옮긴 것이다. 수도는 포르토프랭스(Port-au-Prince)로, 프랭스 호(Le Prince)라는 배가 정박한 항구라는 뜻이다.
아메리카에서 비백인종(흑인)이 주도한 최초의 독립국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오랫동안 외세의 간접적인 지배를 받았고, 지금은 남북아메리카의 최빈국이다.
2 자연
서인도제도에서 두 번째로 큰 히스파니올라 섬을 도미니카 공화국과 공유하면서 육지로 국경을 맞대고 있다. 카리브해 국가 중에선 육상 국경을 맞대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례. 섬의 서쪽 1/3과 인근의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지리적으로 작은 나라에 산지가 많고 열대산림이 우거져 국가 기반 산업이 벌목 산업일 정도였으나, 고산과 삼림으로 인한 다양한 생물의 서식이 확인되어 국제 환경단체에서 환경보호에 열심히 노력 중이다. 벌목 산업을 관광 산업으로 바꿔가려 한 것은 국가 경제 지표도 어느 정도 올라가고 한 면에선 좋은 모습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메리카 전체에서 문맹률이 가장 높은 나라라 성공적이진 않다고 한다. 거기에 글을 아는 사람도 잘 아는 것도 아니라 UN에서 준 에너지바의 제조일자를 유통기한으로 착각해 기한이 지났다면서 버리라고 난리쳐서 사람들이 못 먹고 심지어 밟아버리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지금은 숲이 파괴되기를 거듭해 전 국토의 2%에 불과하며, 옆 동네 도미니카와의 삼림 비교를 통해 저개발국과 중진국을 비교할 때 흔히 쓰이기도 한다.
아이티 출신 애완동물인 이놈들은 어쩌다가 우리나라에 수입되어서 헤이티안이라는 괴상한 이름으로 들어왔는지 모를 일이다. Haitian은 보통 '헤이션'이라고 읽는데(...)
최북단의 작은 섬이 알게 모르게 유명한데 캐리비안의 해적의 무대였던 토투가 섬(Tortuga)이다. 론리 아일랜드의 노래 '잭 스패로우'에 나오는 그 아일랜드 토투가 맞다. 스페인어로 '거북이'라는 뜻.거북한 섬 처음 섬을 발견한 콜럼버스가 거북이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 실제로 17세기 해적들의 본거지로 쓰였던 곳이다. 현재는 지명이 바뀌어 라토티 섬으로 개명되었다.
3 역사
3.1 근대사
아이티는 1492년 12월 5일 만악의 근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훗날 카리브해로 불리게 되는 서대서양의 히스파니올라 섬을 발견한 이후 그 막장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원래 히스파니올라 섬에는 토착민인 타이노 족이 50만명가량 살았으나 섬의 원주민이던 타이노 족과 아라와칸 족 등이 스페인군의 전염병으로 인해 99%가 몰살되었고 남은 원주민들도 학살당했다(일부 혼혈만 살아남았다.) 이에 일할 사람이 없던 스페인은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데려와 일하게 했는데, 이들이 현재 아이티인들의 선조이다. 물론 아이티에 원래 살고 있던 토착민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려 오늘날에는 현존하지 않는다. 혼혈 타이노는 극소수 남아있다.
그렇게 토착민들은 에스파냐가 16세기 초반 점령한 이후 반 세기만에 멸종했고, 16세기 말 프랑스가 히스파니올라 섬의 서반부를 차지하여 생 도맹그(Saint Domingue)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동반부는 여전히 스페인령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로, 같은 말이지만 불어와 서반아어로 구분되는 지역 명칭을 갖게 된다. 이 구분이 지금의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의 구분으로 이어져 오게 된다. 18세기에 현재의 도미니카 공화국은 평방킬로미터당 인구밀도가 5명 남짓했을 정도로 인구가 희박했으며 주민들은 소떼를 쳐서 소가죽을 수출하는 안습한 동네였으나 아이티는 노예만 70만 명에 이르렀고 인구는 지금 경계상의 도미니카 공화국 당시 인구의 7배에 달했으며, 사탕수수 농장을 기반으로 한 경제로 인해 번성해 프랑스 국부의 4분의 1을 조성할 정도의 부유한 식민지였다. 물론 섬 인구의 90%에 해당하는 노예들은 그냥 노예일 뿐이었고(...) 부는 몽땅 프랑스로 돌아갔다.
하지만 미국 독립 전쟁과 프랑스 혁명[6]의 영향으로 독립 분위기가 일찍 불거졌다. 미국 독립 전쟁 당시 자유 흑인들은 프랑스군에 입대하여 미국 독립을 위해 싸웠다. 하지만 자유 흑인들은 군에서 활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지위가 계속 떨어지는 것을 눈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결국 프랑스 혁명 초기 혁명주의자들이 만든 국회에 아이티도 의원을 보내게 되자 자유 흑인들은 자신들도 더 많은 정치적 영향권을 요구, 백인 농장주들과 백인 빈곤층들과 대립하였다. 그리고 결국 혁명이 시작하기도 전에 자유 흑인 vs 백인 농장주(들과 그들이 소유한 노예들) vs 백인 빈곤층이 내전을 일으켰다. 또한 이를 배경으로 노예들도 불만이 폭발하게 되어 본격적인 혁명이 시작되었다. 거기에 프랑스 혁명정부, 그리고 1799년 이후는 나폴레옹과 전쟁중이던 영국과 스페인군까지 자메이카와 산토 도밍고에서 아이티를 침략한 결과 자유 흑인, 백인 농장주, 백인 빈곤층, 프랑스군, 영국군, 스페인군이 진흙탕 전쟁을 시작한다. 흥미롭게도 이 세력들은 딱히 국가/인종에 기초한 대립구도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영국과 스페인은 필요할 때는 아이티 혁명군과 손을 잡고, 아닐 땐 싸웠다. 위의 백인 농장주와 백인 빈곤층도 마찬가지. 게다가 자유 흑인들과 흑인 노예들도 자주 싸웠다. 심지어 같은 노예들끼리도 싸울 때도 있었고. 나폴레옹이 대군을 보내 "모든 흑인(자유인, 노예 상관없이)을 모조리 죽이고 다시 시작하자!"라는 제노사이드를 선언하고 나서야 힘을 합치게 된다. 이 때문에 아이티에서 나폴레옹은 천하의 개쌍놈으로 까인다.
