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해리슨

조지 해리슨의 정규 앨범 "George Harrison"에 대해서는 George Harrison(앨범)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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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이름조지 해리슨
GEORGE HARRISON
분야음악
입성날짜2009년 4월 14일
위치1752 Vine Street
M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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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생년월일1943년 2월 25일[1]
신체177~179cm, 64kg, A형
사망2001년 11월 29일

1 개요

천재에 가려진 비운의 남자. 그러나 또 한 명의 분명한 천재 아티스트

2004년 솔로 아티스트로서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올랐으며, 2009년에는 할리우드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빌보드 1위 솔로곡은 Give Me Love(Give Me Peace on Earth), My Sweet Lord/Isn't It a Pity, Got My Mind Set on You 등이 있다.

2 생애

2.1 출생부터 청년기까지

영국의 리버풀에서 태어났으며, 학창 시절에 같은 학교를 다니던 폴 매카트니를 만났고, 폴의 추천으로 1958년 존 레논이 이끌던 쿼리맨에 가입했다. (훗날 세계 대중음악계의 원,투,쓰리 펀치가 될 이들이 손바닥만한 동네에서 한데 살고 있었던 것) 이로써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스튜어트 서트클리프, 피트 베스트의 5인조 밴드가 완성된다.

이후 '더 비틀즈(The Beatles)'로 밴드 이름이 바뀌었다. 스튜어트 서프클리프는 그 뒤 탈퇴한 뒤 사망하고, 피트 베스트는 링고 스타로 교체되어 현재 우리가 아는 비틀즈가 출범한다.

2.2 비틀즈 시절

간지남 시절의 조지 해리슨. 인기 아이돌 그룹 비틀즈의 비주얼 담당인 막내 조지입니다!
기타를 잡고.

초기에는 레논-매카트니와 함께 몇 곡을 작곡했으나, 그 수는 적은 편이었다.[2] . 조지 해리슨은 불세출의 명반 페퍼상사 전후로 갈리는 활동 후반기에도 점진적인 음악적 성장을 보인다. 페퍼상사에서 작곡한 몽환적이고 로맨틱한크리슈나 찬송가 곡 'Within You Without You', 화이트 앨범에 수록된 걸작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등으로 듣보잡 논란을 완벽히 종결시켰다. Abbey Road에서도 'Here Comes The Sun'과 'Something' 같이 주옥같은 명곡들을 수록해 입지를 굳건히 했는데, 특히 'Something'은 존과 폴 못지않은, 앨범 최고의 곡으로 평가받는다![3] Let It Be에도 'I Me Mine', 'For You Blue' 등 조지 특유의 가녀린 목소리에서 흘러나오는 감성이 돋보이는 곡들을 수록한다.[4][5]

조지가 비틀즈 활동 중반기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작곡을 하기 시작한 것은 비틀즈 멤버들 중 최연소자였다는 점도 있겠지만 자신보다 먼저 폴 매카트니와 친했다는 이유로 해리슨을 질투한 존 레논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1958년 의 소개로 조지가 과 마주했을 때, 존은 폴과 1살 차이임에도 조지의 나이를 이유로 들며 그의 가입을 반대했다. (물론 그의 기막힌 기타 실력을 본 직후 바로 태도를 바꿨지만.) 존은 비틀즈가 한참 활동하던 시절에도 조지의 면전에다 '그렇게 앨범에 네가 만든 곡을 싣고 싶으면 비틀즈를 나가서 따로 밴드를 만들던가"라는 말을 했을 정도로 그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1965년부터 조지 해리슨과 존 레논은 '아이돌'이라는 지위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화이트 앨범 세션에 가서 오노 요코를 만나고 이를 해소한 존과는 달리, 조지는 비교적 금방 해결책을 찾아냈다. 바로 종교였다. 원래 비틀즈 멤버들 중에서 가장 현실적인 성격이었던 조지는 영화 Help 촬영 도중 인도 문화와 철학에 매료되었고 얼마 뒤 힌두교의 한 분파인 크리슈나교로 개종하였다.[6] 이후, 자신뿐만 아니라 비틀즈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인도 요기, 구루들과 교류하게 되었으며, 훗날 종교적 가르침에 따라 마약을 끊기도 했다.

