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바닷타

(제바달다에서 넘어옴)

산스크리트어로는 데바닷타, 한역(漢譯)으로는 '제바달다'라고 한다.

1 개요

석가모니의 제자이자 사촌, 아난다의 형, 즉 석가족의 왕족.

석가모니를 배반하고 따로 종파를 세우려 한 일 때문에 불교 쪽에선 두고두고 까이는 인물이다. 그리스도교이스카리옷 유다와 맞먹는다고나 할까.

일부에 따르면 이스카리옷 유다예수가 '너희들 중 나를 팔아먹는 놈이 있을 것이다.'는 예언도 하고, 나중에 죄책감에 자살을 한 것도 있고 해서 동정표라도 받지만[1], 이 사람은 그런 것도 없다.[2][3] 끝까지 석가모니에게 대항하다 지옥에 떨어졌다.

그러나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는 "그가 전생에 나에게 가르침을 주었으며 이 공덕으로 언젠가는 천왕여래(天王如來)라는 이름의 부처가 되리라"고 예고했다.[4] 그러므로 다르게 보면 그리스도교로 따질 때 바리사이나 열심당원, 크게는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이라고 봐도 좋다.

2 일생에 대한 전승

석가모니와 대적하려 한 것 때문에 석가모니가 왕자이던 시절 부인을 놓고 경쟁하는 상대였다는 전설도 있다.[5] 그러나 실제론 석가모니가 훨씬 나이가 많아, 석가모니가 결혼할 무렵엔 데바닷타는 아직 어린애였다고 한다. 여러모로 '악인'의 이미지를 씌우려다 보니 그런 이야기가 만들어졌던 것.[6]

석가모니의 제자가 된 후, 뛰어난 말솜씨와 신통으로 수많은 승려들의 신임을 얻고[7] 빔비사라 왕[8]의 아들 아지타사투 왕자의 마음을 뺏아 절을 세우고 공양을 받으면서 탐욕과 교만에 취하고[9] 얼마 안가서 사건을 터트리니, 석가모니에게 이제 늙었으니 교단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석가모니는 "내가 사리풋다목갈라나와 같은 큰 아라한에게도 넘겨주지 않은 교단을 어찌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의 침이라도 빠는 네게 넘겨주겠느냐?"이라고 거절하면서 데바닷타는 앙심을 품었다고 한다. 이후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불만을 품고 자신의 계율을 만들어서 그걸 사용하라고 주장하다 안 되니까 500명의 신참 제자들을 데리고 나가 따로 종파를 만든다. 그런데 그 500명의 제자들이 석가모니가 보낸 사리풋다와 목갈라나 존자에 의해 곧 마음을 바로잡고 원래 종단으로 돌아가버렸다고 한다.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말이 많은데 500명의 제자들에게 버림받고 고립된 그는 홧병이 나서 죽었다고도 하고 그는 석가모니를 암살하기 위해서 온갖 수를 썼다고도 한다. 아지타사투 왕자를 꼬드겨서 왕위 계승을 하게 만들고 빔비사라 왕을 감금해서 죽게 만들거나,[10] 암살자를 보낸다던가[11] 미친 코끼리(혹은 술취한 코끼리)를 석가모니에게 달려가게 만든다던가. 그러나 그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석가모니 근처에 가자마자 명상에 든 평화스런 모습에 감화되어 살기를 버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친 코끼리는 석가모니를 보자 얌전해지고 코로 석가모니의 발의 먼지를 털었다고 한다.

결국 이도저도 안 되자 자기가 직접 나서기로 하고 처음에 석가모니를 노리고 바위를 굴렸지만 감화된 바위가 빗나가는 바람에 실패했다.(...) 그런데 바위가 떨어지면서 돌조각이 튀었는데 이것이 석가모니의 발가락에 부딪혀 상처를 냈으니 이것이 석가모니가 출가한 이후 유일하게 입은 육체적인 상처다. 그러자 빡돈 그는 손가락에 을 발라 그걸로 석가모니를 햘퀴어 죽이려고 한다. 천하의 개쌍놈 그러나 손가락에 작은 상처가 있던 것을 잊었기 때문에 석가모니에게 가기도 전에 독이 자기 손으로 스며들어 몹시 고통스러워하다가 산 채로 지옥에 떨어진다.(또는 움직이면 독이 먼저 퍼질 것을 우려하여 수레를 타고 석가모니가 있는 곳으로 달렸으나, 독이 예상보다 빨리 퍼져 수레에서 굴러 떨어져 죽었다고도 전한다. 또는 정말 용서를 빌러 석가모니에게 갔지만 결국 지옥에 떨어졌다고도 한다.) 결론은 지옥행.

