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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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직후의 나혜석 (1920)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중략)
조선 남성들 보시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고, 잘나건 못나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이외다.
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에, 내 자식의 어미이기 전에 첫째로 나는 사람인 것이오.
내가 만일 당신네 같은 남성이었다면 오히려 호탕한 성품으로 여겨졌을 거외다.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 때만 안아주어도 항상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라.

「이혼고백서」 중에서

1 개요

정월 나혜석(晶月 羅蕙錫). 1894.04.28 생~1948.12.10 몰

본관은 나주(羅州). 호는 정월(晶月). 수원 출생.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다. 일제강점기대한민국의 화가이자 작가, 시인, 조각가,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 언론인이다. 그리고 한국 최초의 페미니스트로 평가받으며, 한국 페미니즘의 선구자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프리다 칼로를 연상하게 하기도 한다.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의 여자미술전문학교[1]로 유학을 다녀왔다. 귀국 후에는 정신여학교 미술교사를 지내기도 했고, 김일엽과 함께 잡지 <신여자(新女子)>를 창간, 발행하기도 했다.

2 작품 세계

작품경향은 크게 2기로 나눌 수 있는데, 파리에 가기 이전에는 주로 사실적인 수법으로 인물과 풍경을 그렸으며, 그 뒤로는 야수파표현파 등의 영향을 받아들인 한결 참신한 수법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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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1928)

그녀의 작품 <자화상>. 30년대에 그린 이 유화는 서구적 신여성의 우아한 자태를 묘사한 수작으로 평가된다.

그녀의 <자화상>에 대해 미술평론가 이구열은 "1930년 당시 이처럼 창조성이 내포된 자화상은 단 1점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구도, 표현, 색상 모두 놀라울 정도로 뛰어납니다. 천재 화가를 포용하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울 뿐이죠."라고 평하였다.

작품 <해인사의 풍경>은 겹겹이 두꺼운 붓질로 사물의 윤곽과 초점을 흐린 나혜석의 독특한 기법이 발휘되고 있으며 화면 전면의 탑뒤로 대웅전의 일부가 보인다는 평이 있다.

예술의 전당 정형민 전시예술감독은 “예술적 수준을 논하기 이전에 나혜석의 공간과 시간속으로 다가가 조금씩 지쳐가기 시작하는 작가의 숨결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그녀는 파리의 야수파계 미술연구소에서 새로운 예술성에 눈을 떴다. 사실을 주관적 시각으로 재구성하고 활달한 필치와 자유분방한 색채로 표현해냈다. 대상을 단순화시키고 색채를 강렬하게 구사하였다. 그녀의 풍경화에는 섬세한 필선, 밝고 고운 색조, 구도의 신선함을 활용하였다

1921년 그가 <개벽(開闢)> 제13호에 발표한 목판화 <개척자>는 한국 근대 판화의 효시의 하나로도 손꼽힌다.

친구이자 한때 연인이었던 이광수와의 작품경향에 대한 비교도 이루어졌다. 그에 의하면 "이광수의 유학생 주인공들이 거창한 문명개화의 구호를 외치면서도 소설 안에서는 공허한 동어반복만을 되풀이하는 데 비해 나혜석의 글쓰기는 대중을 선도하기보다 대중과 공동의 체험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그밖에 "짧은 시간이었지만 예술과 자아, 감성이 하나가 되는 ‘삶의 본질’을 누렸다"는 평도 있다.

나혜석은 그림뿐 아니라 새로운 시대감각을 담은 소설과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1918년에 쓴 소설 「경희」는 뚜렷한 여성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의 소설 작품은 고백체 소설이었다. 이는 1920년-1930년대의 소설의 사조이기도 했다. 염상섭, 김동인, 나혜석, 김일엽, 김명순 등의 작가들이 시도했던 고백체 소설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기반으로 한 성적인 금기에 도전한 것이었다.

1918년 도쿄 여자친목회 기관지 <여자계>에 발표된 단편 <경희>[2]일본 유학생인 신여성이 구여성을 설득하며 자아를 발견해 나가는 과정을 실감 있게 그리고 있는 자전적 소설이다.

