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덕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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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노덕술.jpg
盧德述 1899.06.01~1968년 4월 1일

1 개요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경찰 간부. 경상남도 울산 출신으로 창씨개명 한 일본 이름은 마쓰우라 히로(松浦鴻).

진보든 보수든 양쪽에서 친일파로 공인된 인물이며,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자세한 악행. 혈압주의.

2 이력(?)

울산 보통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일본인 상점에서 일하다가 돈을 더 벌기 위해 홋카이도로 건너가서 일했다고 한다. 귀국 후 1920년에 경남에 있는 순사교습소를 졸업, 경상남도 경찰부 보안과를 시작으로 경찰 근무를 시작하여, 울산경찰서 사법계에 근무하면서 순사부장이 되었고 1924년 경부보, 1932년 경부, 1943년 경시, 1944년 수송보안과장까지 승진했다.

그는 고등계 형사로 악질 친일경찰로 유명했는데, 불령선인으로 찍힌 항일 운동가를 체포하고 고문 취조하는 데에 앞장섰으며 고문치사한 사람까지 나왔고, 고문 취조를 통한 건수 올리기로 일사천리로 승진가도에 올랐다. 어찌나 악랄했던지 민중들 사이에도 친일 고문 경찰=노덕술이라고 인식될 정도. 장택상은 차라리 이 사람보단 양반이라고 인식될 정도다[1]. 사실 노덕술을 능가할 악질로는 고문 전문인 하판락이 있는데, 하판락은 인지도에서 노덕술만 못하다.[2]

해방 이후 잠시 평양 경찰서장을 맡고 있던 중 공산주의 세력에게 체포되어 몇 달간 구금되었다가 1945년 말에 월남하였고, 다음해에 장택상에 의해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에 기용되어 경찰 내의 반이승만 세력 숙청, 좌익분자 검거를 주도하였다. 장택상과 더불어 여운형 암살 배후로 거론되기도 한다.[3] 1946년 4월 당시의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의 암살범 한현우 등 일당들을 검거함으로써 경찰 수뇌부의 인정을 받았고, 이승만으로부터 반공투사라고 극찬을 받기도 했다.

1949년 1월 24일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1949년 1월 26일 공범 백민태의 자수로 반민특위 간부들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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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판에 출석하는 노덕술

노덕술은 지명수배 상태에서도 번호판을 단 경찰 지프에 경호원까지 대동하여 다녔고 내무부장관 윤치영이나 외무부장관 장택상 등의 집을 방문하여 "내가 잡힐 줄 아느냐"며 큰소리도 쳤다고 한다. 결국 동화백화점 사장 이두철의 집에서 검거되었는데 권총 6자루와 다량의 실탄, 현금도 34만 1천 4백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경향신문.

그가 체포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노덕술은 단지 기술자일 뿐이라며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을 직접 만나 그의 석방을 종용했고## 공보처장 명의로 '정부인사의 조사를 중지한다'고 공포하고 특위법의 개정까지도 시도하는등 특위활동을 방해하였다##
이에대해 반민특위위원장 김상덕과 부위원장 김상돈의 당시 국회증언###

노덕술은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무죄판결을 받고 석방되어 바로 경기도 경찰부 보안주임으로 영전하였고, 이후 군에 장교로 입대하여 헌병 중령으로 변신하였으며(참고로 이근안은 군인에서 경찰로 변신) 1950년에는 육군본부 제1사단 헌병대장 1954년 부산 제2육군 범죄수사단장, 1955년 서울 15육군범죄수사대 대장을 지내는 등 밖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로 대공수사 업무를 담당했다.

참고로 그의 일화 가운데 유명한 것은 '저놈 잡아라!' 사건. 이 사건은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의 롤모델 격이며, 1948년 초에 벌어진 장택상 피습 사건의 용의자 임화를 고문하던 중, 임화가 수사관의 폭행으로 인해 사망하자 시체를 몰래 얼어붙은 한강에 구멍을 내고 유기한 후 노덕술이 취조실 창문을 열고 "저놈 잡아라!" 라고 외치며 임화가 도망간 것으로 개드립을 친 것. 자세한 내용은 저놈 잡아라! 항목을 참조바람.

