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만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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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한국-터키 관계한국-베네수엘라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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舊 주한 중화민국(대만)대사관.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 소재. 단교 이후에는 중국 대사관으로 쓰다가 재건축해서 새 건물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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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주한 중화민국 대사 진수지(金樹基). 한중수교 및 중화민국과의 국교단절 당시, 청천백일만지홍기를 대사관에서 내릴 때 발언이다. 이 국기는 우리 마음 속에 건다. 나라 잃은 설움과 비교할 수 있는데, 실제로 당시 중화민국 국적화교들이 눈물로 진 대사를 배웅했으며, 일부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거리에 나가 한국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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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내려가는 청천백일기. 관련기사 당시 중화민국 외교부에서 비난 성명을 발표했으나 대세는 막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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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청천백일만지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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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대만 한국 대표부 홈페이지

1 개요

중화민국은 청나라 이후 2차대전 때까지 중국 대륙을 지배했던 정부였다. 과거 일제강점기 중화민국 정부(중국 국민당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으며, 현재 대만이 위치한 타이완 섬 자체는 중국의 지배를 받다가 청일전쟁 이후로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었다. 중화민국 역시 중국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동안 중일전쟁 등 일본에게 제국주의 침탈을 겪은 나라여서, 한국과 비슷한 점이 많다. 일제통치 시절의 이런 인연으로 중화민국은 1948년 대한민국과 최초로 수교한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2차대전이 끝난 후 마오쩌둥장제스를 쓰러뜨리며 중화민국은 타이완 섬으로 쫓겨나고 중국 대륙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배 하에 놓이며 공산주의 국가로 변했다. 냉전 시절에는 신생 공산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북한에 대항, 진해에서 이승만장개석이 아시아반공연맹을 창설할 정도로 반공주의의 선두에 섰다. 그러나 1992년, 냉전이 종식되고, 노태우 정부의 이른바 북방정책이 박차를 가함에 따라 한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교하며 맹방관계도 끝장났다.

2 역사

2.1 1990년대 이전의 관계

과거 타이완 섬(대만 섬)은 각종 유럽 국가의 지배를 받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기간은 중국 청나라의 지배에 놓인 땅이었다. 그러나 중일전쟁 이후 타이완 섬은 일본 제국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일제 패망 이후, 한국은 독립했고, 대만은 승전국이었던 중화민국에 반환되었다. 그래서 다시 중국 땅이 되긴 했지만, 당시 중국은 2개의 정부가 서로 싸우던 상황이었고, 2차대전 당시까지의 중국 지배자였던 장제스가 라이벌 마오쩌둥에게 패배하여 타이완 섬으로 피신한 후, 중국 대륙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배 하에 놓이고, 도망친 장제스의 중화민국이 대만 섬을 장악하면서 애매한 상태가 되어버린다.

중화민국의 경우 청나라 멸망 이후 중국을 지배한 국가였다. 장개석 정권 때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해 주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의 뒤처리에서 연합국의 일원으로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였다.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수교한 첫번째 국가가 바로 중화민국이었다. 그런데 국공내전 이후 장제스는 공산당 마오쩌둥에게 패배하여 중화민국 정부가 대만으로 옮겨갔고, 대륙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져 중화민국과 분리되었다. 대한민국의 외교공관도 중화민국의 수도인 난징에 있었다가, 중화민국 정부를 따라 타이베이로 옮겼다. 결국 한국과 마찬가지로 국토일부가 공산당에 점령당한 분단국가가 되었기에, 반공동지로서 유대감을 가져 사이가 꽤 좋은 편이었고 군사적인 면에서 교류도 상당부분 있었다. 대만은 한국과 달리 비율이 흠좀무스러워서 그렇지 엄연한 분단국가다. 실제로 대한민국의 화교는 출신상으로는 산동성 출신이 대다수를 차지하나, 대부분이 중화민국 국적을 갖고 있다.

그러나 수교 때도 국가적인 관계는 모를까 국민의 정서적인 부분에서는 크게 친밀하거나 사이가 나빴다고 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으며, 단교 이후에는 데면데면한 것에 가깝다.듣보잡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한국은 '대만'과 수교를 한 적이 없다. 한국은 단지 중국(중화민국)과 수교를 했고, 중화민국 정부가 타이베이로 옮겨간 후 그 외교 관계를 유지했을 뿐이다. 1992년 이후엔 주중대사관이 타이베이에서 베이징으로 옮긴셈이지만 2012년에 한중수교 20년을 기념하는걸 보면 또 그게 아니고

중화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에 외교관계를 맺었고 그 외교관계를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는 나라는 바티칸파나마 등 얼마 안된다. 중화민국의 수교국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에 중화민국과 수교했거나, 단교했거나, 둘 중 하나다. 이를 구별해야 하는 이유가, 구별하지 않는다면 한국은 '중국'과 처음 수교한 뒤에, 수교하지도 않았던 '대만'이라는 나라와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했다 라는 흠좀무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중화민국의 후계국가로 아직까지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국제연합(UN)은 1971년 이래 중화인민공화국을 중화민국의 후계국가로 인정하며 지금의 중화민국을 따로 인정하지 않는다. 미국은 1979년 이전의 대만수교사를 미중관계에 집어넣고 1979년 이후의 관계는 따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1992년 수교로 기록했으며, 1948년 수교한 중화민국과 단교함으로써 그 외교관계가 끝났다고 설명한다. 즉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외교관계가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반증한다. 다만 이것은 중화인민공화국 측의 입장을 반영한 것 때문일 수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각국과의 수교 연표를 작성할 때 자신의 전신(이라 주장하는) 중화민국과 해당국간의 관계는 전혀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교 몇 년 기념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의 관계만 따진다. 한국은 일부 국가에 대해서는 대한민국의 수교 시기가 아닌 조선 왕조대한제국 시기 때로 한다. 예를 들으면 한미수교 백주년 행사는 1882년 조선과 미국의 수교 조약을 기준으로 했다. 영국과의 수교 기준점도 1880년으로 잡는다. 그래서 2010년한영수교 130주년이었다.

반면 한러수교 20주년 기념 행사는 1884년 조선과 러시아 제국의 조러수교가 아닌 1990년 대한민국과 소련의 수교를 기준으로 했다. 이후 1991년 소련이 해체됐을때 러시아를 소련의 후계국으로 인정해서 별다른 수교절차 없이 계속 외교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반면 구소련의 다른 구성국가들은 독립 시점에 맞춰서 따로 국가승인과 수교 절차를 밣았다.

다만 2번의 국가체제 변혁(러시아 제국→소련→러시아 연방)을 거친 러시아와 달리, 미국과 영국 같은 경우 과거 조선과 수교를 맺을 때나 지금이나 국가체제의 변경이 전혀 없는 나라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즉 정부구조만 바뀐 것은 이어졌다고 본다. 2차대전 후 공화국이 된 이탈리아와의 수교 연도는 조선이 이탈리아 왕국과 수교를 맺은 1884년이다. 그런데 이것도 완전히 성립하지는 않는 것이 덴마크1902년 대한제국과 수교를 맺을 때나 지금이나 동일한 왕조를 유지 중임에도 수교 연도는 1959년으로 잡고 있다.