그림의 인물인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 1743년 5월 20일 ~ 1803년 4월 7일)는 아이티의 혁명가, 흑인 독립운동가 중 하나로, 노예 제도를 끝내고, 프랑스로부터 아이티의 독립 운동을 이끌었다. 또한 프랑스군의 장군 및 생 도맹그(산토 도밍고의 프랑스어 이름)의 식민 통치자로도 지냈다. 그의 노력으로 흑인 독립군은 아이티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을 결국 무찔렀다. 그러나 투생은 어처구니없게도 프랑스군의 비열한 함정에 걸려 프랑스로 끌려가 옥사했다. 프랑스군 사령관이 투생에게 협상을 제안하자 투생은 우리 힘을 보여줬으니 프랑스도 협상을 제대로 하겠지...라는 생각으로 프랑스군 진영으로 갔다가 갇힌 것이다. 대단히 비열한 짓거리였지만, 투생이 흑인이라서인지 비난하는 여론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이티 혁명군 수뇌부들도 자신들과 달리 투생이 아이티의 완전한 독립을 바라지 않아[7] 어느 정도 대립하는 상황이라 함정인 걸 알면서도 프랑스군 진영에 가는 걸 안 말렸다.
투생이 죽고 난 후 후계자인 장 자크 드살린(Jean-Jacques Dessalines)에 의해 1804년에 독립하였으며 이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 다음으로 가장 빠른 것으로, 흑인이 수반이 된 흑인 주도의 근대적 정부가 구성된 것으로서는 최초의 사례이다.
장 자크 드살린(Jean-Jacques Dessalines 1758년 9월 20일 ~ 1806년 10월 17일).
1804년 드살린은 아이티를 독립국으로 선언하여, 종신 총독직을 맡았다. 다만 독립 후에도 막장 상태가 끝나지 않은 것이 큰 문제. 1804년 10월 6일 나폴레옹 1세의 황제 즉위에 대항한다며 드살린이 나폴레옹을 흉내내어 스스로 자크 1세라 칭했다. 1805년 5월 20일 제국 헌법이 공포되고 농민 군국주의적 국가로 돌아섰는데 알렉산드르 페시옹과 앙리 크리스토프 등의 경쟁자들은 이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스스로 황제를 지칭했던 드살린은 옛 동지였던 공화파에 의해 암살되었다. 그는 1806년 10월 17일 포르토프랭스 북쪽의 한 도시에서 반란군에게 붙잡혀 살해되었다. 시체는 잘려져 근처에 묻혔고, 이로 인해 아이티의 정치도 혼란에 빠져들었다. 알렉상드르 페시옹(Alexandre Pétion)이 이끄는 공화파에 의해 역시 사상 최초의 흑인 공화정부(지금의 아이티 공화국)가 수립되었으나 공화파 내에서도 자기가 황제, 왕이라고 하며카리브해의 흔한 제왕병자 분리 독립한 자가 많어 제대로 된 통일은 1820년에나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시몬 볼리바르의 재기를 결정적으로 도와 남아메리카의 독립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다.
허나 정작 자신들이 독립국임을 인정하는 나라가 어디에도 없었기에 결국 프랑스의 압력에 굴복, 배상금을 줄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국가 재정을 한 세기 이상 탈탈 털어갔으며[8] 이 경제 압박은 심지어 흑인에 의한 흑인 노예제 부활이란 희대의 병크까지 불러왔다.[9]
결국 배상금은 미 군정기 미국 정부가 프랑스의 헛소리를 묵살해 버리고 나서[10] 유명무실해졌지만 정식으로 무효화한 건 1947년에 이르러서였다. 이로 인한 농업의 몰락, 경제 피폐, 정치 혼란(이후에도 황제를 참칭하는 작자들이 잊을 만하면 등장했다)과 이로 인한 내분, 대국들의 압박 등은 아이티 사람들의 등골을 휘게 했다. 1843년부터 1915년까지 22명의 대통령이 재임했는데 이 중 21명이 암살당하거나 쫓겨났다.약속된 사망 플래그 물론 그동안 아이티는 있는 것도 다 말아먹고 최빈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던 중 1915년 미국의 아이티를 침공하게 된다. 미국은 아이티의 채무불이행을 구실로 해병대를 파견하여 점령했는데, 채무불이행은 구실에 불과했고 실은 미국의 뒷마당인 카리브 해에서의 미국의 이익을 지키고 대서양에서의 독일 세력을 견제하기 위함이다. 건국후 한 세기 반 가까이를 빚쟁이들이 나라를 좌지우지했다.
1915년부터 1934년까지 미군이 점령하여 군정 통치를 펼쳤다. 아이티는 국가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미국에 대항했지만 성공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수십 만 명의 아이티인들이 쿠바와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망명하였다. 미국의 경우 다른 국가와 달리 빚 받으려고 아이티를 두들겨 패거나 하는 짓은 덜 했고, 오히려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의 빚쟁이 놀이를 막았기에 평가 면에서 유럽 국가들보다는 좀 낫긴 하다지만, 그래도 침략자는 침략자라...때문에 지금도 미국과는 여러 감정이 뒤섞여 그렇게 사이가 좋진 않다. 미국과 영토 분쟁 중인 몇 안 되는 용자나라이기도 하다.