조지는 비틀즈 멤버들 중 인도 문화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비틀즈 6집 Rubber Soul의 트랙 'Norwegian Wood'에 서양음악 최초로 시타르 연주를 도입했고,[7] 'Think For Yourself', 'If I Needed Someone'과 같이 사이키델릭하고 나름 독창적인 곡들로 앨범 내에서 상당한 존재감을 나타내기도 했다.[8] 7집 Revolver에서는 당시의 지나쳤던 세금 징수를 비아냥거리는 노래 'Taxman'을 작곡하기도 했다. 명상과 철학에 조지 다음으로 가장 큰 관심을 보인 사람은 역시 존 레논. 훗날 'Sexy Sadie'로 구루를 조롱하고, 'God'에서 '나는 만트라를 믿지 않아', '나는 요가를 믿지 않아'라며 울부짖기는 했지만...

비틀즈 후기에 폴 매카트니와 크게 대립하여 비틀즈를 잠시 나가기도 했다. 비틀즈 해체 이후 링고 스타와 함께 존 레논의 집에 놀러갔을 때 오노 요코가 "4인조 밴드 비틀즈..."라고 말을 하자 폴은 비틀즈의 멤버로 인정하지 않겠다며 "3인조 밴드"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그래도 시간이 지난 후 폴과의 관계는 회복했다. 사이가 소원해진 쪽은 오히려 존 레논이었는데, 70년대 후반 저술한 전기에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끼친 영향을 서술하는 부분에서 존 레논을 누락시켜 버렸다. 존은 이걸 무척 불쾌하게 받아들였고, 살해되기 직전까지 화해조차 하지 못했다. 후에 조지는 (폴도 그랬지만) 존과의 관계를 개선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한으로 여겼다.

비틀즈가 해체하기 전 조지는 솔로 앨범 두 장을 내게 되는데 한장은 영화 Wonderwall의 OST인 'Wonderwall Music'이고얘네가 떠오르면 지는거다.[9] 또 한장은 'Electronic Sound'으로 각각 1968년과 1969년에 발매 되었다. 다만 Electronic Sound는 너무 실험적이라 그냥 묻혔다.[10]

2.3 솔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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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시절의 조지 해리슨. 나이 들어서도 미중년 포스를 낸다.

비틀즈 시절 폴과 존 사이에 존재했던 극도의 유대감 탓에 조지는 밴드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기 어려웠고 이러한 상항에서 멤버들 간의 음악적 이견차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비틀즈는 해체, 조지의 작곡 전선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조지의 활동과 업적은 존과 폴의 업적에 비해 비교적 빛을 못 보였다. 해체 후 그는 힌두교도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인도 음악과 철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솔로 시절 작곡과 가사들에서 그 영향을 알 수 있다.

비틀즈 해체 이후에는 'All Things Must Pass' 등의 음반을 내면서 솔로로 활동했으며, 영화계에서도 활동했다. 비틀즈 멤버중 가장 먼저 솔로곡으로 빌보드 1위를 한것도 조지 해리슨이었다. 가장 좋은 평가를 받는 앨범은 첫 앨범인 'All Things Must Pass'이며, 이 앨범은 무려 3LP나 되는 트리플 앨범이다.(컴필레이션이 아닌, 뮤지션이 낸 최초의 정규 트리플 앨범이다. 물론 CD로는 더블 앨범) 조지의 대표 히트곡 역시 여기서 쏟아져 나왔다.(그러나 이는 1LP~2LP 한정이며, 연주곡으로 가득찬 3LP에 대한 평은 그다지이다. 나쁘진 않지만 굳이 연주곡을 넣어야 할 이유가 있냐는게 중론.) 여기서 우리는 조지가 얼마나 쌓인게 많았는지 알 수 있다. 앨범 수록곡 중 상당수는 비틀즈 시절 작곡한 곡이었다. 어떤 평자는 조지 해리슨을 '비틀스 전설의 당당한 주역이었음을 죽을 때까지 증명해야 했던 희생자'라고 평하기도 했다.

뒤이어 발표한 앨범 'Living in the Material World'도 상업적과 비평적인 면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뒤 이어 발표한 후속작들도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다. 다만 1982년 발표한 'Gone Troppo'가 상업적으로 크게 실패함으로써 잠정적으로 활동을 중단한다.

하지만 5년 뒤인 1987년, 조지 해리슨은 ELO의 리더였던 제프 린과 공동작업을 통해 팝 성향이 강한'Cloud Nine'을 발표하며 다시한번 화려하게 재기한다. 음악적으로도 All Things Must Pass 이후의 최고작품으로 꼽을만한 작품이고, 첫 싱글 Got My Mind Set On You도 히트했다. (편집자 개인의 경험으로 2009년 유럽권에서 여행하다가 핸드폰 벨소리로 이 노래를 두번이나 들었다.)

