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야구에서 벌어진 한일전을 소개하는 문서. 축구에 비해 야구를 하는 나라들이 많지가 않기 때문에 국제대회에서 자주 맞대결이 펼쳐진다.
2 성인 국가대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Korea baseball national team |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Japan baseball national team |
모든 팀에 다 이겨도 일본에 지면 전패고, 다른 나라에 다 져도 일본에 이기면 전승
김응룡. 야구 대표팀 감독 시절의 발언.기사
1904년 한반도에 야구가 도래한 이래 한국과 일본의 야구 경쟁을 이루어져왔다. 최초의 한일전은 1905년 황성 YMCA 야구단의 일본원정경기였는데 비록 고교야구팀에게도 압도적인 패배를 당하는 수준차를 경험하는 등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에도 시대에 야구가 도입되어 1878년 일본 최초의 야구단인 니이바시 아스레틱 클럽(新橋 アスレチック 俱樂部)이 창단되어 이미 기반이 갖춰진 일본에게 승리한 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이 간극은 해방 이후에도 이어져 1950년대까지 이어졌다. 일본과의 경기에서는 한국 선수들은 이를 악물고 경기를 펼쳐왔지만 번번히 이기지 못하며 7전 7패를 기록했다. 이처럼 한일전에서 굴욕적인 성적을 기록하던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이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은 해방후 13년이 흐른 1963년이었다. 1963년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개막한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1차 리그에서 한국과 일본이 맞붙게 되었는데 이때 동점 홈런과 결승타점을 기록한 박현식의 맹 활약으로 5:3, 대한민국 대표팀이 승리를 거둔다. 그리고 두번째 맞대결이 펼쳐진 2차리그에서는 우승을 결정짓는 맞대결이 펼쳐졌는데 신용운의 완투,3타점을 기록한 김응룡을 앞세운 한국 대표팀이 승리하고 1963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사상 야구 국제대회 첫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이때 반일감정이 극에 달해있던 시절이었기에 승리 기념 카퍼레이드를 했을 정도였고 최초의 국제 야구대회 우승을 숙적 일본을 꺽고 기록했기에 더욱 반응이 뜨거웠다.
1971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는 김영조 당시 대표팀 감독이 당뇨병으로 대회 중 쓰러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 최종전은 다름 아닌 일본. 그러나 대표팀의 방망이는 불탔고 8:3으로 대승을 거두며 숙적을 꺽음과 동시에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한일전은 바로 김재박의 개구리 번트와 한대화의 결승 쓰리런이 터지며 우승한 1982년 야구 월드컵을 꼽을수가 있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 프로선수가 나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일본의 프로선수와 맞붙은 최초의 대회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이었다. 단, 이때 일본의 경우 사회인 야구 선수 11명과 대학생 5명이 포함된 1.5군 정도의 대표팀. 아시아 예선에서 처음 맞붙은 양 대표팀은 5:3으로 한국의 승리로 기록되었고, 이후 올림픽 예선에서 연장 접전 끝에 7:6으로 승리를 두게 된다. 그리고 또 다시 만나게 된 3,4위 동메달 결정전에서 감기에 걸려 몸상태가 영 아니었던 선발투수 구대성이 9이닝 1실점 완투를 기록하고 이승엽이 결승타를 때려내며 3:1 승리를 거두며 동메달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게 되었다.
그후 2004 아테네 올림픽을 준비한 일본은 엄청난 준비를 기울이게 되었다. "우리 목표는 금메달!"이라는 기조아래 일본 야구 역사상 최초로 대표팀 멤버 전원이 일본프로야구에서 날고기는 주전급 선수들로 모조리 채워진것. 대표팀 감독은 일본의 전설 나가시마 시게오였고 삿포로 돔에서 열린 경기에서 한국 대표팀은 2:0으로 패배하며 올림픽에 진출하지 못하는 충격의 결과를 받아들이게 되었다.[1]
그리고 2006년, 세계 야구 대표 대회라는 이름을 내세운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이 열리면서 한국과 일본의 진검승부가 연이어 벌여졌고 특히 2006년과 2009년에는 대회 주최측인 MLB에서 미국 야구 국가대표팀을 밀어주기 위함과 동시에 흥행을 위해 연이어 한일전을 맞붙이는 등의 노답 대진으로 한일 베이스볼 클래식이라는 비아냥을 얻기도 했다. 2015년에는 WBSC가그리고 일본야구기구가 출범시킨[2] 프리미어 12가 출범하면서 더욱 자주 국가대항전을 볼수 있게 되었다.
단 2000년 이후에도 아시안게임의 경우에 한국대표팀은 미필 선수 위주의 대표팀 선발이 이루어 지지만, 일본대표팀은 일본의 사회인야구 선수들로 구성된 라인업을 짜기 때문에 사실상 1군과 2군간의 맞대결이라고 볼수 있게 되는데 가끔 이런 2군급 팀에게 대패를 당하며 메달권에서 멀어지는 사단이 나기도 한다(...) 아시안게임에서의 한일전은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이 마지막이다.