또 다른 이유로는 러시아와 중화인민공화국이 한국을 적대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러시아와 중공은 과거엔 명백히 대한민국을 포함한 서방진영의 적대 공산국가였다. 북한을 도와 6.25 전쟁이 일어나게 한데다, 직접 중화인민공화국이 이 전쟁에 참전하여 국군과 미군과 전쟁을 했으니 더 말할 것이 없다. 이는 기존의 수교 자체가 있었어도 무효화될 수준의 사건으로, 기존의 국가와 조약을 맺었어도 적대국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재정립하고 새로이 수교를 맺은 시기를 수교의 기준으로 보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같은 사례로는 2015년 기준으로 한일 수교 50주년이 있다. 기사 참조. 한일 국회의 의원들 차원에서 수교 50주년 기념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을 기준으로 둔 것이다. 원칙적으로 '수교'의 기준을 근대적 조약으로 보면 1876년 강화도 조약을 기준으로 두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 이전의 한국은 이념 사상이고 국제관례의 입장이고 뭐고 다 집어 치우고 일본을 '식민 지배의 원수'이자 '적대국'으로 보았기 때문이며 일제의 침략으로 강화도 조약 당시의 조약관계가 무효화 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후 한일기본조약을 통해 적대국 관계에서 기존의 모든 조약을 효력 정지하며 수교 관계를 재정립하게 되었으니 1965년이 한일 수교의 기준이 된 것이다.

한국과 중화민국의 군부 및 정계 지도자 중에는 옛 일본육군사관학교 혹은 황포군관학교 등의 동창, 동문들이 많았다.[2].[3] 과거 예편한 국군 고위 장성이 가는 곳이 중화민국 대사인 이유가, 일본육군사관학교나 황포군관학교 동기들을 통한 중화민국과의 친교 확대문제라고 보는 시선도 있었다. 실제로 육군 대장 출신으로 중화민국 대사를 역임했던 정일권이 주요 대만통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역대 중화민국 대사들을 보면, 김홍일, 최용덕, 김신 등 옛 국부군에서 교육받거나 복무한 광복군 출신 고위 장성들이 주로 역임하였다. 특히 김홍일(1951~60), 김신(1962~70)의 경우 이례적이라 할만큼 장기간 재임하였다. 즉 군부 인사의 학연을 통한 친교확대라기보다, 광복군 및 국부군 출신 한국인과 중국 국민당 간의 밀접한 관계를 통한 친교가 핵심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당시 중화민국은 미국 다음으로 가는 우방국이었으므로, 무게감 있는 인물을 대사로 파견하는 것이 관례적 일이었다. 당시 신생국가였던 대한민국에서 엘리트 계층은 단연 군인이었다. 군사정변 직전 기준으로, 해외 교육 및 연수 경험자가 외무부보다 국방부에 더 많았다. 흠좀무(...) 정일권 뿐 아니라 백선엽, 유재흥 등 중장 이상의 고위 장성들은 세계 각지의 대사로 파견되었다. 지금도 레바논 등 분쟁지역 국가의 대사들에 군 장성 출신들이 임명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국교단절 전까지 한국에게 중국 = 대만(중화민국)이었고, 대만으로 중국어를 배우러 유학가는 경우도 많았다. 중국 관련 학과, 특히 중국어나 동양철학 전공 선생님들의 경우 2000년대 기준으로 대다수가 대만 유학파 출신이었다. 중국 유학파들은 한중수교 이후 세대들.

한국의 1970년대의 백과사전에서 '국기' 항목을 찾으면 세계의 국기가 쭉 나오는데 거기엔 청천백일기가 나오고 밑에 중국이라 적힌 사례도 흔했다. 도올 김용옥이 자신의 논어 해설 저서에 대만 유학 경험을 써놨는데 대만을 그냥 중국으로 부르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보면 중화인민공화국으로 간 줄로 착각하기가 쉽다(...).

냉전 시대, 한국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공이라는 비칭[4]으로 불렸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중국'이라고 하면 '중화민국', 즉 대만을 일컫는 말이었다. 중공과 확실하게 구별하기 위해서 대만을 '자유중국'으로 칭하고,48년간 자유선거도 없이 계엄령으로 통치한 나라가 자유(...).[5] 대륙의 중공 정권은 그냥 '중공', '공산중국'으로 지칭하기도 했다. 1공화국 시절엔 '국부중국'이라고 부를 때도 있었다. 물론 지리적 명칭인 대만/타이완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긴 했으나, '자유중국' 혹은 정식 국명인 '중화민국'으로 호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80년대 후반부터 단교 직전까지, 대한민국은 중화민국에게 있어 엄청난 귀빈이었다. 일단 동북아시아에선 일본 다음으로 존재감이 크기도 하고(...)일본 중국 제외하면 동북아시아에 나라도 별로 없었잖어 실제로 중화민국과 수교한 국가 중에서 가장 큰 나라였다. 단교 직전인 1990년 기준으로, 서울에는 미국, 소련, 프랑스, 서독, 영국, 일본 등 이른바 세계 열강의 대사급 외교관이 상주하여, 중화민국 외교관이 대사 자격으로, 강대국 대사들과 대등하게 접촉하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중공에 밀려 수교국을 대거 상실한 다른 나라에선, 중화민국 외교관은 중화민국 대사가 아니라 타이베이 대표일 뿐이었기에.[6]

아무튼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은 이토록 친밀했지만 1971년, 중화민국이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와 전 중국의 대표자격을 빼앗기며 유엔에서 추방당할 때(대만축출)는 도움을 주지 못했다. 당시 한국은 공산권의 반대로 참관국(옵저버)이었을 뿐, 가맹국이 아니라 반대표를 던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가맹국이 됐더라도 워낙 스코어 격차가 커서 큰 도움은 되지 못했겠지만. 그리고 이제 대만은 참관도 못한다(...)

유엔의 중화민국[7] 축출은 월남의 멸망과 함께 한국에 상당한 충격을 주어서, 나중에 10월 유신을 단행하는데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왜냐하면 한국 입장에선 북한의 동맹국인 '중공'이 가입했으니 정전협정 무효화→북한정권 승인 및 대한민국 불인정→정전협정 파기→적화통일->profit!!!로 이어지는 게 아니냐는 불안감이 나돌기도 했기 때문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김일성덩샤오핑이 아니었고, 북한은 중국만큼 대국이 되지 못하었다.

2.2 단교

2.2.1 과정

한·중 외교관계 수립으로 …(중략)… 대만은 이번에 세 번째 타격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는 1971년 유엔에서 쫓겨난 것이고, 두 번째가 미중 수교, 세 번째가 한중 수교라는 것입니다. - 첸지천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장의 국제정세 문제에 관한 연설(’92. 09. 05.)

그러다가 1988년에 출범한 노태우 정부가 공산권과 외교 관계 개선에 적극 나서면서 한국-중국 및 한국-대만 관계에 변화의 기류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소위 북방정책으로 표현되는 이러한 외교 노선에 따라 한국은 헝가리,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동구권 국가들과 수교한 데 이어 1990년 10월에는 공산주의의 종주국 소련과 수교함으로써 북방정책의 정점을 찍게 된다.[8] 이제 북방정책의 마무리라 할 수 있는 한중수교를 남겨 놓은 가운데, 1991년에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단장으로 한 대규모 민간 사절단이 중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게다가 1990년을 전후하여 이미 상당한 양의 중국산 농산물이나 제품들이 국내 시장에 유통되기 시작했고,[9] 중국에서도 한국제 상품이 시판되는 등 경제적 교류는 이미 상당 부분 진척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급증하는 한중간 경제, 민간 교류와 별개로 양국의 수교 문제는 1991년까지만 해도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었는데 이는 양국이 북한과 대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중국은 한국과 수교할 경우 이에 반발한 북한이 친소로 기울어질 것을 염려하여 한중 수교에 미온적이었는데, 1991년 8월 쿠데타 이후 소련이 급속히 와해되면서 상황이 급변하게 된다. 한국은 노태우 정부의 사실상 임기 마지막 해인 1992년 안에 중국과 수교함으로써 북방정책의 대미를 장식하고 싶어했고, 중국 역시 한국과 수교함으로써 대만을 아시아에서 완전히 고립시키는 동시에 제3세계 저개발국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통해 수교국을 늘려 나간다는 대만의 이른바 은탄(銀彈)외교[10]를 차단할 필요가 있어, 상호 수교에 대한 양국의 공감대는 일찌감치 형성되어 있었으며, 게다가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 연방이 새로 출범하면서 북한이 중국의 영향권에서 이탈할 가능성이 사라지자[11] 이제 한중수교는 초읽기 단계에 들어가게 된다. 물론 한중 수교가 가시화되면 북한과 대만이 견제에 나설 게 불 보듯 뻔한지라 한중 외교 당국자들은 북한과 대만을 설득하여 양해를 구하는 절차를 생략하고 비공개로 직접 수교 교섭을 벌여야 했다.

