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bhas Chandra Bose(सुभाष चन्द्र बोस) 1897년 1월 23일 ~ 1945년 8월 18일
1 개요
수바스 찬드라 보세는 인도의 독립운동가이다. 인도 국민회의 의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경칭이자 통칭은 '네타지(지도자라는 뜻)'
그러나 인도의 친일 부역자. 일본의 대외선전용 꼭두각시 국가인 자유 인도 임시정부의 국가 주석 겸 인도 국민군 최고 사령관을 지내며 영국군에 소속된 동포들에게도 총을 겨눴다.
2 생애
그는 평소에 비폭력 투쟁에 의문을 제기하고 폭력투쟁을 주장하였다. 물론 주장의 견해차이는 있었지만 인도의 독립을 염원하는 것은 같았고, 마하트마 간디나 자와할랄 네루 같은 다른 인도의 독립운동가와 친하게 지냈으며, 때문에 영국의 감시대상에 포함되었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평소 자신의 소신을 펼치기 위해서 감시망을 뚫고 소련(러시아)을 통해 독일에 들어갔다. 이때는 아직 독소 불가침조약이 깨지지 않은 상황인지라 보세는 소련과 독일이 연합해서 북쪽에서 인도를 치는 전략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미 바르바로사 작전을 구상중인 아돌프 히틀러는 당연히 듣지 않고, 대신 보세는 대영방송에 동원된다. 이때 영국에서 이 방송에 대항해서 BBC를 중심으로 다른 방송국을 만들었는데 조지 오웰이 잠시 참여한다. 그리고 북아프리카 전역등의 전선에서 포로로 잡힌 인도군들을 설득해서 독일 내부에 인도인 부대를 창설하게 되는데, 최종적으로는 3,500여명의 부대원이 모였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패배 이후 독일의 점령지역이 축소되면서 자꾸만 인도와 거리가 광속으로 멀어지는 바람에 해당 부대는 독일과 점령지 내부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패전을 맞고 전원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으며, 일부는 전범으로 처벌받았다. 그래서 해당 부대에 있던 인도인 중에서 전투에 본격적으로 참전한 사람은 에르빈 롬멜휘하에서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복무한 수백명 수준에 불과하였다.
(1943년 11월 '대동아회의'에서의 왕징웨이. 이 회의에서는 일본의 영향 하에 있던 아시아의 국정 최고 책임자라고 쓰고, 일제의 꼭두각시라고 읽는 이들을 초청했다. 맨 오른쪽은 인도의 독립운동가 찬드라 보세이다. 왼쪽에서 3번째가 왕징웨이, 그 다음이 도조 히데키. 여담으로 왼쪽에서 2번째는 만주국 수상 장징후이.)
하지만 이미 패전하기 2년 전인 1943년에 태평양 전쟁으로 한참 영토를 넓히던 일본군이 오히려 독일보다 인도에 가깝게 접근하자, 찬드라 보세는 도조 히데키와 아돌프 히틀러의 동의를 얻어서 유보트를 타고 연합군이 지배하는 바다를 건너와 일본군의 도움을 얻어 인도를 해방시키려 했다. 물론 이 때만 하더라도 유럽의 인도인 부대를 버리는 것이 아니었기에 현지에 후계자도 세워놓고, 잠깐 다녀온다는 식으로 갔지만...
사실 인도 국민군은 2차 대전 전부터 일본 제국에 의해서 구상된 바 있는데 실지로 보세가 도착하기 이전에 이미 군 조직을 갖추었다. 하지만 어른의 사정으로 탄압받게 되고 수장이 수마트라 섬으로 유배를 가는 지경까지 이르자 유명한 반영운동가 찬드라 보세를 일본이 영입하게 된다.
보세는 싱가포르에서 자유인도임시정부를 세우고, 주로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전향한 인도인들을 모아[1] 4만 5천명의 군대를 조직했다. 그리고 조직된 인도 국민군을 일본군과 함께 공동 전선을 펴게 했는데, 하필 그것이 임팔 작전이었다. 찬드라 보세는 작은 땅이나마 스스로의 힘으로 인도를 해방시키려고 했는데…. 당연히 인도 국민군도 작전 실패 후 철수과정에서 와해에 가까운 타격을 입게 된다.
이후 타이완에서 머물던 보세는 1945년 8월 15일 일본 항복후 연합군의 진주가 시작되기 전에 소련으로 망명하기 위해서 타이완 송샨공항을 출발하나 비행기가 추락하여 숨지게 된다.
살아남은 인도 국민군은 전후 반역죄로 재판을 받지만 당시 대영제국이 인도에서 손을 떼는 것이 기정 사실화 되었고 이들을 변호한 사람이 바로 인도의 독립운동가인 자와할랄 네루였던 탓에 거의 불기소나 무죄 처분을 받고 독립영웅의 일원이 된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에게 기소된 죄목이 반역뿐 아니라 살인죄도 있다는 것이다. 즉 동료 포로들중에 전향하지 않는 포로들을 일본군과 같이 학대하고 처형했던 일들인데, 이들이 무죄가 되면서 이런 죄상은 덮어졌다. 그때 살해된 사람들을 생각하면 역사의 비극.
망명 중에 비서 출신 오스트리아 여자랑 결혼했고 딸을 두었다. 보세가 일본으로 가면서 영원히 헤어졌고 이 여자는 1996년까지 생존하였다. 보세의 딸은 오스트리아의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다.
