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콜트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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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네임은 존 윌리엄 콜트레인 (John William Coltrane). 1926년 9월 23일 ~ 1967년 7월 17일

미국재즈 색소폰 연주자. 2차대전 이후의 모던 재즈신을 이야기할 때 절대 빠뜨릴 수 없는 본좌로 손꼽힌다.
'인생은 짧고 굵게!' 를 몸소 실천한 색소포니스트. '재즈의 성인(聖人)'이라 불리운다.

 

1 생애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햄릿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고, 그 곳에서 학교를 다니며 색소폰과 클라리넷 등의 연주법을 익혔다. 1945년에는 해군 군악대입대하와이 소재 해군 빅 밴드에서 연주했고, 1946년에 전역한 뒤 필라델피아 출신의 기타리스트 데니스 샌돌에게 재즈에 관한 체계적인 이론을 배웠다.

이후 이런저런 빅 밴드 등에서 연주 활동을 벌이다가 찰리 파커를 비롯한 신인 연주자들이 들고 나온 비밥에 푹 빠졌고, 이내 뉴욕을 거점으로 삼아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를 비롯한 초기 밥 연주자들과 여러 세션이나 공연, 녹음에 참가했다. 1950년 초기에는 실력이 소니롤린스보다 못해서 기가 죽어있었지만(마일스 자서전) 초인적인 연습량과 콜트레인만의 강한 캐릭터를 지닌 연주로 세기의 거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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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콜트레인의 존재감을 잘 설명해 주는(...) 역사적인 사진. 왼쪽부터 토미 포터,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 그리고 콜트레인이다.)

1955년에 스승인 샌돌이 마일스 데이비스의 퀸텟(5중주단)에서 소니 롤린스가 탈퇴한 뒤 새로운 색소포니스트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콜트레인을 추천했다. 당시 마일스는 헤로인에 쩔었던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하드밥의 유행에 맞추어 새로운 형태의 음악을 만들려고 했는데, 아직 젊고 이론에도 꽤 빠삭했던 콜트레인을 적임자로 여겨 멤버로 영입했다.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에서 연주한 기간은 1957년 까지로 3년이 채 안되는 시간이었지만, 그 동안 이 그룹의 최고 명반들이자 하드밥의 전설적인 결과물로 손꼽히는 '~in' 시리즈' 인 Cookin', Relaxin', Workin', Steamin' 네 장의 음반 등이 프레스티지에서 출반되었고 메이저 음반사였던 컬럼비아와 계약 후 처음 내놓은 'Round About Midnight'도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다른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콜트레인도 마약으로 헤롱대던 상황은 마찬가지였고, 심지어 클럽 공연 도중 꾸벅꾸벅 졸기까지 하는 등(...) 상당한 막장 행보를 보여주었다. 마일스는 참다 못해 1957년 4월 중순에 콜트레인을 그룹에서 짤라버렸고, 동시에 마일스 퀸텟 1기의 역사도 끝나 버렸다.

방출 직후 필라델피아에 있던 친가에 틀어박혀 힘들게 마약을 끊은 뒤, 5월 말 뉴욕으로 돌아와 마일스 퀸텟 시절 음반사인 프레스티지에 자신의 첫 리더작 Coltrane을 취입했다. 이어 같은 해 9월에는 블루노트 레이블과 녹음한 첫 앨범이자 두 번째 리더작인 Blue Train으로 생애 첫 대박을 쳤다. 한국 팬들의 경우 이 Blue Train 앨범을 통해 콜트레인을 처음 접하는 경우가 많다. 또 버드 파웰을 통해 약에 헤롱대던 천재삘 나는 연주자들의 행보에 본의 아니게 꽤나 익숙해있던 셀로니우스 몽크의 쿼텟(4중주단)과도 잠시 어울려 연주했고, 이들이 카네기홀에서 공연한 실황으로 제작된 음반도 명반으로 손꼽힌다.