1992년에 대한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 교섭을 할 때 중국 측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중국원칙을 들이대며 대만과의 단교를 조건으로 내걸었다.나야 저년이야? 그리고 이것은 중국의 외교에서 최우선 원칙으로 대한민국에게만 요구한 것은 아니다. 당장 미국도 1979년 중국과 수교하면서 중화민국(대만)과는 단교하였다. 흔히 중국에서만 이를 외교적으로 강요한 걸로 알지만, 실제로는 중화민국(대만)도 과거에 똑같이 하였다. 실제 대만이 전 중국의 대표 자격으로 중화민국이란 국호 아래 유엔 상임이사국을 맡고 있던 1950~1960년대에는 '하나의 중국'원칙을 내걸면서 중국을 왕따시키기도 했다. 1952 헬싱키 올림픽 때는 중국이 참가했다고 일방적으로 불참했을 정도.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중국의 UN 가입도 계속 반대하다가, 1970년대 들어서 미국및 서유럽 국가의 정책변화와 제3세계 국가들의 중국 지지로 표대결에서 참패하면서 오히려 UN에서 쫓겨났다. 홍콩 반환이 걸려있던 영국은 전부터 친중적인 자세를 보여주었고,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독자노선을 부르짖던 프랑스도 중국과 관계가 무난했다. 그리고 중소결렬 이후에 미국을 위시한 서방국가들이 소련 견제를 위해서 중국과 손 잡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리면서 정책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기본적으로 전 인류의 거진 1/4을 차지하고 있는 중국 대신에, 인구 1000만 명(당시) 규모의 소국 중화민국이 UN상임이사국임이 힘의 균형 면에서 부적절하기도 하고.

한국과 중국이 가까워지는 것을 느낀 대만 측은 몇달 전부터 한국 쪽 공식/비공식 루트를 총동원하여, 중국과의 수교에 대해 문의해왔다. 비록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더라도 대만이 한국과의 수교는 끊지 않을 것이라며, 국교 유지에 필사적이었다.[12]그게 말이 되냐. 전례를 볼 때 중국이 중국-대만 동시수교를 승인할 가능성은 전혀 없는데(...) 여러 차례 강조되지만, 대한민국은 당시 중화민국에 있어 최후의 대국이었다. 중화민국 외교관이 외교부장(외무부 장관)으로 가는 엘리트 코스의 마지막 관문이 바로 주한대사였을 정도였으니까. 그렇지만 한중수교는 한국의 입장에서는 북한에 대해, 중국의 입장에서는 대만에 대해 외교적 판정승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양국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는 부분도 있었기에 언젠가는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중국과의 수교가 정식으로 맺어지기 일주일 전인 1992년 8월 15일. 결국 한국 외무부는 중화민국 대사를 소환해 비공식적으로 중국과의 수교, 중화민국과의 단교 계획을 밝힌다.새 애인이 생겼어 우리 헤어져 이는 전세계에서 제일 먼저 알린 것이며, 미국의 24시간 전 통첩보다는 여유가 있었다(일본은 단교 열흘 전 통첩). 한편 첸푸(錢復) 외교부장은 주한 대사관으로부터 한중수교 합의를 통보받은 후 8월 19일 입법원 대표들을 외교부로 불러 한국이 중국과 수교하고 대만과 단교한다는 사실을 통지하고 이에 동요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하지만 입법원 의원들은 외교부장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이를 즉각 언론에 누설하였고, 대만 내 여론은 격분했다. 한국 정부는 대만 소식통을 통해 한중수교 뉴스가 전해지자 처음에는 즉각 부인했다가 결국 하룻만에 이를 번복하여 한중수교 사실을 시인했는데, 이때 보였던 오락가락하는 태도는 대만의 반한감정을 더욱 자극했다.[13] 그리고 8월 21일 공식적으로 중화민국에게 단교 문서를 전달한다. 1971년 유엔 축출 때와 마찬가지로, 중화민국측에서 선수를 쳐 대한민국과의 단교를 선언했다. 그리고 중국과 수교를 맺은 24일, 중화민국 대사관에 72시간 내에 국기와 현판을 내리고 철수해줄 것을 요구했고, 이후 중화민국 대사관은 6시간만에 국기하강식을 갖고 한국을 떠났다.

중화민국이 철수한 대사관은 곧바로 중화인민공화국 대사관으로 탈바꿈했다. 대만은 자신들이 한국에서 철수하는 한이 있어도 대사관 건물만은 자신들의 소유라 주장했지만, 중국이 내세운 조건에는 대만과의 단교 외에도 '수교국 내 존재하는 대만 재산은 모두 중국으로 귀속된다'는 것이 있었다. 전 중국의 정통성을 중화민국이 아닌 중화인민공화국이 가진다는 증명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대사관 건물도 주인이 탈바꿈한 것. 단교까지 가는 과정과 더불어 이것 또한 중화민국의 심기를 긁어놓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14] 이 곳은 본래 청나라외교공관이었고, 일제강점기 때에도 중화민국 영사관으로 쓰였다. 중화민국과 일본제국은 외교관계가 있었던 나라기에 중화민국은 당시 일제의 식민지였던 서울(경성)에 공관을 유지했던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독립한 뒤, 청나라 시절 때처럼 대한민국 주재 대사관으로 승격되었던 것인데 중화인민공화국 측으로 넘어가고 만 것이다. 한편 문제의 중국 대사관은 재건축 문제로 종로구 효자동으로 임시 이전했다가, 2014년 1월에 복귀했다. 복귀 후 개관식 개최.

