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플라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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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블뢰 군단의 주장이었던 현역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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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후대의 마에스트로가 한 자리에.

미셸 플라티니 (Michel Platini)[1]
생년월일1955년 6월 21일
국적프랑스
출신지뫼르트에모젤 주 죄프
포지션공격형 미드필더
유스팀AS 죄프 (1966~1972)
소속 팀AS 낭시(1972~1979)
AS 생테티엔(1979~1982)
유벤투스(1982~1987)
국가대표72경기 42골 (프랑스)
1경기 (쿠웨이트)
감독프랑스 (1988~1992)
1977 Ballond'or
수상
알란 시몬센
2위
케빈 키건
3위
미셸 플라티니
1980 Ballond'or
수상
카를 하인츠 루메니게
2위
베른트 슈스터
3위
미셸 플라티니
1983 Ballond'or
수상
미셸 플라티니
2위
케니 달글리시
3위
알란 시몬센
1984 Ballond'or
수상
미셸 플라티니
2위
장 티가나
3위
프레벤 엘케어 라르센
1985 Ballond'or
수상
미셸 플라티니
2위
프레벤 엘케어 라르센
3위
베른트 슈스터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주장
마리우스 트레소르
(1976~1979)
미셸 플라티니
(1979~1987)
루이스 페르난데스
(1987~1988)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감독
앙리 미셸
(1984~1988)
미셸 플라티니
(1988~1992)
제라르 울리에
(1992~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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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 대회 역대 최고의 포스를 낸 선수"

지네딘 지단 이전에 존재했던 오리지널 마에스트로이자, 프랑스 축구의 첫번째 화양연화의 주인공.

유럽에서 디에고 마라도나에 대한 유일한 대항마로 칭해졌던 전설의 플레이메이커.[2]

유벤투스에게 첫 빅이어를 안겨 준 선수

중원의 장군

그리고 축구 역사상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 명.

그리고 톱플레이어 감별사

그러나 은퇴 후의 행보로 인해서 모든 명성을 한 번에 걷어차버릴 위기에 처했다.

1 개요

프랑스의 前 축구 선수, 前 UEFA(유럽 축구 연맹) 회장.

2 플레이 스타일

골 기록을 보면 공격수마냥 골을 집어넣어 굉장히 공격적인 선수로 착각할 수 있으나, 오히려 2-3선 사이의 위치에 주로 위치해 경기를 조율하는 역할을 하며 아래까지 내려와 볼 배급을 자유자재로 했다. 특히 방향전환하다가 아주 작은 찰나의 순간조차도 틈을 찾아서 찌르는 킥이 플라티니의 최대 장기. 이는 판단력과 킥의 정교함과 힘이 모두 최고 수준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찬스 포착 능력과 슈팅 능력은 당시 유럽 최고의 리그였던 세리에에서 미드필더로서 연속 득점왕을 수상했다는 것만으로 더 이상 말이 필요없을 정도. 단점이라면 스피드와 드리블 능력은 비교적 평범했다, 그러나 슛팅, 패싱, 시야, 조율 등의 전반적인 부문에서 역대 최고 수준인 전설적인 미드필더.

3 선수 경력

3.1 클럽 커리어

3.1.1 프랑스 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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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국 프랑스의 르 샹피오나(현재의 프랑스 리그 1) 소속의 AS 낭시에서 데뷔, 1978년에 쿠프 드 프랑스(프랑스 컵 대회) 우승 컵을 안겨 주었으며 생테티엔으로 이적한 후에는 1980-1981 시즌 르 샹피오나 챔피언 트로피를 얻는 데 막대한 활약을 펼쳤다.

이렇게 10년 간 내공을 쌓고 있던 플라티니에게 손짓한 클럽이 바로...

3.1.2 유벤투스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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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벤투스 FC의 위대한 전설
세리에 A의 명문팀인 유벤투스였다. 1980년대 초반 당시 전설적인 명장 조반니 트라파토니가 지휘하던 유벤투스 FC세리에 A에서 언터처블 그 자체였고[3], 이탈리아의 자존심 그 자체라고까지 불렸으니 이방인 선수에 대한 텃세가 심할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으며 또 실제로 플라티니가 합세한 1982-1983 시즌 초반에는 아니나 다를까 제법 견제가 따랐다고 한다.

