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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세
한참 판타지 소설이 유행하던 시절에 거론되었던 개념. '한국적인 게 무엇인가?'와 관련이 있다.
기존의 국내 판타지 소설들이 서양 소설 《반지의 제왕》에 기초한 것에 반감을 품어 생겨났으며, 한국 고유의 소재나 색을 살리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이웃나라 일본이 판타지 소재의 게임이나 소설을 만들 때 자기네 나라의 요소를 잔뜩 집어넣는 것에 대한 부러움으로부터 생겨났다고 주장하는 쪽도 있다. 사실 이것은 우리나라가 이쪽으로 크게 떨어진다기보다는 일본이 유독 발전했다고 보는 편이 맞다. 거기다 이건 일본 문화 자체가 자포네스크라는 방식으로 이미 해외에 17세기부터 소개, 재해석되어왔고, 일본인들 역시 자국 문화요소의 재해석에 거리낌이 없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한국형 판타지" 논란은 단순히 등장 소재만 한국의 것을 쓰고 스토리는 기존에 그 틀이 확고히 잡혀 정착한 《반지의 제왕》류의 전개방식을 따라가는 것과, 세계관 및 이야기 전개요소 자체를 한국적인 것에 기인하여 쓰는 방식으로 나뉘어진다. 보통 손쉬운 전자가 많이 쓰이는데, 후자의 경우는 전통 문화에 대한 작가의 해박한 지식과 해석력, 필력, 스토리 작성 능력을 많이 요구하므로 그 수가 드물며 자칫하면 중국의 무협 비스무리한 작품이 되기 십상이다. 실제로 조선시대 판타지 소설이라 할 수 있는 군담, 신이(神異) 소설류가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런 군담, 신이 소설류는 상당수가 중국을 배경으로 쓰거나, 중국을 모델로 한 가상의 나라를 배경으로 쓰여졌다. 고전 소설에 있어 중국의 영향은 굉장히 큰데, 중국의 영웅 소설인 《설인귀전》이 한국 영웅 소설에 끼친 영향만 살펴봐도 상당한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게다가 한국 전통 건물들의 건축 양식도 중국의 영향력 아래 있기 때문에 한국만의 독특한 느낌을 주는 작품의 무대를 만들기가 어렵다.
다만 이 고전 중국 소설들은 현대 무협과는 세계관이나 스타일 자체가 달랐던 만큼, 현재 한국형 판타지를 시도하는 이가 무협적인 소설을 만들게 된다면 실력이 모자라 무협 짝퉁을 썼다거나, 무협적 스타일을 '소재'로 쓰려 시도한 경우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동양의 환상성이라는 부분에서 중국 무협이 내놓은 스타일이 굉장히 매력적이라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세계관을 만드는 재료로 쓰려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심하고 방대한 중국의 환상 소재 자료는 굉장히 자주 참고되기 마련이라, 동양 판타지 세계관을 만들면 아무래도 중국적인 색채가 들어가기 쉽다. 의도적으로 이것을 배제하려고 했던 작가조차 무공이나 내공 같은 것을 써 버린 경우가 있을 정도이다.
1.1 한국형 판타지 개념의 한계
한국형 판타지라는 개념 자체가 한국적 문화 창작물 논란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서구나 일본 등의 외부에서 유입된 문화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며, 서구/일본 판타지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한국산 판타지물에 대해 '한국적이지 않다'라는 대중들의 비판에 반발해 시도된 것이기 때문에 한국적 환상문학에 대한 진지한 사유 없이 피상적인 시도에서 그쳐버린 것이다.
사실 한국형 판타지가 확고하게 자리잡지 못한 이유는 서구형 판타지에 한국형 소재를 넣으려는 무리수를 두다가 실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원래 서양 판타지 장르의 시작은 서구권의 옛 역사와 전설, 신화 등을 융합하여 거기에 상상력을 가미한 형태였다. 물론 지금은 이것만이 아니지만, 이런 방식이 서양 판타지의 중심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이처럼 한국에서 판타지 붐이 일어난 이후 제기된 한국형 판타지 소설에 대한 이야기는 독자적인 흐름이나 시장이라고 부를 만한 그런 판도나 세계관 설정이 형성되지 못했고, 몇몇 이들이 간간히 시도해서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다. 그나마 나쁜 의미에서 인지도도 있고 멋대로 왜곡하기도 좋은 환단고기 같은 불쏘시개를 세계관 소재로 삼는 일이 잦다. 그것도 정식 역사서인 것 마냥 인용한다는 것은 거꾸로 한국의 전설과 신화소들을 오염시키는 동시에 그 개념조차 불명확한 한국형 판타지를 퇴보시키는 짓이나 마찬가지이니 절대 좋게 보기 어렵다.