만화로 요약하면 이렇다 여래여래다제

3 오늘날의 평가: 스스로 쇠퇴를 초래한 근본주의 교단

현대의 불교 연구가들은 데바닷타를 폄하하는 설화는 대체로 후세의 창작으로 여겨 부정하는 견해가 많다. 예를 들어 아쇼다라 왕비를 덮치려 했다는 설화는 그녀가 데바닷타의 친누나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말이 안 된다. 혹시 모르지 시스콘이였을지도

보통 현대의 연구에서는 석가모니와 의견이 맞지 않아 분파하게 된 정도로 추측하며, 혹은 석가가 불교를 정립하기 이전 기존의 신앙계 인물이라 보기도. 이 경우 아래의 기록에 의거하여 석가가 '개혁'하기 이전의 종교 교단의 유력한 사람이라 보기도 한다.

가끔 석가모니에게 반기를 든 것 때문에 2차 창작물에서 '권위주의에 저항하는 종교개혁가'란 이미지로 나오기도 하나, 현실은 그가 만든 계율이 더 엄격하게 수행자를 묶는 것이었다. 원래 이상은 현실과 따로 노는 법이지.[12] 예를 들면 '수행자는 숲에서 생활해야 하니 마을로 내려가지 말라'거나 '나무 밑에서 살고, 절대로 지붕 밑으로 들어가지 말라', '수행자는 고기와 소금을 입에 대서는 안된다'[13] 등등의 엄격한 계율을 주장했고, 고행이나 엄격한 계율이 오히려 수행자의 정신을 옭아맨다고 생각했던 석가모니는 당연히 반대를 했다.[14]

인도에 다녀온 현장법사의 기록을 포함한 몇몇 기록들에 의하면, 데바닷타의 가르침을 따르는 교단은 그 때까지도 남아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불교의 사원을 빌려서 쓰기도 하는 등 불교와 대립하지 않고 공존하면서 존속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제바달다의 교단은 다른 부처[15]는 공양하고 경대하면서 석가불에게만은 공대하거나 공양하지 않았다고 한다.

현대의 연구가들은 지나치게 엄격한 계율 때문에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멸하게 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또 다른 가설은 영양 부족으로 신도들이 전멸했다고도 한다.

《아랍의 눈으로 본 십자군》이란 책으로 유명한 무슬림 작가 아민 말루프는 데바닷타(국내에도 정발됨)라는 소설을 썼는데 이 소설에서 재평가로 좀 좋은 면도 있다고 봤으나, 광신적인 한계로 가서 스스로 파멸하니 안타깝다고 결국 결말이나 그 근본주의에 대해서는 비난하고 있다. 그렇지만 서문에서 패자이기에 더더욱 기록에서 불리하게, 왜곡되어 남았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쓰기도 했다.

3.1 데바닷타 교단의 교리

데바닷타가 주장한 오법은 대략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다섯가지 계율은 전승마다 달라지는 경우도 많지만, 대체로 거주지, 걸식, 금육, 의복의 절제 등 의식주 전반에 대한 계율이다.

  • ① 봄∼여름, 8개월은 태양 아래 숲 속 나무등걸 밑이나 무덤 가에 앉아 있고, 겨울 4개월은 초가집에서 머문다. 촌락의 집에서 살아야지, 아란야[16]에서 살지 않는다. (일부 불경에선 반대로 '아란야에서 산다'라고 적혀 있기도 하다.[17])
- 왜 촌락의 집에서 살고, 아란야에서 살지 않는가? 왜냐하면 촌락의 집은 시주(施主)가 보시한 것이기 때문에 만약 그곳에서 살지 않는다면 시주의 보시를 버리는 것과 같다. (혹은 큰 비용을 들여 지은 아란야에서 사는 것은 수행자로서 합당하지 않다.)
  • ② 모든 비구는 일체 신도들의 공양 초청에 응하지 않는다. 오직 탁발(걸식)만 해서 먹도록 한다.
- 왜 공양 초청에 응하지 않고 걸식하는가? 초청을 받으면 좋은 음식과 나쁜 음식을 차별하게 되기 때문이다.
  • 생선고기를 먹지 않는다. 기름기 있는 음식(유지방 포함, 특히 버터)을 먹지 않는다.
- 왜 생선과 고기를 먹지 않는가? 왜냐하면 차마 중생들이 생명을 없애는 것을 내버려 둘 수 없기 때문이다. 왜 버터를 먹지 않는가? 왜냐하면 그 원료인 젖을 송아지에게 먹이기 위해서이다.[18]
  • ④ 새 천으로 된 옷은 입지 않는다. 옷을 받을 때 옷감 그대로 꿰매어 입는다.
- 왜 옷을 받을 때 옷감 그대로 꿰매어 입는가? 왜냐하면 사문 고타마[19]는 옷을 받을 때 옷감을 찢는다. (즉 얻은 옷감을 찢은 다음 다시 꿰매어 승복으로 만든다.) 이 같은 짓은 옷 만드는 장인의 노고를 훼손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마땅히 원래 옷감 모양대로 꿰매야 한다.
  • ⑤ 소금을 먹지 않는다.
- 왜 소금을 먹지 않는가? 왜냐하면 소금 속에 먼지가 많기 때문이다.[20]