미국은 1934년까지 아이티를 군정통치하면서 미국식 헌법과 정치, 경제, 군부를 하나로 결합하는 방식을 강요하였다. 그 결과 세계 최초로 성립한 흑인 국가인 아이티는 군부의 입김이 강한 국가로 변모하게 되었다. 물론 그 시절에 어느 정도 재정이 안정되고 국가 체제 정비와 산업화는 이루었지만 쿠데타와 군부 독재라는 혹도 덤으로 딸려왔다.(...) 그리고 산업화도 얼마 가지 않아 완벽하게 붕괴되어 사실상 나라 자체가 존재할 가치가 있는지나 의문인 최빈국으로 전락.이쯤되면 국가적 사망전대
미국의 점령 이후 아이티는 흑인이 아니라 소수인 혼혈 물라토가 집권하면서 다수 흑인과의 갈등이 증폭되기 시작하였다. 1947년 쿠데타가 발생하여 흑인인 뒤마르세 에스티메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는 다수 흑인의 권익을 위한 정책을 펼쳤지만 소수 물라토와 흑인 지식층의 저항을 받았다. 에스티메가 50년 헌법을 개정하여 재선을 하려하자 물라토와 흑인 지식층의 지원을 받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에스티메를 축출하였다. 그리고 흑인 지식층의 지원을 받는 폴 마글루아르의 군부정권이 탄생한다. 이 정권도 마글루아르의 권력욕심으로 인해 1956년 일어난 쿠데타로 전복되었다. 1957년 군부의 통제 아래 선거가 실시되어 흑인 다수파를 대표하는 프랑수아 뒤발리에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하였다.
3.2 현대사
이후 막장국가의 수난이 절정에 이르게 된다. 긴 군사독재를 종식시키고 반 세기만에 문민대통령으로 당선된 프랑수아 뒤발리에는 집권 초기에는 선정을 펼치며 국가 발전과 안정에 기여했는데... 그러나 몇 년 되지 않아 손바닥을 뒤집듯 돌변, 이디 아민 뺨칠 정도의 최악의 독재자 "파파독(Papa Doc)"이 되어 나라를 철저히 거덜냈다. 비슷한 시기 도미니카 공화국의 라파엘 트루히요와 칠레의 피노체트도 뒤발리에와 비슷하게 독재 정책을 감행했으나 트루히요와 피노체트가 자기 국가를 개발했다면 뒤발리에는 그것도 아니고 그냥 막장 독재일 뿐이었다. 뒤발리에 독재 정권은 아들에게까지 세습되었고 카리브의 김일성 장 클로드 뒤발리에가 민중 봉기로 쫓겨나는 1986년까지 계속되었다.
1991년, 좌파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Jean Bertrand Aristide)가 선거로 집권했다. 그러다 반 년 만에 군사 쿠데타에 쫓겨났으나 UN과 미국 지원을 받아 돌아와서 1년 동안 국정을 수행했다.사이가 어지간히 나쁜 미국이 이런건 도움을 줬구나 그 뒤 2002년에도 선거로 집권, 군부를 억누를 목적으로 군을 해체했으며 다국적 기업의 횡포를 견제하고 IMF의 차관 제의를 거부했다. 결국 2004년 반정부 무장 세력의 쿠데타가 일어나(상당수는 바로 그 해체된 국군) 아리스티드는 2년만에 다시 해외로 쫓겨났다. 아리스티드에 대한 논란은 후술한다.
더 이상 털어봐야 털릴 것도 없는 철저한 몰락 끝에 결국 UN이 나서서 평화유지군이 투입되어서야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고 지금도 브라질군이 주축이 된 UN 아이티 안정화 작전(United Nations Stabilization Mission in Haiti/MINUSTAH)이 계속되고 있다. 미 국무부는 아이티를 파탄국가(failed state)로 선언한 지 오래이다. 2014년 취약국가지수도 120점 만점에 104.3점으로 9위를 기록했다. 비교하자면 이라크가 102.2점으로 13위를 차지했고 북한이 94.0점으로 26위에 올랐는데, 전쟁도 없이(그래서 집단간의 갈등과 치안유지력 지수는 각각 7.0과 7.5로 상대적으로 낮다) 이라크보다도 높은 걸 고려하면 이 나라 경제와 정치가 얼마나 막장인지 알 만하다.
설상가상으로 2010년에는 대규모의 지진이 국토를 강타했다. 이 때의 혼란은 극에 달해 지진이 반영된 2011년(왜 2010년이 아니냐 하면, 2010년에 '일어난' 지진이 2011년 지수에 '반영된' 것이기 때문이다)에는 108.0점으로 5위를 기록하여 아프가니스탄보다도 순위가 높았다. 덕분에 잠시 나쁜 의미로 아이티의 인지도는 올라갔지만 그 답이 없는 참상도 금방 잊혀져 버렸다. 사실 아프리카와 마찬가지로 아이티에서 내전이 벌어져 몇백 만이 죽건 어떻게 되건 국제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한 게 가장 크다.
2010년 인기가수 출신인 미셀 마르텔리가 농민행동당(Repons Peyizan)을 창당하고 대선에 출마하여 2011 4월 20일 제4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2011년 5월 14일 수도 포르토프랭스 대통령궁 앞 광장에서 국내외 주요 인사 1,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아이티 대통령직에 공식 취임했다.
3.2.1 아리스티드에 대한 논란과 의혹
2010년 장 클로드 뒤발리에가 아이티인들을 돕겠다는 개드립을 펼치며 아이티에 돌아와 현재까지도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정작 아리스티드는 2011년 3월 20일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남아공 대통령 주마에게 전화를 걸어 아리스티드를 아이티에 돌려보내면 안 된다고 했으나 주마는 이를 무시하고 아리스티드를 아이티로 돌려보냈다. 일부 미국 역사가들이 민중봉기로 쫓겨났다고 주장하는 전 대통령 아리스티드는 공항에서 아이티인 수만 명의 대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아리스티드를 지지하는 정당은 선거 참여가 여전히 금지되어 있다. 뒤발리에도 오자마자 고소당한 상태긴 하지만 정치활동을 못 하는 아리스티드보단 정치적인 면에서는 사정이 나았다. 그러나 장 클로드 뒤발리에는 2014년에 사망했다
당국은 아리스티드를 부패와 돈세탁 혐의라는 죄목으로 엮으려 하고 있으나 "아이티 국민을 대변하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그의 이름은 아리스티드이다", "만일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아이티는 문을 닫게 될 것이다"고 말하면서 버티기 때문에 아리스타드를 잡아 가두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자료
아리스티드는 자신이 축출된 쿠데타 당시에 미 해병대와 CIA가 쳐들어와 자신을 납치했다고 한다. 미국인 역사학자 스키드모어는 미국 국무부 설명을 충실히 따라 아리스티드가 국민봉기로 쫓겨났다고 주장한다. 반면 아이티에서 NGO 및 자선 의료 활동을 했던 의료인류학자 폴 파머(현재 하버드 대학 사회의료대학 석좌교수 겸 학장)에 따르면 미국의 공화당 세력이 쿠데타 뒤에 있었다고 한다(관심있으면 '권력의 병리학'이란 책을 참고).