그리고, 한국형 판타지라고 부를 만한 작품들은 지금도 상당수 나와 있다. 김진의 바람의 나라, 김혜린의 불의 검, 이두호의 머털도사 등등. 이 외에도 김삼의 작품군에서부터 바람과 구름과 비나 치우천왕기 같은 팩션 소설까지 이미 한국형 환상 문학이라고 할 만한 스타일은 존재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현대 한국인이 서구형 사고관을 가져서 못 나오는 게 아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판타지 붐이 일어난 직후 제기된 한국형 판타지라는 논리에서는 위와 같은 작품군이 핵심적인 모델로 제시되지 못했다.
그러한 작품군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이른바 한국형 판타지라는 것을 말하던 이들이 진짜로 바랐던 것은 서구형 판타지의 논리와 재미를 그대로 답습하면서도 한국형 소재를 잘 버무려낸 판타지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이런 건 존재할 수가 없다. 서구형 판타지는 서양의 문화를 기초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문화와는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반드시 생기기 마련이다.
이렇듯 한국형 판타지라고 할 수 있는 스타일은 이미 확고한 형태로 존재했음에도, 당시 판타지 소설을 쓰려던 이들 중 한국형 판타지라는 것을 시도하는 작가들 대부분은 서구형 판타지가 갖고 있던 스타일에 한국형 소재를 억지로 끼워넣거나, 한국 고유의 세계관을 추구한다는 명분 아래 난해하고 매니악한 소설을 썼기에 독자들에게 확고한 스타일을 전달하는 작품이 나오지는 못했다. 게다가 당시 서구 판타지는 세계관을 참고할 자료나 모방할 작품이 넘쳐났고, 스타일 역시 정리하기 쉽게 기준들이 나와 있는 상황이었기에 어지간한 필력으로는 그런 작품들과 대등한 수준의 한국형 판타지를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판타지 붐이 일던 당시 활동하던 대다수 작가들의 작품 스타일이 서구형 판타지였다는 점, 참고를 할 만한 좋은 한국형 판타지가 부족했다는 점, 위에서 언급했듯 억지로 서구형 판타지에 한국형 소재를 끼워 맞추려 한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한국형 판타지라는 것을 자리잡지 못하게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애초에 서구형 판타지는 세계관을 참고할 자료나 모방할 작품이 넘쳐나고, 스타일 역시 정리하기 쉽게 기준들이 나와 있는 상황이며, 그 시작은 서구권의 옛 역사와 전설, 신화 등을 융합하여 거기에 상상력을 가미한 형태였다.[1] 이것은 반지의 제왕이 북유럽 신화와 중세의 기사도 문학을 모티브로 했다는 점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북유럽 신화와 기사도 문학은 주로 거대한 괴물과의 전투와 비장미 넘치는 전쟁, 영웅의 일대기적 서사극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반지의 제왕이 그와 비슷한 특징을 가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할리우드가 추구하는 블록버스터적 요소와 잘 맞아떨어져 영화를 통해 대중에게 각인된 것이다.
따라서 어지간한 필력으로는 작가 혼자 그런 작품들과 대등한 수준의 한국형 판타지를 만들기가 쉽지 않다. 결국 판타지 붐이 일던 당시 활동하던 대다수 한국 작가들의 작품 스타일이 서구형 판타지였다는 점, 억지로 서구형 판타지에 한국형 소재를 끼워 맞추려 한 점, 그리고 국내 독자들 대다수가 서구형 판타지의 요소를 원했다는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서로 모순을 일으켰다고 봐야 할 것이다.
1.2 한국형 판타지에 대한 담론들
여기에 관련해서, '일본풍 판타지도 기존의 서양 판타지가 가진 소재와 이야기 전개에 일본식 소재만 기괴하게 덕지덕지 붙인 것이다.'라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 판타지의 역사를 전혀 모르는 사람의 주장이다. 일본의 기성 판타지 작가와 신인 판타지 작가 간의 교류를 목적으로 쓰인 히카와 레이코의 《도쿄에서 판타지를 읽다》를 보면, 기성 작가들이 활동하던 시기의 일본 판타지는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일본의 위인이 주인공이거나 하는 것처럼 일본을 중심으로 하지 않으면 독자가 봐 주지도 않았다는 대답이 있다. 현재의 일본은 서구형 판타지에 일본식 소재를 넣더라도, 수많은 경험과 역사가 있기에 보다 일본색이 강한 작품을 만들 수 있으며, 아예 일본의 문화만으로 이루어진 판타지 또한 상당히 많다. 더 나아가 한국에도 큰 영향을 끼친 《로도스도 전기》, 《슬레이어즈》 같은 작품들은 서양의 것을 일본식으로 재해석한 판타지다.