3 평가
인도에서는 독립의 영웅으로 마하트마 간디, 자와할랄 네루와 함께 추앙받는 인물이다. 당장 캘커타 국제공항의 정식명칭은 그의 이름을 딴 네타지 수바스 찬드라 보세 국제공항(Netaji Subhas Chandra Bose International Airport)이고 안에 보세의 대형 초상이 있다. 뿐만 아니라 콜카타 시내에도 곳곳에 보세의 초상과 조각상이 산재하고 있어서 쉽게 볼 수 있다. 인도 학교에도 이 사람의 초상이 마하트마 간디, 자와할랄 네루,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와 함께 꼭 걸려있다.
인도 학교에 흔히 걸려있는 초상 중 하나.
예상대로 일본 극우들은 엄청 띄워준다. 지팡구에서도 꽤나 간지나게 등장하고, 2007년에는 아베 신조 총리가 인도를 방문했을 때 보세의 후손과 만나기도 했을 정도. 물론 이들의 의도는 대동아공영권의 명분을 얻기 위한 것이다. 도쿄 전범 재판에서 일본인 전범들의 처형에 반대했던 라다비노드 팔 판사와 함께 일본 우익에서 엄청나게 띄워주는 인물이다.반대로 일본을 영국과 똑같은 제국주의 침략자로 보고 비난하던 자와할랄 네루를 반일이랍시고 비난한다.[2]
4 음모론
갑작스런 폭사 때문에 그의 죽음에 대한 음모론이 몇 가지 있다. 찬드라 보세가 사고를 당한 비행기에는 군자금으로 쓰던 막대한 금괴와 일본인 고문들이 함께 타고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찬드라 보세는 행방불명되고 금괴의 행방도 묘연한데, 왠지 그 고문들은 그 뒤에 어디서 얻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자금으로 잘 먹고 잘 살았다는…이야기가 있다. 사실 찬드라 보세가 망명을 결심할 시기는 만주 작전으로 인해 소련과 일본간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일본인이 소련에 자발적으로 간다는 것 자체가 굴라그로 가는 것과 동의어가 될 정도로 웃기는 일이 되었고, 전쟁도 패배하기 직전인 마당에 찬드라 보세가 더 이상 일본에 필요하지 않았으므로 현실성이 높다. 당장 관동군도 소련군에게 벗어나려고 현지 일본인을 버리고 일본으로 도주하는 것이 그 당시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로는 보세는 사실 죽지 않았고 지금 타이완에 있는 유골은 DNA 검사 결과 가짜라는 것이다. 즉 무사히 일본 고문들의 도움으로 러시아로 갔지만 아직 연합국과의 친교가 필요했던 스탈린이 보세를 시베리아로 보냈고, 거기서 최후를 맞이했다는 것.[3] 인도 정부에서 수차례 이 설을 조사했지만 아직도 명확한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당시 타이완의 기록이나 미국측의 정보 조사에 따르면 보세가 사망했다는 비행기 사고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일어나지 않은 사고로 사망했다는 것이 공식 기록인 셈.
인도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는 또 다른 음모론에 따르면, 보세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자와할랄 네루가 손을 써서 보세를 암살(혹은 시베리아에 있는 걸 알고 모른채)하여 경쟁자를 제거했다는 주장도 있다. 독립운동의 세 거두 중 마하트마 간디는 세속적 권력에는 관심이 없는 구름 위에 있는 사람이니 경쟁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고, 최대 경쟁자였던 네루와 보세의 대립이 암살이라는 형태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단 이 설 역시 확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도에서 은거하다가 1985년에 사망한 힌두교 승려가 사실 이때 탈출한 찬드라 보세라고도 한다.[4] 조사 위원회는 이 사실을 무시했지만 음모론자들에 따르면 이 승려 사망시 정부에서 긴급히 시체를 처분했고, 심지어 유골에 황산을 끼얹어 검사를 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승려의 소지품은 모두 압류했다고 한다. 이 승려가 살던 곳에서는 지방에서 보세의 탄신일을 결부시켜서 기념한다고 한다. 하지만 보세와 같이 독일로 일본으로 날아다니며 적극적으로 움직인 정치가가 종전 이후 갑자기 은거했다는 것도 납득하기는 어렵다.
- ↑ 전후 기록에 의하면 위장 전향한 사람들도 꽤 되었고 적어도 3명 이상의 인도군 장교가 영국군 진지로 탈출한다.
- ↑ 물론 일본 안에서 그렇지, 인도에 가면 그런 소리 못한다. 간디와 찬드라 보세의 후손과 달리 네루의 후손들은 지금도 인도 정계를 좌지우지하는 정치 명문가이니 막대한 인도 시장이나 인도 정계와 원수될 일이니까. 일본 정치인들이 인도에 가면 네루의 무덤에 헌배하고 네루를 찬양해주는게 현실. 게다가 후술하겠지만 찬드라 보세 본인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에 공감한 것도 전혀 아니기 때문에 자기네들의 변명에 찬드라 보세를 끌어드리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할 수 있다.
- ↑ 실제로 소-인 외교 관련 회의때 흐루쇼프가 인도에서 원한다면 48시간내에 보세를 귀국시키겠다. 내지는 생존확인을 해주겠다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이야기도 56년 이후에는 사라진다
- ↑ 조작설에 휩싸이긴 했지만 네루의 장례식을 촬영한 영상에 보세와 상당히 비슷한 승려하나가 참배하는 장면이 찍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