이후 뚜렷한 음악적 행보를 보이지 않던 조지 해리슨은 밥 딜런, 로이 오비슨, 제프 린 등과 함께 떠돌이 윌버리스 (The Traveling Wilburys)를 결성하여 간헐적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의 최후 작품은 죽은 뒤 발표된 유작 'Brainwashed'이며 다시한번 대중과 평단의 호평을 얻는다. 앨범은 그래미에서 총 3개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고 수록곡 Marwa Blues는 최고의 팝 연주곡 부문에서 수상하였다.

3 개인적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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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해리슨의 유족 올리비아 해리슨과 대니 해리슨. 아들은 아버지를 매우 닮았다. 아주 빼다박아 놓은 정도. 수염을 안 기르면 안 기른 대로, 수염을 기르면 기른 대로 아버지랑 참 많이 닮았다. 그런데 외모 뿐만 아니라 목소리도 굉장히 비슷해서 마치 조지 해리슨이 환생한 듯한 느낌을 준다.

위에서 말했듯 인도 사상에 무척 심취해 있었는데, 이후에는 아예 힌두교로 개종하고 담배[11]를 끊었다. 간간히 인도 음악을 작곡하고[12] 장례까지 인도식으로 치를 정도면 말 다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모터 스포츠의 열성팬이였고, 비틀즈 해체 후에는 더 적극적으로 경기를 관전하러 다녔으며, 레이싱을 모티브로 한 "Faster"라는 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니키 라우다 등의 레이서와 친분이 있어서 직접 레이스에 참여한 경력도 있다. 데이먼 힐과도 친분이 있어 F3에 참가할때, 출천 자금이 부족했던 데이먼을 지원해줬는데, 훗날 그가 F1월드 챔피언이 되었을 때, 지원금을 돌려주려고 하자 웃으며 거절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대인배...

에릭 클랩튼과는 절친한 친구로 'While My Guitar Gently Weeps'의 기타는 그가 연주해 주었으며, 조지 해리슨 추모 공연 때도 그 곡을 연주했다. 그러나 조지 해리슨의 연인이었던 패티 보이드를 사이에 놓고 벌인 삼각 관계로도 유명하다.

10대 후반부터 모델로 활동 중이던 패티 보이드는 비틀즈의 첫 영화 A Hard Day's Night에 캐스팅 되면서 조지 해리슨을 처음 만났다. 패티에게 반한 해리슨이 먼저 대쉬를 했는데 처음에는 이미 오랫동안 사귄 남자친구인 Eric Swayne이 있었기에 거절을 했으나 조지는 패티가 비틀즈의 팬이라는 점을 이용해 패티에게 계속 사랑을 고백했고 비틀즈의 팬이었던 패티는 결국 남자친구와 결별한 다음 조지 해리슨에게 다시 찾아가서 교제하게 된다.

하지만 조지는 비틀매니아 시절에는 다른 여성들과 대놓고 바람을 폈고, 투어를 중단하고 본격적으로 인도 사상에 심취한 이후로는 인도 사상에만 몰두하며 패티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사실 이때도 조지는 버릇을 못버리고 바람을 피웠다는게 함정. 종교는 종교고 바람은 바람이냐) 게다가 인도 사상도 당시 마음 고생하던 조지를 위해 패티가 소개시켜준 것이다. (크리슈나교로 먼저 개종한 것도 패티였다.) 패티는 이렇게까지 조지가 종교에 심취할지 몰랐던 것. 패티와 싸울 때면 조지는 패티가 아이를 가지지 못한다는 이유를 들며 그녀를 압박했다고 한다. (크리슈나교는 불임한 여성과의, 즉 아이를 갖기위함이 아닌 쾌락을 위한 성관계를 일체 금지한다. 그런데 바람은 왜...? 애를 그렇게라도 낳고 싶었나) 가정을 돌보지 않는 조지의 마음을 돌리고자 패티는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에릭 클랩튼과 친분을 쌓고 어울린다. 그런데 에릭이 정말로 패티에게 반해 버리고 조지가 자신에게 관심을 쏟게 하려고 했던 의도밖에 없던 패티는 당황했다고 한다.