참고로 2000년 이후 2016년까지 경기 중반까지는 일본이 압도적인 리드를 가져가는 경우가 많았으나 경기 후반에 대표팀이 뒤집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일본의 경우 7회 이전 득점은 한국보다 2배 이상 많이 얻어낸 반면, 8회 이후 득점은 한국이 일본보다 10점 더 많았다.
상황 | 대한민국 | 일본 |
7회 이전 | 21점 | 47점 |
8회 이후 | 24점 | 14점 |
2.1 역대 전적
- 일본이 프로급 선수들로 대표팀을 꾸린 2003년 이후 한일전 모음.
- 2016년 기준으로 일본과 한국의 성인 대표팀 맞대결은 34승 2무 62패였으며, 프로급 선수간의 맞대결이 벌어진 2003년 이후 성적을 기준으로 한다면 14전 7승 7패(2016년 기준)로 동률이다. 역대 한일전 41전이라는 기사도 있는데 프로레벨에서의 대결뿐 아니라 야구 월드컵 같은 기타 대회들도 포함시킨 수치로 보여진다.한국 일본 야구 한일전 역대전적은 20승21패... 1998년 이후 국가대표 경기에서 일본이 여전히 우세
- 간단히 전적을 볼수 있게 홈 어웨이는 표기하지 않았다.
2003년 | 아테네 올림픽 | 아시아 예선 | 한국 | 0 | 2 | 일본 |
2006년 | 2006 WBC | 아시아 예선 1라운드 | 한국 | 3 | 2 | 일본 |
본선 2라운드 1조 | 한국 | 2 | 1 | 일본 | ||
4강 | 한국 | 0 | 6 | 일본 | ||
2008년 | 베이징 올림픽 | 아시아 예선 | 한국 | 3 | 4 | 일본 |
예선 리그 | 한국 | 5 | 3 | 일본 | ||
준결승 | 한국 | 6 | 2 | 일본 | ||
2009년 | 2009 WBC | 1라운드 A조 4경기 | 한국 | 2 | 14[3] | 일본 |
1라운드 A조 6경기 | 한국 | 1 | 0 | 일본 | ||
2라운드 1조 4경기 | 한국 | 4 | 1 | 일본 | ||
2라운드 1조 6경기 | 한국 | 2 | 6 | 일본 | ||
결승전 | 한국 | 3 | 5 | 일본 | ||
2015년 | 2015 WBSC 프리미어 12 | 예선 B조 1경기 | 한국 | 0 | 5 | 일본 |
결선 토너먼트 4강 2경기 | 한국 | 4 | 3 | 일본 |
2.2 주요 경기
-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대회.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1982년항목 참조.
-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 : 결승전에서 만들어진 한일전으로 한국은 박찬호등 슈퍼스타를 총 출동시킨 반면, 현재와 마찬가지로 일본은 사회인야구대표팀을 출전시켰다. 그결과 7이닝 콜드게임 대패를 당했고, 이에 충격을 받은 일본야구기구는 "이대론 안된다!"라며 올림픽에서 프로선수등을 참가시키기 시작했다.
-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야구 : 프로선수들이 참가한 첫 한일 맞대결. 3/4위전에서 마주한 한국과 일본의 맞대결. 감기 몸살로 골골대던 구대성이 일본 타선을 상대로 완투승을 따내며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2000년 야구 3~4위전 한국 vs 일본 하이라이트
-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야구 :
- 2015 WBSC 프리미어 12 : 2013 타이중 참사와 같은 점수차인 0:5로 일본에게 완패했다. 준결승전에서 다시 만나서도 8회까지 0의 침묵을 이어갔다. 하지만 9회 4:3 극적인 역전승으로 설욕, 4만명이 넘는 도쿄돔을 침묵시켜버렸다! 자세한 건 도쿄 대첩(야구)을 참고할 것.
3 프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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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 KBO League | 일본프로야구 日本プロ野球 |
- 1991년 / 1995년 / 1999년 한일 슈퍼게임
- 아시아시리즈
- 한일 클럽 챔피언십
일본과 한국의 프로리그는 엄청난 격차를 보였다. 1920년 세미프로리그인 지바우라리그가 개막했고, 1934년 메이저리그 올스타의 방일경기를 계기로 1938년에 일본프로야구가 본격적으로 출범했다. 반면 한국은 1970년대 현대건설이 세미프로팀 출범을 시도했지만 한일은행과 제일은행과의 갈등으로 실현되지 못했고 이어 재미교포 사업가 홍윤희가 프로야구 출범을 시도했으나 돈과 어른들의 사정으로 인해 출범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1981년 한국야구위원회가 설립되고 1982년부터 비로소 프로야구가 시작되었는데 일본과의 간격은 무려 50여년에 달하는 것이다.
