蹴球戰爭
Soccer War/Football War
La guerra del fútbol(축구전쟁) 혹은 Guerra de las 100 horas(백시간전쟁)
1 개요
1969년, 중앙아메리카의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가 100시간 동안 벌였던 전쟁.
1970년 월드컵 중미(中美) 예선이 계기가 되어 일어났기 때문에 축구전쟁이라고 불린다.(…) 축구가 이 전쟁의 주요 원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기폭제로 작용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2 진행 과정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온두라스의 영토는 엘살바도르에 비해 5배 정도로 훨씬 넓었는데에 반해, 엘살바도르(370만)는 오히려 이런 온두라스 인구(260만)보다 40% 더 높은 인구과잉 문제로 인해 골치를 앓고 있었다. 이 때문에 농지가 부족해지자 엘살바도르인이 온두라스로 대거 월경, 무단 경작을 하면서 경작지 문제로 충돌이 잦았다. 특히 엘살바도르인의 온두라스 대규모 이주는 1969년 초에 절정에 달하여 파악된 것만 30만에 이르는 엘살바도르인들이 온두라스에서 살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들이 무단으로 차지하고 있던 농지는 온두라스 전체 농토의 20%에 달했다. 이 때문에 두 나라는 국경선과 이민자 문제로 대단히 적대적이었다.
더 이상 이를 참을 수 없게 되자 온두라스에서는 1962년에 새로운 토지개혁법을 발표했다.(1967년에 발효) 이 법은 엘살바도르 이주민들이 불법 점유하고 있는 농토를 환수하여 자국민들에게 재분배하는 법이었다. 온두라스 대지주와 대기업들이 중심이 되어 반포된 이 토지개혁에 의해 수천명의 엘살바도르 노동자들이 추방되었고, 엘살바도르가 이에 강하게 항의하면서 큰 긴장상태가 조성되었다.
이렇게 가뜩이나 감정이 안 좋았는데, 두 나라 간의 월드컵 예선전이 벌어지자 관중들간의 충돌은 물론이고 각종 방해공작이 판을 쳤다. 온두라스에서 벌어진 1차전에선 온두라스 시민들이 엘살바도르 선수단 숙소 바로 옆에서 밤새도록 축제를 벌였다. 당연히 급조된 축제. 반대로 엘살바도르 홈경기 2차전에선 호텔 요리사가 대량의 설사약과 수면제를 넣은 요리를 경기날 아침 온두라스 선수들에게 제공했다. 이걸 먹은 선수들 몸상태가 정상일 리가 없다. 이런 막장 방해공작 속에서 1차전은 온두라스가 1:0으로, 2차전은 엘살바도르가 3:0으로 나눠가지면서(각자 홈 구장에서) 1:1이 되었다. 더구나 이 시기 플레이오프에는 골득실이니 원정 다득점같은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1:0으로 이기나 10:0으로 이기나 똑같았고 이것만 잘 처리 했다면 전쟁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지만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축구는 단지 기폭제 및 침공명분이 되었을 뿐이다. 마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이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암살로 인해 터졌던 것처럼.
어쨌든 이는 훗날 FIFA가 플레이오프에 골득실과 원정 다득점 개념을 도입하게 된 계기가 된다.
이 와중에 엘살바도르에서는 한 열혈 축구팬 소녀가 자국의 국가대표팀이 진 것에 충격을 받아서 권총으로 자살했고(!), 달아오를대로 달아오른 국민감정을 식히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그 소녀의 장례식에 대통령과 축구 대표팀 전원이 참석하고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정부에서도 극단적으로 국민 감정을 부추겼다. 결국 관중 간의 유혈사태를 우려한 FIFA가 3차전을 제3국인 멕시코에서 열었다. 이 때, 멕시코는 경기 중 발생할 수 있는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10만명이 입장할 수 있는 축구장에 2만명만 입장시켰고, 그나마도 경찰이 관람객보다 많을 지경이었다. 내가 축구를 보러 온건가 경찰을 보러 온 건가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엘살바도르는 온두라스가 이기면 외교단절을 하겠다고 협박하는 지경에 이른다. 6월 27일에 벌어진 3차전의 결과는 연장전 끝에 3:2로 엘살바도르 승리였고 이에 온두라스 정부가 먼저 단교를 선언, 팽팽해진 긴장감 속에서 7월 14일, 엘살바도르 공군이 민간 여객기에 폭탄을 장착하여 온두라스 수도 테구시갈파의 공군기지를 기습 선제공습하며 결국 전쟁이 개시되었다.