시 <노라를 놓아주게>에서는 유교의 삼종지도를 비판하였다. <노라를 놓아주게> 등에서 그는 가부장제 하에서 아버지만을 따르고, 남편만을 따르고, 아들만을 따라야 된다는 것이 잘못임을 비판하였으며, 아버지의 착한 딸, 남편의 착한 아내, 아들의 좋은 어머니 역할을 인형에 빗대어 표현하였다. 1937년 10월에 발표한 <어머니와 딸>에서 나혜석은 자신이 이혼 직후 머물렀던 어느 하숙집에서 본 구식 어머니와 신식 공부한 딸의 갈등을 표현하였다.

외도를 고백했던 나혜석, 배신당했던 일을 고백했던 김일엽, 성폭행 피해 경험을 고백했던 김명순. 이러히 절절하게 자신의 아픔을 고백했던 이들은 탕녀로 낙인찍히며 문학사에서 매장된 반면, 의사(擬似) 고백을 했던 염상섭이나 김동인 등의 남성 작가는 근대 고백소설의 모범으로 문학사에 기록됐다.

3 신여성적 면모

인형의 가(歌)

나혜석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 때
기뻐하듯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는
위안물 되도다

노라[3]를 놓아라
최후로 순수하게
엄밀이 막아논
장벽에서
경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주게

남편과 자식들에게 대한
의무같이
내게는 신성한 의무 있네
나를 사람으로 만드는
사랑의 길로 밟아서
사람이 되고저
(하략)

나혜석은 일본 유학 시절부터 시, 소설, 칼럼, 강연 등을 통해 '여자도 인간이다.'라고 주장하였다. 1927년 파리에 도착했을 때의 어느 날 그녀는 프랑스의 한 여권운동가를 만나 ‘여성은 위대한 것이오, 행복된 자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녀는 파리에 체류할 무렵, '남녀관계, 여성의 지위 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해답을 얻기 위해 혼자 계속 파리에 남기로 결심했다.'라고 했다. 또한 귀국 후 그녀는 여행기 <구미유기>에서 영국 참정권 운동에 참여한 영국여성운동가의 활약을 알렸다. 인간평등에 기초한 참정권운동뿐만 아니라 노동, 정조, 이혼, 산아제한, 시험결혼 등 여성문제를 소개하였다.

그는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조선 신여성의 표본이 됐다. 그녀는 억압된 조선 여성들을 대변하고, 새로운 여성상을 만들고자 했다. “여자도 사람이다.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 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 인류의 여성이다”라는 주장을 글로만 쓴 게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실천한 것이다. 여성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는 가부장적 사회를 질타했던, 글과 그림으로 ‘여자도 사람’임을 끊임없이 주장하였다. 그는 남자, 여자 이전에 사람이라며 여자 역시 한 사람의 인간이라며, 여자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 대우해줄 것을 거듭 주장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와 일제, 보수적인 지식인과 노인, 유학자 등은 모두 그의 견해를 외면했다.

<섣달대목, 초하룻날>이란 제목의 연작은 여성들의 일상과 가사노동을 중심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한 섣달의 풍경을 담고 있으며, 계속해서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는 만평형식의 목판화에도 신여성·구여성의 고달픈 일상에 대한 연민을 나타냈다.

또한 그는 명절이 여자들에게만 일을 시키는 고통스러운 날이라고 지적했다. 나혜석이 1930년대 신문삽화 <섣달대목>으로 일찌감치 명절이 여성들에게 고단한 날임을 고발하였다. 그가 명절의 고단함을 지적한 것은 후일 명절증후군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적 화두가 되기도 했다. 오오. 시대를 앞선 선견지명. 오오. [4]

결혼을 여성을 억압하고 옭죄는 족쇄라고 판단했다. 또한 그는 '이혼의 비극은 여성 해방으로 예방해야 하고 시험결혼이 필요하다'라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칼럼을 <삼천리> 잡지에 기고하여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나혜석은 잘못된 결혼으로 불행을 야기하는 것보다는 시험 결혼이나 동거혼 비슷한 결혼을 통해 비극을 예방해야 된다고 보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결혼, 서로 맞지 않는 결혼 생활을 억지로 유지하면서 불행을 억지로 참고 살아야 될 이유는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가정폭력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는 여성 지인들에게 아내를 구타하는 남편, 알콜중독자 남편 등의 가정폭력이나 구타를 억지로 참지 말고 이혼하라고 하였다. [5]

