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웹

흔한 이름이긴 한데, 20세기 이후의 미국인 제임스 웹 두 명이 모두 미국 민주당원이자 미합중국 해병대 장교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1번 항목의 제임스 웹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전간기와 2차대전기에 복무했고, 2번 항목의 제임스 웹은 베트남 전쟁기에 복무했다. 다만 1번 항목의 웹이 그냥 평범한 민주당원인 것과 달리 아래의 웹은 공화당이랑 매우 친한 무늬만 민주당원이라는 노선의 차이는 있다. 또한 묘하게도 둘은 각각 동성애자와 여성에 대한 비하 발언을 했다가 흑역사가 잊을만하면 언급되는 공통점도 있다(...)

1 NASA의 제2대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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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스 레이스에서 NASA를 뒷바라지하며 끝끝내 인류를 달에 보낸, NASA의 숨은 영웅

James Edwin Webb
1906년 10월 7일 출생 ~ 1992년 3월 27일 사망

1960년 선거에서 리처드 닉슨이 패배하며 공화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민주당 존 F. 케네디 행정부에게 정권을 넘겼다. 이전 해리 S. 트루먼 행정부 시절부터 관료로 일하며 국무차관까지 지냈다가 정권교체 크리로 야인이 되었던 제임스 웹은 정계에 연줄만 유지한 채로 기업 임원직을 전전했다가 JFK 행정부에서 다시 불려왔는데, 평소 예산을 관리하고 인적 자원을 다루던 그를 케네디는 연구기관에 배정했고, 그 조직이 바로 NASA였다.

사실 피그만 침공, 쿠바 미사일 위기 같은 무시무시한 사건들이 많이 터진 케네디 행정부 초반이었지만, 웹은 전쟁을 치러야 하는 위치에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모종의 이유로 웹은 JFK 행정부 출범 이래 최초로 소련에게 헤드샷을 쳐맞은, 그리고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미국은 스푸트니크 쇼크뱅가드(...) 라이카로도 국가적 위신이 땅에 떨어졌지만, 1961년 4월 12일 이후 미국은 안보 같은 건 둘째치고 전미가 울었다. 이렇게 우주를 향한 소비에트의 행진이 전 지구를 뒤엎으며 웹과 NASA는 케네디 행정부에게 온갖 잔소리를 다 들어야 했고, 그 전까지 나름대로 보스토크 계획에 대한 첩보를 입수하고 대응으로 착실히 준비하던 머큐리 계획은 그냥 콩라인으로 묻혀버렸다(...)

그래도 앨런 셰퍼드거스 그리섬의 탄도비행을 거쳐 존 글렌의 궤도비행을 끝끝내 성공시킨 뒤 글렌을 정계에 입문시키고 케네디가 라이스 대학에서의 그 연설에도 불구하고 허무하게 절명한 뒤 존속이 불투명했던 유인 달 탐사 프로젝트를 계속 이어나가는 데에는 웹이 가장 큰 힘이 되었다. 정치적인 센스가 꽤 괜찮았던 웹은 린든 B. 존슨 행정부에서도 여러 의원들을 상대로 늘 로비를 하고 다녔고, 그런 웹의 로비는 제미니 계획이 진행되면서 진가를 발휘했다. 제미니 프로그램의 필수요소이자 궤도상 미션의 스파링 파트너였던 아지나 표적기가 자꾸 말썽을 일으키고, 제미니 9호 승무원 엘리엇 시와 찰스 배셋의 T-38이 우주선 제작 공장에 추락하여 두 우주비행사가 순직하는 사고도 있었으며, 인류 역사상 최초의 궤도상 우주선 도킹에 성공한 뒤 끔살당할 뻔 했던 제미니 8호 등 여러 사건사고들이 많았지만, 웹이 평소 갈고 닦은 연줄과 말빨 덕에 프로그램의 진행에는 악영향이 없었다.

