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음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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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칙에 패전이라는 말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물론 항복이라는 말도 사용되지 않았다. 잔혹한 원자폭탄이 이 전쟁의 종결 이유라고 했다. 그리고 다른데서 말한 것처럼, 조칙에서는 "일찍이 미·영 2개국에 선전포고를 한 까닭도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 것만이 이 전쟁의 목적이라고 했다. 그래서 만일 구 군인이 장래에 자기 좋을대로 역사를 다시 쓸 기회를 얻는다면, 그들은 이 조칙의 텍스트를 기반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전쟁을 그만둔 것은, 단지 우리 적의 비인간적인 행동에 의한 것이었다. 우리의 천황은 휘하의 군대가 깊은 상처를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살육을 막는 데 동의했다. 왜냐하면 천황은 일본의 구세주일 뿐 아니라 어떠한 잔학행위에도 반대하는, 인간 문명의 방위자이고자 하기 때문이다.

- 로베르 길랭, '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 누구의 책임이나 권한도 침범하지 않고, 자유로이 나의 의견을 피력할 기회를 처음으로 얻은 것이다. 이에, 나는 그간 생각하고 있던 소신을 표함으로써 전쟁을 그만두게 한 것이다.

- 히로히토가, 총리 스즈키 간타로의 요청으로 성단을 내린 것을 소회하며 당시 시종장 후지타 히사노리에게 한 말.

한국어 : 옥음방송
일본어 : 玉音放送 (ぎょくおんほうそう)
영어 : Jewel Voice Broadcast
헵번 식 로마자 표기 : Gyokuon-hōsō

1 개요

1945년 8월 15일, 정오 뉴스에 방송된 일본 제국GG항복선언이다. 덴노의 조서 낭독 녹음본을 재생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내용은 일본 제국의 국가원수인 히로히토가 연합국의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는 것으로, 이 방송을 기점으로 길었던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 전쟁은 끝을 고하고, 한국8.15 광복을 맞이한다. 또한 이후 일본은 미국이 점령하여 태평양 최고사령부(SCAP)의 통치를 받게 된다.

옥음방송의 '옥음'이라는 단어는 '왕의 목소리'라는 뜻으로, 해석하자면 친히 목소리를 내셔서 하시는 방송이라는 뜻이 되겠다. 옥음방송이라는 단어 자체는 왕이 국민에게 하는 방송이라는 일반명사지만, 일본에서 이 항복선언 이전엔 덴노가 국민을 대상으로 방송을 한 예가 없었던 데다가, 이 항복선언의 임팩트가 컸기 때문에 옥음방송 하면 대개 이 항복선언을 일컫는다.

태평양 전쟁 항복선언 이전에도 아예 덴노의 목소리가 전파를 탄 사례가 전무했던 것은 아닌데, 우연히 어느 스포츠 행사의 NHK 실황중계 중에 히로히토의 육성이 마이크에 잡혀서 송출된 적이 있다. 히로히토가 이 사실을 긍정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갔지만, 당시 NHK의 기술진부터 총재(!)까지 모두 궁내청에서 불경죄가 떨어질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는 후문.

전제왕조 국가에서는 다양한 관례 때문에 서민이 왕과 직접 접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이야기할 일이 있으면 평민-신하-신하-신하-시종-왕으로 이루어지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덴노와 직접 대화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특권'으로 취급되었던 것인데, 이처럼 평상시에 국민에게도 말씀을 아끼던 높으신 분이 입을 처음으로 연 게 하필 항복선언이었던 셈이다. 영화 킹스 스피치에서 드러나듯 영국의 조지 6세잘 하지도 못하는 연설을 2차대전 동안 여러 번 한 것과 대조된다.[1]

이후에도 덴노가의 공식 발언은 직접 송신되는 경우가 드물고, 대개 각료나 아나운서의 말을 거쳐 전달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소위 옥음방송에 해당하는 사례는 현대에도 많지 않다. 항복 당시로부터 66년이 지난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후인 3월 16일 오후 4시 35분에 아키히토가 위로 메세지를 발표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

다만 앞서 말했듯이 옥음방송이라는 용어 자체가 지극히 일본을 기준으로 한 표현이기에, 타국에서는 '왕의 목소리'라는 '옥음'이라는 용어 자체에 불쾌함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래서 대체로 항복선언이라고 일컫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일단은 조서의 명칭도 '대동아전쟁 종결의 조서'이다. 중국 측의 용어인 '종전조서'라는 표현도 쓰인다. 사실 종전조서도 일본의 항복이라는 의미가 드러나있지는 않은 용어이다. 관점의 차이를 존중하기 위해 종전조서로도 리다이렉트를 걸었다.

황족이 하는 방송 아니랄까봐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대국민 방송 주제에 일반인은 알기 어려운 낡은 표현이 떡칠되어 있는 건 예사고, 빙빙 에둘러 서술하는 문어체식 표현으로 되어 있어 얼핏 들으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에 심지어 당대의 일본인들조차도(…) 이 연설이 무슨 내용인지 처음에는 제대로 이해한 이들이 많지 않았다는 언급이 있으나, 이는 당시 증언들이 엇갈린다. 읽다보면 자신들을 변호하는 내용이다. 자세한 건 후술.