이민자 문제, 경제문제, 정치적 문제 등으로 오랫동안 곪고 곪아왔던 두 나라 간의 적개심이 축구를 계기로 폭발한 셈이다. 때문에 군대는 물론이거니와 양쪽의 농민들까지 서로 민병대를 조직하여 엽총과 농기구로 서로를 공격하는 지경에 이른다.[1]
7월 14일 전쟁이 시작되자 엘살바도르 육군은 온두라스로 연결된 두개의 도로를 통해 두 방면에서 신속히 진격하였다. 전체적인 공군력은 온두라스가 위였지만 갑작스런 기습공격으로 인해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고, 하루사이인 7월 15일 저녁까지 온두라스 육군은 8km 이상 후퇴하였다. 처음에는 육군력 또한 온두라스가 질적으로 다소 우세하였으므로 육군만으로도 어느정도 막거나 버틸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으나 어처구니없게도 당시 온두라스 육군 3군 주둔지에는 할당된 인원의 절반만이 근무하고 있었다. 온두라스 육군 장교들이 군대의 돈을 누락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행정 수도인 Nueva Ocotepeque 와 다른 8개의 도시가 함락되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린 온두라스 공군이 제공권을 장악, 엘살바도르의 Ilopango 공군기지와 원유시설을 타격하고, 엘살바도르 군대로 공급되는 물류를 차단하면서 공세가 끝나게 되었다.
이 꼴을 보다 못해 미주기구가 개입하자 엘살바도르 정부는 온두라스 내의 엘살바도르 국민과 군인들의 안전과 피해에 대한 보상이 약속되지 않으면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미국까지 외교 압력을 가하자 7월 18일 정전이 선언되며 100시간에 달하는 이 한심한 전쟁은 일단 막을 내렸다. 그러나 엘살바도르군은 휴전협정 후에도 점령지를 내놓지 않고 버텼으며 결국 미주기구가 경제제재를 개시한 8월 1일에 이르러서야 철수를 개시했다. 이 와중에 열받은 온두라스군도 무단으로 국경을 월경, 엘살바도르의 6개 마을을 점령하고 버티는 바람에 정전 이후에도 한동안 소규모 충돌은 계속되었다. 이 충돌은 미군을 포함한 미주기구 정전감시단이 도착하고 나서야 마무리 되었으나 최종 평화협정까지는 10년이 더 걸렸다.
3 사이좋게 망하다
전쟁 후 두 나라의 경제상황은 막장이 되어서 오랫동안 그 후유증에 시달렸다. 국토가 전쟁터가 된 온두라스는 공식적으로 100여명의 군인과 2천여명의 민간인 사상자가 났으며 수천여명이 거리에 나 앉았다. 거기다 상당수 농지가 쑥대밭이 되어 산업에 막대한 타격을 받았다. 결국 엘살바도르가 재침공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떨다가 결국 미국 정부의 권유에 따라 미군 주둔을 허용하게 된다.
온두라스를 침공한 엘살바도르는 공식적으로 총 900여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거기다 열받은 미주기구의 경제제재에다 온두라스가 30만에 달하는 불법 이주자를 모조리 강제 추방해버리면서 대규모 난민을 떠맡게 되는 더블 펀치로 경제가 결딴나는 것도 모자라 빈민층 급증으로 사회 불안이 가중되고 만다. 여기에 석유파동으로 인해 식료품의 가격이 폭풍처럼 상승하고 안그래도 인구에 비해 토지가 너무 부족해 최하를 찍던 농업 생산력은 파국을 맞았다. 결국 축구전쟁은 세계발 석유파동과 함께 1972년부터 1992년까지 총 50만명의 난민과 최대 8만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엘살바도르 내전(혹은 엘살바도르 남북전쟁)의 두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둘 다 농업국가라서 전쟁특수 따위 바랄수도 없는 경제구조였던 주제에 근시안적으로 벌인 짓거리라는 점이 이 전쟁의 막장성을 더욱 강조한다. 이 틈에 득을 본 것은 소수 인도계 이민자, 미국인 이민자 부자들로 두 나라의 경제를 휘어잡았다고 한다.