몇 편의 시와 《규원》(1921년), 《현숙》(1936년) 등의 단편소설, 그리고 여러 편의 수필을 발표했는데 수필과 작품에서는 주로 인습의 굴레에서 고통받는 여인들의 삶을 그렸다. 나혜석은 일본 유학시절부터 여성이 각성하여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주장과 그렇게 살기 위해서 여성들이 살림살이를 개량하는 구체적 방법까지 담은 여러 논설들을 썼으며, 여성이 각성하고 사람답게 사는 길로는 교육과 계몽, 사회참여, 남자들로부터의 경제적 자립 등을 들었다. 그의 작품 중 《경희》는 신여성이 주변의 낡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설득해 가는 과정을 담은 소설이기도 했다.

그는 인형보다는 인간이기를 원했던 여성이었다 한다. 19세에 <이상적 부인>이란 글에서 현모양처론이 여자를 노예로 만들려는 주의라고 주장한 바 있는 나혜석은, 40세에 쓴 글 <신생활에 들면서>에서도 여성의 정조는 취미일 뿐이지 도덕이나 법률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근대 사회로의 전환기, 개성의 확립이 문화계의 화두였던 시절 나혜석은 여성화가와 여성해방론자로, 그리고 여성작가로 자신이 내딛는 한 걸음마다가 조선 여성의 진일보가 될 것으로 확신했다.

'아이는 에미의 살점을 떼어먹는 악마' 라고 분노하던 그는 모성애를 사회가 여성에게 인위적으로 강요한 역할이라고 주장하였다. 모성이라는 이름 아래 어머니는 수많은 희생을 감내한다. 그리고 이는 본능이 아니라 강요라는 것이다. 그는 모성애가 사회에 의해 학습되는 경향도 있다는 것을 처음 언급하였다. 그는 모성애가 사회적으로 학습되고 강요되는 강요의 결과물로 파악하였다.

나혜석은 여성에게 모성애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며 사회가 여성에게 인위적으로 억압, 강요한 역할이라고 규정했다. 여성에게도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의 자유와 성공 등의 욕구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현모양처는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인습이자 굴레라고 비판하였다. 그에 의하면 '현모양처는 이상을 정할 것도, 반드시 가져야할 바도 아니다.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부덕(婦德)을 장려한 것이다.'라 하였다. 그녀는 모성은 인간으로서 자식과 관계를 맺으며 쌓아가는 경험 적 인간관계라 주장했다.

모든 여성은 모성애를 지니고 태어나는가, 학습되는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발생하자 그는 모성은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강요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동물이 자기 새끼를 버리는 것이라거나 새끼를 물어 죽인 수컷과도 관계하는 것을 하나의 예로 들기도 했다.

'잠 없고는 살 수 없다. 이런 것을 탈취해가는 자식이 생겼다 하면 이에 더한 원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므로 나는 자식이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 정의한다.'라고 하였다. 그는 종종 자식은 악마, 또는 자식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 자식은 모체를 희생시키는 존재라고 규정하였는데, 자식을 악마라고 발언한 그의 발언들 역시 화제가 되었다.

그는 모성애는 의무사항이 아니라고 하였다. 나혜석은 결혼 1년 만에 첫아이를 낳았다. 그녀는 생각지도 못한 빠른 임신, 고통스러운 출산육아의 심경을 '모(母) 된 감상기'로 『동명』지 1923.1.1~21호에 발표한다. 여기에서 나혜석은 모성애가 본능이 아니라고 밝혔다. 이후 모성애는 본능이 아니며, 모성애는 의무가 아니라는 견해를 주장한다.

1923년의 <모 된 감상기>에서 그는 자신이 “나열(羅悅)[6]의 어미’는 '어미 될 때'로 '어미가 되기'까지의 있는 듯 없는 듯한 이상한 심리 중에서 '있었던 것을' 찾아 여러 신식 엄마들과 공유하고자 '그렇지 않습디까, 아니 그랬었지요?'라고 묻고 싶다”는 게 이 글의 취지였다. 즉 그녀는 '엄마'로서 겪는 여러 감정을 다른 엄마들과 공유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사회가 강요하는 모성애에 대해서 비판하였다. 모성애는 의무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모 된 감상기>에서 그는 자신의 임신 과정을 고백했다. 그녀는 입덧을 하면서도 자신이 임신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했다. “그런 중에 뱃속에서는 어느덧 무엇이 움직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깨달은 나는 몸이 오싹해지고 가슴에서 무엇인지 떨어지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가끔은 태어날 아이에 대한 기대로 설레고 기쁜 적도 있었지만, 촉망받던 예술가로서의 인생이 갑작스러운 임신출산으로 인해 헝클어져 버린 것에 대한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이 더 컸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그녀는 여성이라고 해서 임신하자마자 본능적으로 모성애가 생기는 것은 아니더라고 말한다. 나혜석은 임신이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7]