2.2.2 평가: 대만측의 '한국 배신론'을 중심으로

한국과 중화민국 그 때까지 상황상 동질성이 있고 사이가 좋았으므로 더 큰 배신감을 느꼈다는 것도 작용했다. 북한-남한, 중국-중화민국의 대치상황에, 서로 자본주의 국가고 대치하고 있는 국가는 사회주의 국가며, 심지어 1980년대 말에 들어와서야 민주적인 주권을 회복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을 국가승인하지 않았던 한국이 1988년 한국이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호칭을 중공에서 중국으로 변경했을 때, 중화민국 측은 당연히 항의했다. 중화민국이 중국 대륙의 정통 국가라는 원칙을 훼손하기 때문이었다. 여러 번 강조되지만, 여타 소국들과 달리 한국은 차례 차례 단절되어 가는 중화민국 외교에서 최후의 대국이었기에 그러한 조치가 중화민국 입장에서는 중대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이 중화민국 수교국 중 최후의 대국이었기에 1980년대부터 90년대 초까지, 한국 외교관에 대한 대만의 대접은 거의 국빈 수준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타이페이 총통부 근처에 대만 국빈관이 있는데 그곳의 최다 사용국가가 한국이라고...) 때문에 마지막으로 걸고 있던 기대가 무너지자 맹렬히 증오하는 대상으로 바뀌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일례로 서울이 올림픽을 개최하기 위해 분주히 뛰어다닐 때, 개최지 결정 투표가 예정되있던 독일 바덴바덴 현지 분위기는 초기에는 '서울은 딱 3표 나오겠다.'였다고 한다. 그 3표는 각각 한국+미국+대만이라고 생각했단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정말, '중화민국 외교상 최후의 대국'이라고 하기에는 어폐라는 주장도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아직 중화민국의 수교국으로 남아 있었다는 것을 든다. 남아공은 1996년 중국과 수교 접촉을 가진 뒤, 1998년 정식으로 단교했기 때문인데, 남아공이 한국보다 인구도 더 많고[15] 면적도 더 넓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한국이 최후의 대국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장조차 UN 축출, 미중수교와 대등한 타격으로 평가한 것이 한중수교였다. 그만큼 중화민국에서 대한민국의 존재감은 어마어마했다. 당장 40년 넘게 수교했던 맹방이었던데다, 이해관계가 밀접한 동아시아 국가 가운데 유일한 수교국이었으며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리며 경제대국으로 성장세를 보였던 것이 1992년의 대한민국이었다. 경제력뿐 아니라, 정치외교적 측면에서도 아파르트헤이트로 오랫동안 국제적 고립 상태였던 남아공과는 넘사벽이었다.[16][17] 단순히 인구와 면적만 따지는 논리라면 스위스보다 필리핀이 대국이다(...). 당장 중화민국 외교관이 외교부장으로 영전하는 엘리트 코스의 마지막 관문이 주한대사였으며, 중화민국 정부 역시 한중수교 저지에 필사적이었다는 사실에서 이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단교 당시 중화민국 주한 대사는 진수지(金樹基)였는데, 그의 입장에서도 한중수교는 그야말로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주한대사 자리는 외교부장으로 올라가는 마지막 관문이었으나 단교로 인해 진 대사의 외교부장 영전도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한중수교와 한국-중화민국 단교가 진수지 대사의 입장에서 청천벽력의 날벼락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한국이나 대만의 외교가에서 한중수교와 그로 인한 한국-대만 단교는 기정사실이고,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사실 진수지 대사 자신도 주한대사 내정 소식을 들은 직후 '"사람을 사지로 내모는 처사"라고 격하게 반발했다고 할 정도. 애초에 한국 대사로서 진 대사의 활동 자체가 어떻게든 한중수교와 한국-중화민국 단교를 자신의 임기 이후로 늦추고, 무사히 외교부장으로 올라가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결국 진 대사는 외교부장이 되지 못했고, 장징궈의 사생아 장샤오옌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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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수교 및 중화민국과의 단교에 대한 대만인들의 유별난 분노는 애증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속국 주제에 종주국을 배반하다니!'라는 중화주의도 기반에 깔려 있다. 중국인이나 일본인이나 대만인이나 조선인(현재의 한국인+북한인을 통틀어 한자문화권에서는 조선인으로 분류한다)들을 내려다보는 시선은 솔직히 거기서 거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만인들도 사실 본성인들 자체가 중국 주류 민족인 한족이고, 외성인들은 특히 중국인 정체성을 가졌으며, 냉전 기간 동안 부국(富國)이었기에 한국을 내리깔아보는 시선이 많다. 중국 국민당이 대륙의 통일 정권이었던 시절부터 국민당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지만 동시에 장개석광복군을 이른바 '한국광복군 행동준승'에 의거, 국민당군의 휘하에 두려했다. 1941년 임시정부와 국민당 정부 사이에 합의된 행동준승에 의하면 광복군은 국민당 정부의 허락없이는 총알 한 발 쏠 수 없는 군대였고, 심지어 광복군이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에 진격하더라도 여전히 군의 통수권은 장개석에게 있었다. 무늬만 대한민국 광복군이지, 사실상 국민당 정부군의 조선인 부대나 다름없는 굴욕적 조건이었다. 이 때문에 광복군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이탈하거나, 합류를 거부하고 독자노선을 걷던 단체들이 많았다. 하지만 국민당 정부의 지원 없이는 갓난아기처럼 무력하기만 했던 임시정부는 이 조건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해방 이후에도 중화 사대관계에 의거하여 한국을 자국의 속국으로 간주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다 냉전 하에서 양국의 외교 협력과 별개로, 대만인들은 한국에 대해 자고자대하는 태도가 있었다.[19] 그렇게 예전에는 자기네 중화민국이 많은 도움을 줬다고 자부하는 한국이 단교를 해버리니 화가 난 거고, 나중에 한국 경제나 문화가 자기들을 추월하니 반감을 갖게 된 것이다. 실제 단교 문제로 따지면 일본이 먼저 대만과 단교해버렸었음에도 대만은 일본에 대해서는 별다른 반감을 가지지 않고 여전히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보이고 있다. 심지어 프랑스에서 축출당할 때는 프랑스 경찰들이 대만 대사관에 개를 풀어서 짐승처럼 몰아냈을 정도다. 그렇게 중화민국의 국제적 지위의 추락과 반비례하여 위세가 높아져가는 한국의 단교 역시 반발을 촉발시킨 것이다. 즉, 영향력 있는 단교국들 중에서 가장 만만해 보이는 나라였던 한국까지 중화민국을 버리고 추월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었던 것.

당장 80년대만 해도 대만이 한국을 얼마나 깔보고 있었는지 몇가지 일화를 더 얘기하면.

  • 대만이 한국산 군함을 구입하려고 했는데 그딴 수준 낮은 국가에서 만든 배를 왜 사냐고 난리를 쳐서 무산.
  • 86 아시안게임 때 대만언론이 한국을 방문 후 그때부터 한국의 안좋은 면만 집중적으로 방송에 내보내서 부각시킴.
  • 한국은 절대로 올림픽 개최되면 안된다며 노골적으로 일본 나고야 올림픽을 공개지지.
  • 한국이 88 올림픽 이후 의외로 선전하자 대만언론이 저건 한국의 비리로 점철된 검은 올림픽이라고 주장.

거기다 중화민국이 한중 수교 가능성을 전혀 예상치 못한 건 아니었다. 이미 80년대 후반 한국이 북방 정책을 추진할 때부터 한중 수교 가능성은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냉전이 격화되던 1980년대 중반에도, 프랑스가 북한과 수교를 추진하자 한국 측에서는 프랑스와 북한의 수교를 승인하는 대가로 한국과 중국의 수교를 중재해 줄 것을 프랑스에 요구한 바 있다. 이에 프랑스 측에서 중국 대신 폴란드와 수교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한국 측에서는 프랑스가 북한과 수교함으로써 한국이 입게 될 외교적 손실을 커버하려면 북한-프랑스/한국-중국의 교차 수교가 이루어져야 한다며 버텼다. 결국 프랑스는 북한과의 수교를 단념하고, 파리 주재 북한 통상 대표부를 일반 대표부로 승격시키는 선에서 마무리지었고, 한국은 몇 년 후에 프랑스의 중재 없이 중국과 수교하게 된다. 그리고 북한과 프랑스는 아직도 미수교 상태이다.

특히 1990년 한소 수교가 이루어지자, 대만 내에서도 한중수교는 시간 문제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당시의 외교 관측통들은 한소 수교보다 한중 수교가 먼저 성사될 것으로 예측했는데, 한소 수교가 먼저 이루어지고 한중 수교가 나중에 이루어진 걸 보면 당시 한국 정부가 중화민국과의 외교 관계 정리를 상당히 조심스럽게 추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중국 정부가 북한과의 관계를 의식해서 조심스럽게 추진한 것도 있다.