그 와중에 당사자인 플라티니가 세리에 A에서 절정으로 활약한 첫 3시즌간 커리어를 보면...
1982-83: 세리에 A 득점왕(16골) / 세리에 A 2위 / 코파 이탈리아 우승 / UEFA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
1983-84: 세리에 A 득점왕(20골) / 세리에 A 우승 / UEFA 컵 위너스 컵 우승
1984-85: 세리에 A 득점왕(18골) / 세리에 A 6위 / UEFA 슈퍼 컵 우승 / 코파 이탈리아 8강 /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 UEFA 챔피언스 리그 득점왕(7골)

텃세고 적응기고 나발이고 무심한 듯 시크하게 이런 기록들을 세워 주셨다.

세리에 A 역사상 최초의 非 이탈리아인 데뷔 시즌 득점왕이었으며, 유벤투스 클럽 역사상 최초의 3연속 득점왕 기록이었으니 이탈리아 축구의 성지에 찾아온 프랑스 이방인에 대해 그 어떠한 폄훼도 늘어놓을 수 없었으며 오히려 그를 찬양해야 마땅했다.

무엇보다 백미였던 점은 역시 1984-85 시즌, 유벤투스에 처음으로 챔피언스 리그 우승 타이틀을 안겨 주었던 점이다. 당시 유럽 전체를 호령하던 유벤투스라는 빅 클럽에 딱 하나 없던 것이 바로 챔피언스 리그 트로피였고, 비안코네리 팬들이 얼마나 빅 이어에 목말라 있었는지는 두 말하면 입이 아프겠다. 그런데 어느 날 날아 들어온 프랑스 이방인이 데뷔 시즌에 팀을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데리고 가더니, 2년 후에는 그토록 바라던 빅 이어를 토리노(유벤투스의 연고지)에 가지고 와 주었으니.

당시 챔스 득점왕조차 플라티니였으며(7골), 1-0으로 마무리되었던 리버풀 FC와의 결승전에서도 선제골이자 쐐기 골이 된 골을 넣었던 것도 플라티니였으니 더 이상 설명이 必要韓紙?[4][5]

플라티니의 미친 듯한 활약으로 유벤투스는 UEFA 사상 최초로 유럽 클럽 대항전 3대 메이저 타이틀[6]을 모조리 점령한 클럽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사족으로,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갓 유벤투스 FC에 영입되어 우물쭈물하던 덴마크 태생의 한 애송이가 있었으니... 그리고 그 애송이는 5년 후 바르셀로나에서 신이 되었다가 배신하고 레알 마드리드의 전설이 되었다.

뱀발로 플라티니의 클럽 스탯을 되짚어보면,
AS 낭시 : 181경기 98골
생타티엔 : 104경기 58골
유벤투스 : 147경기 68골
총합 432경기 224골. 이 사람, 공격수 아니다. 미드필더다. 흠좀무.

물론, 이런 기록들을 세우며 진정한 월드 클래스 선수로 거듭나게 됨에는 개조가 필요했다. 프랑스에서는 공격수로 뛰었지만, 발재간과 득점력과 패스가 절묘하게 결합된 그의 능력을 눈여겨본 유벤투스에서는 마개조당해 프리 롤 역할을 기반으로 한 플레이 메이커 임무를 맡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보시는 대로. 그의 막강한 득점력에는 공격수로 뛰던 배경이 있다.

이런 화려한 영광을 뒤로 하고, 1987년에 불과 32세라는 젊은 나이에 돌연 은퇴를 한다. 1985년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할 당시 헤이젤 참사가 일어났는데, 이에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3.2 국가 대표 커리어

아직도 회자되는 전설의 유로 1984

사상 최고의 플레이 메이커라는 찬사를 받았던 만큼 국가 대표에서도 그 맹렬한 활약은 계속되었는데, 그전까지 국가 대항전에서 영 힘을 못 쓰던 프랑스를 끌고 나선 2차례의 월드 컵에서 연속 4강에 진출하는 흠좀무한 쾌거를 이룬다.[7][8] 사실 월드 컵에서도 당대의 최강자이던 디에고 마라도나의 유일하다시피 한 라이벌로 연결되었으며 실제로도 거의 그러했다. 1982년 월드 컵 때는 플라티니의 승리라 할 수 있었겠으나[9] 1986년의 마라도나는... 답이 없죠.