이후에도 프레스티지와 블루노트에서 번갈아 가며 녹음을 했는데, 프레스티지에서는 아직 블루노트 만큼의 성과가 없다고 여겼는지 후속작으로는 1958년에 Soultrane를 정발하는데 그쳤다. 대신 계속 녹음은 하되 테이프를 음반화하지 않고 자료실에 짱박아 놓았다가, 콜트레인이 확실히 유명해진 1960년대 초반에야 이들 녹음을 무단으로 발매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온 리더작들이 Dakar, The Last Trane, Lush Life, Settin' the Pace, Standard Coltrane, Stardust 등으로, 완성도는 좀 들쭉날쭉하지만 하드밥 시절 콜트레인이 보여준 실험과 시행착오가 담겨 있는 귀중한 앨범들이다.

1958년에는 마일스 데이비스가 새로 결성한 섹스텟(6중주단)에 다시 합류했는데, 이번에 마일스가 들고 나온 아이디어는 선법(Mode)에 기반한 모달 재즈(Modal Jazz)였다. 섹스텟이 낸 두 장의 스튜디오 앨범인 Milestones와 Kind of Blue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특히 후자는 '재즈 팬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어야 하는 음반' 으로까지 회자될 정도로 지금까지 유명하다.

마일스 섹스텟 후반기였던 1959년에는 애틀랜틱과 계약해 완전히 자작곡으로만 구성된 앨범인 Giant Steps를 발매했다. 타이틀 곡에서는 어지러울 정도로 잦은 코드 변화를 구사해 비밥의 극단을 추구했고, 반대로 자신의 첫 번째 아내에게 헌정한 곡인 Naima라는 곡에서는 느리고 명상적인 모달 재즈를 보여주는 등 상반된 요소가 혼합된 논쟁작이었는데, 이후 콜트레인이 추구하는 방향을 제대로 암시한 것은 후자였다.

다만 앨범 녹음 직후 틀니를 하고 취주법을 새로 익히기 위해 약 반 년 가량 공백기를 가져야 했고, 1960년 10월이 되어서야 본격적인 녹음과 공연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그리고 활동 재개 직후 Coltrane Jazz를 통해 이후 자신의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쿼텟 멤버가 되는 피아니스트 맥코이 타이너, 드러머 엘빈 존스와 첫 녹음을 취입했고, 또 프리 재즈 초창기 수많은 논란을 일으킨 에릭 돌피, 오넷 콜먼, 돈 체리 등의 뮤지션들과 어울리면서 점차 전위적인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색소폰과 플루트, 클라리넷 등 다양한 관악기를 능숙하게 다루던 돌피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지, 이 시기를 전후해 종래의 테너색소폰 외에도 소프라노색소폰을 자주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따금 플루트도 연주했다.

1961년에 애틀랜틱에서 임펄스로 소속 음반사를 옮긴 뒤 11월에 뉴욕의 유명 재즈 클럽인 빌리지 뱅가드에서 가진 공연에서 베이시스트 지미 개리슨이 합류하면서 쿼텟 멤버가 완전히 확정되었고, 이 공연의 라이브 앨범부터 시작해서 두 번째 셀프 타이틀 앨범인 Coltrane, Ballads, Impressions, Live at Birdland, Crescent 등 중요한 앨범은 거의 모두 이 멤버들로 녹음되었다. 이들의 연주력과 인기는 그야말로 대단해서, 3년 뒤 결성된 마일스 데이비스의 세컨드 퀸텟과도 곧잘 비교된다. 특히 마일스 퀸텟같은 경우 모던 재즈에서 퓨전 재즈로 넘어가는 그룹으로 자주 언급된다면, 콜트레인 쿼텟의 경우 모던 재즈에서 프리 재즈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상징하는 그룹의 대명사로 취급된다.