주(駐)타이베이 한국 대표부의 조백상 대표도 이 점을 지적하면서 "대만 일부에서 정치적 목적으로 한국을 공격하는 것을 우리나라에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안된다", "우리가 대만에 대해 저자세를 가질 이유는 전혀 없다"는 견해를 밝혔다. 물론 한국 내 일각, 특히 전통적인 반공/반중 논리에 입각한 이들 가운데는 대만과의 단교를 명분적, 도덕적인 잘못으로 간주하는 관점도 존재하지만 조선일보 2016.5.12 칼럼 "타이완을 홀대해서는 안 되는 까닭" 현대의 한국인들은 2000년대 이후 대만이 한국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대만에 대해선 냉담하거나 무관심한 경우가 많다.

아직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은 어느 정도 비공식적인 교류는 유지하고 있다. 양국의 대사관이 철수하긴 했지만, 대신 대표부 성격의 외교 기구가 상대국에 위치해 있다. 대한민국의 대표부는 타이베이에 위치해 있으며, 중화민국의 주한 타이베이 대표부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대로네거리의 동화면세점 건물에 위치해 있다. 타이베이 대표부 항목 참고. 또한 부산광역시 중앙역 바로 앞에 부산사무처도 두고 있다.

3 대만에서 한국 대중문화

대만이 한국을 그렇게 적대시하고 있어도 정작 대만에서는 한국문화의 수용도는 꽤 높은 편이고 심지어 우호적인 수준까지 왔다.

1990년대 말부터 대만 지상파 TV의 저녁 시간대에는 한국 드라마(중국어로 한쥐(韓劇)라고 부른다.) 여러 개가 방영되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중화 문화권에서 한류 열풍의 시작을 알렸다. 한국 문화 열풍 일명, 한류라고 가장 먼저 부른 곳도 대만이었다. 한때 클론이 대만 연예계에서 최고의 인기를 얻었던 적도 있었고 월드컵 송은 현지 여가수가 번안해서 불러 크게 히트했다.

한국 대중음악 인기도 대단하다. 슈퍼주니어 는 대만내 현지 음원/음반 차트 상위권을 유지하는 등 큰 인기를 끌었다.[20] 또한 외국 가수 최초로 자국 가수를 제치고 금곡장 대상을 두차례 거머쥐기도 했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골든디스크나 서울 가요대상에서 대만 가수가 음반대상을 탄 격. 라디오나 길거리, 음식점에서도 한국어 노래가 자주 흘러나오는데, 광저우 아시안게임 태권도 사건 때에도 소녀시대, 원더걸스 불매운동이 이슈가 되고 "소녀시대, 원더걸스가 와도 용서해 줄 수 없다!" 같은 구호까지 등장했다.

대만에서의 한국 대중문화가 그들이 옛날부터 심취해 있던 일본이랑 비교해서도 뒤지지 않을 수준까지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2015년에 자국 출신인 쯔위걸그룹 TWICE의 멤버가 되어 한국 연예계에 데뷔한 후로 이러한 모습을 잘 알 수 있는데, 쯔위가 아시아 아이돌 팝의 선두주자인 K-POP의 메이저 기획사에서 데뷔한 사건을 가지고서 몇 달 내내 언론 메인에 걸고, 그걸로 "왜 대만에는 스타가 안 나오는가?"로 언론(!)에서 갑론을박한 것을 통해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대만의 주목도가 굉장히 높다는 점을 반증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여행업협회(KATA) 발표 자료에 따르면, 2016년 8월 한국을 방문한 대만 관광객의 수는 7만 9,400여명으로 1년 전(2015년)보다 3.1배, 2년 전(2014년)보다 33% 증가된 것으로 나타났다.[21] 쯔위가 대만인들의 한국 관광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결과라는 평가와 함께.

4 한국에서 대만 대중문화

1980-90년대 당시에 포청천 등 사극을 중심으로 대만 드라마가 인기를 끌기도 하였고, 호소자 시리즈 등의 대만 영화도 상당수 흥행하기도 했으며, 90년대부터 2000년대 중순까지 영건이나 채지충의 중국고전만화시리즈, 접지전사 등의 대만 만화도 흥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만화는 접지전사 이후로 수입되는 만화가 그리 없는 상황이고[22], 방송 역시 무분별한 개방에 따른 방송사의 영세화로 프로그램의 질이 나빠지면서 사그라 들었다. 일부 대만 드라마가 알려지는 경우가 있지만 딱히 인기를 얻지는 못하는 수준. 영화역시 불법공유로 시장이 망가지면서 거의 중국쪽에 의존하게 된 상황. 덕택에 포청천도 중국이나 홍콩에서 만든 드라마로 잘못 아는 사람들도 많다. 지못미.

한국에서 오래 일한 외국인 강사들은 타이완(대만)과 타이(태국)를 잘 구분 못하는 어린 한국인 학생들이 있다고 전한다(...)..

5 반한 감정

대만에는 중화민국 시기부터의 친밀감 및 현재의 한류 등 친한감정이 존재하면서도 반한감정 또한 잔존하고 있다.

대만 내의 반한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원인들이 있다. 우선 한국인들에게도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상술되어 있는 대만에 대한 한국의 단교가 있다. 단교 이외에도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잘 모르는 원인들이 있다. 예를 들어 대만은 한국을 라이벌로 생각하는 일이 많다. 한국 : ? 한국이 예전에 한국 스스로를 일본에 견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만도 스포츠, 경제 등의 분야에서 한국에 스스로를 비교하면서 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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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대만 10대 기업 비교.[23]

그나마도 이 표는 2013년부터 대만이 경제위기를 맞아 대기업이 침체를 겪으면서 의미없게 되었다. 사실 저 비교표만 봐도 일반인이 우라나라에서 한번이라도 들어본 기업은 hTC[24], Foxconn[25]정도 뿐이고, 컴퓨터 좀 만져본 사람엑슬러 에이서 정도 기업들을 들어봤을 것이다(...) (TSMC까지 안다면 당신은 진정한 컴덕) 하지만 에이서같은 경우 90년대 한국 진출하여 수익성이 부진하자 그야말로 야반도주하듯이 철수하여 구매자들의 A/S문제라든지 무수한 문제를 일으켰고 2000년대 와서 한국에 재진출했다가 야반도주한 놈들이 뭔 낯으로 돌아오냐며 욕퍼먹고 막장기업이라느니 대만답게 개판이라는 비난과 같이 대만기업 이미지 악화에 기여하고 말았다.


2014년 대만의 전국 지방자치단체 선거에서 국민당이 제작한 광고 (한글판) 대만 정부가 중국과 체결한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의 서비스 부문 추가 비준이 중국에 비판적인 민진당 등 야권, 학생단체의 반대로 지연되는 동안 한중 FTA가 체결되어 중국 시장을 한국에게 빼앗기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한국에 대한 경제 라이벌 의식에 호소하면서 "경제 발목잡는 야당을 심판하자"는 의도였지만, 막상 해당 선거에서 국민당이 참패하면서 그다지 호응을 얻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애국심 마케팅이라 널리 욕을 쳐먹은 것은 덤이었다. 한중 FTA를 막는게 아니라 민진당을 선거에서 참패시켜 동력을 상실케 해 ECFA 확대를 빠르게 하자는 것[26]이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로 국민당이 민진당한테 관광 당했으니(...) 실제로 ECFA 서비스/투자협정은 국민당의 지방선거 참패 이후 비준동의안이 멈췄다.

일단 대만 지자체에서 "한중 FTA를 막읍시다!"라는 공약을 내거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중국과 한국이 맺는 협정을 제 3국의 일개 시(市)에서 뭘 어떻게 말리려고 (...) 지자체가 손댈 수 있는 영역의 일이 아닐 뿐더러, 된다면 내정간섭이다. 중화민국 총통도 제대로 못하는 것을 공약으로 내세우는 것 자체가 어이가 뺨을 치는 소리다.

