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지도자!오오 흑형 간지
파리 생제르맹 FC 단장 | |
파트릭 스테판 클라위버르트 (Patrick Stephan Kluivert) | |
생년월일 | 1976년 7월 1일 |
국적 | 네덜란드[1] |
신체 조건 | 188cm, 81kg |
포지션 | 포워드 |
소속 클럽 | AFC 아약스 (1994 - 1997) AC 밀란 (1997 - 1998) FC 바르셀로나 (1998 - 2004) 뉴캐슬 유나이티드 (2004 - 2005) 발렌시아 CF (2005 - 2006) PSV 아인트호벤 (2006 - 2007) 릴 OSC (2007 - 2008) |
지도자 | AZ 알크마르 수석코치 (2008 - 2010) 브리즈번 로어 수석코치 (2010) NEC 수석코치 (2010 - 2011) FC 트벤테 II 감독 (2011 - 2012)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수석코치 (2012 - 2014) 퀴라소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2015 - 2016) 아약스 A1[2] 감독 (2016) |
스태프 | 파리 생제르맹 FC 단장 (2016 - ) |
국가 대표 | 79경기 40골 |
EURO 2000 BEST XI | |||||||||||
FW 파트릭 클루이베르트 | FW 프란체스코 토티 | ||||||||||
MF 지네딘 지단 | MF 파트리크 비에이라 | MF 에드가 다비즈 | MF 루이스 피구 | ||||||||
DF 파올로 말디니 | DF 파비오 칸나바로 | DF 로랑 블랑 | DF 릴리앙 튀랑 | ||||||||
GK 프란체스코 톨도 |
안드리 셰브첸코 이전의 끝없이 하락한 월드클래스 스트라이커의 표본.[3]
네덜란드 국적의 은퇴한 스트라이커. 국내에서 세계 4대 스트라이커로 호사가들이 칭하고, 한 시대를 풍미하고 전성기 시절 국대의 원톱 자리를 놓고 주전 경쟁을 하던 뤼트 판 니스텔로이와 같은 날 태어났다.
목차
1 플레이 스타일
189cm의 장신에서 뿜어나오는 피지컬로 전방을 초토화시키던 전형적인 타깃 스트라이커. 전성기 시절 헤딩 능력은 동시대 선수인 비어호프가 있었으니 최고라 하긴 무리가 있었으나 그를 포함해 등지는 플레이 등 타겟으로서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이며 루드 반 니스텔루이, 로이 마카이, 피에르 반 후이동크, 지미 플로이드 하셀바잉크등의 출중한 스트라이커를 전부 밀어버렸던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부동의 원톱. 이때 당시 로이 마카이는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득점왕 출신. 하셀바잉크, 반 니스텔루이는 EPL 득점왕 출신이었다.[4]이들을 전부 주전 경쟁에서 밀어버린 최고존엄.
2 선수 경력
2.1 네덜란드
유럽에서 알아주는 AFC 아약스의 유스출신으로 데뷔시즌 이미 네덜란드의 전설이였던 프랑크 레이카르트를 필두로 마크 오베르마스, 에드가 다비즈, 클라렌스 세도르프, 로날드 데 부어, 프랑크 데 부어 형제, 야리 리트마넨, 미카엘 라이지거, 에드윈 반 데 사르등 당시 햇병아리 선수들과 함께 당시 최강팀이였던 밀란 제네레이션을 꺾고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견인한다.[5] 클루이베르트는 이 경기에서 결승골을 넣고 전세계의 주목과 함께 특히 마르코 반 바스텐의 은퇴이후 다니엘 마싸로, 데얀 사비세비치로 만족하지 못해 반 바스텐의 후계자를 찾던 AC 밀란의 관심을 끌게 된다.
이후 2시즌을 주전으로 활약하다 AC 밀란으로 이적한다.