물론 콜트레인 쿼텟은 프리 재즈로 넘어가는 동안 상당히 괴팍하고 과격한 형태의 음악을 보여주며 비평가와 청중들에게 충공깽을 선사했지만, 반대로 듀크 엘링턴 같은 구시대 거장이나 조니 하트먼 같은 재즈 발라드 가수와 협연하기도 하고 기존 발라드를 새롭게 편곡해 재창조하는 유연함을 동시에 보여주기도 했다. 콜트레인의 팬들이 후기 음악의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주에 열광하는 이유도, 극단적으로 보이는 음악 가운데에서 길고 매력적으로 뽑아내는 발라드 감성의 선율미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1964년 녹음해 이듬해 내놓은 A Love Supreme을 통해 콜트레인은 완전히 프리 재즈에 귀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신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이 자신의 아들의 탄생에 대한 축복에 기인한다는 내용의 대규모 모음곡이었는데, 비록 라이브로 연주한 기록은 단 한 번 뿐이지만 지금도 호평을 받는 명작이다.

하지만 1965년 이후로 자신의 밴드에 대한 통제력이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는데, 색소포니스트 파로아 샌더스나 드러머 라시드 알리 같은 극단적인 프리 계통 연주자들을 집어넣으면서 기존 멤버들과 심각한 갈등을 일으켰다. 특히 이들 멤버의 경우 영입 과정에서 많은 팬들과 평론가들로부터 의문 혹은 비판을 받는 경우가 꽤 많았는데, 일본에서 공연을 했을 때는 기자들로부터 '파로아 샌더스 같은 애들을 왜 끌고 다님?'이라는 꽤 노골적인 질문을 받기도 했다.

그래도 마지막 걸작으로 일컬어지는 Ascension을 냈을 때까지는 그럭저럭 잘 돌아가는 모습이었지만, 리더로 보여준 우유부단함과 새로운 뮤지션들과의 부조화 등에 못이겨 1965년 11월에 Meditations 앨범 녹음 직후 타이너와 존스가 탈퇴했다. 타이너의 후임으로는 자신의 부인 앨리스 콜트레인이 들어왔고, 드럼은 계속 알리 혼자 연주했다.

만년에는 점점 더 몽상적이고 Interstellar Space와 같은 우주 지향적인 음악을 추구했고, 아시아아프리카 민속 음악의 영향을 받아 그 지방의 전통 타악기 연주자를 게스트로 맞아들여 공연과 녹음을 하기도 했다. 1967년 3월과 4월에 각각 생애 마지막 스튜디오 녹음과 라이브 녹음을 남겼고, 5월 7일 볼티모어에서 공연한 직후 건강이 심하게 악화되어 롱아일랜드의 병원에 입원했다. 하지만 간암 판정을 받고 그대로 회복하지 못한 채 향년 40세로 타계했고 [1], 유해는 파밍데일의 파인론 묘지에 안장되었다.

2 사생활과 대인 관계

요구 사항을 똑부러지게 이야기 못하고 에둘러 말하거나, 고민 거리가 있어도 혼자 간직하고 있던 경우가 상당히 많았던 탓에 '내성적 인간' 그 자체였다는 것이 주변인들의 중평이다. 다만 음반사나 클럽과 전속 혹은 출연 계약을 맺을 때만은 공격적이고 까탈스러운 모습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이는 초짜 시절 프레스티지와 애틀랜틱 같은 음반사들이 녹음은 있는 대로 해간 뒤 나중에 자신이 유명해지자 아무 동의 없이 그걸로 음반을 마구 찍어내던 행태에 상당히 자주 데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밴드 리더로 보여준 리더십은 마일스처럼 가히 독재에 가까운 카리스마와는 거의 정반대였는데, 리허설 때는 물론이고 공연 중에도 밴드 멤버들 사이에 이견이 있어서 벌어지는 키배설전에도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다소 다혈질적이었던 드러머 엘빈 존스의 경우에는 밴드 멤버와 불안정한 협주가 끝난 후 리더의 우유부단함에 빡친 나머지 콜트레인의 자가용을 개발살내기도 했는데, 그 때도 화를 내기는커녕 '차야 다시 사면 되지만 엘빈 존스같은 뛰어난 드러머는 없다'라면서 엘빈을 달랬다고 한다.