그리고 가끔 가다 한국에 대해 잘못된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는 한국인들이 공자 한국인설을 주장한다는 말이 있다.[27] 최근 마잉주 총통에게 한국 유학생이 직접 공자의 한국인설을 제기한 루머에 대해서 바로 잡아달라고 탄원하기도 하였다. 그 밖엔 한국이 강릉시 단오제를 세계 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하면서 단오의 기원국인 중국 측이 "단오를 한국에 빼앗겼다" "한국이 단오절을 자신들의 명절이라고 세계에 알리고 있다"는 오해도 환빠로 인한 오해와 함께 널리 퍼진 오해다.

운보 김기창 화백이 조선풍으로 각색(현지화)한 '예수의 일생' 연작 그림을 "한국이 예수마저 한국인이라 거짓부렁한다"는 유튜브 영상도 있다. 심지어 환빠를 깔 목적으로 디씨에서 만든 '환빠가 생각하는' 세계지도가 역시 대만을 통해 퍼지면서 '한국인이 생각하는' 세계지도로 알려진 경우도 있다. 위와 같은 억지스런 왜곡과 오해가 하나의 인터넷 문화로 작용하고 있기도 하다.

주리시(朱立熙) 대만 지한원장에 의하면 젊은 세대는 그래도 한류 등의 영향으로 비교적 친한적인 편이나 대만의 고령층은 한국에 대해 중화사상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고 하며[28], 단교 전 양국간 갈등을 목격한 40-50대의 경우 특히 한국에 대한 반감이 강하다고 한다.

더불어 2000년대 들어 경제적이나 문화적인 면에서 대만이 한국에게 뒤쳐지면서 이렇게 우월감을 가지고 있던 대만인들에게서 열폭하는 반한정서가 생겼다. 거기에다가 대만 정치권에서 자신들의 실책을 감추기 위해서 국민들의 관심을 외부로 돌리려는 목적과 선정적인 대만 언론매체들[29]이 이를 조장했다는 것. #

이런 상황임에도 대만인들이 현실적으로 노리고 있는 해외국적이 한국이라고 하니 어이없을 따름이다.

5.1 한국의 반응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류 등의 영향으로 반한감정이 거의 존재하지 않게 되었지만 최근 여러 이슈들로 반한감정이 촉발된 전례가 있다. 또한 한국 언론들이 으레 그렇듯 대만 언론도 자극적인 사실들만 강조해서 말함으로써 기레기들이 대만의 대한감정에 불을 지폈다고 할 수 있다.

대만의 아시안 게임 반한 사태에서 중화민국 정부는 양국 국민들의 반응과 달리 공식적으로는 당연히 중화민국 정부가 미치지 않은 이상 한국 탓이라는 말은 한 적 없는데 다만 행정원장이 욕한 적은 있다.(...) 그게 방송까지 탔다. 그리고 계속 문제가 커지자 진정시키겠다고 한국에 통보했다.

2000년 이후로 대만의 반한 감정이 한국에 많이 알려졌고, 11월에 대만의 아시안 게임 반한 사태로 인해 한국인들의 대만에 대한 감정도 나빠진 면이 있다.

그러나 한국인 대다수의 반응은 대만이 그런다니 '쟤네 뭐지?/ 아, 그래? 근데 쟤네 어디있는 나라지?/ 왜 저래, 열폭인가?/태국[30] 사람들이 갑자기 왜 시비냐' 정도.(...) 한국인들 대부분은 대만에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수준은 아니다.애초에 대만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한국사람이 태반인데 아 눈에 습기가...

6 경제교류

아무리 단교를 했다 하더라도 한국과 대만은 아직 기본적인 교류는 하고 있다. 특히 IT산업. 기가바이트, MSI, ASUS 등의 부품회사들이 많이 교역하고 있으며, 한국 관광에서도 중국, 일본, 미국 다음으로 많이 입국하는 나라가 대만이다. 반대로 2014년 기준 대만 입국 관광객 역시 중국, 일본 다음으로 한국 3위[31]. 한국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대만 브랜드는 바로 버블티 회사 공차이다. 또 GIANT같은 자전거 회사들도 꽤나 유명.

그런데 이게 상품교역이나 인적교류에만 치중된다. 대만과는 투자보장협정(BIT)과 자유무역협정이 없기 때문에 전면적인 교류 확대에 장애물이 있다. 원래 1980년대 BIT를 한국-대만 간에 체결할 뻔했지만 중국 대륙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대만 처리문제가 걸려서 없던 일로 하기로 했다. 안습. 대신에 2010년대현재는 BIT 체결 및 TPP를 통한 자유무역협정(FTA) 발효 등이 진지하게 이야기되고 있다. 중국 대륙 정부의 견제가 좀 있지만, 이쪽은 한중 FTA를 먼저 해서 괜찮다. 그리고 대만과 외교관계가 단절되면서 대만 측이 한국 선박항공기의 항로 진입을 통제하는 등 양국 간 경제 갈등이 약간 있는데다 단교 관계라 정부간 외교/통상협의가 제한되는 등[32] 애로사항이 꽤나 많다. 2016년 주형환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후보자(현 장관)의 인터뷰 내용. 한국-대만 BIT나 FTA를 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제한사항이 있어 일단 다른 방법을 찾는 듯하다. 2010년대 들어서 인적교류는 관광에, 비즈니스는 비활성화[33], 무역 수준은 연 300억 달러 수준에서 수년째 정체되고 있다.

때문에 한국-대만간 상호간 공장 설립이나 기업 M&A, SOC 민자사업 투자에는 서로 소극적이다. 2015년 자유무역협정은 한국과 대만이 2015년 9월 동시에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에 가입신청서를 제출하고 TPP 가입국 및 상호간 협상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보이며,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BIT가 체결될 것으로 보고 있다. 네이버 주식회사가 대만 핀테크 기업을 인수하여 네이버페이를 만들고, 대만의 유안타그룹이 동양증권을 인수해서 유안타증권을 만드는 등 BIT가 없음에도 일단 제한적으로 기업교류가 있는 편이긴 하다.

하지만 투자보장협정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서로 간 국명 문제로 트러블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중화인민공화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추진하는 TPP에는 대만이 '중화민국'으로 가입하는 것을 추진중인데, 양자협정인 BIT에 있어서는 대만의 정식국명인 중화민국을 쓸 것이냐,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견제를 받은 WTO 국명인 "대만, 팽호, 금문, 마조 개별관세영역"을 쓸 것이냐 하는 등 기술적 문제가 있다.

2015년 12월 13일 연합뉴스가 중화민국에 르포 취재를 갔는데 민주진보당 측에서 "5대 교역 상대국인 한국과의 무역 교류를 강화할 예정이며 TPP 동반 가입을 위한 협력 방안도 검토할 것이다."라며 대한민국과의 동반 TPP 가입 의사를 확실시 하였다. 2차 TPP 가입국 중에서 대한민국이 가장 무역협상 경험이 풍부하다보니 한국과 중화민국이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듯. 기사 2016년 차이잉원 정부 수립 이후 본격적으로 한국 무역협상 방식을 배우겠다고 한다.