2 종전? 항복?

일단은 일본 제국의 항복선언임에도 항복이라는 용어가 전혀 사용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이전 버전에서는 "애초에 연합국 측에서도 '항복하라'가 아니라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라'는 입장을 밝혀왔다. 물론 포츠담 선언 자체가 일본군의 무장 해제 및 전쟁 종료를 담고 있었으니 사실상 완곡하게 항복 요구를 한 것이고, 그에 대한 답변으로 이 방송도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겠다'며 완곡하게 항복선언을 한 것이니 딱히 이상할건 없다."라고 서술하고 있었으나,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국, 영국, 지나(중국), 소련 4개국의 공동 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는 문구에서 이 조서의 성격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즉, 히로히토는 이 조서에서 자신의 신민들과 제국정부를 분리하면서, 항복 사실을 (제국정부가 아닌) 일반 신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린 것이다. 항복 사실 자체는 제국정부에서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애초에 히로히토의 결정 자체가 정부회의에서 나온 것이다) 제국정부에게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라고 하는 목적은 아니다.

이게 왜 이런가를 이해하려면 당시 내각과 덴노, 그리고 메이지 헌법과 일본 국내 상황을 생각해봐야 한다. 태평양 전쟁 말기, 패색이 짙어진 후부터, 일본 내에는 본토결전을 운운하는 육군 중심의 강경파와 항복할 수밖에 없다는 외무성을 중심으로 한 화평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대립 속에서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머뭇거리는 일본을 상대로, 연합군은 폭격핵공격을 퍼부었고 소련도 참전하기에 이른다.

사태가 이렇게 흘러가자 사실상 일본 제국의 컨트롤 타워인 최고전쟁지도회의에서는 항복할 수 밖에 없다고 보았지만, 포츠담 선언 수락에 우리도 조건을 붙여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자 그럼 그 조건을 뭘로 한 것인가에 대해 다시금 대립하기에 이른다. 핵심은 '국체 보존'이라는 것으로 '천황제의 유지'를 절대적 선결조건으로 함을 의미하였다. 이에 사태를 현실적으로 보고자 했던 외무성 측에서는 그것만 있으면 충분하다, 빨리 수락하자는 의견을 냈으나 육군의 수장이었던 아나미 고레치카는 그것을 위한 추가 조건[2]을 더 내세우며 뻗대고 있었다. 외무성은 이후에도 아나미 육군대신이 항복결정에 다시 어깃장을 놓을까봐 상당히 전전긍긍했다.

이렇게 뻗대고 있던 중에 8월 9일, 나가사키에 마저 핵이 투하되었고, 보다 못한 스즈키 간타로 수상은 당일 심야에 곧바로 임시 각의까지 열며 결론을 내고자 했으나 도무지 대립은 끝날 줄을 몰랐다. 도고 시게노리 외무 대신와 해군 대신, 추밀원 의장이 포츠담 선언 수락에 찬성했고 아나미 육군대신을 중심으로 우메즈(육군) 참모총장, 토요다 (해군)군령부총장이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스즈키 간타로 수상은 히로히토의 생각을 물어보았다. 그 자리에서 히로히토는 '내 생각은 외무대신 생각이랑 같음'이라고 말한 것이다. 즉, 포츠담 선언의 수락이라는 큰 틀 자체는 8월 9일 23시경에 이미 결정된 사실이었다.

8월 10일, 스즈키 간타로는 연합군 측에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겠다는 뜻을 통보했다. 이에 연합군은 8월 12일, 답서를 보냈으나 그 답서의 내용을 가지고 다시금 육군이 반발하기 시작한다. 문제가 된 부분은 덴노와 일본 정부는 연합군 사령관에게 'subject to' 한다는 구절이었다. 외무성은 연합군 사령관의 제한하에 둔다고 번역했지만, 육군성은 연합군 사령관에 예속된다고 번역, "그렇게 되면 국체 유지 불가능함"를 외치며 최종결재를 하지 않고 뻗댄 것이다.

