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파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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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찰스 파커 주니어 (Charles Parker, Jr.). 1920.8.29~1955.3.12

미국재즈 색소폰 연주자. 별명은 야드버드(Yardbird) 또는 '버드(Bird)'였고, 비밥 시대에 활동한 재즈 아티스트들 중 본좌로 여겨지는 거물.

1 생애

캔자스 주의 캔자스시티에서 태어났고, 열한 살 때부터 알토색소폰을 구해 독학으로 연주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열다섯 살 때였던 1935년에는 지역 음악인 연맹에 등록해 소규모 클럽 등지에서 객원 단원으로 뛰면서 경험을 쌓았는데, 아직 뉴비였지만 굉장히 독특하다 못해 괴팍한 연주 스타일을 보여주는 바람에 다른 음악인들과 잘 어울리지는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캔자스시티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유명 빅 밴드였던 카운트 베이시의 밴드 연주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고, 첫 프로 데뷰 무대와 녹음도 제이 맥샨이 이끌던 지역 빅 밴드의 단원 자격으로 치뤘다.

물론 여기서도 이미 모르핀이나 헤로인을 비롯한 마약에 쩔어 살던 생활 습관을 보여주며 리더의 신경을 꽤나 거슬렀다. 파커 자신도 빅 밴드의 획일화된 연주 방식에 상당한 불만을 갖고 있었고, 이후에도 빅 밴드 협연 기회가 주어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1939년에는 뉴욕으로 옮겨가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돈이 없어서 맨해튼의 한 댄스홀(사보이 볼룸)에서 설거지 알바를 뛰어야 했다. 하지만 그 레스토랑에 정기 출연하던 피아니스트 아트 테이텀ㅎㄷㄷ한 속주 연주를 귀동냥으로 듣고 상당히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후 파커의 전매 특허가 되는 잦은 코드 변화와 미칠듯이 빠른 아르페지오 속주에도 테이텀의 영향이 반영되었다고 한다.

1940년대 초반에는 얼 하인스의 밴드에서 잠시 일하다가 밴드의 트럼펫 단원이었던 디지 길레스피와 함께 소규모 잼 세션을 벌이면서 조금씩 주목받기 시작했다. 당시 신인 음악인들의 잼 세션은 정규 공연 시간이 끝난 한밤중이나 이른 새벽에 운영하는 클럽(소위 애프터아워즈 클럽)들인 클라크 먼로 업타운 하우스나 민튼스 플레이하우스 등지에서 이루어졌다.

2차대전 후반기였던 1944년부터 소규모 세션에서 공식 그룹 활동으로 전환하면서 일반 대중들에게도 어필하기 시작했는데, 춤추기 좋은 규칙적인 리듬과 감미로운 멜로디 일색의 스윙/빅밴드 팬들에게는 거의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여져 엄청난 논쟁을 유발했다. 이 과정에서 '비밥(Bebop)'이라는 단어가 등장했고, 곧 이들을 긍정적이건 부정적이던 수식하는 전문용어로 자리잡게 되었다.

1945년 11월에는 사보이 레코드사에 리더 자격으로 Ko-Ko와 Now's The Time, Billie's Bounce, Thriving on a Riff 네 곡을 취입했는데, 전자의 두 곡은 기존 유행가나 연주곡의 코드 진행이나 리프를 바탕으로 싹 갈아엎어 2차 창작한 것이었고 후자의 두 곡은 파커의 자작곡이었다. 이 녹음들은 지금도 비밥 초창기의 전형적인 모습을 아주 적절히 보여주는 것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하지만 파커와 길레스피의 공동 작업은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는데, 하도 마약을 해대는 통에 시간 관념이 희박해져 공연 일정에 차질을 빚는 경우가 예사였고 심지어 1946년 7월에 있었던 서부 순회 공연 때는 동부로 돌아가는 기차삯마저 마약 사는데 써버려 돌아가지도 못했다(...).

결국 호텔에서 만취 상태로 침대 매트리스를 태워먹고 완전 벌거벗은 채로 돌아다니는 등의 진상짓을 저지르다 체포되었고, 캘리포니아의 카마릴로 주립 정신병원에 6개월 가량 수용되어 재활 치료를 받아야 했다. 퇴원한 뒤에는 이 때의 기억을 살려 Relaxin' at Camarillo라는 곡을 쓰기도 했고, 사보이와 다이얼에 여러 장의 음반을 취입하면서 한층 물오른 연주력을 과시했다.