2.2 이탈리아
당시 초특급 유망주로 꼽히던 에드가 다비즈, 옌스 레만와 함께 AC 밀란으로 향하지만 다비즈는 당시 최고의 딥 라잉 미드필더 였던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에게, 레만은 세바스티안 로시[6] 마르코 반 바스텐의 후계자로 주목을 받던 클루이베르트는 로베르토 바지오, 조지 웨아등에게 밀려 후보 신세로 전락해 불만을 품고 1년만에 팀을 떠나게 된다.[7]
2.3 스페인
결국 FC 바르셀로나로 헐값에 이적하여, 1년전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로 이적한 호나우두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최전방 공격수로 낙점된다.[8] 아약스 시절 자신을 이끌었던 루이스 판 할 감독과 다시 재회하여 드디어 기량을 만개하여, 히바우두, 클루이베르트, 루이스 피구라는 당시 역대 최강급 공격진의 일원으로 리그 우승을 차지하나 계속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운이 없었는지 팀을 떠날때까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9] 유로 2000을 정점으로 슬슬 기량 하략이 눈에 띄었지만 하필 당시 바르샤에서 루이스 판 할을 다시 기용한지라 히바우두와 세르히는 재계약을 포기하고 각각 AC 밀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자유계약으로 이적해버리고, 기껏 영입한 히카르두 콰레스마, 시망, 후안 로만 리켈메 등은 이상한 포지션에 세우는 기행을 선보이는 와중에 클루이베르트는 하비에르 사비올라와 투톱을 이루며 그럭저럭 스텟을 쌓아주었지만 전성기만큼의 임펙트는 보여주지 못했다. 결국 2003-04 시즌 결국 판 할을 경질하고 네덜란드 국대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었지만 클럽팀 감독 경험으로는 스파르타를 강등으로 인도한 프랑크 레이카르트를 임명하는 초 강수를 둔다. 레이카르트도 전반기에는 클루이베르트를 기용하였으나, 눈이 썩는 경기력으로 부진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결국 사비올라에게 주전경쟁에서 밀린다.[10] 시즌이 끝나고 2004-05 여름 이적시장에서 마요르카의 떠오르던 공격수 사무엘 에투의 영입으로 결국 팀을 떠나게 된다.[11] 바르셀로나 시절 기록은 182경기 90골로 경기당 약 0.5골 꼴.
2.4 잉글랜드
클루이베르트의 새로운 안식처는 뉴캐슬 유나이티드였다. 아무리 기량이 하략했어도 클루이베르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던 루드 반 니스텔루이를 밀어낸 부동의 네덜란드 원톱 스트라이커였기에 팬들과 언론의 기대는 대단하였다. 심지어 아스톤 빌라 원정 경기에서는 홈팀 빌라의 꼬마 팬들이 상대팀 선수인 그에게 사인을 받을 정도였으니 뉴캐슬 팬들의 기대는 더 대단했으리라. 하지만 자신을 영입한 바비 롭슨 감독이 시즌이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경질 되었고, 본인도 리그 적응 실패, 부상 및 부진 등으로 25경기 6골이라는 기대에 걸맞지 않은 악몽스러운 기록을 세우고 발렌시아 CF로 이적하게 된다. AC 밀란 시절 이후 최대의 흑역사였지만 이건 서막에 불과했다.
2.5 다시 스페인으로
이미 기량이 하락한 클루이베르트를 영입한 구단은 발렌시아 CF였다. 하지만 당시 떠오르던 신예 다비드 비야에게 밀려 10경기 1골을 기록하는 최악의 커리어를 기록하고 1년 후 다시 팀을 떠나게 된다.(...) 이때의 폭풍삽질로 2006 독일 월드컵 참가가 물거품이 된 것은 덤.
2.6 이후
이후 2006-07 시즌은 네덜란드로 복귀하나 아약스가 아니라 아약스의 라이벌인 PSV에서 뛰었고, 2007-08 시즌을 프랑스의 릴 OSC에서 보내나 각각 리그 3골과 4골이라는 전부 기대 이하의 활약을 보이며 쓸쓸하게 은퇴하게 된다. 특히 PSV 시절 자신의 친정팀이라고 할 수 있는 아약스와의 홈경기에서 골을 넣었으나 당시 경기에서 팀이 지고 있던 상황 탓도 있고(당시 결과는 1-5로 PSV가 패배) 그다지 기뻐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아약스 팬들에게 묘한 느낌을 주기도. 전성기 시절 전 세계를 호령했던 스트라이커의 말년이 이렇게 허무할줄 누가 알았는가. 동갑내기 반 니스텔루이가 2006-07 시즌 레알 마드리드에서 피피치를 수상하고 유로 2008에 참가하는 등 계속 멋진 활약을 보인 것과는 대조적.