아리스티드 지지자들은 아리스티드 축출 쿠데타 뒤에 미국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티드는 그가 쓴 <가난한 휴머니즘>(한국어판도 나와있음)에서 자신이 IMF 정책을 따르지 않고 그것을 비판한 것이 강대국의 미움을 샀다고 주장했다. 참고로 아리스티드가 세웠던 의과 대학은 아리스티드가 쫓겨난 뒤 "미군" 기지로 바뀌었다고 한다(...). 아리스티드 귀환을 다룬 기사능욕쩌네
반면 쿠데타 정부는 아리스티드 본인이 쓴 '가난한 휴머니즘'이라는 책과는 달리 아리스티드 자신은 전혀 가난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아니, 가난하기는커녕 수천만달러의 자금이 예치된 역외은행의 비밀계좌를 관리하고 있었던 것이 드러났다고 한다. 실제 계좌를 추적해서 드러난 사실이라고도 주장한다. # 더불어 이런 엄청난 재산이 정상적인 대통령 월급으로 채워졌을리는 만무하고, 부정축재와 기금횡령으로 거둬들인 재산이며 그가 쓴 책과는 달리 얼마나 아이티인들을 위한 정치가였는지는 의문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옹호자들은 이런 의혹은 정작 앞에서도 말했듯이 쿠데타 세력이 일으킨 정부가 발표한 것이며, 그걸 밝힌다고 미국에 넣은 소송은 2006년에 중지되었다고 말한다.[11] 한 마디로 "밝혀진 것"이 없다는 주장. #
물론 쿠데타 세력은 아리스티드 정부시절 받은 수표와 계좌가 밝혀진 것은 사실이라고 아직도 주장한다. 그 사진은 다음과 같다.
500px
아리스티드의 옹호자들은 이 수표가 왜 비밀도 아니고 훤히 드러나는 아이티 국립은행 것인가에 대해 의혹을 제기한다. 금액도 수천만달러가 아니라 60만달러이며, 단지 저 수표에 서명을 했다는 것만으로 그것이 바로 부정축재 증거가 된다고 보기엔 적혀 있는 내용이 너무나 간략하다. 출처
반면 현 정부 옹호자들은 스위스 은행에서는 아리스티드의 자산을 동결했다고 밝혔고, 프레발 대통령은 아이티 경제가 어려워지자 이 동결을 해제하여 현금화할 것을 고려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므로 스위스 은행가들이 존재하지도 않는 아리스티드의 자산을 만들어내서 아이티에 지원할 만큼 천사들은 아닐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연합뉴스 다만 이 기사는 프레발 대통령이 아리스티드 대통령의 동결된 재산을 가져오려 하겠다고 "말했다고" 스위스의 '한 TV'가 말한 것을 전한 것이다. 또한 위 링크에 나온 취재기자 Lucy Komisar에 대해서도 말이 많다. 이 기자는 아이티 쿠데타에 찬성한 아이티의 거물 부로 집안(Boulos family)과 미국 우파 단체 Haiti Democracy Project (HDP)의 고용원으로 일한 사람이다. 한 마디로 쿠데타 정부와 한 편이라는 주장(아이티 주간지의 기사). # Lucy Komisar가 증언자의 말을 왜곡했다는 기사도 있다. # 다른 아이티 소식지 또한 아리스티드가 마녀사냥을 당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
4 경제
위 문단의 이 나라의 역사를 보면 알수 있겠지만 건국 이래로 빚이 많았고 그것이 이 나라의 빈곤의 첫번째 원인이었다. 그리고 프랑수아 뒤발리에 시대에는 식량 자급률이 80%였지만 미국의 원조식량이 들어오고 나서부터 농산물 가격이 급락, 현재 식량 자급률은 45%대이다. 그렇다고 원조를 줄이면 당장 대량기아가 발생하는 판이라 빈곤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게다가 정부 인사라는 자들은 하나같이 답이 안 나오는 무능력을 자랑하며, 그게 잘못된 줄도 모르는 자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그 결과 전국민의 80%가 절대빈곤상태에 처해있는 절망적인 상태이다.
거기에다 2008년에는 폭풍 4개가 나라를 갈아엎고 지나가는 바람에 진흙 쿠키가 나돌 정도로 식량난이 고조되고 있다. MBC 프로그램이던 W에선 한국인 취재진[12]이 아이티 보건부장관한테 국민들이 진흙 쿠키를 주식으로 먹는다는 사실을 물어보자, "건강에 진흙 쿠키가 유해하다는 증거는 없으며, 앞으로 그런 게 외국인들 눈에 보일 경우 조치를 취하겠다"고 답했다(...). 그러다가 기생충이 많은 진흙[13]에 대하여 이야기하자 말문이 막혔는지 바쁘다면서 얼른 퇴장해버렸다. 이 나라 높으신 분들이 얼마나 통치 부적격자인가를 말해주는 좋은 사례. 2010년에는 대지진까지 일어나 가뜩이나 빈곤하던 이 나라를 더욱 가난하게 만들어 버렸다. 여하튼 뭔가 엉망진창이다. 거기에 태풍까지...
