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클레망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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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뱅자맹 클레망소(Georges Benjamin Clemenceau) (1841년 9월 28일 ~ 1929년 11월 24일)

1 소개

제 1차 세계대전프랑스연합국의 승리로 만든 1등 공신
하지만 민주주의적 철칙 위배, 인명 경시, 권력 남용으로 인해 독재자로까지 평가받기도 하는 인물이란 것을 좌파란 이유로 또한 산업혁명을 대놓고 무시한 유럽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거의 들어먹는 불운의 인물.

프랑스의 의사, 정치인이자 언론인. 프랑스 제3공화국수상을 지낸 인물이다.

2 생애

열렬한 공화주의자이자 의사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파리에서 의학을 공부, 졸업 및 면허 취득 이후 일찍 정치활동에 투신했다. 동시에 미국 남북전쟁을 경험하고, 이와 같은 현대전이 대세가 될 것임과 산업혁명이 보일 총력전을 인식했다. 초기에는 언론사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다 1870년, 몽마르트(Montmartre)로 유명한 파리 18구 구청장에 당선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언론인 시절 때는 일간지 '오로르(L'Aurore; 새벽)' 지의 사주이자 주필을 겸했다.

정치 초기에 파리 코뮌을 지지하는 등 좌파 성향을 보이긴 했지만 보불전쟁이후로는 군비 증강과 독일에 대한 외교적 고립정책을 강하게 주장하는 등 애국주의적인 성향 또한 강하게 드러내면서 장 조레스등의 사회주의자들과는 일찍부터 멀어졌다. 그러나 드레퓌스 사건 당시 자신이 주필로 있던 신문 '오로르'를 통해 군부와 우익을 비판하고 드레퓌스를 옹호하는 입장에 서는 등 기본적으로는 극우 보수주의자들에도 반대하는 리버럴의 입장에 가까웠다. 그래도 굳이 좌우익을 따지라면 좌익에 가까운 인물이다. 만일 이러한 움직임이 탈력을 받아 드레퓌스가 누명을 당했다는 결론과 프랑스 전체가 그렇게 수용하였다면, 시오니즘이란 괴물같은 나비효과가 없었을 점에서 매우 아쉬운 일이다.

쥘 페리(Jules Ferry)가 국회에서 한 이른바 '문명화의 사명, 계몽의 의무'으로 식민지를 개척해야 한다는 골자의 연설에 대해 '그것은 의무의 이행이 아닌 부정이다' 반박하기도 했다.

에밀 졸라가 1898년 1월 13일 이 신문에 《나는 고발한다(J'accuse…!)》라는 공개서한을 써서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했다. 애초에 이 공개서한의 제목은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아주 소극적 제목이었는데 클레망소가 《나는 고발한다》라고 돌직구적 제목을 바꾸도록 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에밀 졸라, 아나톨 프랑스, 장 조레스 등 지식인 들과 함께 드레퓌스의 결백을 위해 싸웠던 것으로 유명하다. 사실 전쟁은 총력전이 될 것이라 보고, 이러한 근거 없는 행위로 인한 분열을 매우 우려한 점이 같이 참여한 지식인들과 달리, 많았다. 일례로 에펠탑에 대해 당시에는 산업혁명을 느끼지 못 한 프랑스 내에서 많은 반발이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 중에는 알만한 예술가들이 산업혁명이 가져올 새로운 변화를 수용하지 못 하고, 흉물로 취급하였다.

1906년 ~ 1909년 의 1차 집권 뒤 고령으로 인해 사실상 은퇴 상태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17년 11월, 프랑스의 전쟁수행능력이 거의 바닥난 상황에서 76세의 나이로 총리로 컴백. 서부전선페르디낭 포슈앙리 필리프 페탱, 조제프 조프르 등을 중심으로 재정비하고 강력한 전쟁수행 의지를 보이면서 전시내각을 이끌었다. 쉽게 말해서 20여년 후인 2차대전에서 영국의 윈스턴 처칠에 해당하는 역할을 해냈던 셈. 이 점에서 클레망소는 2차대전의 처칠, 포클랜드 전쟁의 마가렛 대처, 걸프전의 조지 허버트 부시 등과 더불어 '전시(戰時) 국가지도자'의 모범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결국 미국의 참전과 함께 서부전선에서 힘의 균형이 무너지고, 마지막 힘까지 쥐어짜낸 독일이 내부 붕괴하면서 1차 대전은 연합국의 승리. 프랑스 수상 클레망소는 베르사유 조약의 연합국 리더 중 하나로 독일에 대한 천문학적 배상과 군사력 억제를 요구해서 관철시켰다. 허나, 이 때에 너무 심하게 배상금을 요구하다고 평가한 이도 있었는데, 그가 바로 베버리지 보고서를 작성하고, 뉴튼이 마지막 연금술사라 대중적으로 알린 경제학자 케인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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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유 조약에 참석한 연합국 정상들과 함께. 왼쪽부터 로이드 조지 영국 수상, 비토리오 올랑도 이탈리아 수상, 클레망소, 우드로우 윌슨 미국 대통령

베르사유 조약 이후 1920년에 완전히 은퇴하여 미국과 영국령 인도 등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평화로운 노후를 보내가다 1929년에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장례는 당연히 국장으로 치뤄졌고, 대통령 레몽 푸앵카레는 특히 슬퍼했다고 한다.

3 프랑스의 스탈린(?)