이에 8월 14일 오전 11시에 다시금 합동 어전회의가 열렸다. 역시나 위의 3명은 옥쇄를 주장했지만, 히로히토는 다시금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겠다는 최종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이 자리에서 최후의 결정을 내렸다'고 말하기에 이른 것이다. 도조 히데키가 도쿄재판에서 말했듯이 '일본의 고관이 덴노의 뜻에 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3] 포츠담 선언에 반대했던 군부 인사들도 이제는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8월 14일 오후 항복선언의 초안이 작성되고 녹음 준비를 위해 NHK의 기술진들과 총재가 국민복 차림을 한 채[4] 궁내청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초안이 정서되지 않아[5] 밤 9시경까지 초안이 완성되지 않았고, 기껏 정서를 끝내놨더니 또 '전세가 불리하여'란 구절을 '유리하지 않아'로 바꾸는 등[6] 이런저런 병크로 인해 녹음기술진들과 히로히토는 7시간 가까이 대기하게 된다. 이윽고 3번에 걸친 녹음 끝에 오후 11시 30분 조서 낭독 녹음이 종료되었고, 이를 우여곡절 끝에 다음날 정오에 방송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태평양 전쟁의 종결에 이른바 덴노의 결정이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대공황으로 허우적대던 일본 내에서 군부가 대두하여 을 일으키더니 그 전비의 지출로 다시 허우적대다가 일으키게 된 것이 태평양 전쟁이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전쟁은 군부와 그들이 점거한 정부내각에 책임이 있고 히로히토는 죄가 없다는 식의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전후에 만들어진 오늘날의 상징 천황제를 과거에 투영하는 것은 잘못이다. 일제 시절의 천황은 상징 천황도 아니었으며, 무가 정권기의 허수아비도 아니었다. 특히 전후 증언들을 종합해 보면 이미 당시의 각료들은 '전범'으로 처형될 것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메이지 헌법에 따르면 선전포고는 국무대신의 보필 사항에 속했다. 당시 헌법에서는 "국무 각 대신은 천황을 보필하고 그 책임을 진다"라고 되어 있었다. 즉, 천황의 '군주무책임론'이 성립 가능한 것은 천황의 결정에 국무대신들이 보필하고, 그 책임도 대신들이 지기 때문인 것이다. 문제는 개전[7]이 내각이 아니라 보필 책임이 없는 참모총장, 군령부총장, 육해군 차장 등이 참석하는 대본영-정부 연락회의(, 연락간담회)에서 사실상 결정된 것이라는 데 있다. 결국, 국무 대신의 보필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기 때문에 법적으로도 히로히토는 전쟁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것이 맞다.

천황의 결정이 있음으로써 종전이 가능했다면, 반대로 천황에게는 개전 책임도 있다는 논리가 가능해진다. 이를 위해 개전 조서에서는 다른 신민들과 분리되어 서술되지 않았던 '제국정부'가 분리되는 등의 작업이 진행되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상징천황제를 과거에 투영하여 히로히토도 사실은 재가만 하는 기계였을 뿐이라는 식의 인식은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내려져서는 안 될 결정이 내려졌으니, 그럼 왜 이제와서 덴노가 그러한 결정을 내렸는지 온갖 구실을 붙여야만 했고, 그 결과물이 이 조서였던 것이다. 때문에 조서에서는 덴노 자신이 바라왔던 것은 만방공영과 같은 좋은 것이지, 전쟁을 벌여 타국을 침략하는 등의 나쁜 행위는 바라지 않았다는 식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결코 전국이 호전되지 않았고, 세계의 대세 역시 유리하지 않으며[8] 적은 새로이 잔학한 폭탄(원폭)을 사용해 빈번히 무고한 백성들을 살상했기 때문에 결국 인류 문명의 보호자인 덴노가 제국 정부로 하여금 포츠담 선언에 응하도록 지시한다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또한, 중일전쟁에 대한 서술을 생략함으로써 태평양 전쟁 4년 만을 전쟁으로 상정한다.

결국 항복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은 것과 전반적 내용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정신승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3 방송

3.1 예고

8월 14일 오후 9시 뉴스, 그리고 15일 7시 21분 뉴스로 2번에 걸쳐 방송을 예고하였다. 15일 오전 중 덴노가 직접 조서를 발하여 발표가 있을 예정이니 모두 빠짐없이 잘 들으라는 안내가 그 내용이었다. 이 때문에 평소에 전력부족으로 인하여 주간 송전을 중단하던 지방의 임시방송소 14곳 모두에도 15일 오전에는 특별송전이 실시될 예정이었다.

3.2 영상


위의 동영상은 1945년 8월 15일 당일 정오, 2016년으로부터 71년 전 실제로 라디오로 방송된 자료다.

2015년 8월 1일, 일본 궁내청에서는 종전 70주년을 맞아 위 항복 방송 녹음 원판 사진과, 이 원본에서 디지털로 녹음한 고음질 음성을 일반에 공개했다. #(일본어) 디지털 녹음본(mp3)


3.3 구성

1. 정오 시보.

2. 와다 노부카타[9] 아나운서의 멘트.
"지금부터 중대한 발표가 있겠습니다. 전국의 청취자 여러분께서는 기립해주시기 바랍니다."

3. 정보국[10] 총재 시모무라 히로시의 멘트.
"덴노께서 황공하옵게도 친히 전 국민에게 칙서를 말씀하시게 되셨습니다. 지금부터 삼가 옥음(玉音)을 방송해 드리겠습니다."

4. 기미가요 반주 연주.[11]

5. 조서 낭독. (녹음본)

6. 기미가요 반주 연주.