그러다가 아폴로 계획이 막 시작되면서 벌어진 아폴로 1호 화재 참사로 우주비행사 세 명이 지상에서 허무하게 사망하자, NASA에 대한 비판 여론이 쇄도했다. 민주당에서도 월터 먼데일[1] 등 여러 의원들이 달 탐사 프로젝트를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시기 웹은 자신과 NASA가 투명한 진상조사와 사고방지 대책마련에 힘쓰겠다며 정치권에 확신을 심어줬다. 또한 정치권의 까임공세를 받아내면서도 죄책감을 갖고 있던 NASA 엔지니어들을 챙겨주기도 했다. 아폴로 우주선 개발의 주요 책임자 중 하나였던 조 셰이(Joseph Francis Shea)가 대표적인 사례로, 승무원들이 순직한 뒤 너무 큰 상실감과 죄책감에 시달려서 자살 징후를 보이자(게다가 국회의원들의 전방위 공세에 시달려야 하는 청문회에 출석한다면 정신이 온전치 않았을 것이었기에) 웹은 그를 여러 상담사들과 정신과 의사들에게 보내면서 스트레스 덜 받는 직책(나쁘게 말하면 실권 없는 한직)으로 전보시켰고, 비록 셰이는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아서 NASA를 나갔음에도 웹의 배려 덕에 NASA 관계자들 사이에서 그는 나쁘지 않은 평판을 유지하여 MIT 교수 겸 NASA 자문으로나마 훗날의 ISS 기획에까지 기여할 수 있었다. 또한 웹은 CIA로부터 소련의 N1 로켓 개발 첩보를 전해듣고 베르너 폰 브라운이 제안한 달 궤도비행 미션을 적극 지지하며 1968년 아폴로 8호의 크리스마스를 기획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을 전폭적으로 믿어줬던 LBJ가 재선 출마[2]를 포기하자, 아폴로의 첫 유인 우주비행인 아폴로 7호 발사 얼마 전에 사임하였다. 하지만 온갖 비판을 감당해내며 NASA가 공밀레에 전념할 수 있게 NASA의 방파제 역할을 했던 그의 공로는 아폴로 11호로 결실을 맺었고, 후기 아폴로 미션들이 조기에 마무리되면서 정치력을 발휘해서 예산을 끌어오고 까들을 버로우 태우던 공로가 얼마나 컸던 것인지를 NASA 관계자들은 새삼 깨닫게 되었다. 1992년 사망한 뒤, NASA는 비록 국장으로서 달 착륙에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보여줬던 리더십과 헌신을 기리는 의미로 허블 우주 망원경의 차세대 우주망원경을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으로 명명하였다. 2018년 발사 예정.

흑역사로는 매카시즘이 깽판을 치던 국무차관 재직시절 빨갱이아나키스트 잡는 김에 함께 탄압하던 동성애자들에 대해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많은 이들의 의견"이라며 국무부에서 일하던 동성애자들을 싹 잘라버렸던 전과가 있다. 하기사 그렇게 안하면 자기가 욕먹을 시대였긴 한데, 이후 NASA 역사상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 샐리 라이드가 동성애자였던 것을 생각하면...

2미국 국방부 해군청장, 前 버지니아주 연방 상원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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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Henry "Jim" Webb, Jr.
1946년 2월 9일 출생 ~

1968년 미국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미합중국 해병대 소위로 임관했다. 해군참모총장합참의장을 지내는 마이크 멀린해병대사령관을 지내는 마이클 헤이지, NASA 우주비행사 출신으로 NASA 국장에 오르는 찰스 볼든과 동기이다. 임관년도인 1968년은 베트남 전쟁구정 공세 등으로 점입가경으로 치닫던 시기였으니, 당연히 그의 첫 복무지는 베트남.

아나폴리스 졸업 후 미 해병대 초군반 교육을 마치고 제1해병사단 5연대 1대대에서 소대장으로 복무를 시작한 웹은 종횡무진 전장을 누비며 온갖 험한 교전을 벌인 끝에 해군 십자장과 은성훈장, 2개의 동성훈장을 받은 뒤로 전쟁 영웅이 되었지만 상이기장 퍼플 하트를 두 개나 받을 정도로 큰 부상을 입었고, 결국 해군청장실에서 행정직으로 근무하다가 대위 계급으로 전역했다.

이후 조지타운 대학교 법대를 나온 뒤 백악관에서 보훈 업무에서 일하며 참전용사들에 대한 복지혜택 증대를 추진했다. 해사에서도 자주 초빙되어 강의를 했다. 다만 워싱터니언 매거진에 기재했던 여성 비하성 칼럼(Women Can't Fight)으로 까이기도 했는데, 이는 훗날 그의 발목을 단단히 잡는 흑역사가 되었다.

민주당과 공화당을 막론하고 전쟁영웅을 숭상하는 기조는 동일했던지라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에서도 그는 국방부에서 일할 수 있었다. 1987년에는 해사 출신으로는 최초로 해군청장에 오르는 기록을 썼다. 문민통제가 막강하여 국방부와 3군청장에 웬만하면 군인 출신을 쓰지 않는 미국인지라 사관학교 출신으로 그 자리에 오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이는 지금까지도 굉장히 보기 드문 사례이다. 다만 전임자였던 존 레만이 하이먼 리코버의 강제 전역과 미래 미 해군의 함정 운용 규모를 두고 국방관료들과 벌이던 의견대립이 심해지며 어정쩡한 임기를 남기고 그만두자 그 대타로 투입된 성격이었기 때문에 레이건 행정부가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로 넘어가면서 금방 그만두기는 했다.