농담이 아니라 영양학적 관점으로 보면 영양실조로 죽기 딱 좋은 법도다.(…) 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생각이니? 만화(맨 아래) 영양 부족으로 신도들이 전멸했다는 가설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 특히 소금! 음식에 자연적으로 포함된 염분을 섭취하는 걸로 견디려는 것인지는 몰라도, 소금은 지나친 것보다 모자랐을 때의 해악이 훨씬 크다. 그냥 먼지도 핥지

이러한 데바닷타와 그 종단의 이야기는 근본주의란 것이 왜 해로운지, 그리고 석가모니가 왜 이를 불식시키려 노력했는지를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사례이다. 석가모니 생전에 풍속이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그 풍속을 유지하며 불법을 따르게 해달라고 하자 모두 허락하며 불법이 깨달음을 구속하는 도구가 되어선 안 된다고까지 한 일도 있다. 오히려 계율을 두고 논쟁이 일어난 것은 석가모니 사후의 일.

  1. 예수 본인은 이스카리옷 유다가 자신을 팔아 넘긴 것에 대해 "유다 걔는 정해진 수순에 의해 움직였을 뿐이다."라고 말하며 용서했다. 다만 "그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다."란 언급도 있었지만.
  2. 예수의 궁극적 계획인 대속을 이루기 위한 필요악으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 이스카리옷 유다이기에 동정을 받는 것이다. 물론 정식 교리상에선 어디까지나 "이스카리옷 유다의 자유의지(특히 교만과 불순종)로 죄를 저질렀다"라고 보기에 일어날 대속은 일어난다 영지주의를 제외한 교단에서는 동정하지 않는다.
  3.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대속의 핵심은 "예수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 물론 억울하게 죽었기 때문에 그 상징성이 더욱 커지는 것은 있으나, 예수가 실제로 고귀하고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잘 먹고 잘 살다가 죽고 부활했더라도 대속은 이루어질 것이라 보는 것이다. 즉 이스카리옷 유다가 팔아먹고 유대인들이 죽이라 청하지 않았더라도 인류 구원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4. 물론 불교 교리상 모든 중생은 열반할 때까지 계속 윤회하니까 언젠가는 당연히 열반하게 된다. 그래도 이 예고하는 부분은 상당히 제자들에게 파장이 컸던 듯하다. 또 아동용 불교 서적 중에는 개심해 석가모니에게 용서를 빌고 그 밑으로 들어갔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아무래도 아동용이라 내용을 개찬한 듯하다.
  5. 제바달다로 직접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한국 영화 석가모니(1964년작이지만 의외로 고증이나 여러 모로 신경썼고 제법 제작비도 들여 만들어 당시 한국 경제사정을 생각하면 대작이다.)에서는 이런 경쟁 상대 캐릭터가 나온다. 박준규의 아버지 박노식이 분장한 왕자.
  6. 이런 예는 석가를 강조할수록 더해지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전생에 석가가 정의로운 사자였을 때, 의형제 동생이던 코끼리(이 코끼리는 미륵이다.)와 함께 죽인 독룡이 제바달다라고까지 하니 그저 안습, 심지어 어떤 전승에 의하면 전생에 머리 둘 달린 새의 한쪽 머리는 석가, 다른 머리는 제바달다이고 다른 머리가 한쪽 머리를 시기해서 동반자살한 이야기도 있다.
  7. 수많은 비구와 비구니들이 그를 따랐으며 심지어 교단의 2인자 사리풋다도 '데바닷타는 신통과 위력이 뛰어난 비구다'라고 칭찬했었다.