프랑스 국가 대표 미셸 플라티니가 플레이의 정점을 찍었던 시점은 역시 유로 84 되겠다. 플라티니가 주장 완장을 걸고 참가하였던, 그리고 프랑스에서 열리고 프랑스가 우승했던 1984년 유럽 선수권 대회는 단 한 문장으로 정리 가능했다.

"플라티니의, 플라티니에 의한, 플라티니를 위한"

조별리그 덴마크전 결승골(1-0 승리)
조별리그 벨기에전 결승골, 쐐기골 2골 해트트릭(5-0 승리)
조별리그 유고슬라비아전 동점골, 역전골, 쐐기골 해트트릭(3-2 승리)
준결승 포르투갈전 결승골(3-2 승리)
결승 스페인전 결승골(2-0 승리)

5경기 동안 9골을 몰아쳤다. 그것도 모든 경기에서 결승골을 기록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2게임 연속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이 2게임 연속으로 오른발, 왼발, 머리로 1골씩을 넣으며 '퍼펙트 해트트릭'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당시 프랑스 공중파에서는 "다음번 플라티니가 보여줄 묘기는"이라는 제목의 TV프로그램이 방영되기까지 했다니 이 무슨. 게다가 저 중 페널티킥 골은 벨기에전 쐐기골 뿐이고 프리킥은 두 골이나 넣었다. 더더욱 대단한 것은 유로 1984에 출전한 8국가 중 9골 이상을 기록한 국가는 플라티니의 프랑스(14골)과 준결승에서 좌절한 덴마크(9골)이고 나머지 팀들은 2골~4골에 그쳤다. 그리고 조국 프랑스마저 자신이 넣은 골을 제외하면 5골이다. 즉 한 선수가 웬만한 팀 하나보다 골을 많이 넣었다(...)

포르투갈과의 4강전에서는 2-2로 팽팽히 맞서던 연장 후반 14분(=종료 1분전)에 결승골을 내지르며 팀을 결승전에 안착시켰으며, 스페인과의 결승전에서도 불꽃 프리킥으로 선제골을 작렬, 조국 프랑스에 사상 최초의 메이저 대회 트로피를 안겨주었으니 이젠 마에스트로를 넘어서 국민영웅이었다.

얄짤없는 대회 득점왕 및 MVP였으며 현재까지 깨지지 않고 있는 유럽 선수권 대회 최다 득점 기록이다. 좀 더 부연하자면, 당시 유럽 선수권 득점 2위였던 프랑크 아르네센이 3골, 3위 루디 푈러가 2골이었고(...) 전설적인 스트라이커인 게르트 뮐러마르코 반 바스텐도 각각 4골, 5골이 한 대회 최다 득점기록이다. 게다가 플라티니는 유럽 선수권 대회는 유로 84 한 대회만 출전해서 9골을 넣은 것인데 이 9골이 유럽 선수권 대회 통산 득점 순위에서도 1위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유럽 선수권 대회에서 3번이나 4번 출전한 선수들도 수두룩한데 통산 득점이 9골을 넘는 선수가 단 1명도 없다는 것이다.[10] 그냥 미친 기록이다. 이러니 단일 메이저 대회에서 유로 84에서의 플라티니의 퍼포먼스는 86년 월드 컵에서의 마라도나보다도 한수 위로 평가받는다.[11]

간단히 말해서 축구 역사에서 2차 대전 끝난 후인 1950년 이후가 주로 언급되기 때문에 그 시점 이후를 기준으로 따진다면 1950년대 이후로 열린 모든 메이저 국가 대표 대회에서 한 선수가 얼마나 큰 활약을 했는가. 즉 원 맨 쇼를 보여줬는가를 따지면 단연코 유로 84에서의 플라티니가 1순위다. 1958년이나 1970년 펠레나 1974년 요한 크루이프, 1978년 마리오 켐페스, 1982년 파올로 로시, 1986년 디에고 마라도나, 1988년 마르코 판 바스턴, 2000년 지네딘 지단, 2002년 호나우두 등 팀에서 에이스 역할을 하면서 우승하거나 준우승한 경우가 굉장히 많지만 그 정도 활약은 팀에서 돋보이는 선수, 에이스로서의 대단한 활약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유로 84에서의 플라티니의 퍼포먼스는 그냥 LoL에서도 자주 쓰이는 표현으로 선수단 전체를 하드 캐리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팀 득점의 절반 이상을 책임지고, 그렇다고 골만 넣은 선수도 아니고 중원에서 패스, 플레이 메이킹을 다 하면서 기록한 스탯이다. 그만큼 임팩트가 어마어마하다는 뜻. 다만 대회 특성상 월드 컵이 한수 위의 대회이기 때문에 후대의 평가나 언급에서 자주 밀리는 것뿐이지...