이 격차를 여실히 드러낸 것은 1991년에 열린 한일 슈퍼게임으로 특히 일본 투수들의 포크볼은 한국 선수들이 처음 보는 구종이었고 이 구종에 타자들은 맥을 못추었다. 1995, 1997년에도 일본과의 야구격차만이 확인 되었으나 더이상 한일 슈퍼리그는 열리지 않았고 이후 2009년 아시아 시리즈가 출버하며 다시 클럽 대항전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시리즈와 일본시리즈가 종료된후 한 겨울에 열린 대회였던 지라 선수의 부상등을 우려해 전력으로 경기를 펼치지 않아 큰 의미를 두기엔 어려웠다.
시즌 중에 베스트 멤버들이 참가해 펼쳐지는 축구클럽대항전인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같은 대회가 열리지 않는 이상 프로팀의 100% 전력 맞대결은 사실상 볼수가 없는데 야구는 한달 내내 야구경기가 펼쳐지기 때문에[4] 사실상 보기가 힘들것이다.
4 아마야구
4.1 18세 이하 청소년 대표팀
- 2012년에는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야구 월드컵 이후, 30년만에 IBAF가 주관하는 국제 야구대회가 대한민국에서 개최되었다. 바로 제25회 IBAF 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였는데 이때도 한일전이 열렸다. 9월 6일에 벌어진 한일전에선 한국이 2:4로 패했다. 이감독이 대회 전에 일본 팀이 부정배트를 쓴다는 발언을 하며 신경전을 벌였으나 되려 역효과를 냈다는 평. 우승을 노리던 한국은 콜롬비아, 대만에게도 패하면서 결승 진출도 좌절되었고 5, 6위전으로 밀려났는데 웬걸. 일본도 미국, 콜롬비아, 대만에게 덜미를 잡히면서 결승행이 좌절되면서 5, 6위전으로 밀려나서 9월 8일 2번째 한일전을 치루게 됐다. 남은 건 자존심 대결이지만...한국이 가볍게 3:0으로 승리. 참고로 이날 한국의 선발은 이건욱이었고 일본의 선발은 오타니 쇼헤이였다. 자세한 내용은 대한민국 U-18 야구 국가대표팀/2012 항목 참조.
- 그러나, 1년만인 2015년 제27회 WBSC U-18 야구 월드컵에서는 정반대로 일본에게 0:12, 콜드게임으로 참패했다. 한국은 호주를 이기고 3위를 거두긴 했으나 7년만의 대회 우승 좌절도 그렇거니와 공교롭게도 한일전에서 콜드 게임패로 참패했기에 엄청나게 욕을 처먹었다. 그나마 처음으로 대회를 개최한 일본이 미국에게 밀려 2회 연속 준우승을 거둬 한국에서 통쾌해했다. 참고로 일본은 이 대회에서 준우승만 4번이며 한국은 5번 우승해봤다. 그나마도 이걸 아주 못했다고 욕할게 못되는 것이 2008년 우승 이후 최고 성적을 거둔게 이 대회다. 전날 미국에게 통한의 역전패를 당하지 않았다면 최소 준우승을 확보할 수 있었기에 더 아쉬운 대목이었다. 그러나, 오로지 한일전 콜드 게임 굴욕으로 인하여 욕을 펑펑 먹고 7년만에 거둔 4강 선전이 가려져버렸다.
- 2016년 아시아청소년야구대회에서 한일전이 펼쳐졌다. 김민의 호투가 있었지만 결국 수비에서 승부가 갈리며 3:1 아쉬운 패배를 기록했다. 이해 대회 우승은 일본 U-18 야구 국가대표팀이 차지했다.
