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80년대 3대 흑역사

존재 자체가 흑역사 북한에서 1980년대 후반에 저지른 꿀꾸리우스고모부 처형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경제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힌 3대 흑역사. 서해갑문,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가 그것이다. 여기에 류경호텔을 추가해 80년대 4대 흑역사라고도 부른다.

1 서해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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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갑문은 북한 남포특별시의 서쪽 15km에 위치한 갑문으로서 위에는 도로가 건설되어 남포와 황해남도를 연결하는 역할도 한다. 사실 서해안에는 뜬다리부두 등의, 조차를 극복할 시설이 필요하다.[1] 특히 남포 같은 큰 항구라면 국가 단위의 무역량을 수용해야 하는 만큼 갑문 설치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하다. 당장 남한도 인천에 갑문이 설치돼 있는 상황. 그리고 하구둑으로서의 순기능은 하고 있으니 뒤의 두 사례에 비하면 서해갑문은 훨씬 양반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부실 공사, 날림 공사, 무리한 공사의 그랜드 슬램을 달성함으로써 득보다 실이 더 많았다는 점이다. 대동강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1981년 착공하여 3년 내에 완공한다는 목표 아래 조선인민군 육군 1개 군단의 군 병력과 수만 명의 노동자를 투입하였다. 그러나 워낙 난공사였고 북한의 토목공사 기술 수준이 낮아(...) 완공 시기를 두 차례나 연기한 끝에 1986년 겨우 완성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 김일성의 지시로 어떻게든 완공 일자를 당겨야만 했기에(...) 그때 겨우 완성이 된 것이다. 이럴 바엔 선진국에게 공사를 의뢰하는 것이 더 이득이었을듯 하다.

그렇게 시간적으로 여유가 없는 상태에서 날림으로 공사하느라 발생한 부실시공으로 방파제에서 물이 새어들어오고 틈이 벌어지고 갑문이 황폐화되는 이러한 현실 속에 유지보수를 위해 육군 1개 건설사단이 보충작업을 위해 이곳에서 항시 대기하는 병크가 현재진행형이다. 남는 게 군 인력인가 덤으로 완공된 이후에 대동강 유역의 기후가 변하면서 농업생산량과 어업생산량이 이전보다 떨어지게 되었다(…). 통일하면 부수고 다시 지어야 할지도 모른다. 북한에서는 돈을 들여 공산을 해 생산량을 줄입니다!

얼마나 큰 뻘짓이었는지 남한 특수부대가 대동강을 타고 평양직할시로 침투할까봐 지었다는 카더라도 있을 정도(…).

참고로 조선중앙TV 뉴스에서 2005년부터 2012년까지 아나운서의 배경으로 가끔 서해갑문의 사진이 나왔다. 뭐 자랑이라고 저런 거를

2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임수경 방북 사건)


평양축전 당시 영상

축전 개최 당시 사진들

세계청년학생축전은 사회주의 국가 청년들의 행사로 냉전 시기 제 3세계나 사회주의 국가에서 주로 개최되었다. 특히 1989년 제 13회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은 1988 서울 올림픽에 자극을 받은 북한 정부가 의욕적으로 개최한 행사였다.[2] 177개 국가, 약 22,000명이 참가하여 성황을 이루었고 북한 정부도 올림픽보다 더 큰 규모의 행사를 개최했다고 선전할 정도였다. 당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국가들의 이런 세력과시는 신흥국 경기 대회 항목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나마 2010년대에는 아예 이런 허세를 부릴 여유조차 없는지 대구광역시에서 열린 2011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는 뒤늦게 중계를 하면서도 화면을 편집해서 남한에서 개최했다는 사실 자체를 비밀에 부치고 있다.(...) 이 뉴스 참고.

2.1 경제적 타격

하지만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은 이후 동구권 공산 독재 체제의 붕괴와 함께 똥망 테크를 타버렸고(…) 가뜩이나 부가가치를 기대하기 힘든 행사를 무리하게 연속적으로 개최한 북한측은 막대한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순안공항 확장, 광복거리 조성, 류경호텔과 릉라도 경기장 건설, 평양내 고층아파트 건설[3] 등 여러가지 개발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였기는 했지만 문제는 북한은 사회주의 계획경제 체제라 부동산 개발로 수익을 올릴 수 없다는 것이다.[4][5] 그렇다고 행사를 통해 자국을 홍보해서 관광 수입을 올리는 것도 아니고, 사회주의 국가의 관광단이란 초청해서 먹여주고 재워주는 일종의 과시용 성격이 강하다. 그러니까 버는 건 10원 한 장 없고 그냥 돈만 잡아먹는 하마였다는 얘기. 이러니 당연히 손해만 볼 수 밖에 없었다.