2016년 7월, 뉴스타파의 탐사보도에 의하면, 노덕술은 놀랍게도 이 시기 충무무공훈장을 비롯하여 3개의 무공훈장을 받았다고 한다. 일제시대 때에도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일제로부터 훈장을 받았던 인물이 해방이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처벌은 커녕 훈장을 받았으니...

이후 특무대장 김창룡과 권력을 놓고 암투를 벌이다 이승만 눈밖에 나면서 날개가 꺾인 노덕술은 1956년 군에서 예편한 후 고향 울산으로 내려가 칩거하다가, 1960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4만 1109명 중 1744표(4.24%)만 얻어 전체 8명의 후보 중 6번째로 낙선크리를 먹었다.[4]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다가 1965년 불법 흥신소를 운영한 혐의로 체포당하여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나기도 했다. 이때 앓고 있던 지병이 악화되어 결국 1968년 4월, 서울 종로구 궁정동 자택에서 뒈졌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친일 행위로 몰락했으니 나름 벌을 받은 셈이다.

비슷한 케이스로 김창룡이 있다. 노덕술이 공산게릴라의 공격에 대처할 치안전문가가 필요해서 이승만이 빼준 인물이었다면 김창룡은 군내 좌익 숙청을 목적으로 고른 인물이었으니 역할도 비슷하고 둘이 초래한 부작용도 비슷했다. 차이점이라면 권력 투쟁에서 밀린 노덕술은 자택에서 병사하고 이승만의 총애만 믿고 사방을 적을 만들었던 김창룡은 56년에 암살당했다는 점.

5공 시절 치안본부(현 대한민국 경찰청) 대공수사단장으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축소은폐를 진두지휘했던 박처원 치안감과도 인연이 깊다.[5]

최근 울산의 인물 후보로 선정돼 논란이 일고 있다. 결국 취소되긴 했지만.

선정 기준은

1. 울산 출신일 것
2. 국가와 민족의 발전에 기여한 사람일 것
3. 활동여부를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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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창작물에서의 노덕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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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시대에서는 서영탁이 배우로 등장하는데 찌질한 이정재의 상관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김두한, 유진산, 이정재를 비롯한 반민특위 암살 기도를 했다가, 암살을 맡긴 백민태가 항일 극렬 테러리스트였기에 그대로 자수해서 이정재에게 체포당한다. 하지만 이승만에 의해 노덕술은 풀려나고 오히려 이정재가 체포당해 고문을 당하고 이 일을 계기로 이정재는 정치권에 환멸을 느끼고 경찰을 그만두게 된다.

고문당하고 비참하게 경찰서를 나가는 이정재를 보면서 득의양양했으나, 얼마 후 자기 부하였던 곽영주가 이승만의 눈에 들어 광속출세하는 걸 보고는 뭐 씹은 표정이 되거나 곽영주에게 굽신굽신하는 게 매우 통쾌하다. 6.25 이후로 등장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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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암살에서의 맨 마지막 장면에 반민특위에서 재판을 받은 후 석방된 염석진이 노덕술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의견이 많다. 노덕술은 이후 떵떵거리며 잘 살았지만 염석진은 안옥윤과 명우의 총탄에 사살된다.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것에 대한 울분을 대리만족시킨 것으로 보인다.
  1. 그런데 이 사람을 출세시켜준 장택상은 굳이 나누자면 항일운동가였다. 그런데 이런 반응이 나온 이유는 미군정 시기 장택상의 행동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2. 물론 항목을 보면 알지만, 하판락도 노덕술과 같은 행보를 걸었다. 일제강점기의 악행, 반민특위 체포, 습격으로 탈주, 이후에 잘 먹고 살다가 친일명단 등재.
  3. 직접 암살한 것은 아니지만, 여운형이 지속적으로 테러를 당할 때 경찰임에도 테러범을 봐주고 고의적으로 방관함으로써 암살을 유도하였다. 그리고 노덕술은 암살범들하고 비밀리에 서로 짜고 '단독범행'으로 축소하는데 커다란 일조를 했고...
  4. 당시에는 친일파라 해도 고향의 인재라면 뽑아주는 게 보통이었고 개중에는 상당히 악질적인 자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덕술이 이렇게까지 망한 건 그가 얼마나 인망을 잃었는가를 보여준다. 즉 반민특위의 처벌은 면했지만 사회의 처벌은 면하지 못한 것.
  5. 박처원은 이 사건으로 결국 감옥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