일단 2015년 투자보장협정을 시도하는 모양이다. 또한 2015년 한국거래소(KRX)가 자본시장 국제화를 위해 ETF 교차거래를 위한 첫 파트너로 대만의 대만증권거래소(TWSE)를 선택하는 등 경제적으로는 2010년대들어서 다시 협력이 강화되고 있다. 2016년부터 KRX - TWSE 간 ETF 교차거래가 시작된다. 2015년 10월 27일 이런 내용을 담은 기사가 공식 발표되었다. 한국거래소에서도 "우리나라와 경제 환경이 유사한 대만거래소와 대표지수(Taiwan 50) 추종 ETF 교차상장을 먼저 추진하고 이후 다른 지역으로 확대할 예정이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12월 13일 다시 기사가 나왔다.

상당히 큰 변화로, 유안타그룹이 한국 동양증권을 인수하여 유안타증권이 된 이후로 한국 TV 광고방송, 인터넷 광고, 심지어 한국 길거리 등에 청천백일만지홍기가 상당히 많이 노출되고 있는 등, 한국 내에서 대만의 입지가 다시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이야기한 한국거래소-대만증권거래소 주식시장 ETF(대만 : KOSPI200 ETF, 한국 : 가권지수 ETF) 교차상장은 2016년 10월 7일에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 대만증권거래소 보도자료 한국거래소 상장기념식 이에 따라 2016년 10월 6일 대만 정부에서 한국의 KOSPI200 선물상품이 적격상품으로 인증받으면서 한국-대만 간 금융투자 분야에서도 시장 확대가 기대된다.

7 북한과의 관계

중화민국은 북한이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어 형식적으로는 서로 적국이었으나 지리상 너무 멀어서 부딪친 적도 없고 뭣보다 어마어마한 중국과 대치하다 보니 딱히 그렇게 악감정이 쌓이지는 않은 편이다. 1992년 한중 수교로 한국과 단교되면서 슬슬 북한과 민간차원에서 비공식적인 교류를 하고 있다. 한국과 단교한 이후 중화민국은 그동안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던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념의 차이도 있고, 북한 역시 하나의 중국 원칙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으나 스포츠 등의 비공식 민간 교류는 했다.

2016년 현재는 대북 제재로 공식적으로 모든 대북 교류가 중단되었다. 원래 정부 차원에서는 중화민국북한이 서로를 인정하지 않았으니까 민간 교류 등 중국 본토를 통한 무역 등이다.

1970년대에는 북한 선수들이 중화민국과의 경기를 거부하는 병맛사례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 없다. 개최지를 따로 정하지 않고 홈 앤드 어웨이를 채택하는 각종 대회에서 양쪽이 맞붙게 되는 경우 특별한 경기 거부 같은 것 잘 없이 평양타이베이에서 경기 잘 치른다. 가끔 다른 지역도 나오지만. 실제로 한 대만인이 북한으로 넘어가 정식으로 취재를 한 적도 있고, 거기다가 2010년에 북한에 미사일 부품 팔다가 적발된 적이 있다. 해당 기업은 교역했던 중국 회사가 북한군 소속의 위장회사였다는 걸 몰랐다는 투이다. 물론 이것은 민간기업의 짓이고 공식적으로는 엄연히 적성국가로 대만인의 여행이나 무역은 제한 대상이다. 대만인비자 없이 함부로 방북이 금지되어 있고 북한이 2012년 은하 3호를 발사할 당시 중화민국군 공군일본 항공자위대와 함께 미사일 파괴조치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중화민국 정부는 북한의 천안함 폭침이나 연평도 포격 등 각종 도발 당시 규탄 성명을 냈으며 국제 사회의 대북 제재도 충실히 이행하여 북한 선박의 가오슝항 기항을 금지하고 있다.[34] 2016년 북한의 4차 핵실험2016년 북한 광명성호 발사 사건에도 신속하게 규탄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2016년 현재는 국제 대북 제재 및 정부 차원의 독자 제재가 실시되어 북한과의 관계는 100% 단절되었다. 북한 선박도 입항 못하고 북한인의 입국도 금지되었다.

북한의 노동3호의 사정권에 대만 섬필리핀, 싱가포르 등이 들어간다. 더 나아가 이 미사일은 동맹국인 중국의 특별행정구인 홍콩과 남쪽 끝 호주 북부 다윈까지 사정거리에 두고 있어 국제 사회가 우려하고 있다. 물론 서로 직접 충돌할 가능성은 거리가 멀고 중국을 사이에 두고 있어 없다시피하지만, 시험발사하던 장거리 미사일이 대만에 불시착, 민가를 덮치거나 하는 불상사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로 중화민국군항공자위대해상자위대와 협력해 파괴 조치 명령을 내린다. 비슷하게 일본도 북한 미사일 시험발사 경로에 서부 지방이 포함되어 니가타 같은 대도시나 심지어 도쿄 수도권에(!!!)[35] 잘못 떨어지는 일을 우려한다. 북한의 컴퓨터 시스템이 매우 허접해 정확도가 낮기 때문이다.

북한이 돈이 없어서 중국에 이어 대만한테도 어업권을 판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사 김정은의 통치자금과, 북한 정부의 예산 조달 차원에서 어업권을 대만에도 판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만 정부는 어업권을 산 적이 없다며 사실 무근으로 부인했다.

8 참고할 만한 자료

<<대만: 우리가 잠시 잊은 가까운 이웃>>(2012. 최창근 외)
<<한국-타이완 관계사>>(2015. 문흥호, 주리시(朱立熙) 씀)
<<대만 반한정서의 연원과 대책>>(2013. 주리시)