동시기 서울올림픽이 선수촌 아파트 분양으로 제법 쏠쏠하게 흑자를 냈고 한국에 대한 이미지 제고를 통해 이후 관광 활성화의 시발점이 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어쨌거나 북한은 이미 지나치게 과도한 군사비 부담과 계획경제의 모순[6]으로 인해 저성장 상태에 놓여있었고, 과도한 행사 비용 부담으로 인해 휘청거리게 된다.

게다가 이때 외국인들을 위해서 찍어낸 '외화와 바꾼 돈표'에 의해서 일종의 통화량 팽창으로 북한의 외환경제는 지속적으로 데미지를 입어 소련 붕괴, 자연재해와 더불어서 고난의 행군을 불러오게 되는 주요한 원인이 된다.

2.2 사회적 타격

대놓고 체제경쟁 패배 인증

임수경남한 사람으로서 민간통일운동으로 참석하는 바람에 화제가 되었다. 물론 동년 3월에 문익환 목사가 방북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임수경은 듣보잡 일개 대학생에 불과했던 만큼 남북한 주민들 모두 휴전선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임수경에 충격을 받는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임수경의 자유분방한 모습이 오히려 통제사회인 북한 일반 주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북한에선 청바지를 미 제국주의 상징으로 선전했는데, 통일투사로 선전했던 임수경은 청바지를 입고 다녔다. 이게 무슨 소리야

또 임수경은 아무런 사전 원고 없이 사람만 모이면 하는 즉석 연설을 하기도 했고, 김일성 생가 만경대 순례를 거부하기도 했다. 결국 수행원이 겨우겨우 설득을 하고나서야 간신히 방문했다. 그런데 가장 큰 것은 공개석상에서 "북한 체제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라고 비판을 하는 것이었다.

이런 임수경의 행동은 북한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고 한다. 사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월북자가 북한 사회에서 이처럼 자유로운 활동을 하기는 어렵다. 세계 학생축전이라는 큰 행사를 벌이고 있는 상황이라 북한 역시 세계 각지에서 모인 좌파 청년들 눈 앞에서 임수경의 돌출 행동을 통제하지 못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명철김일성대 교수 등 1990년대 탈북자들의 증언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게 바로 임수경 충격이다. 임수경을 보고 적어도 남한이 북한보다는 자유롭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축전이 끝난 후 북한 정부에서 사상무장을 다시 해야 한다느니 하면서 한동안 통제가 강화되었다는 후문이 있다.

여담으로 1990년 남북 고위급 회담으로 서울을 대거 방문한 북한 기자단은 당시에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임수경의 집을 방문하여 임수경의 부모와 인터뷰하여 남한 체제를 비판하려고 했는데 정작 그 뉴스를 본 북한 주민들의 반응은 "아니? 정치범이 수감당하고도 가족이 아무 일이 없다니?!"[7]

그리고 중산층에 불과한 가정집에서 (그들 기준으로) 상다리가 부러질 것 같은 식탁을 내놓은 데 대한 충격을 먹었다고 한다. 당시 북한에선 외국인들이 다닐 법한 길에 위치한 가정집들에 통조림을 두어개씩 나누어주며 "혹시 외국인 손님을 받을 일이 있으면 대접하라"라고 지시했다. 한마디로 북한에선 통조림이 부의 상징인 셈. 그나마 당시에는 상대적으로 경제 사정이 나아서 행사가 끝나면 그 때까지 참았다가 반납 안하고 먹어도 좋다고 했다고 한다. 그 이후 경제가 막장이 되면서 이런 선전물품들의 가치가 워낙 올라가 소모되지 않았으면 도로 회수하고 있다. 외국인 왔다 가서 깠다고 뻥치고 먹어버리려 해도 북한에선 외국 관광객들에게 일일이 감시 겸 가이드가 붙어서 얘들이 그런 사람 온적 없다고 해버리면 처벌받아서 못한다.

그런데 임수경 집의 냉장고에선 통조림이 산더미처럼 쏟아졌고, 그런 모습을 본 북한 사람들은 눈이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임수경은 남한 기준으로도 잘 사는 집이었다. 그 당시 집에 컴퓨터가 있었고[8] 부친이 서울지하철공사 공보실장이었을 정도면 말이 더 必要韓紙? 다만 북한 입장에선 혁명열사가 부르주아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혹 붙여주려고 왔다가 되려 자기한테 혹 붙이고 간 꼴이다.(...)