조지는 에릭과 패티의 관계를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알고 난 후에도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고 오히려 한 술 더떠서 패티와 마찬가지로 비틀즈의 팬에서 멤버와 결혼에 골인한 링고 스타의 아내인 모린 콕스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 (이때 링고는 우울증알코올 중독 상태였고 모린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조지는 부부 침실에서 모린과 꽁냥거렸고 모린은 링고 앞에서 대놓고 조지가 선물한 목걸이를 매고 돌아다녔다. 마침내는 조지와 모린이 링고와 패티를 불러내어 두 사람이 사귀고 있다는 고백까지 한다. 조지와 모린의 관계를 알게된 링고는 모린과 이혼했고[13] 일련의 과정에서 매우 큰 충격과 상처를 받은 패티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하는 에릭 클랩튼에게 가게된다.

이 과정에서 에릭 클랩튼은 'Wonderful Tonight', 'Layla' 등의 곡을 내놓으며[14]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막상 패티와 결혼하고나자 결혼 전이나 후나 똑같이 계속 바람을 피우고 술을 마시고 마약을 했으며, 패티가 아이를 낳지못한다는 사실을 알자 밖에서 사생아를 둘이나 데려왔다. 결국 또 다시 상처를 받은 패티는 에릭과 이혼한다.

심지어 에릭은 나중에 자기 자서전에 패티를 원했던 건 그저 조지 해리슨이 질투났기 때문이다. 조지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 훌륭한 차와 믿기지않는 경력, 그리고 아름다운 아내 등 모든 것을 가지고 있고, 그저 패티는 그 모든걸 갖고있는 남자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패티를 탐냈다. 이는 감성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전혀 새로운 면이었다. 예전의 나는 내것보다 훨씬 비싼 장난감을 갖고 있는 이복형의 장난감을 탐내했다. 이게 내가 패티에 대한 감정과 정확히 같았을 것."이라고 저술하며 진정한 상똥차의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이후 패티는 오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했으며, 최근에는 알코올 중독자와 마약 중독자를 위한 자선 사업을 펼치고 있다. 막장드라마 며느리 뺨치게 불쌍하다. 뭔가 위대한 여성이다.

저번 서프라이즈 방송에서는 조지 해리슨과 패티 보이드, 에릭 클랩튼 삼각관계를 다뤘었는데 방송에서 위의 내용은 전혀 다루지않고 패티를 오노 요코 수준으로 몰아가며 왜곡된 방송을 했지만[15] 이는 사실이 아니다. 조지 해리슨과 에릭 클랩튼은 패티 보이드에게는 천하의 개쌍놈들 매우 나쁜 남자들이었고 똥차들 진실을 알고있는 비틀즈 팬들은 패티를 매우 안타까워 하고 있다.

조지 해리슨은 후에 올리비아 아리아스와 재혼. 아들 하나를 두었다. 아들의 이름은 대니 해리슨. 아버지를 상당히 닮았고,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아 가장 젊은 영국 20대 부자들 순위에 자주 랭크되기도 했었다. 이젠 다니도 30대로..

비틀즈 해체 후 첫 앨범 'All Things Must Pass'를 발표했는데, 거기에 실린 'My Sweet Lord'가 싱글차트에서 4주간 넘버원을 기록하는 등 잘나가고 있었는데, 이 곡이 시폰즈의 'He's so Fine'을 표절했다는 소송에 휘말렸다. 자세한 내용은 All Things Must Pass 항목 참조.

사이먼 앤 가펑클폴 사이먼과 친분이 깊었다. 제3세계의 문화에 대해서 애착을 가졌던 점이 유대관계를 가지게 만든 계기였다. 조지 해리슨은 인도의 문화에, 폴 사이먼은 중남미의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1999년 12월 28일 천하의 개쌍놈괴한의 침입으로 칼에 가슴부위를 찔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큰 부상을 입지 않고 퇴원하지만 이 사건은 조지의 건강에 영향을 줬고, 그의 죽음을 앞당기는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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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마지막 사진.

2001년 폐암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시신은 인도식으로 화장해 갠지스 강에 뿌려졌다고 한다. 에릭 클랩튼이 그의 추모 공연인 Concert for George를 기획했으며, 이 공연에는 비틀즈 멤버였던 폴 매카트니링고 스타를 포함해, 생전에 친분이 있었던 많은 유명 아티스트들이 참석했다.

2011년에는 그의 명곡 "While My Guitar Gently Weeps"가 멕시코 출신 기타리스트 산타나에 의해 리메이크되어 발표되기도 하였다.

2012년 조지 해리슨의 삶과 음악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Living in the Material World'가 개봉되었다. 국내에서는 그냥 "조지 해리슨"이란 제목으로 개봉하였다.

조지는 말년에 캐나다인 코미디언 마이크 마이어스#s-2의 팬이 되었다고 한다. 조지는 죽기 전날 마이어스에게 "미니 미가 너무 재미있어서 유럽을 돌아다니는 내내 미니 미 인형을 들고 다녔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는데, 마이어스가 나중에 그 편지를 받고 엉엉 울었다고 한다.