그러나 이 글이 발표되자 지식인 남성들은 반발했다. '백결생'이라는 필명의 논객익명의 인터넷 논객?은 모성애는 숭고한 것이라며 "원래 임신이라는 것은 여성의 거룩한 천직이니 여성의 존귀가 여기 있고 여성이 인류에게 향하여 이행하는 최대 의무의 한 가지인 것을 자각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며 반박했다. 여기에서 그는 나혜석의 임신이나 육아의 의무를 방기하려는 태도라고 규정, 비난했다.[8] 남성의 오만←이 위키러는 동일인물이자 남자입나다

그러자 나혜석은 이에 자신의 감상기가 임신출산을 한 여성들의 솔직한 감정이라고 반박한다. 그래서 자신의 글이 분명 일부 여성들에게는 공감을 얻으리라 확신한다고 말한다.[9] 모성애는 의무가 아니라는 견해를 피력하자, 일부 지식인 남성과 보수적인 유학자들은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나혜석은 "모든 어머니가 모성애를 가진 것은 아니며, 모든 여성이 모성애를 가진 것은 아니며, 모든 여성이 모성애를 가져야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반박하였다. 또한 사회가 여성에게 모성애를 강요한다고 반박하였다.

논쟁이 있은 후 훨씬 나중의 일이기는 하지만, 나혜석의 아들은 자신을 이렇게 적대시한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으며 원망한다고 고백한 바 있다. 모성의 신화와 엮어서 생각해 볼 만한 부분.

나혜석은 전통과 근대가 충돌한 혼란스런 식민지의 과도기 상황에서 이상적인 사랑과 결혼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했다. 그녀는 결혼하는 것만이 올바른 선택은 아니라고 평하였다. 결혼 생활 중에는 이를 조심스럽게 내비쳤지만, 1930년 이혼 이후에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결혼 제도의 대안으로 독신 생활, 남자 매춘부[10], 시험 결혼, 이성 간 우정과 같은 다양한 대안들을 제시했다. 그녀는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라며 "결코 마음의 구속을 당할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이혼에 대한 편견과 색안경에 대해서도, 이혼 역시 하나의 선택에 불과하며 죄악이거나 잘못은 아니라며 반박하였다.

그녀는 "여자도 인간이다."라는 주장을 끊임없이 반복 되풀이하면서 여자들의 인권, 권리를 존중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남녀평등을 지지했던 그녀도 정작 가정 내 부부 사이의 남녀평등에 대해서는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가부장제를 비판하고, 가족 개개인의 의사결정권이 존중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나혜석은 이상적 가정을 말하면서 가족 내에서는 “남녀평등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불평을 갖는 수가 많다”고 언급한 게 바로 그것. 그녀는 오히려 “남편은(이) 아내보다 우월감을 가지고 부득이한 일 외에는 자기 혼자 처리하는 것이 오히려 불평이 없다”며 “신가정에 충돌이 많고 구가정에 평화가 유지되는 사례가 그것을 입증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우호적으로 해석하면, 이는 현실주의적인 전략이라고 볼 수도 있다. 21세기인 지금도 그런데, 당시의 남자들의 가부장성은 무척 뿌리깊었고, 제도 자체는 개혁할 수 있어도 어릴 때부터 뿌리깊게 새겨진 성향은 쉽게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연령과 관계없이 평등을 추구한다고 해도 중고생이 성인인 나에게 대뜸 반말을 쓰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것처럼 말이다.[11]

더군다나 지금처럼 여성의 경제력이 상당 부분 남성을 따라잡은 때도 아니다. 여성이 독립하는 것은 가정폭력 등 최악의 상황이 아니라면 별로 좋은 일이 아니었던 것. 그렇다면 사소한 가정생활에서의 자존심이나 주도권 정도는 조금 접어 주고, 대신 남편에게 책임감을 더 부여하여 외도나 일탈을 통제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전략이라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지금만 해도 가부장적일지언정 책임감 있는 상남자가 많은 여성들에게 이상형인 판국에[12], 당시 여성들 중에서 꿋꿋히 주체성을 유지할 여성이 많지는 않았을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신가정이 불화가 컸다는 것은 사실일 수 있다. 즉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보면 이해할만한 이야기라는 것.