사실 그 전에 5년형을 북한 언론이 비판할 때부터 북한 내부의 분위기는 "그럼 사형이 아니란 말이냐?" 였다고 한다(...). 판문점으로 남쪽에 돌아가는 임수경을 보고 "아이고 저 새파란 처녀가 죽으러 가는구나ㅠㅠ" 라고 생각하는 분위기였을 정도.

하지만, 임수경은 방북했다가 돌아온 뒤 국회의원까지 한 것을 생각해보면...[9] 북한이 체제경쟁에서 진 것을 포함해서 확인사살까지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3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는 1983년 김일성의 지시로 평안남도 순천에 연간 10만 t 규모로 추가건설되던 비날론 공장이었다. 북한 정부는 이 공장이 완공되면 400여 가지 화학제품 생산이 가능해 경공업 발전의 토대가 되어 이팝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의도는 좋았다.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이었으니... 결국 가장 큰 100억 달러를 날려버리고 말았다. 비날론 항목 참조.

그나마 돌아가던 기존 비날론 생산도 90년대 연이은 대홍수로 석탄 가격을 감당하지 못해 1994년에 이르러 모두 중지되었을 정도. 설비는 몰래 고철로 바꿔먹었고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2007년에는 김정일이 비날론 재건을 지시해 2010년 2·8비날론연합기업소가 재가동에 들어갔다. 물론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는 손도 못 대고 고철 상태로 방치되다가 결국 철거된 것으로 추정된다.

파일:Attachment/Sunchon vinalon section1 305.jpg

2009년 5월, 인공위성이 촬영한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 의 사진을 2004년에 촬영한 모습과 비교해보면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철거하는 데만 20년 가까이 걸렸다.

4 종합

직접적인 손해만 서해갑문으로 약 70억 달러, 세계청년학생축전으로 약 40억 달러, 그리고 비날론 공장 증설로 약 100억 달러를 날린[10] 북한 경제는 이 때부터 끝없는 나락으로 빠지기 시작하였다. 간접적 손해 및 파급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 중에서도 직격탄은 세계청년학생축전 유치였는데, 서해갑문이나 비날론 공장 건설은 유동성 자산이나 금융 자산을 활용할 수 있었으나 세계청년학생축전 운영 비용은 얄짤없이 현금이었다. 즉, 40억 달러라는 막대한 현금을 날려버린 셈. 지금도 북한이 자금난에 허덕이는 것은 당시 막대한 현금을 날려버린 측면이 크다.

이 3대 흑역사와 더불어서 소련 붕괴로 수출길이 막히다시피하면서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공산권에서 소련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행사했던 중국의 경우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소득이 크게 신장하긴 했지만 아직 1인당 소득으로 따지면 형편이 없었다. 더군다나 다른국가로 물건 수출하기에는 북한제품의 품질이 낮았고, 이미 북한보다도 값싸게 물건을 수출할 수 있는 나라들이 넘쳐나다보니 경쟁력에서 밀렸다.

여기에 각종 자연재해로 인한 식량 생산량 감소가 겹쳐지면서 결과적으로 고난의 행군을 자초하게 된다.

식량 생산량 감소는 이른바 주체농법과 관련이 있다. 북한당국이 농업생산량 증대를 강조하면서 일단 산을 개간해서 대대적으로 다락밭을 만들어내는걸 장려했고 이 과정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 당연히 나무를 베어냈는데 일단 단기적으로 식량생산량이 크게 증가하는 결과를 낳기는 했지만, 산이 황폐화되면서 홍수 및 산사태에 매우 취약해지는 결과를 낳았고, 결국 경제적으로 큰 비용을 치를수밖에 없어졌다. 거기에다가 90년대 이후에 비료와 연료공급이 크게 줄어들면서 북한 농업은 완전히 망했어요. 2015년에는 가뭄극복한다며 모를 조금씩 염도가 높은 물에 적응시켜 바닷물을 논에 끌어들이려 시도했다는(...) 뉴스가 나오기도 했다. 리센코의 부활