비밥 시대의 여느 재즈 뮤지션들과 마찬가지로 마약에 탐닉한 것은 매한가지였지만-특히 트럼페터 리 모건이랑은 이래저래 약으로 같이 맺어진 사이...-, 마일스의 퀸텟에서 잘린 뒤에는 어지간히 충격을 받았는지 방에 틀어박혀 며칠이고 물만 마시며 금단 현상을 이겨내는 근성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도 이 때 완전히 끊었고, 아주 가끔씩 담배 피우는 것 외에는 일체의 기호품을 가까이하지 않았다(채식주의 식습관도 이 때 시작되었다).[2]

하지만 마약 대신 중독성을 보여준 것이 과자탄산음료를 비롯한 단 음식들이었는데, 덕분에 치아 상태는 그야말로 개막장이 돼서 1960년대 이후로는 틀니를 끼우고 살아야 했을 정도였다. 체중도 들쑥날쑥이어서, 단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 뚱뚱해질 때와 날채소와 과일, 물만 먹는 극단적인 감량법으로 날씬해질 때를 대비해 두 벌의 옷이 필요했다니 흠좀무.

악기 연습도 거의 중독이나 집착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혹독하게 했는데, 어떤 때는 탈진 직전까지 연습한 후 색소폰을 물고 잠들기도 했고 손님이 왔을 때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나와서 연습을 했을 정도였다. 물론 그 결과 당시 색소폰의 거의 모든 연주 기교를 마스터할 수 있었고, 프리 재즈 시대에도 어려움없이 적응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A Love Supreme 앨범에서 보듯 신앙심도 상당히 깊었는데, 다만 개신교를 비롯한 서양의 특정 종교에 귀의한 것은 아니었고 이슬람교힌두교를 비롯한 동양의 종교/철학에 특히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인도 음악에 심취했던 파로아 샌더스나 라시드 알리를 밴드에 기용한 것도 비슷한 맥락인 듯 하다(그러나 그의 종교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아직도 말이 많다). 말년에는 자신이 죽으면 메시아가 될 거라고까지 이야기했는데, 메시아는 아니더라도 재즈 계의 본좌 위치는 확실히 하고 갔다.

3 사후의 영향력

워낙 리더 경력이 늦게 시작된 탓에 다른 재즈 아티스트들과 비교하면 턱없이 적은 리더 앨범들을 남겼을 뿐이지만, 대부분 명반으로 평가받고 있다. 윗 항목에 소개한 앨범들 외에는 My Favorite Things도 모달 재즈와 소울, 펑크 등을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낸 명작으로 일컬어진다.

앨범에 대한 높은 평가 외에 자작곡들도 지금은 스탠더드 레퍼토리로 고정되어 애주되고 있고, 기존 레퍼토리를 완전히 새롭게 개작한 경우에도 '콜트레인 버전'이라고 독자적으로 취급될 정도다. 만년에 그룹 활동을 같이 했던 파로아 샌더스 외에도 앨버트 에일러아치 셰프를 비롯한 후배 색소포니스트들도 콜트레인과 작업하면서 전면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색소포니스트들 외에 다른 악기를 다루는 모던 재즈 아티스트들도 그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마일스의 경우 콜트레인의 마약 습관이나 프리 재즈를 향한 방향 전환은 대단히 못마땅하게 바라보았지만, 음악에 대한 예리한 감각과 박식함은 확실히 높이 샀다. 프리나 아방가르드 재즈, 에스닉 성향의 후배 뮤지션들에게는 그야말로 태양으로 여겨졌을 정도. 소니 롤린스의 경우에 그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한동안 잠수를 탔다. 클래식 현대음악 작곡가들 중에도 콜트레인의 솔로를 따서 분석한 뒤 작곡에 응용한 경우까지 있다고 한다.