한편, '현대 한국인이 자라고 배운 사상과 사고방식 자체가 이미 서양식이라서 제대로 된 한국형 판타지 소설이 나올 수 있을 리가 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것은 한 가지 관점에서만 본 이야기다. 가치관이라는 것은 사회를 움직이는 사고관 외에 문화 자체에 끼어 있는 것이므로 그렇게 간단히 사라지지 않는다. 근대와 현대 한국인의 가치관은 분명 크게 다르지만, 여전히 유교적인 가치관이 한국 사회를 얼마나 지배하고 있는가를 찾아보면 놀랄 정도다. 뿐만 아니라 '판타지라고 하는 장르를 만들려면 옛 가치관을 완전히 이해하고 공유해야 한다.'라는 시각도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유럽이나 미국의 판타지는 옛 유럽, 미국의 가치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것인가? 만일 위와 같이 현대 한국인은 사고방식이 서구식이라 옛 관점을 이해할 수 없기에 한국형 판타지를 만들 수 없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정통 사극이나 《전설의 고향》 같은 것은 절대로 만들 수 없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판타지는 얼마나 뚜렷한 2차 세계를 만들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한국형 판타지에 관련된 유명한 논쟁은 2001년 하이텔 시리얼 잡담란에서 군사소설가 김경진과 이영도의 논쟁으로, 김경진은 이영도에게 《퇴마록》을 예로 들며 한국식 소설을 쓰지 않는다며 비판을 했다. 퇴마록이 후반부로 갈수록 환단고기가 되어간다는 것은 일단 무시하자. 이에 이영도는 《구운몽》을 예시로 들며 "한국인이 쓰면 한국적이다."라는 반박을 한 바 있다. 그리고는 보란듯이 눈물을 마시는 새를 써냈다.[2]
해당 논쟁의 개략적인 내용은 다음의 모 창세기전 팬카페의 2002년도 게시글(아카이브)에 일부가 남아있다. 논쟁이 심화되자 당시 게시판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이우혁이 등장해서 '자신은 퇴마록을 한국적 판타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관심 있는 분야인 건 사실이고, 왜란종결자로 관련 시도를 해 본 것'이라는 요지의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고, 김경진의 어조가 격해져 인신공격 수준으로 치닫자 이영도는 논의를 그만두었다. 왠지 2010년 전후의 한국적 라이트 노벨 논쟁같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2 유사 사례
한국적 라이트 노벨 논란이 시작되었을 때 이 개념이 다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한국적 판타지 소설' 논란이 한국식 vs 서양식의 문제라면, '한국적 라이트 노벨' 논란은 한국식 vs 일본식의 문제. 한국에서 나오는 라이트 노벨은 일본에서 나오는 라이트 노벨과 차별화된 점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논란의 요지이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한편으로는 양판소 같이 한국의 소설 시장 하에서 괴상하게 변형된 케이스를 한국형 판타지라 부르기도 한다.(...) 시장 판도를 보자면 이쪽이 주류다. 그리고 대장금의 흥행 성공 이후 대부분의 사극이 젊은 층을 노리게 되면서, 역사 고증과 스토리라인을 말아먹고 괴상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걸 비하하는 용어로도 쓰인다.
매체의 범위를 좀 더 넓게 보았을 때 웹툰 쪽으로는 좋은 시도를 한 작품이 몇 가지 있다. 네이버 웹툰의 신과함께나 낮에 뜨는 달 등이 그 예. 사실 일본 만화 붐이 있기 이전에는 이쪽이 만화의 주류 장르 중 하나였고,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로도 제법 여러가지가 시도되었다. 판타지 소설 붐이 일어날 시점에는 거의 만화에만 그런 류가 남아있었으나 현재는 영화, 연극, 드라마 쪽에서도 재차 시도되는 중이다. 모든 작품이 치밀한 세계관을 가졌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한국적인 색채를 표현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히 좋게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