플라티니가 국가 대표 유니폼을 입고 넣은 스탯은 72경기 41골. 2007년 티에리 앙리가 추월하기 전까지 프랑스 국가 대표 최다골 기록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강조하는데 이 사람, 전문 공격수 아니다. 미드필더다.

이 정도 되는 플레이어니 월드사커 올해의 선수상이나 발롱 도르가 그를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역시나, 플라티니는 월드사커 올해의 선수상 2회(1984, 1985)[12] 및 발롱 도르 3회(1983, 1984, 1985)로 유럽을 넘어 전 세계를 쓸어버렸다.

발롱도르를 3회 이상 수상한 플레이어는 단 5명으로, 최초 요한 크루이프에 이어 플라티니, 그리고 마르코 반 바스텐이 있었으며 최근 리오넬 메시, 그리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리고 발롱 도르 3연속 수상은 메시가 나타나기 전까지 3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플라티니만의 유일한 기록이었다. 발롱 도르라는 상의 파급력과 그 상징성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ㅎㄷㄷ한 기록. 이 양반이 괜히 레전설이 아니다.[13][14]

은퇴 직전 쿠웨이트 국왕의 요청으로 쿠웨이트와 소련의 친선경기에서 쿠웨이트 국가대표팀으로 1경기를 뛴 적이 있다.

3.3 은퇴 이후

제프 블래터 前 FIFA 회장과 함께 다스 베이더다스 시디어스 결국 사이좋게 망했다

1987년 은퇴 후 1988년부터 1992년까지 프랑스 국가 대표 감독을 역임하였고,[15] 1998년 프랑스 월드 컵 조직위원장, 이후 FIFA 기술개발위원회 의장과 프랑스 축구 협회 회장을 거쳐 현재는 상술했듯이 UEFA 회장을 역임 중이다.

스타 플레이어가 지도자로 성공하기 힘들다는 속설은 그렇다 쳐도, 행정가로 성공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데 이 양반은 이마저도 해 냈다.[16] 은퇴 후의 커리어로 이 양반에 견줄 수 있는 사람은 프란츠 베켄바워 정도뿐. 사실상 베켄바워와 함께 제프 블라터 FIFA 회장에게 맞장 뜰 수 있는[17] 둘뿐인 축구 행정가라 할 수 있겠다.

헤이젤 참사 당시 뛰었던 선수로 2010년 벨기에 헤이젤 스타디움에서 참사 25주년 추모행사가 열렸다. 당시 선수로 뛰었던 미셀 플라티니 UEFA 회장은 다음과 같은 추모사를 남겼다.

그 경기는 90분으로 끝난 게 아니다. 아직도 당시 경기는 계속되고 있다. 그날 밤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당시 사건은 우리 인생에 남아있으며, 지금도 또한 앞으로도 항상 우리 인생에 남아 있을 것이다. 당시 경기에 참가했던 선수들이든, 단순히 텔레비전으로 경기를 지켜봤던 사람들이든 그 참사를 목격한 사람들이라면 어느 누구도 기억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서 39명의 희생자들을 추모한다. 우리 머리와 가슴은 희생자들과 희생자 가족들과 함께할 것이다.

지네딘 지단과 상당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18] 지단과 비교를 해 대는 설레발들이 많은데 정말 의미없는 짓이다. 둘이 플레이하는 위치만 비슷할 뿐, 플레이 스타일 자체가 다르다. 쓸데없는 짓 말자.[19]

가끔 이름이 비슷하다고 아스날마티유 플라미니랑 헷갈리는 사람도 있는데, 플라미니를 이 사람과 헷갈리는 건 플라티니에 대한 모욕이다(...).

2012년 4월 유로파 리그를 없애고 UEFA 챔피언스 리그에 통합하는 게 어떠냐는 말을 하다가 엄청난 비난을 당했다. 결국 여러 가지 기획 중 하나로 제시된 것이라며 물러서야 했다.