  8. 싯다르타가 구도 중에 만난 마가다 국의 왕. 수행하는 싯다르타의 기품을 보고 나라를 주겠다, 군대를 줄테니 다른 나라를 정벌하라고 권했다. 싯다르타는 고맙지만 세속의 행복을 찾으러 수행을 하는 게 아니라고 하면서 정중히 거절하고 바르게 나라를 다스려 달라고 부탁한다. 왕은 작별하면서 도를 이루시거든 나를 먼저 찾아와 달라고 부탁했으며, 석가모니는 약속을 지켰다.
  9. 석가모니는 데바닷타가 점점 교만해지는 걸 보고, 데바닷타가 걸식하러 나타나면 '어리석은 사람은 상대해 봤자 백해무익하다'라고 하면서 먼저 자리를 떴다.
  10. 아지타사투는 나중에 갓 태어난 아들의 종기를 빨다가 어머니 웨데히가 '너의 아버지도 그렇게 너의 종기를 빨았단다'라고 하면서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자신의 악행을 후회하면서, 데바닷타 무리들을 버리고 석가모니를 찾아가 참회했다. 이후 아버지 빔비사라 왕처럼 석가모니를 후원한다.
  11. 한 설화에서는 처음엔 4명의 암살자를 보내고, 그 다음 그들을 죽여 입막음시킬 8명의 암살자를 보내고, 그 다음 또 그들을 죽일 16명의 암살자를 보낸 뒤 마지막엔 그 16명을 독살할 계획을 세웠다고 전한다. 그런데 암살자들이 죄다 부처님에게 반해서 참회하고 제자가 되었다(...).
  12. 사실 기독교에서도 가톨릭보다는 개신교가 훨씬 교리적, 도덕적으로 엄한 편이다.
  13. 당시 초기불교는 삼정육의 조건을 맞추거나 시주받은 고기를 먹는 허용했다.
  14. 현대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전혀 이해가 안 갈지도 모르지만, 당시 석가모니와 불교는 당시 브라만교(힌두교의 전신)에서 독립한 여러 종파 가운데 유력종파인 자이나교로부터 '할 거 다 하고, 먹을 거 다 먹으면서 무슨 깨달음을 얻는다는 말인가'라는 비판을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수행자들이 행하는 고행이란 건 웬만한 고문은 저리가라 할 정도 수준으로 자기 몸을 괴롭히는 것이었고, 그것으로 단순히 윤회와 공덕으로 좋은 곳에 태어난 신을 능가하는 신통력을 얻는다고 생각했던 것. 또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접한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석가모니 본인이 이걸 행하다 종국에 때려치고 '고행'보다 '깨달음'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바꿔 반나절만에 깨달음을 얻은 케이스다. 콜럼버스의 달걀
  15. 과거불이나 미래불
  16. 촌락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수행하기에 알맞은 조용한 곳이라는 뜻으로, 한마디로 절
  17. '파승사' 권11, '선견율비바사' 권13
  18. 반면 붓다(석가)는 비구(수행자)가 음식을 가리는 것이 더 큰 잘못이라고 보았다. 위의 탁발론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인 것. 그러면서 "자신을 위해 죽인 것을 보았거나, 들었거나, 의심이 가는 고기"를 제외한 (즉, 억지로 살생을 초래한 고기)를 제외한 나머지는 먹어도 좋다고 설하였다. 게다가 붓다는 고행하던 시절에 우유를 공양받아 마신 적도 있다.
  19. 부처를 따르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 사문은 출가한 수행자를 가리키고 고타마는 부처의 성씨이다. 쉽게 말하면 "고타마 패거리"라는 뜻을 가진 비하적 표현.
  20. 실제로 과거의 소금에는 불순물이 많았다. 지금은 일부러 불순물이 든 소금을 먹기도 하지만 예전에는 거의 무조건 하얗게 정제해야만 시장성이 있었다. 비슷한 예로 예수가 "빛과 소금이 되라"라고 비유를 할 때도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오 복음서. 마르코 복음서, 루카 복음서에도 부분 등장.)"라고 말한 것도 이런 불순물 함량이 높은 소금이 많았기 때문. 하지만 그렇다고 먹지 않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