이후 199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밥 케리를 지지했지만 아시다시피 이 선거에서는 아칸소 출신의 젊은이가... 그리고 1994년에는 버지니아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찰스 롭을 지지했는데, 이 당시 롭의 경쟁상대인 공화당 후보가 자신의 해사 동기인 올리버 노스[3]여서 말이 좀 있었다. 하지만 2000년에는 공화당의 조지 알렌 후보를 지지하여 당선에 일조했다. 그런데 2006년에는 민주당 소속으로 버지니아에 직접 출마하여 알렌을 버로우 태우고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평소 행적이나 정치적인 행보를 보면 네오콘까진 아니어도 정말 '아니'라고? 공화당이랑 놀면 놀았지 절대 민주당이랑 어울릴 것 같지는 않은 양반이지만 이라크 전쟁을 반대한다는 딱 한 가지 이유로 공화당을 쌩까고 민주당에 입당했다. 좋게 말하면 정당 정치에 얽매이지 않는 소신 있는 싸나이, 나쁘게 말하면 회색분자(...)라서 리버럴 성향의 민주당에서 주류로 떠오를 일은 없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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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고 부시는 가카와 아들 지미와 함께. 지미도 해병대에서 복무했는데, 집안 빽으로 어떻게 학위를 따서 장교로 복무할 수도 있었지만 그냥 이등병으로 입대해서 하사까지 올랐다. 2006년 선거 때는 참전용사들에 대한 경의를 표한다는 취지에서 아들이 이라크에서 신었던 전투화만 신고 다녔다고. 딱히 화기애애한 사진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2008년에는 버락 후세인 오바마가 대선에 출마하면서 러닝메이트로 지명할 것이라는 떡밥이 돌았으나 앞서 언급한 Women can't fight 칼럼 때문에 끝내 발목을 잡혀서 조 바이든에게 자리를 내줬다. 사실 꼭 저 흑역사가 아니더라도 민주당 내 주류와는 몇 광년 쯤 떨어진 인물인데다 결혼을 여러 번 한 전력도 문제가 되었으니 부담이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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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에 미국 상원 동아태소위원장 자격으로 방한하여 이명박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과 회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버지니아 상원의원 임기가 다 될 무렵 재선 불출마를 선언한 뒤, 뜬금없이 201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출마를 선언했다. 충격과 공포... 뭐 2012년 오바마의 재선 이래로 힐러리 로댐 클린턴이 워낙 막강하다보니 큰 효과는 없을 것으로 보이지만 민주당 내에서는 일부에게나마 여전히 큰 호응을 얻는 사람이라서 공화당원들은 내심 힐러리에게 고춧가루를 뿌려달라는 기대를 한다나. 하지만 정작 공화당에서 내보낼 인물이 있던가... 안습

  • 하지만 2015년 10월 13일에 벌어진 제1차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힐러리 클린턴과 버니 샌더스에게 밀려 제대로 말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아 밀려나고 말았다. 시청자들이 기억하는 건 시간을 더 달라고 요청하던 모습 뿐이라 그야말로 안습. 결국 반응이 좋지 않자 20일에 민주당 경선에서 하차하고 필요하면 무소속으로 뛸 것임을 선언했다.

2000년작 영화 룰스 오브 인게이지먼트의 각본가이자 책임 프로듀서로 활동하여 영화 팬들에게도 어느 정도 익숙한 이름이다. 다만 이 영화의 제작 과정에서 각본의 수정을 두고 다른 관계자들과 마찰이 심했다고 전해지며 결국 할리우드 일 못 해먹겠다고 이것만 만들고 영화 일은 그만뒀다.

결혼을 3번 했고, 2005년에 결혼한 현재 부인은 나이차가 상당한 베트남전때 사이공에서 탈출한 난민 출신 여성. 젊고 이쁜 waifu
  1. 지미 카터 행정부의 부통령이다. 이후 로널드 레이건의 재선 도전에서 민주당 대선 후보로 출마했지만 낙선.
  2. LBJ는 JFK가 3년차에 사망하면서 승계하였기 때문에 LBJ의 첫 임기는 절반도 안 된 기간이라 정식 당선 횟수로 인정되지 않았고, 따라서 데이지 걸로 공화당을 관광태웠던 그 선거는 초선으로 카운트되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한 번 더 출마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 때문에 워낙 못 볼 꼴을 많이 봐서 국민 여론이 개판이었던지라 그냥 GG.
  3. 이란-콘트라 사건의 중요 인물이었지만, 자신의 그간 국가에의 헌신을 강조하고 사건 전후의 상황에 대해 알리며 읍소한 결과 더러운 반역자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호불호가 갈리는 선으로 크게 바꾸며 유명인사가 되었다. 해병 중령 예편 후 정치활동에 뛰어들기도 했지만 이 선거에서 물을 먹고는 그냥저냥 저술활동이나 폭스 뉴스 같은데서 방송활동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