  1.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중화민국 국적의 화교들은 중국 정부와 그리 관계가 나쁘진 않다. 심지어 중화민국과 수교 중인 시절보다 더 낫다는 평.
  2. 고자 장개석조차도 일본육군사관학교 유학생 출신이다. 일본육사는 당대 아시아 최고의 군사교육기관이었다. 따라서 중국의 강력한 항일 애국자였던 장개석도 추천서까지 받아가며 말그대로 기를 쓰고 일본육사에 입교했다. 제대로 군사교육을 할 수 있는 곳은 당대 아시아에선 유일하게 열강반열에 든 일본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오합지졸인 국부군 장성들을 보며 기가 차서, '너희가 우리 군대에 있으니까 사단장, 군단장을 해먹지 일본군이었으면 대대장도 못했다!'고 일갈했을 정도다(안습하게도 장개석 외에는 국부군 고위 장성 가운데 체계적인 군사교육을 받은 장성이 없다시피 했다. 안습)
  3. 어찌보면 일본 육사에서 공부한 장개석이 2차대전에서 일본을 항복시킨 걸 보면 호랑이 새끼를 키운 셈이라고 볼 수도 있다. 비슷한 경우론 호찌민과 보응우엔잡이나 후엔 오사마 빈라덴을 키워준 미군들도 있고..
  4. 중국공산당의 준말. 승인을 하지 않았으므로, 정식 국호 대신 일개 정당의 정권으로 낮추어 부른 것이다.
  5. 냉전시절, 공산권과 대립하는 동아시아의 반공진영 국가에게 의례적으로 '자유'라는 이름을 붙여주곤 했다. 그나마 자유중국, 자유월남(남베트남)은 남이 불러준 이름인데, 민주주의와는 백 만년은 동떨어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나,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은 본인들이 주장한 이름이다(...).
  6. 어찌보면 당시 서울보다는 이탈리아 로마가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있다. 로마에는 바티칸 주재 중화민국 대사관이 있으며 - 지금까지 유럽 내 유일한 중화민국의 대사관이다.안습 - 바티칸 땅이 좁아서 대사관은 이탈리아에 있으니까. 한국은 1989년 이전에는 공산권 국가와 전혀 외교관계가 없었으며, 이탈리아바티칸은 공산권과도 꽤 접촉을 한 나라였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는 역시나 중화민국 대사가 아닌 타이베이 대표 취급을 받으니 불이익이 따른다. 주 바티칸 중화민국 대사 자격으로 접촉할 타국 대사들도 있지만 장소가 바티칸이니만큼, 그들은 정식 외교관이 아닌 가톨릭 성직자들이 절대다수. 안습
  7. 엄밀히는 장제스의 일당들을 축출한 것으로, 이 당시에 유엔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사라진 중화민국의 후신으로 보았다.
  8. 당시 국내외 외교 관측통들은 한소수교가 한중수교보다 먼저 이루어진 데 대해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아무래도 북한이 소련보다는 중국과 더 가까웠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한중수교 추진 중엔 한중 양국이 대만과 북한의 눈치를 많이 보았었다.
  9. 오죽하면 농민 단체에서 중국산 농산물 수입 규제를 요구했을 정도였다.
  10. 대만은 빈곤한 제3세계 국가들을 경제적으로 원조함으로써 수교국을 늘려 나가 나중에 이들 제3세계 국가들의 지지를 발판으로 자신들이 UN에서 축출되었던 과정을 뒤집어서 UN 총회 표 대결을 통해 UN으로 복귀할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게다가 서울은 대만이 제3세계 국가들과 외교 접촉을 하는 데 주요 창구 중 하나였는데, 만일 한중 수교가 이루어질 경우 이 주요 창구가 막히게 된다.
  11. 신생 러시아 연방은 더 이상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므로 종전처럼 동지 의식을 바탕으로 한 의리 외교가 통하지 않을 것이고, 소련 붕괴 전후로 불거진 경제난, 민족 갈등 등 체제 전환에 따른 후유증을 수습하느라 중국을 견제하러 나설 처지가 안 되었다. 때문에 북한은 중국이 어떻게 나오건 간에 중국의 입장을 거스를 수 없게 되었다.
  12. 노태우 정부의 책사로 통했던 박철언의 회고에 따르면 이 당시 한국의 정, 관, 군계 유력인사 치고 대만 정부로부터 국빈으로 초대를 받아 대만을 방문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13. 심지어 대만에 유학중이던 한국외대 중국어과 학생이 대만인들에게 폭행을 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14. 미국의 경우 중화민국 국적의 화교 사업가에게 매각하는 식으로 눈가리고 아웅했지만, 그 덕분에 중국 내 미국 자산이 동결되는 보복조치를 당했다. 미국도 당했는데 1992년의 대한민국은(...) 다만 사우디의 경우 국왕의 배려로 중화민국 대사관이 곧장 타이베이 대표부로 간판만 바꿔달 수 있었다. 당연히 중국측은 격분했지만, 사실 수교 전까지 별다른 이해관계도 없는데다 산유국 + 아랍의 맹주인 사우디에게 중국이 특별난 보복을 취할래도 취할 것이 없었다(...).
  15. 단 1990년대 초까지는 한국이 남아공보다 인구가 더 많았다(1992년 기준 한국 4300만, 남아공 3900만). 남아공 인구가 한국 인구를 추월한 것은 9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16. 당시 남아공은 데 클레르크 집권 이후 넬슨 만델라 석방,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종식 노력, UN 재가입을 통해 고립에서 벗어나 국제 사회로 복귀하고 있던 터였다.
  17. 게다가 남아공도 몇 년 후에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으로 갈아탔다.
  18. 당시는 공식적으로 장징궈의 자식임을 인정받지는 못했다.
  19. 1960년대에 월드컵 축구 아시아 지역예선으로 원정을 간 한국 대표팀이 편파판정에 항의하자, 중화민국 관중들이 난입해서 선수를 폭행하는 깽판을 저지른 적도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도 중화민국 언론은 서울 시내 달동네를 보여주며 이런 가난한 나라에서 올림픽을 한다는 투로 방송했다.
  20. 단교 이례 최초로 대만에서 한국 유명인사에게 전용기를 보내주었고, 가장 큰 공연장에서 최다 공연횟수를 기록함
  21. 다만 2015년 통계는 메르스 사태로 외국 관광객이 격감하여 평소보다 차이가 커졌던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22. 하지만 현재 네이버 웹툰에서 아만의 백귀야행지가 연재되는 등 아예 없지는 않다. 가뭄에 콩나듯해서 그렇지.. 참고로 백귀야행지의 평점은 9.9점대로 꽤 좋은 편이다.
  23.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어색해보일 수 있으나 한국전력공사 역시 매출액으로 보면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거대기업이다. 하기사 국내 시장을 독점하는데 매출이 안 나올 리가...
  24. 대만의 자존심과도 같은 스마트폰 기업. 한때는 잠시나마 안드로이드 OS 체제의 선두주자이기도 했다. 현재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는데, 그래서 별명이 Help This Company(...).
  25. 국내에서는 애플의 하청업체로 유명한 기업. 최근 삼성전자와의 경쟁 끝에 샤프전자 인수에 성공했다. 물론 이번 인수전 승리엔 일본 관료들의 삼성 배척 운동(...)이 한몫했다.
  26. 자유무역협정 항목에 "경쟁적 자유화 효과" 문단 참고.
  27. 일부 환빠 성향 사람들이 이렇게 주장한 사례는 있다. 물론 그런 사례는 공자에만 그치진 않는다.
  28. 여기에 더해 일제시대 당시 조선의 경제력이 대만보다 열악했던 점 및 80년대까지만 해도 대만의 경제력이 한국보다 앞서 있었던 데 따른 멸시감과 우월의식도 한 몫 한다.
  29. 중화민국/문화항목 참조. 대만 언론의 선정성 경쟁은 한국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가 않다. 인구가 한국의 절반 정도 수준인 국가에서 지상파 방송사가 5개인데다가, 종합편성채널이 20개, 보도채널이 9개나 될정도니 자연히 방송사들은 수익을 조금이라도 더 얻기 위해 선정성 경쟁에 열을 올릴 수 밖에 없는 구조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야말로 복마전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신문이라고 해서 사정이 특별히 다르지는 않다.[1]
  30. 해외에서도 'Taiwan'과 'Thailand'를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31. 대만에서는 홍콩/마카오에서 온 관광객을 중국 대륙에서 온 관광객과 따로 분류한다. 이에 따르면 홍콩/마카오 관광객이 3위이고 한국이 4위.
  32. 일반 국가와 미승인국과의 외교관계는 대표부급 관계이므로, 외교관이 아니라 민간 자격이기때문에, 통상 협상에서 전권 위임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통상 협상에서 전권대사를 따로 뽑아 특사 형식으로 파견하고 협상을 하는데, 절차가 복잡하다.
  33. 한국-대만 간 컨벤션센터 교류도 없다. 예를 들어, 대만의, 아니 아시아 최대의 IT 행사인 컴퓨텍스 타이베이(난강전람관)에서 시행)에는 한국 회사가 거의 참가하지 않으며(정작 일본이나 중국, 미국, 독일 회사 등은 잘만 참가한다.), 한국에서 하는 지스타나 기계산업전 등에도 대만의 회사들이 경쟁력이 있음에도 많이 참가하지 않는다. 다만 한국의 신산업 행사에는 기가바이트아수스 등이 참가하기는 한다.
  34. 중국의 특별행정구인 홍콩도 북한 선박 입항과 북한인 입국을 금지했다. 베이징과는 또 다른 홍콩특별행정구 독자 제재의 일환이다.
  35. 북한 미사일 발사 뉴스가 뜰때마다 일본 방위성 앞마당에 패트리어트 요격 미사일이 나타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참고로 방위성 본청은 도쿄 도 신주쿠 구 이치가야에 있는데, 외국 관광객들이 즐겨찾는 명소이자 도쿄 도의 본진인(도쿄도청이 이곳에 있다.) 신주쿠의 바로 앞마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