북중남미 통틀어 가장 경제 수준이 열악한 나라. 사실상 국가기반 산업이라곤 전무한 상태이다. 기초적인 농업조차 제대로 유지되지 못할 정도로 사회 인프라가 무너져 있어 쌀의 3, 4모작까지 가능한 열대지방이면서도 식량 자급률이 겨우 45%에 불과하며 대책 따위는 물론(...) 존재하지도 않는다. 사실 말이 열대지방이지 삼림이 거의 황폐화된 점에서 볼 수 있듯이 실질적으로는 기후 빼면 화성이라고 봐도 무방할 지경이다. 실제 구글어스로 아이티를 보면 왜 화성 취급을 받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주요 외화수입원은 커피원두와 해외에서 일하는 아이티인들이 송금해주는 돈, 그리고 해외원조(...).[14]
또한, 물가도 비싼 수준이다. 근로자들의 평균 수입은 적은데 기본적인 생활용품부터 수입해오기 때문에 세계 최빈국답지 않게 물가가 비싸다고 한다.
5 문화
사용하는 공용 언어는 프랑스어와 아이티 크레올어. 하지만 프랑스어가 많이 섞인 아이티 크레올어가 주 생활 언어이다. 이 심히 괴이한 프랑스어의 변형은 발음은 프랑스어와 비슷한데, 정작 프랑스인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따라서 교육받은 식자층에서는 프랑스에서 정통 불어를 공부한다. 쓴 걸 보면 예를 들면 Bonjour을 Bonjou라고 쓴다. 네덜란드어에서 파생한 아프리칸스어와 비슷하다 생각하면 된다. 스페인어는 도미니카 공화국과 접한 국경에서 쓰이고 있다.
부두교와 좀비가 이 나라에서 유래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6 사회
폭동, 무장 단체들의 납치 사건, 강도 강간 살인이 자주 발생하는 나라. 한마디로 헬게이트 수도인 포르토프랭스를 구글에 검색하면 주검하나가 길바닥에 누워있는 사진부터 나온다...
론리플래닛으로 유명한 토니 휠러는 이 나라를 여행한 다음, 여기에 견주면 쿠바는 천국[15]이며 다른 나라들도 최소 선진국이라고 비판할 정도였다.
아이티 어린이들의 삶과 인생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싶다면 UNICEF에서 만든 다음 게임을 해보자. #
평균 수명은 41.2살, 북중미에서 최저를 자랑(?)하며 전세계적으로도 최하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도 이 정도로 막장스러운 국가는 극히 드물 정도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 대부분의 평균수명이 깎이는 가장 큰 이유는 에이즈고 그게 없는 나라는 다 50대 중반에서 60대 초반인데 아이티는 에이즈와 내전 문제가 아프리카 급으로 심각하지 않음에도 이 정도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감옥의 수용가능 인원대비 실제 수감인원 비율도 세계 최고인데, 무려 417%다. 이는 수용인원 1000명인 감옥에 4170명이 수감되어 있다는 뜻이다. 물론 감옥이 초과 상태인 국가는 굉장히 흔하지만[16] 아이티의 경우는 문제가 정말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아이티의 상황이 얼마나 막장인지는 구글 어스를 통해서도 바로 알 수 있다. 구글 어스로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중심가 아무 데나 골라서 확대해 보면 지진이 일어난 지 4년 후 찍은 사진인데도 복구가 되어있지 않은 곳이 굉장히 많다. 또한 도로 상황은 아예 신호체계가 작동하지 않는 것인지 차가 중구난방으로 움직이고 있고 심지어 차선이 보이지 않는다.(...) 아프리카 지역의 웬만한 나라들의 수도를 구글 어스로 살펴봐도 이 정도의 막장성을 보이는 도시는 극히 드물다. 게다가 7년동안 콜레라와 전쟁중이고 아이티 국민의 7%가 콜레라에 감염되었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 등록박람회를 개최한 적이 있다!!!! 물론 1949년으로 매우 오래 전 일이긴 하지만.
7 종교
국교가 없는 세속국가이지만 전 식민통치국인 프랑스의 영향인지 가톨릭이 80% 가량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개신교가 16%로 기독교도 비중은 96%에 달한다. 그러나 미묘한 게,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도 부두교와 관련된 주술을 행하거나, 주술사를 찾거나 관련 비밀결사에 가입되어있는 경우가 많다. 즉, 이에 따르면 아이티 최대의 종교는 시각에 따라선 기독교가 아니라 부두교로 봐도 될 정도라는 의견. 그러나 엄밀히 정확히 보면 거의 가톨릭+일부 개신교의 기독교 위주의 국가로 보는 것이 맞다고 보면 된다. 실제로 아이티가 아닌 다른 아프리카나 중남미쪽의 기독교를 보면 순수 전래된 기독교 자체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해당 지역에 전래되면서 전통 신앙, 부족 신앙과 엮여서 교리나 예배 방식이 조금 달라진다거나 성향이 섞이는 경우는 있는 만큼 아이티만 예외로 볼 것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애당초 이런 식으로 치면 다른 가톨릭이 다수인 국가들 중 아이티처럼 가톨릭과 개신교를 믿으면서 다른 민속 토종 종교와 신앙이 일정 부분 섞여 있는 나라들은 죄다 비 기독교 국가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한 교회에 나가는 아이티 사람들 중 부두교 주술을 행하거나 관련 비밀결사에 가입되어 있는 것도 정말 진지하게 하는 것인지 그래도 사회적으로 전통이 깊은 부두교라 다른 종교를 믿더라도 아주 무시하고 배척하기가 어려워 형식상 재미로 이름만 걸어놓고 가입한 것인지 등을 봐야하기 때문. 즉 저 아이티 종교인구 중 같이 믿더라도 그 중 가톨릭(혹은 개신교)를 더 중요시 여기는지 부두교를 더 중요시 여기는지 비율을 따져봐야 한다.