그리고 유로컵 2020 대회부턴 유럽 여러 나라에서 경기를 서로 개최할 예정으로 계획안을 내세워, 조국 프랑스가 개최하는 2016 유로 대회 때 프랑스를 지지하면 2020 유로 개최를 밀어 주겠다고 약조한 터키를 배신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터키와 그리고 2020 유로 컵 경쟁 후보로 나온 아제르바이잔-조지아(공동개최 희망), 스코틀랜드-웨일즈(역시 공동개최 희망)에서도 반발하고 있는 가운데 터키에선 그러지 말고 2016 유로 컵부터 먼저 프랑스 개최를 취소하고 분산 개최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터라 그도 난감해하고 있다. 결국 2020 대회만 그렇게 시험적으로 열고 2024 대회부턴 종전처럼 1, 2개 나라에서만 개최한다고 뜻을 밝혔다.

그래서 이에 대해서 다른 목적 보다는 터키의 유로컵 개최를 방해하려는 목적 아니냐는 음모론이 나오고 있다. 요는 터키가 유럽연합 준가입국으로 가입을 희망하고 있으며,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을 가장 앞장서서 반대하는 국가가 프랑스[20]라는데 있다. 결국 터키는 내부사정까지 더해져서, 2020년 유로컵 결승과 2024년 유로컵 개최를 천명하고 나선 상황.

2014년 발롱도르 투표를 앞두고 "월드컵에서 부진했던 선수가 발롱도르를 수상하는건 옳지 못하다"라며 호날두의 수상을 저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호날두가 올해 발롱도르를 수상하게되면 총 3회 수상으로 플라티니와 같아진다. 그리고 현실이 되었지

2015년 비리가 드러나서 물러난 제프 블래터의 뒤를 이어서 후임 피파 회장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고 있다. 외신은 이미 차기 회장감이라고 예측하는 기사가 나올 정도다. 위에서 상술하듯이 블래터의 지지로 유럽축구연맹의 회장이 되었지만 회장이 된 이후, 유로컵의 참가국을 늘리고 상금을 대폭 올렸고 월드컵에 맞서는 모습을 보여서 블래터와 거리를 두고 있다. 후보로 나서는 정몽준이 플라티니는 블래터의 아들이나 다를 거 없다고 비난하면서 자신이 회장이 되면 개혁을 하겠다고 큰소리를 치지만 정작 외신의 반응은 비아냥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정몽준이 이끄는 현대중공업 비리 문제조차도 해결못한다고 역으로 까임새나 당할 거리가 있으니...

또한, 유럽 빅리그 팀의 팬들은 대다수가 플라티니를 아주 싫어한다. 이 사람이 적극적으로 주장해서 밀어붙인 재정적 페어플레이 룰(FFP)때문에, 빅클럽들이 이적료를 무한 투입하여 선수를 영입하는데 제동이 걸렸고, 실제로 맨체스터 시티, 파리 생제르맹 FC는 FFP때문에 선수영입 금지의 징계를 먹기도 했다. 하지만, FFP에도 불구하고 모국 프랑스의 파리 생제르맹 FC는 그런 것 없이 마음껏 질러대서 플라티니가 배후에 있는거 아니냐는 음모론을 제기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FIFA 회원국 중에서 절반에 가까운 회원국들의 지지를 확보한 상태여서 가장 유력한 차기 FIFA 회장으로 점쳐지고 있었다. 그러나...

3.4 몰락


자신의 후원자와 같이 몰락하다
2015년 9월 스위스 검찰이 플라티니가 블라터에게 200만 스위스 프랑(약 24억원)을 받은 정황을 포착하면서 플라티니를 수뢰 혐의로 수사할 방침이어서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을 위기에 처해 있다. 플라티니 본인은 돈은 받았지만, FIFA가 정상적으로 지급한 보수라며 반발하는 상황이다.[21] [22]

플라티니는 무고를 주장하고 회장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지만 결국 FIFA 윤리위에 의해서 제프 블라터와 함께 나란히 8년 간의 자격정지 징계가 확정되었다. 플라티니는 CAS(국제 스포츠중재 재판소)에 항소했지만 기각되어 최종적으로 8년 자격 정지가 확정되었다. 결국 자동적으로 FIFA 회장 선거 출마는 희박해진 셈.

사상 최대 조세 스캔들인 파나마 페이퍼즈에 연루된 인물 중 하나로 알려지고 있다.