1949년에는 현악 합주를 대동하고 발라드 넘버 위주의 음반을 몇 장 발매했는데, 이후에도 몇 차례 반복되었다. 하지만 비밥의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면모를 찬양하던 젊은 팬들은 '파커도 돈벌이 때문에 변절했다' 고 맹렬히 비난했고, 상업적인 성공은 충분히 거두었지만 지금도 평가절하되고 있는 실정이다. 파커는 클래식에 깊은 관심이 있었고,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에드가 바레즈 같은 당대의 전위적인 작곡가들의 음악에 열광했다. 이런 점 때문에 영화 "버드"에서는 세계대전 당시 미국으로 피신해있던 이들 클래식 음악가들을 만나러 가는 파커의 모습이 나오지만, 만나지도 못하고 캐무시 당하는 안습한 상황만 연출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파커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합당한 작업이었지만, 편곡의 밋밋함 등도 있어서 파커의 개성은 충분히 살아나지 못했다는 게 중평이다. 하지만 꽤 돈벌이로는 쏠쏠했는지, 이후 동료 디지 길레스피를 비롯해 내노라 하는 재즈 뮤지션들이 이 아이디어를 따라해 'with Strings' 음반을 계속 내놓았다. 비록 이것을 클래식의 힘을 빌어 떠보려는 꼼수 혹은 한철 유행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 평론가나 프로듀서들도 있었지만, 파커 이후로도 계속 현악 합주를 동반한 앨범은 계속 나오고 있다.[1]

1950년대 초반에는 비밥에 대한 세인들의 호불호를 떠나 음악계에서는 거의 으로 추앙받는 거물이 되었는데, 수많은 색소포니스트들이 파커의 속주와 넘쳐나는 아이디어를 따라잡으려고 노력했지만 대부분 중도 포기하고 닥버로우했을 정도였다. 1953년 5월 15일에는 캐나다 토론토의 매시 홀에서 디지 길레스피, 피아니스트 버드 파웰, 드러머 맥스 로치, 베이시스트 찰스 밍거스와 함께 5중주단(퀸텟)을 꾸려 공연했다. 임시 편성한 그룹이라 이름은 없었지만 지금도 재즈 팬과 전문가들에게 'The Quintet'이라고 하면 단번에 이 그룹을 칭하는 것으로 여겨질 정도로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로 평가받는다.

하필이면 이 공연과 동시에 토론토에서 그 당시 본좌 복서였던 록키 마르시아노와 제시 조 월콧의 권투 헤비급 타이틀 매치가 열리는 바람에 공연장은 절반도 차지 않았지만, 공연 실황이 운좋게 녹음되었고 훗날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물론 지금도 닥치고 최고의 비밥 실황반이라는 평가. 재즈를 좋아한다면 정들어볼만하다. 사실 재즈를 좋아한다면 이미 들어봤을 음악.

이 공연 뒤에도 계속 연주 활동을 벌였지만, 이미 마약 사용이 도를 훨씬 지나친 데다가 과음과 과식 습관도 고쳐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딸의 사망 소식까지 접하게 되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결국 1955년 초에 클럽 공연 중 연주자들을 내쫓고 무대와 클럽 내부를 완전히 개발살낸 뒤 쫓겨났고, 자신의 얼마 안 되는 후원자들 중 한 사람이었던 파노니카 드 쾨닉스와터가 마련해준 뉴욕의 한 호텔방에 틀어박혀 텔레비전 쇼를 보고 있다가 급사했다.

사인은 폐렴과 내장 파열로 인한 내출혈이었는데, 부검을 담당한 의사가 그의 나이를 50~60세로 판정했을 정도로 심한 노화가 진행된 상태였다고 한다. 유해는 고향인 캔자스시티의 링컨 묘지에 안장되었다.

2 음악 성향

생애 란에 썼듯이 빅밴드/스윙 등 당시 유행하던 사조에 대해 상당한 거부감을 표했을 정도로 시대를 앞서나간 인물이었다. 남겨진 녹음들의 대다수도 4~6인조의 소규모 그룹 편성을 취하고 있고, 협연한 뮤지션들도 대부분 비밥의 선구자 혹은 그 뒤의 재즈 흐름을 이어나가는 대가로 성장했다.