4.2 리틀야구
- 2014 리틀야구 월드시리즈에서 한국 대표팀은 예선에서 일본을 4:2로 누르고 결선에 진출했고, 다시 만난 일본을 12:3으로 개박살낸 후, 결승전에서도 미국 대표팀을 8:4로 꺾고 우승한 후 그라운드에 태극기를 꽂았다. 29년만에 우승한 대표팀은 금의환향했다. 야! 신난다~
4.3 여자야구
우선 일본과 한국에는 여자야구 리그들이 존재한다. 일본은 일본여자프로야구, 한국은 한국여자야구대회 및 토너먼트 대회들. 일본은 프로리그에 가깝게 연고지가 존재하고 유소년 야구팀을 운영할 계획을 발표하는 등 준프로야구에 가까운 반면 한국은 선수 이적등에 제약이 존재하며 스폰서를 받는 팀등이 있지만 실업리그와 사회인야구의 사이에 위치해 있다.[5]
대한민국 여자 야구 국가대표팀과 일본 여자 야구 국가대표팀간의 첫 맞대결은 2004년에 열렸다. 일본에서 열린 제4회 여자 야구 월드 시리즈(Women's Baseball World Series)경기였는데 이 경기에서 무려 0:53으로 5회 콜드게임 대패를 당했다. 하지만 도통 알려지지 않아서 한국에서도 일본 신문을 본 이들이 번역하여 올리면서 알려졌을 정도이다. 더불어 이 대회에 대하여 제대로 한국에서도 알려지지 못해 그저 여자야구 세계 선수권 대회로 국내 언론으로 작게 보도되었는데 여자야구 세계 선수권 대회는 아예 없었으며 Women's Baseball World Series는 미국 월드시리즈 이름을 본딴 여자 야구 이벤트였다가 2004년 일본에서 열린 4회 대회를 국제대회로 확장해서 치뤄진 거 뿐이다. 개최국 일본과 참가국 미국, 인도, 호주, 캐나다, 홍콩, 대만, 한국이 참가하여 한국은 홍콩,캐나다,일본과 경기를 벌여 콜드게임 3전전패에 6득점 93실점을 당했다.
하지만 알아둘 점은, 당시 한국 여자 국대선수가 없어서 한국팀으로 나간 팀은 비밀리에라는 여자야구 동호회팀이었다. 이 팀이 국대선수로 나갔으며 그마저도 달랑 10명이 겨우 넘는 수준으로 준비 및 훈련기간도 1주일 남짓했다. 이기긴 커녕 대회에 나갔다는 것으로도 대단한 거다. 경기 당시 되려 일본 관중들은 비웃긴 커녕 한국선수들에게 박수를 치며 격려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 경기 전에 가진 조예선 경기에서 여자 야구종목에 제법 강자인 캐나다에게 0:24로 콜드게임으로 진 건 그렇다쳐도 아시아 야구 최약체급인 홍콩에게도 6:16으로 콜드게임으로 지면서 수준 차를 실감해야 했다.
일본 언론도 제법 상세하게 보도하면서 그야말로 맨손의 야구가 좋아서 하는 한국 여인들, 그들을 크게 이겨도 자랑할게 아니며 그녀들이야말로 야구팬이라면 축하해줘야 하는 멋진 선수들이라고 일본 신문들이 찬사했기에 일본 관중들도 잘 알고 있었다.
이 대회가 치뤄지고 두달도 안돼 비로소 캐나다에서 치뤄진 제 1회 2004 IBAF 여자 야구 월드컵에서는 한국은 아예 나가지도 못했다. 그리고 4년 뒤 2008년 일본에서 열린 여자 월드컵대회에서 비밀리에팀이 아닌 한국 여자 야구 대표팀으로 다시 만나서 이번에는 11점차로 콜드게임으로 졌다. 그래도 4년전을 생각하면 정말 많이 선전했다.[6] 비록 2년 뒤 베네수엘라 대회에서 다시 만나 0-14로 일본에게 졌고 2015년 한국에서 열린 LG컵 국제 야구여자 대회에서 한국 여자 야구대표팀은 결승에 올랐으나 실업여자팀인 일본 아사히 트러스트팀에게 0-16으로 콜드 게임 참패해 준우승하는 등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2016년 부산 기장군에 위치한 기장-현대차 드림 볼파크에서 열린 제 6회 여자 야구 월드컵 4강에서 마주친 한국과 일본은 6:0으로 패배했지만, 역대 한일전에서 가장 적은 점수차이를 기록하며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한일전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 ↑ 당시 삿포로 참사는 일본전보다 대만전 패배가 큰 충격이었다. 웬 듣보 선수들로 구성된 대만에게 5:4 끝내기 패배를 당한 것이기 때문.
- ↑ 일단 주최측은 WBSC이지만 일본측의 입김이 강하게 들어간 대회다. 애초에 스폰서들부터가 일본 기업들이고 주도적으로 움직인 쪽도 일본야구계이기 때문.
- ↑ 콜드게임 승
- ↑ 한국은 매주 월요일이 휴식일, 일본은 일정에 따라 휴식일이 배정된다.
- ↑ 단, 사회인 야구보다는 실력이 월등한게 남자 사회인 야구팀들과 맞붙으면 여자 야구팀이 이기는 경우가 많다. 사야이에서도 이내용을 다룬 적이 있다.
- ↑ 4년 전 콜드게임패를 안긴 홍콩을 15-5로 이기며 설욕은 했다. 참고로 여자야구 월드컵에선 일본이 여럿 우승(2014년까지 6번 열린 월드컵 대회에서 우승 4번, 준우승 2번이며 결승에서 캐나다와 호주를 10점차 콜드게임으로 이기고 우승했다. 미국에게는 2012,2014년 3-0으로 이기며 우승)할 정도로 일본여자야구는 세계 최강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