단적으로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개인적인 신앙이 좀 낮긴 한데 그래도 자기 종교는 기독교라고 하는 사람이 그냥 재미삼아 본인 신앙이 낮아 딱히 기독교인이 이러면 안 된다는 종교적 신념이 강하지는 않아서 한번쯤 점집에 아는 지인따라 가서 혹은 타로카드같은(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교리에 없는 이방종교적인 미신적인) 것들을 간단하게 본다든지 아니면 기독교이면서도 조상 제사를 지내기는 한다든지(최소한의 형식만 따르겠지만, 가령 조상 앞에 상차리고 절 한번 정도는 대강 하더라도 음복같은 절차는 절대 안한다든가) 하는 경우도 종종 보인다. 아이티인들이 기독교 교회에 다니면서 부두교도 신경쓰는 이유도 이런 이유에서일 가능성이 있고 자세한 것을 알기 위해선 더 정확한 조사가 필요하다.
첨언하자면 한국에서의 기독교의 경우 유럽의 기독교와 다른 경우도 많고 같은 국내 기독교 내에서도 종파에 따라 기복신앙적인 측면이 섞이거나 내세관이 교리가 일부 다른 경우도 꽤 많은 점을 감안하면 기독교에서 정말 오리지날 순수 원조 기독교적인 요소만 찾기도 어려운 것이 현재의 기독교이다. 애초에 혈통 문제에서 순도 100% 단일민족이란걸 따지는게 무의미하거나 설령 따진다 해도 세계에서 그런 민족은(설령 한민족이라 해도)거의 없다고 하듯이 종교에서도 순도 100%의 종교 이렇게 따지면 수많은 현 종교들 중 다른 종교 영향을 거의 안받는 폐쇄적인 환경서 자생해 온 민족종교, 전통 토속 신앙 외에는 지적 안받을것이 없다. 우선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 특정 국가 한두국가나 한두 민족만이 아닌 전 세게권적으로 믿는 인구가 많은 종교들은 이들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가 서로간에 영향을 주고받은 것도 있고 그 외에도 시대를 거치면서 다른 이방 종교들에 영향을 받아 교리나 경전에 섞이는 경우도 많다. 이 외 같은 기독교 내에서도 이단이라 판정받는 짜잘한 종파들도 많다. 그렇지만 가령 한국에서 기독교 인구를 통계로 계산할 때는 같이 합산되지 따로 세진 않는다. 대한민국 종교 인구 수에서 무종교 다음으로 기독교이고 그 다음이 불교인 것이 그 이유인데 개신교와 가톨릭을 나누면 불교보다 수가 적어지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객관적으로 맞기 때문.
8 스포츠
8.1 축구
2013년 1월에 피파 랭킹 38위까지 올라가 사람들이 놀랐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축구 잘 하는 나라는 아니다. 몇 달 안 가 피파 랭킹이 60~70위권으로 내려갔으며 2014년 4월까지도 77위를 지키고 있는 수준이다.
70년대에 잘하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북중미 수준에서 잘했다는 것일 뿐이다. 북중미 대륙 챔피언십(CONCACAF Championship, 골드컵 전신)에서 1973년 자국 대회 우승을 차지하고 1971, 1977년 대회를 준우승한 적이 있으며, 카리비안컵 전신인 CFU 챔피언쉽에서 1979년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1974년 서독 월드컵에도 참가했으나 3전 전패하고 탈락했다. 1974년 월드컵에서 당시 1142분 무실점 기록을 이어가던 이탈리아의 디노 조프의 기록을 깬 것도 아이티의 스트라이커 에마뉘엘 사논이다.[17] 이후에는 강호에 속했다가 말았다가를 반복한다
2007년에는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개최된 카리비안컵에서도 우승을 차지하긴 했지만 이 대회는 중미 대회에서 중하위 나라들이 참가하는 대회이기에 아이티의 우승이 대단한 것도 아니다. 참고로 트리니다드 토바고가 최다 우승 8번이며, 자메이카가 5번 우승했고 축구랑 거리가 먼 쿠바나 마르티니크도 아이티처럼 1번은 우승했던 대회이다.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선 일찌감치 예선 탈락했지만 2013년 스페인,[18] 이탈리아와의 평가전에선 각각 1:2, 2:2로 선전했다.
하지만 2013년 7월에 열린 골드컵에선 온두라스, 트리니다드토바고, 엘살바도르와 맞붙어 1승 2패를 거두며 조 꼴지로 토너먼트에서 탈락했다.
2013년 9월 6일 인천축구전용경기장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홍명보호)와 평가전이 성사되었다. 유럽과 남미 팀들이 여전히 월드컵 예선 진행중이라 대진 상대를 구하기 힘든 상태에서 축구협회는 이란, 쿠웨이트와 평가전을 추진했으나 모두 불발되고 결국 나름 강팀을 상대로 선전을 보인 아이티를 상대로 잡은 듯. 항간에는 축협의 무능을 탓하기도 했지만 같은 시기 일본 역시 대진 상대를 못 구해서(...) 과테말라와 친선전을 가졌다. 결국 아이티는 한국에게 1:4로 패했다.
역시 언어적으로 같은 프랑스에서 아이티 선수들이 여럿 뛰고 있으며 거기서 뛰는 유망주들이 많다. 프랑스 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카옌의 수비수 장 자크 피에르, 낭시의 제프 루이스와 르망의 켈벵스 벨포르 등이 아이티 선수이다.
9 아이티 출신 인물
독재자 프랑수아 뒤발리에가 쓸데없이 유명하다.
삼총사, 몽테크리스토 백작 등을 쓴 알렉상드르 뒤마(아빠)의 친아버지가 아이티 섬 출신이다. 뒤마의 친할아버지는 프랑스 출신의 귀족이었고 친할머니는 흑인 몸종이었다. 뒤마의 아버지는 원래대로라면 노예가 됐어야 하나 출생 이후에 부친을 따라 프랑스로 건너가 자유인이 되었고 프랑스군의 첫번째 흑인 장교가 된다. 즉 뒤마(아빠)의 아버지가 아이티 출신의 물라토이고, 뒤마(아빠)는 1/4가 흑인인 셈이다. 결국 뒤마(아빠)의 아들인 춘희를 쓴 뒤마(아들)는 1/8이 흑인이다.