2.7 국가대표
뤼트 판 니스텔로이, 로이 마카이등 네덜란드의 쟁쟁한 스트라이커를 죄다 묻어버린 부동의 원톱 스트라이커였다. 통산 79경기 40골로 2013년에 로빈 반 페르시가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 네덜란드 A매치 통산 최다 골 기록 보유자였다. 이후 클라스 얀 훈텔라르도 클루이베르트의 득점 기록을 경신하면서, 현재는 네덜란드 A매치 역대 3위의 골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훈텔라르는 현재 반 페르시에 이어 네덜란드 A매치 역대 2위의 골 기록을 가지고 있다.
다만, 유로 1996에서는 부상으로 거의 뛰지 못하다가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골을 넣었고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첫경기 벨기에전에서 퇴장을 당하는 바람에 한국 경기에 뛰지 않아서 한국에서는 네덜란드 부동의 국대 스트라이커라는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나왔다면 5:0을 뛰어넘는 역대급 대참사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알다시피 2002년 한일 월드컵은 네덜란드가 예선탈락으로 아예 못나왔으니까(...).
클루이베르트 국대 커리어의 정점은 유로 2000으로, 유고전 해트 트릭 포함. 5골을 넣어 득점왕을 차지한 것. 하지만 2002년 월드컵은 예선 탈락해 버렸고,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한 유로 2004 때는 국대 승선은 했으나 딕 아드보카트가 그를 여러 가지 문제로 기용하지 않아 결국 유로 2004가 마지막 국대가 되었다.
3 지도자 경력
2008년 4월 코치 라이센스를 취득했고 2달뒤인 6월에는 2008/09시즌 AZ 알크마르의 수석코치로 임명됐다. 1년 반 가량 AZ의 수석코치로 활동하다 2010년 1월 호주로 건너가 A리그의 브리즈번 로어 의 수석코치로 약 5개월간 단기간으로 활동했다. 2010년 8월에는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와 NEC의 수석코치로 임명되어 한 시즌간 팀을 지휘했다. 2011년 여름 네덜란드 트렌테의 산하 유스팀인 트렌테 II의 감독으로 임명되어 유스 지역리그를 우승시키기도 했고 2012년 여름 루이스 반 할의 요청에 따라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수석코치로 임명됐다. 그 후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네덜란드 대표팀을 3위로 이끌기도 했고 월드컵이 끝난 직후 반할과 함께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2015년 3월 북중미 카리브해에 위치한 퀴라소의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됐다. 곧 바로 2018 러시아 월드컵 지역예선전을 치뤘는데 1차예선에선 몬트세렛을, 2차예선전은 쿠바를 상대로 승리를 거둬 3차예선에 진출했으나 엘살바도르에게 0:2로 패배당해 지역예선에서 탈락했다. 2015년 9월 10일 6개월간의 재직을 끝으로 퀴라소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직에서 물러날것임을 발표했다. 그 이후로도 기술고문역으로 퀴라소 축구 대표팀의 자문을 해주며 인연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2016년 2월 캐리비언 컵에 참가하게 된 퀴라소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직에 복귀함을 발표했다. 한달뒤인 2016년 3월 2일 아약스 유소년팀인 아약스 A1의 감독으로 임명되어 2016/17시즌 유스리그를 지휘하게 됐다.
그렇게 퀴라소 축구 국가대표팀과 아약스 A1의 감독직을 겸임하는듯 했으나 캐리비언 컵이 끝난 직후 퀴라소 대표팀에서 사직했고 2016년 7월 14일 파리 생제르망에서 단장직 제의를 받자 아약스 A1에서의 짧은 감독 생활을 마무리 짓고 파리 생제르망의 단장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4 기타
기량이 한순간에 몰락한 선수의 대표적인 케이스로 신체와 경험이 완숙되어 가장 기량이 빛난다는 20대 후반에 저니맨이 되어 소속팀마다 이정도로 망한 월드 클래스급 공격수를 찾는 것이 어려울 정도.[12] 특히 2006-07 시즌 동갑내기의 같은 국적소속 반 니스텔루이가 라리가에서 25골을 넣어 득점왕에 오른 것과 대조적.