7. 정보국 총재 시모무라 히로시의 멘트.
"삼가 덴노의 옥음방송을 마칩니다."

8. 와다 노부카타 아나운서의 멘트.
"삼가 조서를 봉독하겠습니다."

9. 조서 재낭독.

10. 이후 종전 관련 뉴스, 총리 담화, 포츠담·카이로 선언 요지, 해당 선언 수락문 요지 등의 방송.

3.4 조서 내용

이하의 원문은 일본어를 아는 사람도 읽기가 쉽지 않은데, 이는 이 글이 일본어 문어체로 쓰여 있는 데다가, 히라가나 대신 가타카나가 사용되고 한자도 현대의 신자체가 아닌 구자체로 되어 있는 등 역사적 가나 표기법의 영향 하에 작성되었고[12], 탁음을 표현할 때 쓰이는 탁점(゛)도 사용되지 않는 등 표기법이 현대 일본어와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어로 치면, 기미독립선언서 원문급 이상이라 할 수 있다. 朕이世界大勢와帝國의現狀을鑑ᄒᆞ야非常措置로時局을收拾코쟈忠良ᄒᆞᆫ爾臣民에告ᄒᆞᆫ다 같이 씌여 있는 격.[13]

상술했듯이 문장 자체가 논점을 돌려 말하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어 문어체를 알아도 곧바로 해석하기 어려운 건 덤이다.

3.4.1 원문

朕深ク世界ノ大勢ト帝國ノ現状トニ鑑ミ非常ノ措置ヲ以テ時局ヲ收拾セムト欲シ茲ニ忠良ナル爾臣民ニ告ク

朕ハ帝國政府ヲシテ四國ニ對シ其ノ共同宣言ヲ受諾スル旨通告セシメタリ

抑々帝國臣民ノ康寧ヲ圖リ萬邦共榮ノ樂ヲ偕ニスルハ皇祖皇宗ノ遣範ニシテ朕ノ拳々措カサル所曩ニ米英二國ニ宣戰セル所以モ亦實ニ帝國ノ自存ト東亞ノ安定トヲ庶幾スルニ出テ他國ノ主權ヲ排シ領土ヲ侵スカ如キハ固ヨリ朕カ志ニアラス

然ルニ交戰已ニ四歳ヲ閲シ朕カ陸海將兵ノ勇戰朕カ百僚有司ノ勵精朕カ一億衆庶ノ奉公各々最善ヲ盡セルニ拘ラス戰局必スシモ好轉セス世界ノ大勢亦我ニ利アラス加之敵ハ新ニ殘虐ナル爆彈ヲ使用シテ頻リニ無辜ヲ殺傷シ慘害ノ及フ所眞ニ測ルヘカラサルニ至ル

而モ尚交戰ヲ繼續セムカ終ニ我カ民族ノ滅亡ヲ招來スルノミナラス延テ人類ノ文明ヲモ破却スヘシ斯ノ如クムハ朕何ヲ以テカ億兆ノ赤子ヲ保シ皇祖皇宗ノ神靈ニ謝セムヤ是レ朕カ帝國政府ヲシテ共同宣言ニ應セシムルニ至レル所以ナリ

朕ハ帝國ト共ニ終始東亞ノ解放ニ協力セル諸盟邦ニ對シ遺憾ノ意ヲ表セサルヲ得ス帝國臣民ニシテ戰陣ニ死シ職域ニ殉シ非命ニ斃レタル者及其ノ遺族ニ想ヲ致セハ五内爲ニ裂ク且戰傷ヲ負ヒ災禍ヲ蒙リ家業ヲ失ヒタル者ノ厚生ニ至リテハ朕ノ深ク軫念スル所ナリ

惟フニ今後帝國ノ受クヘキ困難ハ固ヨリ尋常ニアラス爾臣民ノ衷情モ朕善ク之ヲ知ル然レトモ朕ハ時運ノ趨ク所耐ヘ難キヲ耐ヘ忍ヒ難キヲ忍ヒ以テ萬世ノ爲ニ太平ヲ開カムト欲ス[14]

朕ハ茲ニ國體ヲ護持シ得テ忠良ナル爾臣民ノ赤誠ニ信倚シ常ニ爾臣民ト共ニ在リ若シ夫レ情ノ激スル所濫ニ事端ヲ滋クシ或ハ同胞排擠互ニ時局ヲ亂リ爲ニ大道ヲ誤リ信義ヲ世界ニ失フカ如キハ朕最モ之ヲ戒ム

宜シク擧國一家子孫相傳ヘ確ク神州ノ不滅ヲ信シ任重クシテ道遠キヲ念ヒ總力ヲ將來ノ建設ニ傾ケ道義ヲ篤クシ志操ヲ鞏クシ誓テ國體ノ精華ヲ發揚シ世界ノ進運ニ後レサラムコトヲ期スヘシ

爾臣民其レ克く朕カ意ヲ體セヨ

(御名御璽)[15]