물론 100년 전 이야기이고 21세기 시점에서는 그런 거 없고 생활 속에서도 평등한 상호작용이 필요하다. 여성들의 평등의식과 경제력이 성장한 이상 그런 식의 권위적 태도가 오히려 불화를 만드는 시대가 된 것이다.[13]

4 기타

  • 일본 외무성 외교관이었던 남편 김우영을 따라 1년 8개월에 걸쳐 유럽, 미주 등을 여행하였다. 한국 여성 최초의 세계일주라고 할 수 있다.
  • 남편과의 세계일주 여행 중 빠리에서 최린을 만나 불륜을 저질렀고, 그로 인해 김우영에게 이혼 당했다. 그런데 이후 최린은 나혜석을 버렸다. 그러자 나혜석은 최린에 대해 정조유린죄라며 당시 돈 12,000원의 소송을 걸었다. 여성에게 강요되던 보수적인 정조관념을 거부하고 성적 자기결정권을 주장해온 본인의 행보와 상반되는 소송 제기라 후세에 비판 받는 부분이다. 활기차고 재능 많았던 前 남편 김우영은 나혜석과 이혼하고 무력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김우영이 피해자이기만 한 것 같지만, 김우영에게도 이미 다른 여자가 있었다. 원래 나혜석은 결혼할 생각이 없었으나 집안에서는 끈질기게 결혼을 강요했고 이에 나혜석은 일부러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었는데, 그중 하나가 평생 지금처럼 사랑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를 먼저 깬 것이 남편이었기 때문에 나혜석 또한 외도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던 것.
    • 일각에서는 남편 김우영과 이혼한 시점과 최린을 고소한 시점이 그들이 본격적인 친일 행보를 걷기 시작한 시점이라는 점을 주목하며 의도적인 것이 아니냐고 해석하기도 한다. 사실 나혜석은 1920년대에 비밀리에 의열단 활동을 지원하는 등 다방면으로 독립 운동을 지원했다. 기사 따라서 고소 취하의 조건으로 최린에게서 수천원을 받아낸 것은 결과적으로 친일파에게 금전적인 타격을 가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해당 기사의 필자가 논란 많은 이덕일이지만 적어도 본래 전공인 독립운동사에 관해서는 논란이 없다.
    • 하지만 그렇다고 전 남편 김우영을 내로남불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 당시에는 가부장 주의가 지금보다 심했던 시절이라 아내가 바람을 피우면 아내 간수도 못하는 못난 놈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던 분위기였다. 외도만 아니라면 김우영은 지금 기준으로 보더라도 대인배적인 면이 있었다. 나혜석이 내건 결혼 조건을 받아들여 신혼여행 때 아내의 옛 남자친구 무덤을 참배했고 비석까지 세워 주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나혜석은 딱히 결혼을 할 마음이 없었지만 나혜석에게 빠진 김우영은 3.1 운동을 하다 감옥에 간 나혜석의 변호를 맡았고, 나혜석이 내건 결혼 조건도 들어준 것이니 나름대로는 헌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김우영을 여자에게 휘둘리는 호구라고 비웃었으니 양쪽의 외도가 아니더라도 원만한 결혼은 힘들었을 것이다. 나혜석의 둘째 아들인 김진 전 서울대 교수의 회고에 따르면 그래도 김우영은 나혜석을 비난하는 발언은 일절 하지 않았는데 이를 김진 전 교수는 그래도 나혜석을 사랑했던 마음이 있어서 그랬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어떤 면에서는 김우영 또한 가부장주의의 피해자일 것이다.
    • 다만 김우영은 1930년대 이후 본격적인 친일을 하면서 1943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로도 임명되었다. 이 때문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는 오명을 남겼다.
  • 배우 나문희(본명 나경자)의 고모할머니이다. 그리고 나혜석의 아들은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했던 김건이다.
  • 둘째 아들인 김진 전 서울대 교수가 어머니를 회고하는 책을 펴낸 적이 있었다. 기사 책 제목은 <그땐 그 길이 왜 이리 좁았던고>이며, 나혜석의 글귀에서 따왔다고 한다.
  • 실력있는 여자였으나 개인적, 환경적, 사회적인 편견과 벽을 넘지 못하고 사장된 여성의 재능을 가리켜 '나혜석 콤플렉스'라고도 부른다.