더 심각한 건 북한에서는 이 3대 흑역사를 아직도 혁명과업의 치적으로 선전하고 있다는 점. 반성이 없으면 발전도 없다는 것이 역시 진리. 했으면 지금 이 꼴 났겠냐 또한, 독재국가의 최대 약점인 소수 높으신 분들의 오판이 나라 전체를 시궁창으로 몰아넣을 위험성을 여실히 증명하는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1. 일례로 인천항서울과 붙어있음에도 조차때문에 부산항심하게(거의 4배) 밀린다. 물론 부산항싱가포르처럼 매우 입지가 좋은 것이 근본적인 격차의 원인이다. 게다가 서울-부산 간엔 철도도로 시설이 잘 되어있기 때문에 부산항으로 들어온 물자가 서울까지 수송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2. 여담으로 북한은 서울 올림픽이 개최되는 것을 막기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올림픽 개최는 체재경쟁에서의 패배를 의미하기 때문에 공동개최 같은 것을 주장해 남한의 단독 개최를 저지하기 위한 총력전을 벌였지만 실패했고, 설상가상으로 우방이나 다름없던 중국소련까지 참가하여 북한으로 하여금 뒷목잡기를 시전하게 만들었다.
  3. 다만 고층아파트 건설자체는 필요한 상황이기는 했다. 당시 북한도 남한처럼 막 베이비붐 세대들이 집을 마련해야할 시기가 온지라 고층아파트 건설이 필요했던 것. 다만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예산 부족으로 거의 맥이 끊겼다는게 문제(...)고 2010년대에 들어와서야 다시 건설에 나서기는 했는데 이번에는 부실 공사가 태반이고(...) 그나마도 완전히 짓지도 못했다.
  4. 다만 90년대 이후에는 달라져서 부동산 거래도 이뤄지기는 하긴 한다(...). 고난의 행군 이후 주택 공급이 제때 되지않다보니 벌어지게 된거지만...
  5. 다만 류경호텔은 이 행사랑 직접 관련은 없다. 김일성 생일 선물로 기획된 거라.
  6. 사실 당대 동유럽 국가들도 비슷한 문제를 겪었다. 다만 동유럽 국가들과 다른 점이라면 동유럽 국가들은 부분적으로 공장을 짓겠다고 서방으로부터 외채를 잔뜩 빌렸다가(덕택에 단기적으로 호황을 누리기는 했다. 그 이후가 문제였지만) 오일쇼크와 이자율 상승으로 돈을 제때 갚기힘들어진 영향이 큰 반면에 북한은 군사비 비중이 컸다는 점이다.
  7. 사실 이제 막 제대로 된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들어서고 지금보다 레드 콤플렉스가 훨씬 심했던 당시 남한에서 임수경의 가족들에게 정말 아무런 화가 미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임수경 항목 참조. 그러나 확실한 것은 북한 사람이 남한에 와서 비슷한 행동을 했을 때 겪을 고초보다는 훨씬 나았다는 것이다. 확실히 북한에 비하면 훨씬 나은 정도가 아니라 아무일 없는 거다. 북한이였으면 이미 코로 피양랭면 확정
  8. 지금이야 컴퓨터가 가가호호있을 정도로 대중화 돼 있지만 이 당시만해도 컴퓨터는 고소득층이나 가질 수 있었던 고가품이었다.
  9. 출신성분이 불온하면 당간부조차 꿈꾸지 못하는 북한의 실정을 놓고 본다면 이는 분명한 북한의 체제경쟁의 패배나 다름없다. 더구나 김일성은 생전에 함경도 사람은 간부로 등용하지 말라는 명령까지 할 정도로 특정 지역에 대한 반감이 높은 것도 존재한다. 한국도 엄청 심각한 수준이라고는 해도 특정지역 출신의 고위직 진출 금지같은 막장은 찍지 않는다. 더구나 임수경은 북한으로 치면 반역죄인인데 요덕 수용소아오지로 간 것이면 그나마 행운이고 실제론 무시무시한 총살형이 반기는 판국에 총살이 아니고 국회의원이라는 고위 간부가 되어있다는 사실은 북한에서 볼땐 이만한 컬처 쇼크도 없다.
  10. 참고로 80년대의 210억 달러를 2010년대의 달러 가치로 환산하면 이미 천억 달러를 넘는다. 이는 미국이 세계 2차 대전 당시에 비밀리에 추진했던 맨하튼 프로젝트에 들어간 돈을 훨씬 능가하며 굳이 비교를 하자면 냉전 때 미국이 소련보다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해 돈지랄을 벌이면서 추진했던 아폴로 계획에 들어간 자금과 비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