그 와 록 밴드 아케이드 파이어의 멤버인 레진 사샤뉴[19]하고 퓨지스의 와이클레프 쟝[20]가 유명하다.
픽션에서는 미드 히어로즈의 캐릭터 중에는 통칭 헤이션, 즉 아이티인(Haitian)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본명은 불명이고 그냥 이게 이름이다. GTA 바이스 시티에서도 아이티계 갱단이 등장하는데, 돌려 말하지 않고 대놓고 미션 목표에 "아이티인들을 죽여라!"라고 써버려 락스타에게 거대한 고소크리를 안겨주었다.[21] 이 가운데 와이클레프 장은 최근 아이티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지만 국적상 미국인이라서 불가능.뽑아주고 싶지도 않을듯
아이티인은 아이티 밖에 상당히 많이 거주하고 있다. 미국에는 120만 명, 캐나다에 20만 명, 그리고 도미니카 공화국에는 100만에서 200만 사이의 수가 거주하고 있다. 프랑스에도 9만 명이 거주하며, 바하마에도 8만 명이나 거주한다. 특이하게 캐나다에도 많은데 퀘벡에 상당수가 거주하고 있으며 레진 샤사뉴와 캐나다의 전 총독이었던 미카엘 장(Michaëlle Jean)이 퀘벡 아이티인이다. 아무래도 같은 프랑스 문화권이고 미국에 대한 반감 때문에 차선책으로 캐나다로 많이 이주한 듯. 한편 옆집 흑백혼혈 위주인 도미니카 공화국에선 흑인인 아이티인에 대한 인종주의가 팽배하여 아이티 이주 외노자를 대상으로 착취랑 능욕이 난무하다고 한다.
10 외교 관계
10.1 도미니카 공화국과의 비교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서부의 지옥과 동부의 천국.
같은 섬을 공유하고, 개발도상국 축에 속하는 이웃 도미니카 공화국조차 아이티를 우습게 본다. 도미니카 공화국이 전세계적인 기준으로 봐서는 부유한 나라에 속하는 나라는 절대 아니지만[22] 그래도 옆의 아이티보다는 경제력과 생활 수준이 몇 배는 높기 때문이다. 도미니카 공화국이 아이티와 그 아이티 국민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단적으로 비교하자면 미국이 아래 이웃나라 멕시코를 우습게 아는 정도보다 몇 배로 그 강도가 더 심하다고 보면 된다. "프랑스 식민지 부국 + 인구 7배의 최초의 독립국 vs 소 치는 스페인 식민지"에서 "세계 최악의 헬게이트 vs 그럭저럭 살만한 나라"가 되어버렸으니(...)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는 20세기 후반에 있었다. 70년대, 80년대 독재정권하의 부실한 산림 관리 정책으로 그나마 있던 산림마저 모두 베어버려 암반이 노출될 정도로 심각한 토양 유실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아이티의 식량생산은 급감하여 1991년부터 2002년 사이엔 무려 30% 이상이 감소했다. 이러다보니 기후가 바로 옆나라 도미니카 공화국에 비해 강수량이 적으며, 더욱이 울창한 숲으로 덮여있는 옆나라 도미니카 공화국과 달리 숲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 기본적인 땔감까지 부족한 실정이다.
10.2 바티칸과의 관계
아이티는 1804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할 당시 국교가 가톨릭으로 정해졌지만 바티칸과의 관계는 1860년에 이뤄졌다. 바티칸은 1860년 아이티와 수교를 맺고 교황 대사와 사제를 파견했다.
이후 100년 뒤인 1960년 두발리에 독재정권이 가톨릭 교회를 탄압하면서 가톨릭 교회와 국가 간 관계는 위기를 맞게 된다. 두발리에 대통령은 포르토프랭스 대교구장 주교를 추방시키고 연달아 사제들을 내쫓았다. 또 정권 유지를 위해 국민 1만여 명을 살해하기도 한다.
아이티 교회는 갖은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정부와 대치하는 대신 정부가 미처 손쓰지 못한 국민들의 가난과 인권, 사회복지에 눈을 돌린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3년 포르토프랭스를 방문했고 이때 1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아이티 정부를 비판하며 폭력과 살인, 정쟁없는 변화를 이끌어 낼 것을 주문했다.
1991년에는 가톨릭 사제 출신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대통령이 처음으로 민주적 선거로 당선된다. 하지만 곧 군부 쿠데타에 의해 축출된다. 2004년까지 복귀와 축출을 반복하며 정치적 불안이 계속되었다.
아이티 국민 80%는 가톨릭 신자지만, 토착신앙인 부두교가 아직 사회 저변에 깔려 있으며 근래에 들어서는 개신교(주로 오순절교회)가 매우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10.3 한국과의 관계
남북한 모두와 수교국이지만 현지교민은 몇 안 된다.교민이 있는게 더 이상할 판이다 그렇기에 대사관도 없이 도미니카 공화국 대사관에서 겸임하고 있다. 정부도 가급적 아이티에 거주하지 말 것을 권하는 판이고, 사실 교민들이 뭔가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것도 없을 정도로 낙후되었기 때문이다. 소위 현세에 구현된 전근대 사회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 ↑ Nord 주,Nord-Est 주
- ↑ 여행자제 발령 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
- ↑ #
- ↑ 아이티 크레올어로는 Goud ayisyen.
- ↑ 프랑스어, 스페인어로는 이스파니올라다.