밴드는 콜트레인의 사후 미망인 앨리스 콜트레인이 리더 자리를 넘겨받아 몇 년간 지속되었고, 앨리스가 2007년에 세상을 떠난 뒤에는 아들인 라비 콜트레인이 재즈 색소포니스트로 활동하며 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다.

그의 직계 가족 외에도 조카인 스티븐 엘리슨 역시 플라잉 로터스(소속 레이블은 Warp Records)라는 이름으로 음악 생활을 하고 있다. 초기에는 J Dilla의 영향을 짙게 받아 일렉트로닉 힙합을 위주로 했으나 피는 못 속이는 법. 2010년 발표한 앨범 Cosmogramma에서는 삼촌 라비 콜트레인, 라디오헤드의 톰 요크 등을 게스트로 맞이해 프리 재즈와의 결합을 적극 시도한 바 있다. 또한 GTA 5에서는 자신의 명의로 된 작중의 라디오 채널을 냈다.

미국 샌 프란시스코에는 St. John Coltrane Church라는 교회가 있다. 매주 일요일 잼 세션이 열린다고 한다. 홈페이지

4 음악

프리재즈에 빠진 시기의 콜트레인의 음악은 매우 어렵지만 기본적으로는 미친듯이 정확한 리듬을 탄탄하게 쏟아내는 리듬섹션이 중심을 다잡고 있기 때문에 왠지 재즈같지 않게 들리지는 않는다. 이 부분은 오넷 콜맨과의 큰 차이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전의 존 콜트레인은 최고의 하드밥 테너 주자였다.

존 콜트레인의 연주 스타일로 가장 유명한 것이 Sheets of Sound이다. 각 음표와 음표사이의 빈틈을 모두 소리로 채워넣겠다는 것....쉽게 말해서...빠바밤~하고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빠빠빠 바바바 바바바바밤 하는 식의 연주. Russian Lullaby같은 미드템포 이상의 곡만이 아니라 Someday My Prince Will Come같은 느린 곡도 이렇게 연주한다. 특히 마일즈 데이비스가 리드하는 Someday My Prince Will Come의 후반부에서 콜트레인의 색소폰이 등장하는 대목은 재즈팬이라면 전율할 대목.

하지만 강박적일 정도로 소리의 틈을 없애는 스타일과는 달리 색소폰의 톤은 매우 응집되어 있으며 따듯한 온기가 있다. 따라서 발라드 연주에서도 장기가 유감없이 발휘된다.

자니 하트만의 온기 넘치는 저음과 잘 어울리는 "John Coltrane and JohnnyHartmann(여러분들이 자주 듣는 색소폰 소리 들어간 My One & Only Love는 거의 이 음반에 수록된 곡이다.)"이나 "Ballads"같은 음반은 이지 리스닝으로서 자주 추천된다.

구조적인 완성도를 매우 중시하기 때문에 리듬섹션이 탄탄한 것도 특징이다. 특히 맥코이 타이너와 앨빈 존스가 쏟아내는 탄탄하고 명징한 리듬은 가히 역대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렵다는 오해가 많지만 A Love Supreme, Impression, Ascension같은 작품 정도를 제외하면 비교적 쉽게 들을 수 있는 편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재즈팬들도 콜트레인의 초중기작을 더 즐겨 듣는다.

  1. 언덕길의 아폴론을 보면 당시 콜트레인의 타계가 재즈 팬들에게 얼마나 충격이였는지 알 수 있다.
  2. 다만 콜트레인이 1965년부터 은밀하게 LSD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 주장대로라면 점차 몽상적 음악을 추구하기 시작했던 것도 저 약물의 영향이라는 것이 된다. 아직 확실한 증거가 없어서 진위 여부는 계속 논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