  • 그의 조카인 영문학자 나영균 역시 결혼할 때 비슷한 조건을 내세웠다 한다. "살림살이에 얽매이게 하지 말고 공부를 계속하게 해 주시오. 시집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시오."라고 말했다. 어린 시절에 나혜석의 말년 모습을 목격했으며 여기에 그 자세한 이야기가 있다. 흔히들 가족에게 버림받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기사에 따르면 아예 외면받은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오빠인 나경석이 워낙 나혜석을 아꼈기 때문에 비참하게 몰락한 모습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해서 화를 냈다고 한다. 한 마디로 애증의 관계였는데, 나영균 박사의 모친, 즉 나혜석의 올케는 이를 안타까워해서 나경석이 집에 없을 때 몰래 집에 들여다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파킨슨병으로 폐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어 실력이 여전해서 집에 미국인이 왔을 때 통역을 해 주기도 했다고.
  • 나혜석의 오빠인 나경석은 독립운동가이자 화가였다. 영문학자 나영균의 부친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대단한 집안.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남매의 부친인 나기정은 친일파로 평가를 받는다. 나혜석 집안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조카인 나영균의 저서 <일제 시대 우리 가족은>에 나와 있다. 링크
  • 소설가 염상섭이 1924년에 펴낸 단편집 <견우화> 표지엔 소담한 나팔꽃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나혜석이 그린 것이다.
  • 나혜석은 프랑스의 조각가 카미유 클로델, 시인이자 작가인 알프레드 드 뮈세, 피아니스트 쇼팽의 연인이자 소설가인 조르주 상드와 비견되기도 한다.
  • 1931년 5월에 개최된 최초의 미스코리아대회의 첫 심사위원이기도 했다. 지금 미스코리아 대회가 대표적인 성상품화로 꼽히는 걸 보면 격세지감이나, 그 당시에는 여성의 성적 매력을 노출하는 것도 억압되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 수원시에서 홍난파 기념사업 이후 수원 출신 예술인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현재 수원시 행궁동 쪽에는 나혜석 생가터를 알리는 비석을 세웠고, 인계동에는 '나혜석거리'를 지정했다. 그러나 거기가 먹자거리인 건 페이크(...)
  • 신사참배령이 내려지자 그는 불교를 믿는 불자임을 들어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으며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는 사람을 보내 내선일체에 협력하면 진료비와 집, 화실을 제공하겠다고 회유하였지만 단칼에 거절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당연히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윤동주처럼 소극적이나마 일제에 저항한 예술가로 꼽힌다.[14] 일제 강점기 후반에도 나혜석은 총독부의 감시 대상이었으나 창씨 개명도 거부했다. 그 당시에는 창씨 개명을 거부한 사람이 매우 드물어 민족문제연구소에서도 창씨 개명만으로는 친일파로 분류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러한 점이 재평가되어 수원시에서는 독립운동가로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부친과 남편의 친일 행각을 거론하며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3.1 운동으로 투옥된 것 외에는 별다른 활동이 없으니 다른 독립운동가를 기념하는 것이 온당하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되었듯이 1920년대에 의열단 활동을 지원했으며, 일제 말기에 신사참배, 내선일체 협력을 거부한 사실이 있는 것을 보면 나혜석의 항일 운동이 일시적이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1. 현 여자미술대학
  2. <경희>는 1910년대 가장 빼어난 소설로 꼽힌다.
  3. 눈치챈 위키러들이 있겠지만, 이 시에서 등장하는 '노라'는 헨릭 입센의 소설 <인형의 집>의 주인공인 그 '노라' 맞다.
  4. 지금의 명절증후군도 힘들지만, 이 당시의 명절증후군은 훨씬 지옥에 가까웠을 것이다. 제사 등 일가친척이 모일 일이 훨씬 많고, 훨씬 넓은 범위의 친척들이 모였으며, 돌봐야 할 아이들도 아주 많고, 게다가 지금과 같이 가전제품이 있지도 않았다(!) 우리가 흔히 간과하는 것인데 가전제품이 없을 때 집안일을 한다는 것은 현대인들에게 해 보라면 며칠만에 두손 두발 다 놓을 것이다(...) 현대인들은 가전제품으로 아낀 시간을 노동에 투자하기는 하지만, 뭐 이 시대 여성들도 노동에도 참가하였으니...