昭和二十年八月十四日

눈 앞이 막막해진다

3.4.2 현대 일본어 번역

朕は深く世界の情勢と日本の現状を考えた結果、緊急の方法でこの事態を収拾したいと思い、忠実にして善良な国民の皆さんに告げる。

朕は帝国政府として「アメリカ、イギリス(英国)、中国、ソ連の4カ国に共同宣言を受け入れる旨を伝えて」と指示した。

もともと、日本臣民が平穏無事に暮らし、皆の楽しみを分かち合い、その喜びを共有する事は天皇の先祖、代々の教えで、朕も常に心に持ち続けてきた。

先にアメリカとイギリスに宣戦を布告した理由も、日本の自立とアジアの安定を心から願うからであり、海外に出て他国の主権や領土などを侵略するような事は、もともと朕が思うところではない。

しかしながら戦争は4年を過ぎ、陸海軍の将兵の勇敢な戦いぶり、多くの官僚の努力、一億国民の自己を犠牲にした活動、それぞれが最善を尽くしましたが、戦況はよくならず世界情勢もまた我らが国にとって有利とはいえない。

その上、敵は新たに残虐な爆弾(原子爆弾)を使用して多くの罪なき人を殺し、被害の及ぶ範囲を測る事もできない。

このまま戦争を続ければ、日本民族の滅亡を招くだけでなく人類の文明も破壊させるに違いない。

そんなことになってしまえば、朕はどうやって多くの臣民と子孫を守り天皇の先祖の御霊に謝罪すればよいのか。

以上が朕が政府に共同宣言に応じるように命じた理由だ。

朕は、日本と共に東アジアの解放のために協力してくれた友好国に対し遺憾の意を表せざるを得ない。

臣民の中で戦地で命を失った者、職場で命を失った者、思いがけず悲惨な死に倒れた者、またその遺族のことを考えると、身も心も引き裂かれる思う。

かつ、戦争で傷を負い、被害に遭って家や仕事を失った臣民の健康と生活についてとても心配している。

これから日本が受ける苦難は尋常なものではない。

皆の臣民の衷情も朕はよく知かっている。.

けれども朕は時の運にも導かれ耐えられない事にも耐え、我慢できない事にも我慢し、今後の世界の未来、平和への道を開いていきたいと思っている。

朕はここに国家国体を守る事ができ、忠実にして善良な臣民の真心を信頼し常に臣民と共にある。.

もし、感情の赴くままに問題を起こしたり、仲間同士で排斥したり、情勢を悪化混乱させたりして道を踏み外し、世界の信用を失うことは朕が最も戒める事だ。

その事を国が一つとなって家族のように団結し、神州(日本)の不滅を信じ、責任は重く道は遠いということを心に留め、持てる力の全てを将来の建設のために傾け、道義を大切にし、固くその考えを守り、誓って我が国の国柄の本質を奮い立たせ、世界の流れから遅れないように心に刻むようにせよ。

皆の臣民は、これらが朕の意志だと思ってよく守るようにせよ。

(御名御璽)

昭和二十年八月十四日

[16]

3.4.3 한국어 번역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서 시국을 수습코자 충량한 너희 신민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17][18] 4개국에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

대저, 제국 신민의 강녕을 도모하고 만방공영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자 함은 황조황종(皇祖皇宗, 열성조)의 유범으로서 짐은 이를 삼가 제쳐두지 않았다. 일찍이 미영 2개국에 선전포고를 한 것도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하는 행위는 본디 짐의 뜻이 아니다.

그런데 교전한 지 이미 4년이 지나 짐의 육해군 장병의 용전(勇戰, 분투), 짐의 백관유사(百官有司)의 여정(勵精, 노력), 짐의 일억 중서(衆庶, 국민)의 봉공(奉公, 국가를 받듦) 등 각각 최선을 다했음에도, 전국(戰局)이 호전된 것만은 아니었으며 세계의 대세 역시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적은 새로이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무고한 백성들을 거듭 살상하였으며 그 참해(慘害, 참상)가 미치는 바는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욱이 교전을 계속한다면 결국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 뿐더러, 나아가서는 인류의 문명도 파각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짐은 무엇으로 억조의 어린 백성[19]을 보전하고 황조황종의 신령에게 사죄할 수 있겠는가. 짐이 제국정부로 하여금 공동선언에 응하도록 한 것도 이런 이유다.

짐은 제국과 함께 시종 동아의 해방에 협력한 여러 맹방에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제국신민으로서 전진(戰陣)에서 죽고 직역(職域, 직무)에 순직했으며 비명(非命)에 스러진 자 및 그 유족을 생각하면 오장육부가 찢어진다. 또한 전상(戰傷)을 입고 재화(災禍)를 입어 가업을 잃은 자들의 후생(厚生, 생계)에 이르러서는 짐의 우려하는 바 크다.