모범적인 전시 국가지도자라는 점에서 2차대전의 처칠과 공통점이 많아 보이지만, 희한하게도 그를 스탈린과 비교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총리가 되자 정부와 최고사령부의 소극적인 전쟁수행 방식을 매우 비판하였고, 노동자들의 파업 진압을 위해 군대와 경찰을 동원했으며, 1918년 5월, 파리에서 총파업이 일어나자 경찰을 이용하여 모조리 이들을 체포하여 군대에 입대시켜 버렸던 점, 그리고 반대파들을 극형에 처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느닷없이 처벌했던 일 들이 근거. 이는 냉정히 말하면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위배되는 행위였다. 물론 클레망소를 함부로 독재자라 평가할 수는 없겠으나, 클레망소 집권 이후, 프랑스가 자유로운 의견을 내는 데 제한이 생기고, 더 군국주의화된 것도 사실이다.[1]

그가 제1차 세계대전스탈린이니, 프랑스의 스탈린이니 하고 평가받는 것은 그가 좌파이기 때문이다. 클레망소는 정치성향이 급진 좌파라고 해도 무방한 극좌였는데 근데도 전쟁 중에 같은 좌파들을 많이도 때려잡았다 물론 우파도 때려잡았다, 물어볼 필요도 없이 공산주의는 엄연히 극좌에 속하는 사상이다. 근데 같은 극좌인 것도 모자라서, 똑같이 폭압적인 정치운영을 하였으며, 또한 둘 다 똑같이 전자는 1차 대전, 후자는 2차 대전 승전의 주역이니 1차대전과 2차대전을 모두 잘 아는 밀덕이나 역덕들은 두 사람을 자꾸 비교하게 되는 것이다. 참고로 그들은 빌헬름 2세아돌프 히틀러도 자주 비교하곤 한다 게다가 1차대전 때는 프랑스가, 2차대전 때는 소련이 비슷하게 탱커 역할을 했던 점은 덤.

현재로서는 '클레망소=프랑스판 스탈린 설(?)'은 한국 이외의 어떤 국가의 문서에서도 찾아볼수 없는데, 한국의 문헌에도 있는지 의문이다 인터넷 게시글 말고, 책이나 논문같은 걸로 말이다 타국의 구체적인 출처가 있으면 표기바람.

허나, 위에 비교되는 링컨과 스탈린 모두 자국 국경과 접한 세력과의 전쟁이란 점에서 타당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일어나지 않는 것이 제일 좋지만, 터진다면 해야 하는 저주스러운 일.

4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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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을 시찰하는 클레망소)

직접 병사들이 있는 참호를 돌아다니면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기로 유명했다. 이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도 썼던 방법인데, 사실 그 원조는 바로 클레망소. 이를 보고 당시 프랑스에 파병나와 있던 영국군이 "우리 나라 수상도 저랬으면 좋을텐데..."라고 부러운 반응을 보였다고. 그러나 20년 후에는 정 반대의 입장이 되었다

그러나 독일 제국군에게 겁을 집어먹는 병사나 탈영병, 패배주의에 물든 병사에게는 가차 없었다. 1차대전 당시 프랑스 지휘관들에게 퇴각하거나 도망치는 병사는 무조건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도 이 양반이다. 소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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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별명인 '호랑이'에 빗대어 그려진 삽화)

프랑스는 반드시 이 전쟁에서 승리한다! , 끝까지 난 전쟁, 전쟁, 또 전쟁 뿐이다!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그는 호랑이 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는데, 클레망소가 얼마나 대독일 강경책을 주장했고, 또 프랑스의 승리를 위해 힘썼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2]

정치 은퇴 후 한 기자가 "이제까지 만난 정치인 가운데 최악은 누구였습니까?" 하는 질문에 "아직까지 그런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고 대답했는데, 기자가 정말이냐고 되묻자 "이 작자야 말로 최악이라고 생각한 순간 더 최악의 인물이 나타나더군요"(...) 라고 답한 일화가 있다. 4년만 더살아서 히틀러가 총리가 된 다음에 다시물었으면 어땠을까

"전쟁이란 너무나 중요한 것이어서 군인들에게만 맡겨놓을 수 없다(La guerre! C'est une chose trop grave pour la confier à des militaires)"는 그의 말은 군부에 대한 문민통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명언으로 오늘날까지 자주 인용되고 있다.[3]
  1. 그러나 전면전 상황에서 내부결집이 취약한 상태의 국가의 지도자가 이러한 강경책을 쓰는 경우는 드물지 않은게, 당장 크레망소가 참관하였을 남북전쟁을 이끈 링컨만 해도 남북전쟁 기간동안 13,000명의 북부지역 내 반대파와 유화파를 재판 없이 마구 투옥하는 사실상의 독재적 권력을 행사했다. 사실 방어적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전시 민주국가의 지도자가 행하는 강력한 내부통제 행위는 언제나 논쟁거리이긴 하다.
  2. 과거 문서에서 예로 든 조제프 카요와 또 다른 화평파 정치인이었던 루이 말비(Louis Malvy)의 경우 망명 또는 투옥되었지만 각각 1921년과 24년 석방 또는 완전 복권되었고 그 외 공식적으로 극형을 당한 정적은 없다.
  3. 샤를 드 골은 1958년 정계에 복귀하면서 "정치란 너무나 중요한 것이어서 정치인들에게만 맡겨놓을 수 없다"고 클레망소의 원래 발언을 절묘하게 뒤집어놓은 발언으로 자신의 정계복귀를 합리화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