흠좀무한 연주 실력 외에도 꽤 많은 작품을 만든 작곡가로서 높이 평가받는데, 비밥 시대의 창작곡 성향에 관해서는 파커 작품만 공부해도 충분할 정도로 기틀까지 거의 다 짜놓았다. 물론 훗날의 프리 재즈처럼 막나간 것은 아니었고, 대부분의 곡들에서 열두 마디 구성의 블루스 양식을 지키는 등 전통에 대한 이해도 충분했다.

코드와 리듬에 대한 감각도 귀신같았는데, 행여 비밥 어법을 제대로 이해 못하거나 자신의 스피드를 따라오지 못해 버벅거리는 세션맨들이랑 같이 연주할 때도 오히려 자기 연주에 따라오게끔 만들어버리는 고렙이었다. 심지어 마약에 찌든 상태에도 연주만은 확실하게 해냈다고 할 정도.

다만 음악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점이 핸디캡으로 남았는데, 악보를 읽지도 쓰지도 못해서 뭔가 괜찮은 가락이 떠오르면 아무 때고 악보 읽을 줄 아는 동료 집에 쳐들어가서 색소폰을 불면서 받아적으라고 했다(...). 특히 디지 길레스피가 파커의 악보셔틀 역할을 충실히 해준 덕에 파커의 많은 작품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

파커의 연주는 기본적으로 유려한 프레이즈에 있기 때문에 모든 템포의 곡에서 강점을 보인다. 예를 들어 Now's the Time 같은 미들템포의 곡에서는 스윙감을 극단적으로 유지하면서도 곡 전체를 정확한 기승전결이 짜여진 형태로 끌고간다. Ornitology나 Flyin' high 같은 곡에서는 쉴 새 없이 빠른 프레이즈를 쏟아내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기승전결이 잘 살아있다. 그야말로 천재.

다만 파커의 녹음중에 음질이 좋은 것이 드물다는 것이 단점이다. 굳이 당시의 오리지널 세션을 들어야 할 필요가 없다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버드의 OST를 들어보는 것을 권한다. 파커의 색소폰 파트만 따와서 세션들의 연주와 합성했는데 음질도 좋을 뿐 아니라 파커의 뛰어난 연주를 제대로 즐길 수 있다.

3 사생활

음악적인 업적에 완전 반비례하게 그야말로 캐막장이었는데, 재즈 역사상 가장 많은 마약을 소비한 아티스트의 최상위권을 다툴 정도다. 파커에 비견될 정도의 약쟁이는 쳇 베이커 정도밖에 없다고 할 정도.

약만 징하게 한 것도 아니었는데, 한번 먹었다 하면 하루 세 끼 분량의 음식을 한 자리에서 뚝딱 해치우는 대식가였고, 한번 마셨다 하면 위스키보드카 등의 독한 술을 몇 병이고 비워대는 과음일 정도로 식습관도 개판이었다. 검열삭제도 시도때도 없이 했고, 한 뒤에는 화대를 확 던지거나 침을 뱉아주고 나오는 등 답이 없었다는 것이 주변인들의 회고. 심지어 연주 직전에 백인 여성과 검열삭제를 해 대는것을 즐거워 했다고도 전해진다. 게다가 벌어댄 돈도 마약 사는 데 써버려서, 수중에는 늘 한푼도 없었고 몇 주씩이나 샤워도 안 하고 같은 옷만 입는 통에 악취가 진동했다고 한다.

파커의 천재성을 인정하던 동료나 후배 아티스트들도 결국 이런 모습에 질려 하나둘 결별했는데, 초짜 시절 그와 같이 작업했던 마일스 데이비스도 대단히 비판적으로 회고한 바 있다. 하지만 마일스도 파커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헤로인 등 마약에 빠져 슬럼프를 겪은게 몇 차례 되었으니 동족혐오였을지도? (물론 음악적인 평가로는 꽤 호의적이긴 하지만..)