생각건대 금후 제국이 받아야 할 고난은 물론 심상치 않고, 너희 신민의 충정도 짐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짐은 시운이 흘러가는 바 참기 어려움을 참고 견디기 어려움을 견뎌, 이로써 만세(萬世)를 위해 태평한 세상을 열고자 한다.

이로써 짐은 국체(國體)를 수호할 수 있을 것이며, 너희 신민의 적성(赤誠, 정성과 노력)을 믿고 의지하며 항상 너희 신민과 함께 할 것이다. 만약 격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함부로 사단을 일으키거나 혹은 동포들끼리 서로 배척하여 시국을 어지럽게 함으로써 대도(大道)를 그르치고 세계에서 신의를 잃는다면 이는 짐이 가장 경계하는 일이다.

아무쪼록 거국일가(擧國一家) 자손이 서로 전하여 굳건히 신주(神州, 일본)의 불멸을 믿고, 책임은 무겁고 길은 멀다는 것을 생각하여 장래의 건설에 총력을 기울여 도의(道義)를 두텁게 하고 지조를 굳게 하여 맹세코 국체의 정화(精華)를 발양하고 세계의 진운(進運)에 뒤지지 않도록 하라.

너희 신민은 이러한 짐의 뜻을 명심하여 지키도록 하라.

(어명어새)

소화 20년 8월 14일

번역자님께 감사드립니다!!

4 반응

4.1 일본인

조서의 내용이 표현이 어렵고 우회적이어서 일본인들이 당시 잘 알아듣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많으나 이는 확실치 않은 사항이다.

이 조서를 봉독한 와다 아나운서의 경우, 당시를 회고하며 조서 녹음본이 방송되는 중에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많았다고 하는가 하면, 당시 방송을 들으며 우는 이들의 모습이 짜여진 각본이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알아들었을 리가 없다는 증언도 있다. 혹자는 알아들었어도 울기는 커녕 웃을 일이었다며 전쟁 말의 일본의 상황을 증언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우는 이들의 연출은, 실제 당시에 대동되었던 사람들의 증언으로도 증명되었다.

한편, 옥음방송과 관련하여 NG가 나서는 안 되었기에, 미리 방송국에는 언질을 주었고 신문사에서도 관련 보도를 이미 인쇄 완료하였다는 증언들도 있다. 가령 조서 본문이 어렵고, 음질마저 안 좋아 못 알아들었어도 뒤이은 뉴스의 내용 때문에 뭘 의미하는지는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덴노가 친히 발표한다는 것 자체를 믿지 않은 사람도 많았다고 하나, 2차례에 걸쳐 옥음이 방송될 예정이니 임시로라도 장비를 마련하여 방송 취약지대도 모두 잘 들을 수 있도록 대비하라는 말이 내려온 것을 보면 어떨까 싶다.

한편, 이게 무슨 소린고 고민하는 일반인들과 달리 육군은 분노에 가득차 있었다. 이미 내각에서 수락 반대의 의견을 밀고가지 못한 채 종전조서에 서명한 육군대신 아나미 고레치카는 육군 내 강경파들의 지탄 속에 할복자살하였고, 이에도 분이 풀리지 않은 강경파는 이 음반을 방송 전에 탈취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예기치 못한 사태가 일어날 것을 대비해 미리 백업판을 만들어 두었다고 한다.[20]

4.2 한국인

초반: 뭐라고? 잘 안 들려! 중반: ?????? 후반: 대한독립만세!!!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도 당연히 일본 땅이었고 조선인들도 엄청난 차별이 있었으나[21] 일본 국민이었기 때문에 NHK 월드 라디오의 전신인 동아방송[22]에서 단파방송으로 그대로 전달되었다. 한반도 외에도 당시 일본령이었던 중국 점령지, 대만 등에도 방송하였다.

그러나 단파방송의 특성상 수신이 잘 안되는 지역에서는 음질이 너무 구렸고, 거기에 녹음본 자체의 음질도 문제가 있는데다가, 잘 들렸어도 일본어를 아는 이들도 많지 않았고 문장이 일본인도 알아듣기 힘든만큼 난해했던 탓에 일본어를 아는 사람들도 처음에는 알지 못하였다.

그러다 나중에 그 내용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 - 한국에서는 사실상 조국이 독립된 것이나 다름없는 내용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광복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 일설에 의하면 이미 당시에는 민족 말살정책으로 인해 황국신민화 교육이 빠르게 이루어져서 어린아이들은 자신이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슬퍼한 사람까지 있었다고... 자세한 것은 8.15 광복을 참조.