일부 한국인들은 한국귀화설을 제기하기도 했다.[16]

4 디스코그래피

  1. 기록에 따라서는 2월 24일로 되어있는 곳도 있다. 생전 빌보드지 인터뷰에 따르면 24일 밤에 태어났다고. 일단 공식 문서상 생일은 2월 25일이다.
  2. 최초로 작곡한 곡은 2집 With The Beatles에 수록된 'Don't Bother Me'. 처녀작치고는 무척 고퀄이지만, 어디까지나 존과 폴의 영향을 받아 작곡한 아류작. 훗날 조지 자신도 이 곡을 혹평한다. 그러나 이후 그가 보여준 행보는 그야말로 월취월장, 청출어람.
  3. 'Something'에 대한 프랭크 시내트라의 반응은, '가장 아름다운 레논-매카트니 발라드'(...) 여기에 대한 폴의 반응이 "고마워요, 프랭크"로 걸작이다. 존과 폴 역시 'Something'의 진가를 시원하게 인정한다. 링고도 뒤에서 나름 기뻐했다고.
  4. 여담이지만 'I Me Mine'은 존 레논을 제외한 비틀즈 멤버들이 작업한 곡이다.
  5. 그런데 사실 조지 해리슨은 원래 가녀린 목소리가 아닌 굵직한 목소리였다. 당장 초기 곡인 'Don't Bother Me'나 'I'm Happy Just Dance with You'만 들어봐도 굵직한 목소리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1967년 'Within You Without You'를 기점으로 비음을 가미한 창법으로 변화를 주었다.
  6. 조지는 허울좋은 천주교계였다고 한다. 부모님들의 종교적 강압은 딱히 없었다고.
  7. 사실 이 곡의 작곡자는 존 레논이며, 새로운 방식의 사운드를 표현할 악기를 찾다가 당시 라비 샹카라는 시타르 연주가의 음반을 통해 처음 시타르를 접한 이후 시타르를 배우고 있던 조지 해리슨에게 연주를 권하면서 사운드가 완성된 것이다. 이후 비틀즈 앨범에서 나오는 시타연주에 비해 이 당시 해리슨의 연주가 어디까지나 비교적 설익은 느낌을 주는 것은 이런 과정으로 만들어진 노래이기 때문이다.
  8. 이 두 곡은 1965년작 러버 소울 음반 참여곡들이다.
  9. 아마 실제로 그걸 모티브로 해서 만든 밴드명 맞기는 할텐데?? 그리고 음반 들어보면 느끼겠지만 굳이 가장 비슷한 사운드의 곡을 꼽으라면 조지 해리슨의 솔로앨범 수록곡 Wah-Wah가 떠오를 테고...
  10. 앨범명에서 알 수 있듯이 신디사이저를 이용해 전자음을 만들었는데 너무 실험에 치중한 앨범이라 묻혔다. 빌보드 Hot 200에서는 191위에 오르며 간신히 턱걸이를 하였고 UK차트엔 오르지조차 못했다.
  11. 담배는 97년에서야 비로소 완벽하게 끊었다고 한다. 여기서 담배의 중독성을 더욱 깨달을 수 있다. 조지는 말년에 담배 때문에 인후두염과 폐암에 걸렸다. 결국 폐암으로 숨진다.
  12. Love You To, Within You Without You, The Inner Light 등등
  13. 모린은 링고에게 자신은 링고를 많이 사랑하고 있으며 이혼은 안된다고 애걸복걸 했다고 한다.
  14. 'Layla'의 가사만 보면 에릭 클랩튼은 말 그대로 애걸복걸하고 있다. 결국 패티가 오랜 망설임 끝에 에릭의 구애를 받아주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15. 여담이지만 왜곡은 서프라이즈 방송의 주특기이다. 그 이전에는 폴 매카트니의 사망설이 신빙성 있는 설인 것처럼 묘사했고 이후에는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가 앙숙이라도 되는 것 마냥 방송했으며, 비단 비틀즈뿐만이 아니라 퀸과 닥터후 등도 왜곡된 내용들로 방송해서 덕후들의 분노섞인 욕을 먹었다. 오죽하면 서프라이즈 작가쪽에 소설가라도 있냐는 말까지 나올정도. 왜곡이 아니라 그냥 멍청한 거다
  16. 배철수와 조지 해리슨이 닮았다는 데서 나온 드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