- ↑ 아이티 혁명은 흔히들 같은 시기에 있었던 또 다른 혁명의 스핀오프로 많이들 알고 있지만, 사실 프랑스 혁명과는 아예 근본이 다르다. 자코뱅들보다도 더 극좌 계열이 있었으며, 아이티의 특이한 정치 상황 때문에 프랑스 혁명이 없었어도 내전이 일어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무엇보다 자유주의적이였던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과는 달리, 아이티는 탈식민지주의에 더 가깝기 때문에 오히려 알제리 전쟁이나 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더 비슷하다.
- ↑ 당시 식민주의와 노예제가 가장 극렬한 곳이 카리브 해였다. 이런 곳에 갑자기 노예들이 주축인 흑인 독립국이 탄생된다면 근처 열강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실제로 혁명 중 아이티 혁명군은 스페인군과 영국군과도 싸웠다.
아이티의 독립 후 역사를 보건대 불행히도 투생의 생각이 옳았다 - ↑ 한마디로 프랑스 농장주들의 재산인 농장과 흑인 노예를 상실했으니, 그 대가로 배상금을 내놓으라는 개소리. 당시 유럽 제국주의가 얼마나 악독했는가를 말해주는 좋은 예라고 하겠다.
- ↑ 사실 노예제 부활은 투생 시절이었다. 프랑스군을 몰아내긴 했는데 영토 안에 제대로 돌아갈 만한 경제적 인프라가 설탕수수 농장들 뿐이었고, 이 농장들은 엄청난 양의 노동자들을 필요로 했다. 결국 노예제란 단어만 안 썼지, 강제노동법을 만들게 된다.
- ↑ 이 시점에 이르면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은 아메리카에 대한 개입 여력 자체를 상실한 지 오래였다. 그나마 끝까지 남아있던 스페인도 19세기 말에 미국과 벌인 전쟁에서 패하여 추방됐다.
- ↑ 다른 나라 이야기지만 칠레에서 1973년에 쿠데타로 집권한 피노체트 정부는 아옌데의 인민연합 정부가 Z계획이라 하여 당일 예정된 신임투표에서 친위쿠데타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제는 미국 극우들도 인정 안하는 이야기다.
- ↑ 이들이 직접 파는 진흙 쿠키를 사먹어봤는데 먹는 순간 흙이 씹혀서 도저히 더 이상 삼킬 수도, 씹지도 못하고 뱉어버렸다. 재료는 진흙 절반에 기름 약간, 밀가루 약간, 소금 약간. 이 정도로 넣고 굽는다. 1개당 우리돈으로 30원 정도. 그냥 밀가루와 기름, 소금만 넣어 구운 건 100원이 넘는데 이건 맛이 없다고 해도 최소한 먹을 수는 있었다.
- ↑ 흙을 빵에 넣는다든지 양을 속인 건 과거 유럽에서도 있었는데 주로 흉년 때 이랬다고 한다. 펄 벅의 대지에서도 흉년 속에 아이들이 굶주림에 못이겨 흙을 퍼먹는 게 나오며 우크라이나 대기근 때도 아이들이 이러는 것을 목격한 사례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오래 전 노인들이 그랬더라 하는 이야기도 있지만 자세한 내역은 드러나지 않았던 경우도 있다.
흙파먹고 장사하냐 드립의 기원그래도 다들 오래오래 과거 이야기인데 아이티는 이것이 현재진행형이라는 게 문제.그보다 먹을 게 너무 없을때 흙을 간간히 먹는게 아니라 그냥 흙만 먹는게 문제다 - ↑ 이 탓에 위에 나온 취약국가지수(국가 불안정 지수)의 '외부 의존 및 개입' 지수가 10점 만점에 9.6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다(...).
- ↑ 쿠바는 확실히 아이티에 견주면 천국이다. 여긴 적어도 굶주려 죽는 이는 없다. 적긴 해도 배급이 나오고 비료와 농약을 쓰지 않는 유기농업으로 식량을 자급자족하며, 국민 모두에게 개인주치의를 배정한 무상의료체계로 미국보다 오히려 영유아 사망률이 낮다. 오랜 경제봉쇄로 경제침체 상태에 언론통제와 비밀경찰의 일당독재국가(다만 이는 외국인 관광객에겐 치안상 유리하다는 점도 된다. 정부가 통제력을 상실해 강도, 납치, 폭동, 반군 등이 있는 것에 비하면)이긴 하지만 진흙 쿠키 따위 먹을 일은 없다. 애초에 진흙 쿠키는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에서도 존재하지도 않지만.
- ↑ 예를 들자면 대한민국만 해도 교도소는 포화 상태를 넘어 정원보다 6% 가량이 더 많다. 게다가 사회 전반적으로 엄벌주의가 득세하는지라 더 늘어날 것이다.
- ↑ 이 골과 역시 사논이 아르헨티나 전에서 기록한 한 골이 아이티가 월드컵에서 기록한 골의 전부이다. 다시 말해 사논은 아이티에서 유일하게 월드컵에서 득점을 기록한 선수였다.
- ↑ 대결 이유가 재미있는 것이 컨페드컵에서 같은 조의 타히티와 대결하게 되자, 약팀을 상대하는 방법을 익히기 위해 대진을 추진했다고 한다.
- ↑ 가족이 아이티인이었는데, 뒤발리에의 폭압 때문에 캐나다로 망명했다고 한다. 아케이드 파이어의 1집에 수록된 'Haiti'는 이를 다룬 곡이다("내 태어나지 않은 사촌들은 한밤중에 뒤발리에에게 사냥당했다").
- ↑ 아이티 난민이며 미국 흑인들에게 차별받은 경험이 주요한 음악적 원천이 됐다고 한다.
- ↑ 이 이후로 비디오 게임에선 (실존하는) 특정 국민이나 세력을 죽이라는 말을 단 한마디도 넣지 않게 된다. 제일 쉬운 예는 모던 워페어 2의 No Russian.
- ↑ 2016년 IMF 통계기준 1인당 GDP는 7074달러. 대한민국의 1/3 수준도 안 된다.
- ↑ 유엔에서도 그런 말이 나왔다고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했는데 앞뒤를 잘라 그 대사분이 말씀하신 것처럼 왜곡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