5 그 밖에

히로히토는 이 방송을 3번에 걸쳐 녹음하였다. NHK의 엔지니어는 처음에 OK를 냈으나 히로히토 본인이 "너무 톤이 낮은 것 같다"며 다시 녹음하고자 했고, 2번째는 발음이 씹혀서(...) NG를 냈다. 3번째의 녹음이 방송에 사용되었고, 이는 2개의 녹음기를 통해 녹음되었고, 총 6분 가량의 방송이었다. 1면당 3분에서 4분 반 정도밖에 녹음할 수 없었던 당시 SP 음반의 기술적 한계 때문에 6분 가량의 방송을 2장에 걸쳐 녹음했다.[23]

다만 당시 NHK 엔지니어들은 처음 고쿄에 들어갈 때 1대의 녹음기만을 소지했다. 나머지 1대는 추후 예비용으로 보관중이던 녹음기를 1대 더 급히 들고 온 것. 당시 사용된 녹음기는 일본 전기 음향[24]의 DP-17-K가 사용되었고, 일본 NHK 방송국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녹음본은 SP 녹음인 것을 감안해도 음질이 좋지 않다. 우선 당시 일본의 방송 기술이 딸려서(...) 노이즈가 심한 것도 있고,[25] 오픈릴 테이프가 없었기 때문에 잡음이 심한 아세테이트 디스크에 녹음해야 했던 상황도 감안해야 한다.

일부에서는 항복선언인 만큼 쪽팔려서 천황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리게 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잡음을 많이 넣어 녹음하게 했다는 음모론을 제기하고 있지만, 그보다는 천황의 목소리가 더 잘 들리게 하려고 임의로 출력을 증폭시킨 것이 되레 심한 잡음을 유발했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26] 당장 당시 입궐했던 NHK의 음향기술자들은 DP-17-K를 갖고 간 이유를 일본에서 가장 최신식인 기계라서라고 증언하고 있다(...)

녹음된 SP반은 궁성사건에 휘말려[27] 제작 당시부터 2개의 세트로 제작되었다. 이에 처음 녹음한 것을 부(副), 나중에 녹음한 것을 정(正)으로 정하고 각자 따로 보관하였다. 이 때 부본은 화려한 오동나무 상자에 덴노가의 문장이 자수놓아진 보랏빛 천에 감싸는 등 아주 화려하게 치장을 하고, 정본은 네모진 가방(생긴 것이 딱 방독면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넣어 궁내청 시종 숙소에 처박아 놓았다.(...) 훼이크다 이 병신들아 중간에 쿠데타군에게 탈취당할 것을 우려한 도쿠가와 시종의 아이디어가 그대로 들어맞은 셈.

15일 새벽, 마침내 다나카 동부군 사령관에 의해 쿠데타가 제압된 후에야 정본과 부본 모두 NHK로 이송되었으며, 정오가 막 지난 후 NHK 제8스튜디오에서 정본이 송출되어 일본 전국과 점령지에 방송되었다.

또한 전후로 SP의 소재가 불분명해졌는데, 방송을 치욕스럽게 생각한 황실에서 디스크를 은닉해서라는 설이 있다. 한 동안 공식 녹음반이 분실 혹은 파기되었다고 알려졌지만, 방송 1년 뒤 미군이 당시 옥음방송 녹음을 담당한 엔지니어를 불러와 복제반을 제작했다. 하지만 복제반 제작시 재생 속도와 원판 녹음 속도의 미세한 오차로 인해 현재 일반적으로 유포되고 있는 음원은 피치가 조금 낮다고 한다.

한편 뒤늦게 발견된 원본 음반 또한 NHK 방송 박물관에서 질소가스를 충전해 보관 중인데, 이 아세테이트제 디스크가 품질이 조악해 열화되어버리는 바람에 복구는 되었지만 실제 재생은 어려울 것이라고 한다. 물론 복각 기술이 발달한 21세기에 와서는 잡음을 상당 부분 제거해 비교적 또렷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2011년 5월에 일본의 복각 전문 레이블인 알투스에서 발매된 황기2600주년 기념 봉축곡의 CD에 보너스 트랙으로 실리기도 했다. 지네 나라 왕의 GG선언을 보너스 트랙으로 넣는 열도의 위엄[28]

히로히토의 항복 방송에 대한 비화에 대해 알고 싶은 위키러에게는 KBS의 <8.15특집 전쟁과 일본 제3부 히로히토와 종전조서>라는 다큐를 추천한다.[29] KBS 파노라마 보다 보면 피꺼솟 이외에는 문예춘추에서 발간한 <일본의 가장 긴 하루>가 90년대 중반 한국에서도 정발되었지만 지금은 절판되어 찾기 어려운데, 일본인의 시점에서 쓰여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거슬리는 부분들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 다만 레퍼런스 자체는 상당히 자세한 편.