4 어록

낭시는 나의 고향 클럽이고, 셍테티엔과 로리앙은 프랑스 최고의 축구 클럽이고, 유벤투스는 세계 최고의 클럽이다.[23]
축구는 실수의 스포츠다. 모든 선수가 완벽하게 플레이를 한다면 스코어는 영원히 0:0이다. [24]
축구는 합리적인 스포츠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공은 둥글다.
벤제마 톱 플레이어 아냐
  1. 이탈리아계 프랑스인
  2. 사실 1986 월드컵 전까지는 플라티니가 유럽의 1인자로서의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반면, 수많은 전문가들은 이미 기량은 마라도나가 플라티니 이상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던 시점이다. 이건, 당시 발롱도르가 유럽선수에게만 수여하던 방식이라 마라도나가 수상자격에서 애초에 배제되었다는 면을 감안해야 한다.
  3. 다른 "북부 3강"이던 AC 밀란은 1980년대 후반 아리고 사키 감독 체제가 되어서야 간신히 부활했을 정도로 막장 가도를 걷고 있었고, 인테르 역시 거기서 크게 다를 것 없는 행보를 걷고 있었다.
  4. 물론 이 결승전은 유럽 축구 사상 최악의 참사인 헤이젤 참사가 터진 비극적인 날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유벤투스와 플라니티의 대단한 업적에 손상이 가는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5. 다만 플라티니는 헤이젤 참사의 충격으로 30대 초반의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은퇴한다.
  6. UEFA 컵, 챔피언스 리그, 컵 위너스 컵.
  7. 1982년 4위, 1986년 3위.
  8. 물론 프랑스도 그 이전에는 "나폴레옹" 레이몽 코파나, "월드 컵 한 대회 13골"의 전설인 쥐스트 퐁텐이 있었으나 이들은 5,60년대 플레이어였고 그 이후 이렇다 할 두각을 보인 월드 클래스 선수는 없다시피 했다.
  9. 플라티니 4강, 마라도나 2차 리그 탈락.
  10. 오늘 새벽(2016년 7월 7일, 한국시간) 포르투갈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웨일스와의 유로 2016 4강전에서 1골을 넣으며 플라티니의 9골과 타이를 이뤘다. 하지만 호날두는 유로 2004부터 유로 2016까지 4번의 유럽축구선수권대회를 거치며 축적된 기록이다.
  11. 당시 마라도나는 7경기 동안 신의 손을 포함해서(...) 5골 5도움을 기록했으니 스탯 면에서는 플라티니보다 확실히 아래다. 다만 마라도나는 압도적인 드리블 실력과 그에 따른 어그로(...) 덕에 7경기 동안 드리블 돌파를 53회나 성공시키고 53번의 파울을 당했다.
  12. 잉글랜드 주관 잡지사인 월드사커는 올해의 선수 및 올해의 팀, 올해의 감독을 매년 발표하였는데 기존의 피파 올해의 선수상, 발롱 도르에 이은 3번째 권위 정도에 해당하는 개인상으로 여겨졌다. 이 80년대 시기 월드사커 올해의 선수상은 나름 의미를 가지는데 비유럽권 선수에게는 주어지지 않던 발롱 도르와 이 시기엔 탄생하지도 않은 피파 올해의 선수상과는 달리 남미권 선수에게도 자격이 주어진 상이기 때문에 진정한 올해의 선수로써 좋은 표본이 되는 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83년 지쿠, 86년 마라도나가 그 사례에 해당한다.
  13. 단 이때는 비유럽인들은 발롱도르 수상 대상이 아니었다. 덕분에 브라질에서 주로 선수생명을 영위한 펠레는 물론이고 나폴리에서 전성기를 구가한 마라도나마저도 후보조차 될 수가 없었다. 비유럽권 수상제한이 풀린 것은 1995년이다. 이 때문인지 펠레와 마라도나는 2000년대에 공로상 개념으로 발롱도르를 별도로 받았다. 단 발롱도르 자체가 유럽 국적의 선수들만 자격 대상이어도 정말 받기 어려운 상이라는 것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렇다.