기량이 빨리 몰락한 이유는 다른 거 없다. 불성실한 데다 멘탈이 별로였기 때문. 이 선수가 친 가장 큰 사고는 1995년 아약스 시절 일으킨 교통사고로 피해자가 사망했고 운전면허 박탈에 240시간 사회봉사를 선고받은 것.[13] 이것도 당시 죄질에 비해 낮은 형량이었다고 언론에서 까였고 1996년에는 성추행 의혹도 있었다. 아약스를 떠나 해외로 간건 이런 문제때문이었다. 클루이베르트와 비슷한 이유로 몰락한 스트라이커로는 세리에 팬들의 자랑이였다가 금지어까지 추락한 아드리아누가 있다.
불성실하고 방탕했었던 선수 시절과는 달리 지도자로 전향한 후에는 차근 차근 커리어를 쌓으며 성실한 모습을 보여주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월드 클래스 포워드였다는 걸 입증이라도 하듯 공격수 조련에 일가견을 보이는 모습. 대표적으로 현재 토트넘 핫스퍼에서 뛰고 있는 무사 뎀벨레의 경우 클루이베르트와 함께 한 시즌에 커리어 처음으로 리그 두 자릿수 득점을 등 빼어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현재의 지도력만 꾸준히 보여준다면 조만간 1군 팀 감독으로써의 모습을 볼 수 있을듯..... 그리고 2015년 퀴라소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아 팀을 2018년 월드컵 3차 예선에 진출시켜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입증하는 중.
전처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3명, 그리고 재혼한 아내와의 사이에서 또 아들을 낳아서 아들이 무려 4명이나 있다. 오오 네덜란드의 애국자 전부인 하고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3명, 퀸시, 저스틴, 루벤은 모두 아약스 유스 아카데미에서 축구를 하고 있다. 막내 아들인 셰인도 조금 더 자라면 축구를 하게 될 수도.
아들들 중에서 외모가 가장 아버지와 많이 빼닮은 저스틴은 아버지와는 다르게 주로 측면에서 플레이를 하는데, 기술이 좋아, 동년배들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재능으로 꼽히고 있고, 아약스에서도 기대가 크다고 한다. 결국 아약스와 정식으로 프로선수 계약을 체결하였고, 16-17 시즌에는 아약스 유스의 최고 단계인 A1에서 뛰게 된다고 한다. 마침 클루이베르트도 16-17시즌 부터 A1의 코치로 일하게 되어, 아들을 직접 지도할 수 있게 되었다.
5 경력
5.1 대회 우승
- AFC 아약스 (1994/95 - 1996/97)
- 네덜란드 에레디비지 (2) : 1994/95, 1995/96
- 요한크루이프 실드 (2) : 1994, 1995
- UEFA 챔피언스리그 (1) : 1994/95
- UEFA 슈퍼컵 (1) : 1995
- 인터콘티넨탈 컵 (1) : 1995
- FC 바르셀로나 (1998/99 - 2003/04)
- 스페인 라 리가 (1) : 1998/99
- PSV 아인트호벤 (2006/07)
- 네덜란드 에레디비지 (1) : 2006/07
-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 1998 FIFA 프랑스 월드컵 4위
5.2 출전 기록
시즌 | 클럽 | 소속리그 | 리그 | FA컵 | 대륙대회 |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
1994/95 | AFC 아약스 | 네덜란드 에레디비지 | 25 | 18 | 2 | 1 | 10 | 2 |
1995/96 | AFC 아약스 | 네덜란드 에레디비지 | 28 | 15 | 2 | 1 | 8 | 5 |
1996/97 | AFC 아약스 | 네덜란드 에레디비지 | 17 | 6 | 1 | 0 | 4 | 2 |
1997/98 | AC 밀란 | 이탈리아 세리에 A | 27 | 6 | 4 | 3 | - | - |
1998/99 | FC 바르셀로나 | 스페인 라 리가 | 35 | 15 | 3 | 1 | - | - |
1999/00 | FC 바르셀로나 | 스페인 라 리가 | 26 | 15 | 2 | 1 | 14 | 7 |
2000/01 | FC 바르셀로나 | 스페인 라 리가 | 31 | 18 | 5 | 2 | 12 | 5 |
2001/02 | FC 바르셀로나 | 스페인 라 리가 | 33 | 18 | 0 | 0 | 17 | 7 |
2002/03 | FC 바르셀로나 | 스페인 라 리가 | 36 | 16 | 0 | 0 | 15 | 5 |
2003/04 | FC 바르셀로나 | 스페인 라 리가 | 21 | 8 | 2 | 0 | 3 | 2 |
2004/05 | 뉴캐슬 유나이티드 |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 25 | 6 | 6 | 2 | 6 | 5 |
2005/06 | 발렌시아 C.F | 스페인 라 리가 | 10 | 1 | 2 | 0 | - | - |
2006/07 | PSV 아인트호벤 | 네덜란드 에레디비지 | 16 | 3 | 2 | 0 | 3 | 0 |
2007/08 | 릴 OSC | 프랑스 리그앙 | 13 | 4 | 1 | 0 | - | - |
- ↑ 수리남계 네덜란드인으로 같은 수리남계 네덜란드인 축구선수는 대표적으로 루드 굴리트, 엣하르 다비즈, 클라렌스 세도르프 등이 있다.