4 사후의 평가

물론 지금도 재즈계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극렬 재즈광 클린트 이스트우드포레스트 휘태커 주연으로 전기 영화 '버드'를 찍었을 정도고, 파커의 창작곡들 중 절대 다수가 지금도 리얼북에 올라와 전세계의 재즈 공연장들에서 시도때도없이 연주되고 있다. 뉴욕에서는 매년 8월에 찰리 파커 재즈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고, 파커가 죽은지 몇십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그에 대한 트리뷰트 공연이나 앨범 제작, 리믹스 등이 현재 진행형인 상황.

앨범 제작의 경우에는 주로 리믹스로 진행되고 있는데, 아무래도 워낙 일찍 가시는 바람에 마일스 데이비스나 아트 블레이키 같이 킹왕짱 많은 음반을 남기기 힘들었다. 녹음해 놓은 거야 많을 테지만 뭐(...) 찍어내야지(...)

5 에피소드

  • 파커가 캔자스시티에서 활동하던 초기에 하도 마약을 해대는 것에 이골이 난 제이 맥샨이 밴드 전체에 마약 사용 금지령을 내렸다. 파커도 이에 따르는 듯 보였지만, 이내 '대용품' 을 개발해 동료들에게 퍼뜨렸다. 많이 먹으면 환각을 일으키는 향신료인 육두구 가루를 콜라에 왕창 타먹으면 마약과 비슷한 효과가 난대나 어쩐대나.
  • 파커의 애칭인 '야드버드/버드'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휘황찬란한 속주가 새의 비행을 연상시킬 정도라는 것과 치킨을 몇 마리고 해치워대는 먹성을 빗댄 것이라는 등의 의견이 있다. 심지어 차를 몰고 가다가 실수로 닭을 치었는데, 파커가 그 죽은 닭을 들고 주방장에게 당장 요리를 해달래서 그랬다는 말도 있다. 암튼간에 치킨 엄청 좋아했던 것만큼은 사실인 듯...흑형이잖아
  • 어느 날 클럽에서 공연 직전 파커의 색소폰에 달린 키 하나가 부러져 버렸다. 색소폰 주자는 파커 한 사람 뿐이었고 다른 악기도 찾을 수 없던 상황이었는데, 파커가 클럽 주방에서 숟가락 하나를 갖고 와 구부린 뒤 질겅질겅 씹고 있던 으로 테이핑해 간단히 수리 완료. 맥가이버?
  • 서부에서 공연하고 있었을 때 어떤 햇병아리 백인 트럼페터가 그와 협연할 기회를 얻었는데, 공연 평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파커가 '그 놈 앞으로 크게 될 거야' 라고 툭 던지듯이 말했다고 한다. 그 트럼페터가 바로 쳇 베이커.
  • 파커 사후 추모 공연이 카네기홀에서 열렸는데, 이 때 어떻게 들어왔는지 공연 직전에 비둘기들이 홀 내부를 날아다녔다고 한다. 비주얼이 '버드' 의 환생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극적이었던 모양.
  • 1937년 캔자스 시티의 리노 클럽에서 벌어진 사건은 2014년작 영화 위플래쉬에서 주요 모티브로 여러번 반복 언급된다. 잼을 망친 파커의 연주에 화가 난, 당시 카운트 베이시 오케스트라의 드러머 조 존스가 심벌을 집어던져 파커의 목이 잘릴뻔 했다는 것. 파커는 이 해프닝을 통해 영화에서의 언급처럼 연습하고 또 연습했고 이후 완벽히 차원이 다른 연주자로 거듭날 수 있었는데 이 에피소드는, 만일 조 존스가 그 자리에서 '괜찮아 그만하면 잘했어'라며 잼을 망쳐 낙심한 파커를 위로했다면 '버드'는 없었을 것이라는 부연 해설을 통해 영화의 핵심 주제로 사용된다. 다만 사실과 한 가지 다른 점은 있다. 실제 조 존스는 파커의 목을 노리고 심벌을 날리진 않았다고. 다만 꺼지라는 말 대신 파커의 발 밑에 심벌을 집어 던졌다고 한다.
  1. 한국에서도 2011년에 원로 재즈 트럼페터 최선배가 'A Trumpet In The Night Sky' 를 내놓으면서 처음으로 이 아이디어를 따왔고, 2013년에는 재즈 보컬리스트 박성연이 'Park Sung Yeon with Strings' 를 출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