  5. 이 당시에도 근대적 민사법이 일본을 통해 들어왔으므로 이혼은 가능했다. 그러나 경제력의 부제, 가혹한 사회적 시선, 그리고 스스로 주입된 가부장적 의식 탓에 실제로는 무척 어려웠다. 친정으로 간다? 지금이라면 모를까 그때는 출가외인이다. 아니 출가외인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없다 쳐도 친정도 먹고 살기 바쁜데 받아 주겠는가(...) 지금도 미흡하지만 그 때는 보육시설 자체가 없었다. 돈 많은 사람이야 아이 돌보는 사람을 고용할 수 있겠지만, 그것도 아니라면 여자 혼자 10명 가까이 되는 아이를 돌보면서 생계도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그럴 경우 불가피하게 어린 아이들을 방치하거나 방에 감금해 두는 수밖에 없었으며, 이 때문에 사망사건도 흔히 일어났다. 지금만 해도 부득이하게 아기들을 쇠사슬에 묶어 놓고 일하러 가는 제3세계 부모들이 흔하고, 우리나라도 80년대 화재로 방에 감금되어 있던 어린 아이들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을 소재로 정태춘이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
  6. 나혜석의 딸
  7. 그럴 거면 왜 임신했냐는 지적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때는 지금처럼 피임이 발달하지 않은 때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 사실 피임기구가 대거 보급되고 품질이 좋아진 것은 얼마 되지 않았으며, 그 이전에는 제대로 된 피임 방법은 금욕 밖에 없었으니 완벽하게 임신을 막는 건 무리였다. 괜히 보수적 성윤리가 발생한 것이 아니다. 과거에는 성관계가 필연적으로 임신의 가능성을 동반하였기 때문. 그래도 과거에는 성욕이 한창인 시기에 일찍 결혼해서 성욕을 해소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사실 에페보필리아는 역사적 관점에서 보거나 진화적 관점에서 보거나 정상이다.
  8. 백결생, <관념의 남루를 벗은 비애>, 『동명』, 1923.2.4
  9. <백결생에게 답함>, 『동명』, 1923.3.18
  10. 현대의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성매매 범죄론과는 명확히 구별되는 관점이다. 사실 보수도덕주의와 동맹하기 쉬운 성매매 범죄론과 달리 이러한 관점은 지금 시점에도 무척 급진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그 당시에는 거의 탕녀 취급 받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보통 시대를 앞서 간 선각자가 아니다. 물론 서구에도 그런 페미니스트들은 있었다.
  11. 물론 연장자에게 존댓말이 기본 관습인 상황에서 반말을 대뜸 쓴다는 것은 시비를 건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다.
  12. 이를테면 데이트 장소 결정을 남성이 자신감있게 해야 한다는 것.
  13. 일종의 권위주의의 순기능이라고 볼 수도 있다. 독서실에서 고등학생끼리만 있을 때는 누군가가 떠들기 시작할 때 말리기 힘들고, 만약 뭐라고 지적하면 싸움이 나기 쉽다. 하지만 노인이 있어서 지적하면 떠들던 고등학생이 속으로 욕을 하더라도 겉으로는 알겠다고 하고 조용해진다. 이는 노인이 하는 말에는 굴복해도 별로 쪽팔린 것은 아니다라는 사회적 약속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날라리도 크게 기분 나쁘지는 않았고, 공부하던 고딩도 조용해져서 좋으니 권위주의의 순기능을 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것도 결국 권위주의에 의존하는 것이니 이상적인 사회적 상호작용은 아닌 것은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14. 당연히 그 시대의 일제는 불교를 믿건 기독교를 믿건 신사참배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을 박해하였고, 심지어 투옥이나 순교시키기까지 했던 시절이다. 이 부분에 민감한 종교계에서도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한 교단이나 인사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