4 결과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심하다. 2,000~6,000명에 이를 것이라 추정될 뿐인데 그 대다수가 무고한 양민들을 군대가 보복성으로 학살한 것이라 이 전쟁의 병크스러움을 더해준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 배경은 다른 전쟁과 별다를 바가 없지만, 세간에는 단순히 축구하다가 전쟁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전쟁이 끝난지 11년이 지난 1980년에 서로 화해했고 지금은 그럭저럭 잘 지내는 듯하다.
참고로 월드컵 예선에서 이기고 올라간 엘살바도르는 0승 3패에 무득점 9실점이라는 성적으로 광탈한다.
가끔 인터넷에 떠도는 글 중에는 엘살바도르가 이 전쟁에서 승전했다는 내용이 들어있곤 하는데 이는 틀린 말이다. 물론 갑작스런 침공으로 국토가 유린당한 온두라스가 엘살바도르에 비해 훨씬 큰 피해를 입은 건 맞고 실제 전투에서도 엘살바도르 군이 훨씬 잘 싸웠지만, 위에 적혀있듯 엘살바도르 또한 전쟁 전 수립했던 전쟁목표들을 하나도 이루지 못했고 정치, 경제적으로 몰락했기 때문에 결코 전쟁에서 승리했다 할 수는 없다.
5 뒷이야기
7월 20일에는 아폴로 11호의 역사적인 달 착륙 중계가 시작되자 일시 휴전하고 달을 바라보다가 중계방송이 끝나자 전투를 재개했다는 웃지못할 사건도 있었다. 또한 이 전쟁에서는 F4U 콜세어 P-51 머스탱과 FG1D 코르세어(!)(F4U의 굿이어사 라이센스판)등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시절 같은 연합군 진영에서 사용되던 전투기 간의 공중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우루과이의 작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불의 기억》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한 바 있다.
한 세기 반 전까지도 하나의 공화국에 속했던 중앙아메리카의 두 나라가 축구 때문에 적이 되어 싸운다.작은 농업국가인 온두라스는 소수의 대지주들에 의해 지배된다.
작은 농업국가인 엘살바도르는 소수의 대지주들에 의해 지배된다.
온두라스는 쿠데타로 태어난 군사독재정권이 통치한다.
엘살바도르는 쿠데타로 태어난 군사독재정권이 통치한다.
파나마에 있는 미국의 '아메리카 학교'에서 교육받은 장군들이 온두라스를 다스린다.
파나마에 있는 미국의 '아메리카 학교'에서 교육받은 장군들이 엘살바도르를 다스린다.
온두라스의 독재자는 미국으로부터 무기와 고문관을 공급받는다.
엘살바도르의 독재자는 미국으로부터 무기와 고문관을 공급받는다.
이제 온두라스의 독재자는 엘살바도르의 독재자가 피델 카스트로에게 고용된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한다.
이제 엘살바도르의 독재자는 온두라스의 독재자가 피델 카스트로에게 고용된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한다.
전쟁을 하는 동안
온두라스 민중은 자신들의 적이 엘살바도르 민중이라고 생각하고
엘살바도르 민중은 자신들의 적이 온두라스 민중이라고 생각한다.
1주일간 지속된 두 나라의 전쟁은 4천명의 죽은 자를 남겼다.
한편 13년이 지난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는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양 팀 모두가 출전하였다. 결과는 둘 다 1라운드에서 탈락. 특히 엘살바도르는 이 대회에서 헝가리에게 10:1이라는 엄청난 차이로 패배하여 또 한번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월드컵 예선을 포함해 여러 차례 만났으며, 가장 최근에 만난 월드컵 예선인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북아메리카 지역 최종 예선의 경우 온두라스가 단독으로 진출하여 40년만에 한을 풀었다.
여담으로 FIFA 시리즈인 '2006 FIFA 월드컵'에서는 2002 한일 월드컵 예선에서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와의 배경으로 한 도전 과제가 나왔는데, '축구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였다.- ↑ 다만 전쟁 후 밝혀진 자료에는 이미 1968년부터 엘살바도르 군은 온두라스 공격 계획을 비밀리에 준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