  14. 그리고 펠레와 마라도나에 비견되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스페인 국적을 획득했고 2회의 발롱도르 수상경력(57, 59)도 있긴한데, 이 경우에는 선수 경력의 거의 1/3 동안 발롱도르라는 상 자체가 없었다. 발롱도르의 제정은 1956년인데, 남미시절은 제외하더라도 레알마드리드의 리그 우승과 디 스테파노의 득점왕 행진은 1954년, 레알마드리드의 챔피언스리그 5연패는 1955년부터 있었다. 여기에 1956년 발롱도르 첫 수상은 공로상 개념으로 40세 스탠리 매튜스에게 넘어가는 상황까지 있었다. 물론 전설 스탠리 매튜스 역시 자신의 커리어 태반 동안 발롱도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상은 이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15. 유로 1992 예선에서 스페인, 체코와 같은 조에 속했음에도 불구하고 8전 8승으로 본선에 진출했으나, 정작 본선에서는 잉글랜드와 비기고, 덴마크 돌풍의 희생양이 되면서 해임된다.
  16. 다만 알아둘 점은 그를 블라터가 지지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전직 UEFA 회장인 렌나르트 요한손은 반블라터파 수장으로 블라터가 늘 눈엣가시처럼 여겼기에 그를 축출하고자 고른 게 바로 플라티니이다. 선거 결과 아슬아슬하게 이겨 회장이 되었다.
  17. 다만 UEFA 회장 선거에 블라터가 지지한 배경을 무시할 수 없기에 베켄바워와 달리 맞장 뜰 처지가 못된다. 하지만 그래도 UEFA는 FIFA와 별개라면서 2016년 프랑스 유로컵 대회부터 참가국을 24개로 늘리는 것을 강력하게 지지하여(사실 회장이긴 해도 UEFA에서도 피파가 관여하는 것에 불만을 가지는 게 많아서 다음 회장 연임을 노리자면 블라터에게 거슬릴 수 있음을 어필해야 했다. 무엇보다 회장직을 겨우 2% 수준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이겼기에 아무리 블라터가 그를 지지하네 뭐네 해도 반블라터, 반피파 세력이 상당한 UEFA에서는 그도 눈치 좀 봐야 한다) 블라터가 불쾌하게 여기기도 했다. FIFA 공인 대회가 아닌 대회에서는 처음이며 유로컵은 피파와 일절 무관하고 우승상금 규모로는 월드컵에 뒤쳐지지 않는 유일한 국제 축구 대회이기 때문이다.
  18. 프랑스 출신 레전드 플레이 메이커, 유벤투스에서 챔스 결승 진출, 유럽 선수권 우승 등.
  19. 플라티니는 적극적인 공격 지향적이었고, 지단은 자신에게 수비진을 집중시키며 패스를 찔러 주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득점력에 있어서 플라티니와 지단 사이에는 넘사벽이 있다는 점이다.
  20. 축구와 전혀 다르지만 경제,정치적으로 프랑스가 늘 터키에 대하여 반대한다. 아르메니아 학살에 대해서도 터키를 맹렬히 비난하는 게 프랑스이니 말다했지만, 프랑스도 알제리 전쟁 당시 벌여놓은 이에 못지않아 터키랑 그리 사이좋지 않은 알제리도 프랑스가 터키를 아르메니아 학살로 비난하면 프랑스를 비난하고 터키는 좋아라 알제리를 편들어준다. 즉 돌고 돈다
  21. 플라티니는 자신이 FIFA에서 상근직 임원으로 일할 때 100만 스위스 프랑(약 12억 3000억원)을 블래터한테서 약속받았지만, FIFA의 급여 체계 문제로 모두 받진 못해서 재직 시 연간 30만 스위스 프랑(약 3억 7000만 원)을 지급하고 지급되지 않운 연봉이 2011년에 받았다고 변명했다.
  22. 그럴 듯 하게 보이는 변명이지만 두 가지 이유로 플라티니의 변명을 반박할 수 있다. 첫째, 플라티니가 FIFA에 일한 시기는 2001년부터 2004년 까진데, 당시 FIFA는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던 시기이다. 이에 따라 재정이 부유해졌을텐데, 우리 돈으로 25억 원을 10년 가까이 임굼울 체불할 이유가 전혀 없다. 둘째, FIFA 회장 선거가 열린 2011년에 갑자기 200만 스위스 프랑이 플라티니한테 지급되었는데, 이 돈이 왜 지급되었는지는 모른다. 이것이 불출마를 위한 대가성 자금을 준 것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플라티니는 어떠한 해명책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23. 1987년 브레시아 칼치오의 세리에 A 최종전에서.
  24. 간단히 말해 기술의 스포츠라는 의미이다. 모든 선수가 완벽하게 해도 격차가 나게되는 육상 등의 단련의 스포츠, 포커 등의 판단력의 스포츠와 그 점이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