옥소리와는 관계없다.
  1. 이는 동양에 비해 서양의 교육과 문화가 스피치를 매우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이어져 온 전통으로 현대에도 실리콘 밸리의 사업가들은 일단 마이크를 잡고 프리젠테이션부터 시작한다.
  2. 일본 내 연합군 주둔지 및 그 기간의 최소화, 일본 주도의 무장 해제와 전범 처벌(...)
  3. 물론 이 발언이 나온 후 6일 뒤, 도조는 이 발언을 철회한다. 이 발언은 도조가 자신은 전쟁에 책임이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한 발언이 아니라, 기도 고이치가 평화를 바라는 덴노의 생각에 반하여 이런 저런 행동을 한 것을 알고 있느냐는 변호인의 질문에 나온 대답이었다.
  4. 일본 왕실은 전쟁 중에도 드레스코드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평상복 차림으로라도 들어오라는 특별지시가 따라붙었다.
  5. 인쇄본을 신문사에 돌리기 위해 붓글씨로 쓰지 않고 등사용 철필로 긁었다. 그리고 궁내청 특유의 끝단 맞추는 정서법으로 인해 이건 뭐 한국 공문서랑 똑같잖아 끝부분 7자를 남기고 다시 정서했다(...)
  6. 결국 이 부분은 붓글씨로 가필하였다.
  7. 특히 태평양 전쟁의 원이이 된 진주만 공습.
  8. 결코 불리해져 갔다가 아니다!
  9. 1912년 도쿄 출생. 와세다대학 중퇴후 22세의 나이로 NHK 아나운서 입사. 1952 헬싱키 올림픽 중계방송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하였다. (평소 폭음으로 인한 건강 악화가 원인이 된 것으로 추정.)
  10. 내각정보국이라고도 하나 정보국이 공식 명칭
  11. 국가적 차원의 방송이라서 기미가요를 처음과 끝에서 틀어준다.
  12. 애초에 현대가나표기법이 제정된 것이 일제 패망 이후인 1946(쇼와 21)년의 일이다.
  13. 사실 근대 일본어와 조선어의 문어체는 굉장히 닮은 구석이 많다. 조사만 빼고 다 한문으로 구성된 문장이라던가. 무슨 뜻인지 알아볼 수 없는 것조차 공통점
  14. 이 '만세를 위해 태평한 세상을 연다'라는 구절은 주자학의 근간이 된 북송 오자중 장재의 저서의 쓰인 표현을 자기 입맛대로 갖다 쓴 표현이다. 원문은 '爲天地立心 爲生民立命 爲王聖繼絶學 爲萬世開太平(천지를 위해 마음을 세우고 생민을 위해 명(命)을 세우고 성인을 위해 끊긴 학문을 잇고 만세를 위해 태평을 연다.)'로, 근사록(近思錄)에 적혀있다. 하여튼 어떻게든 포장하려고...
  15. 어명어새. 조서에 찍는 덴노의 도장과 서명을 의미
  16. 이 번역은 원문과 100% 같지는 않다. 그리고 위의 영상의 번역문과도 상당히 다른데, 영상의 그것은 정중체로 써져 있어서 여기에선 편집자가 임의로 원문과 동일한 보통체(반말체)로 재번역했다.
  17. 원문은 米英支蘇, 중국을 '支那'(지나, 중국을 가리키는 명칭, 현재는 멸칭으로 사용)로 썼음
  18. 이래놓고서 8월 10일 연합국에 포츠담 선언의 수락을 통보하는 전문 원문에는 미·영·화(華)·소라고 표기하는 비굴함을 보였다. 華는 당연히 중화민국의 약칭.
  19. 원문에 나온 赤子는 갓난 아기란 뜻으로 군주가 자기 백성을 어린 아기에 비유한 단어다. 국어 사전에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국어에서 적자라고 하면 대개 嫡子를 말하기 때문에 어린 백성으로 번역하는 것이 원래 의미에 더 가깝다.
  20. 1945년 8월의 상황에서 일본이 항복선언을 무사히 마친 것은 일본으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만주한반도 북부에서는 소련군만주 작전을 벌이고 있었고, 만약 강경파가 권력을 장악하고 1억 총옥쇄를 유지했더라면 진주만 공습의 참상을 목격하고 나서 모 제독의 입에서 나온 말대로 그해 11월부터 일본어는 지옥에서나 들을 수 있는 언어가 되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21. 잘 알려져 있지만 조선인들은 광복 때까지 2등, 열등국민 취급당했다.
  22. 1963년부터 1980년까지 존속했던 DBS 동아방송과는 관계 없다.
  23. 듣고도 구별 가능하다. 중간에 갑자기 음질이 맑아지는(...) 파트가 있다.
  24. 현재의 데논
  25. 실제로 1930~40년대에 일본과 방송 교류를 했던 독일 측 기술진들은 일본 방송의 음질이 너무 후달려서 중계하기 민망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반대로 일본 측 기술진들은 독일 방송의 음질이 너무 좋아서 열폭했다.
  26. JOAK의 경우 평시 10kw 내외이던 출력을 60kw까지 증강시켰다.
  27. 군 수뇌부와 정부 각료들은 쿠데타의 정확한 정보는 알고 있지 못했지만, "저 또라이 청년장교단이 분명히 2.26처럼 일을 낼 것이다"라는 소문 자체는 이미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28. 물론 상술했듯이 해당 조서 방송은 덴노의 결단으로 미화되었기 때문에 자기들로서는 기념할 만하다.
  29. 실제 KBS 홈페이지에서는 저작권 문제로 다시보기가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