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중국대사관

22px-Flag_of_South_Korea.svg.png 대한민국 내의 주요 외교공관
주한미국대사관주한중국대사관주한일본대사관주한러시아대사관
주한영국대사관주한독일대사관주한프랑스대사관주한이탈리아대사관
주한캐나다대사관주한인도대사관주한베트남대사관주한브라질대사관
주한호주대사관주한터키대사관주한스페인대사관주한인도네시아대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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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는 원래 중화민국이 쓰던 걸 그대로 쓰다가 업무량 증가 등으로 인해 대규모로 재건축했다. 중화민국 시절에 화교는 많아야 5만 남짓이지만 지금 한국엔 중국인이 100만에 가까우니...그리고 옛 청사의 모습은 한국-대만 관계 문서를 참고하길.
홈페이지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대한민국에 설치한 외교공관.

2 역사

전통적인 사대관계 외에 한반도 국가와 중국대륙에 위치한 국가의 관계는 1882년에 조선청나라가 근대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면서 시작되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면서 청나라의 영향력은 급속히 약화되었고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인해 조선과 청의 외교관계는 끊어졌다. 1912년에 중화민국이 들어서면서 중화민국과 일본의 외교관계로 서울과 평양 등에 영사관이 설치되었다. 당시에는 어디까지나 주일중화민국대사관의 영사였다. 그러던 것이 한국이 독립하면서 외교관계가 새로 복원되었다. 정부 수립 직전인 1948년 8월 13일에 초대 중화민국 대사 류위완이 방한해 친서를 전달했고 중화민국은 대한민국이 처음으로 외교관계를 맺은 나라였다. 1948년 11월에 이승만 대통령은 특사를 파견하였으나 당시 중국은 국공내전이 한창이었다. 난징에 특사관을 설치했다. 1949년 1월 4일 중화민국은 미국(1월 1일)에 이어 대한민국을 국가로 인정하였다. 이로 인해 이미 운영중이던 주대한민국중화민국대사관이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1949년 4월 21일에 난징에 있던 한국대사관은 광저우로 옮겼다. 4월 23일 난징은 함락되었다. 중화민국 정부는 호텔을 빌려 대사관을 운영할 수 있게 해줬다. 참사관이 상하이 총영사가 교포 피난 업무를 제대로 하지 않고 대만으로 도망간 것을 해결하기 위해 상하이로 파견간 탓에 1등서기관이 대사 업무를 맡았다. 국부천대가 이뤄지자 한국 대사관도 따라 움직였고 한국 대사관의 이동거리는 1만 킬로미터에 이른다.

냉전 시기에는 중화민국과 대한민국은 외교상 중요한 관계였다. 프랑스가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했고 1970년대 들어서 일본미국마저 중화민국과 외교관계를 단절하면서 한국만이 중화민국의 외교관계에서 남은 메이저 국가였다.

1992년에 대한민국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면서 서울 명동에 있던 중화민국 대사관 자리를 그대로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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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가는 중화민국 국기. 중국과의 수교가 정식으로 맺어지기 일주일 전인 1992년 8월 15일. 결국 한국은 대만 대사를 소환해 비공식적으로 중국과의 수교 사실, 대만과의 단교계획을 밝힌다. 그리고 21일 공식적으로 대만에게 단교문서를 전달했다. 그리고 중국과의 수교를 맺은 24일, 대만 대사관에 72시간 내에 국기와 현판을 내리고 철수해줄 것을 요구했고, 이후 대만 대사관은 6시간만에 국기하강식을 갖고 한국을 떠났다. 이렇게 써놓으면 굉장히 잔인한 얘기 같지만 다른 나라들은 물 끊고 전기 끊고 경찰 인력 투입해서 강제 퇴거시킨 사례도 있고 미국은 편의 봐주다가[1] 중국에게 중국내 자산 동결 같은 보복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중화민국은 다른 곳(서울시 종로구 세종대로 149)에 주한 타이베이 대표부를 설치했다

주한중국대사관은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2길 27에 위치한다.

3 영사관

부산광역시, 광주광역시, 제주특별자치도에 총영사관이 있다. 이 중 주 부산 총영사관은 과거 중화민국 영사관이었던 것을 한중수교 때 접수한 것이고[2] 주 광주 총영사관과 주 제주 총영사관은 처음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이 설치한 것이다.

4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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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기준으로 추궈홍 대사이다. 1957년 상하이에서 태어났으며 상하이외국어대학을 졸업한 뒤 1981년에 중국 외교부에 입직했다.

4.1 역대 공사 및 대사

대청제국출사 한국흠차대신

  • 서수붕(徐壽朋) 1898~1901
  • 허태신(許台身) 1901~1904
  • 증광전(曾廣銓) 1904~1905

중화민국 주대한민국 특명전권대사

  • 샤오위린(邵毓麟 소육린) 1949~1951
  • 왕동위안(王東原 왕동원) 1951~1961
  • 류위완(劉馭萬 유어만) 1961~1964
  • 량쉬자오(梁序昭 양서소) 1964~1967
  • 탕중(唐縱 당종) 1967~1970
  • 뤄잉더(羅英德 나영덕) 1970~1975
  • 주우쑹(朱撫松 주무송) 1975~1979
  • 딩마오스(丁懋時 정무시) 1979~1982
  • 쉐위치(薛毓麒 설육기) 1981~1987
  • 저우진(鄒堅 추견) 1987~1990
  • 진수지(金樹基 김수기) 1990~1992

중화인민공화국 재대한민국 특명전권대사

  • 장딩옌(张庭延 장정연) 1992~1998
  • 우다웨이(武大伟 무대위) 1998~2001
  • 리빈(李滨 이빈) 2001~2005
  • 닝푸쿠이(宁赋魁 영부괴) 2005~2008
  • 청융화(程永华 정영화) 2008~2010
  • 장신썬(张鑫森 장흠삼) 2010~2013
  • 추궈홍(邱國洪 구국홍) 2014~

4.2 국방무관

국방무관의 경우 소장이 온다. 수행무관들은 교관급 장교들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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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중국 인민해방군 건군 87주년 행사에 두농이 소장.[3] 대사관측은 두농이의 계급을 소장이라 적었고 계급장도 소장 계급장을 달고 있는데, 국방정보본부에선 두농이를 대교라고 적었는데 한국에서 주재 중에 진급한 것인지 오류인지는 불명.

4.3 그외

중화민국대사관 시절부터 이 대사관 주변거리에는 서울에서 유명한 수입서적 딜러가 밀집되어있어서 각종 분야에서 원서를 찾는 이들의 요람이 되었다. 또한 한국의 1세대 오타쿠(수도권 거주자 한정)들이 일본 서브컬쳐 관련해서 원서를 찾으러 가는 루트이기도 했다.
  1. 대사관을 중국한테 안 주고 대만 단체에게 매각해 기념관 등으로 쓰일 수 있게 해줬다.
  2. 대만은 이로부터 몇 년 후에 다른 곳에 주한타이베이대표부 관할 부산사무처를 설치
  3. 각국 대사관은 자국의 건군 행사를 대사관에서 연다. 군사외교에서 중요하기 때문. 2014년에 자위대 창대 60주년 당시에 주한일본대사관은 롯데호텔에서 행사를 크게 진행하려다가 한국의 반발에 부딪혀 대사관에서 행사를 진행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