- ↑ 아약스 유소년 팀
- ↑ 셰브첸코는 30대 초반 새로운 리그의 적응과 마누라의 등쌀등 주변의 상황으로 인한 잘못된 선택을 보여줬다면 클루이베르트는 부상과 슬럼프등의 멘탈문제로 얼마나 망가지는지 잘 보여준다.
- ↑ 그러나 반 니스텔루이가 득점왕을 먹은건 02-03 시즌이며 그때는 이미 클루이베르트는 하향세를 타고 있을때다. 즉 반 니스텔루이가 전성기에 들어서기 시작한 시점과 달라서 반 니를 그냥 묻어버렸다고 보기엔 무리가 조금 있다. 그냥 유로 2000까지 부동의 주전이었다고 생각하자.
- ↑ 이 우승을 마지막으로 아약스는 현재까지 챔스우승을 하지 못하고 있다. 당시 감독은 이후 바르셀로나, 바이에른 뮌헨등에서 성공적인 감독생활을 했으나 특유의 똥고집으로 최악의 결과를 도출시키고 항상 경질된 루이스 판 할. 그 중 압권은 히바우두를 왼쪽날개로 고정시켜버린것. 요즘 축구판으로 따지면 리오넬 메시를 왼쪽 윙포워드만으로 출전시키는 정신나간 짓을 벌였다고 비유할수 있다.
- ↑ 밀란제네레이션 시절의 주전 골키퍼. 클럽에서의 위용과 다르게 국가대표에서는 시대별로 디노 조프, 잔루카 팔류카, 지안루이지 부폰등에게 밀려서 인지도가 낮은편.
- ↑ 세리에 A 경기는 당시는 18팀 34경기 체제였는데 클루이베르트는 26경기를 출전하여 7골을 넣었다. 어린 선수치고 적지 않은 골을 넣었지만 팀의 레전드인 반 바스텐의 후계자이자 즉시 전력감으로 데려온 선수가 이래서야(...). 이후 밀란은 2년 후에 안드리 셰브첸코를 영입하고 나서야 반 바스텐 이후 확고한 주전 스트라이커를 손에 넣는다.
- ↑ 호나우두의 후계로 영입된 선수는 히바우두지만 상기했다시피 판 할감독은 히바우두를 왼쪽 윙포워드로 고정시킨다.
그럼에도 미친 듯한 활약을 보여줬다 - ↑ 바르셀로나의 대외컵 암흑기 시즌은 드림팀 1기 말년이던 1994년도 AC 밀란에게 결승전에서 4:0으로 떡실신 당한후부터 2004-05 시즌 전까지 계속 유지된다. 심지어 클루이베르트 합류전 시즌에는 안드리 셰브첸코에게 농락당하며 예선에서 떨어지는 수모까지 겪는다.
- ↑ 참고로 사비올라는 빅&스몰의 투톱 스트라이커로 바르샤식 4-3-3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선수이다. 이런 타입의 선수에게 밀렸다는 것은...
- ↑ 이 직후 4-3-3 전술을 채용함으로써 투톱 전문인 하비에르 사비올라 역시 임대를 전전한다. 사비올라의 경우 팀을 제대로 잘못만나 망한 케이스지만.
- ↑ 반등에 성공한 셰브첸코는 제쳐두더라도 이 분이 뒤를 이어가고 계신다.
- ↑ 때문에 미국 투어에는 입국 금지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