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동출판사

1 개요

한국 만화사의 흑역사 오브 흑역사. 만화 검열제와 함께 1960~70년대 한국 만화계에 파멸을 몰고 온 존재다. 쉽게 설명하면 거대 출판사들의 카르텔. '주식회사 합동' 혹은 '합동문고'라고도 불렸다.

2 등장

1960년대이후 제3공화국에 들어서면서 만화 잡지와 단행본을 '펄프 낭비'[1]라는 이유로 금지, 제한시키고 돌려보는 대본소 만화는 풀어주면서 만화 잡지와 만화 단행본 시장이 단번에 사라지고 한국 만화시장은 대본소(만화방)의 확산으로 무한경쟁시대가 일어나고 있었다.[2] 만화방만 살아남고 만화 잡지는 아동잡지의 별책 부록이라는 명목으로만 남게 되었다. 이에 따라 출판사는 만화방에 만화를 팔고, 만화방에서 돈을 받고 독자들에게 만화를 빌려주는 시스템이 정착되었다. 만화의 순환이 빠른 대본소가 만화시장의 주체가 되다보니 말 그대로 질보다 양으로 밀어붙이는 시대가 되었기에 최대한 많이 찍어내서 싸게 많이 팔아버리는 쪽이 시장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이때 생긴 게 그 전까지 있던 여러 거대 만화출판사(부엉이 문고, 크리바 문고, 제일문고[3], 진영문고, 오성문구)가 뭉쳐서 만든 합동출판사로 1967년에 등장했다.

합동출판사의 구성원인 출판사들이 모두 신촌에 있었기에 합동출판사 사장 이영래는 일명 신촌 대통령이라고 불리며 만화가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이영래의 재력이 얼마정도였냐 하면 홍대입구역 근처, 정원까지 딸린 고래등만한 집에 전속 운전기사가 있었고 집안에는 당구대까지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만화가를 불러 회유하면서 즉석에서 당시에는 상당한 거금인 20만원을 쥐어줬을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연재하던 만화가들을 우습게 대하고 후술하듯이 연재하는 만화가들에게 돈은 무척 짜게 줬다... 권력도 대통령 급이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참고로 그 재산은 만화가들을 착취한 결과물이다.

3 수법

합동출판사의 수법은 악랄하기 그지없었는데, 일단 만화가들이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을 모두 갖춘 뒤 대자본을 이용하여 다른 출판사의 인기 있는 전속작가들을 빼오고, 전국 곳곳에 배급망을 설치함으로써 다른 출판사들이 확장을 못하게 막고, 대본소에도 '합동출판사 만화 외의 다른 것들 갖다놓으면 만화 안준다'는 협박으로 다른 출판사 만화들을 싹 치워버렸다.[4] 만화작가들에게는 자신들이 할당한 일정 페이지 이상의 원고를 그리지 못하게 막음으로써 자기들이 팔아먹을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못 그리게 사유화를 하고, 만화가들에게 멋대로 예명을 붙이고, 만화와 관련 없는 별별 잡일을 시키고, 심지어는 인기 있는 일본 만화모방과 표절강요하기도 했다. 무협만화가로 알려진 故 이재학이 이 시절 이영래가 지으라고 강요한 하사한 남재주라는 예명으로 순정만화를 그렸는데 이 시절을 구역질 나는 치욕이라고 이를 갈았던 적도 있다. 그렇다고 예명 붙이는 걸 거절하면 합동에서 쫓겨났다! 이 정도로 만화가를 푸대접했으니 만화의 질이 급속히 낮아진건 당연지사였다.(만화검열제로 원고를 일일히 검열받게 된 것도 한몫했다. 즉, 안 좋은 의미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것.)

또한 외판 시스템을 개발해서 만화책을 반품할 여지를 없앴다. 서울에 있는 만화방에 5일간 대여시키고 그 다음에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지방거점도시의 만화방에 대여시킨 뒤, 마지막으로 지방 중소도시에 있는 만화방에 팔아넘기는 식이었다. 이런 식으로 제작단가를 줄이면서도 최대한의 이득을 챙겼다. 거기에다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만화책의 크기도 줄어들고 종이 질도 나빠졌다. 책의 크기를 축소제작하고 질이 나쁜 종이를 쓰면 제작단가가 낮아져 책의 가격을 내리지 않고도 그 이득을 합동이 챙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게 해서 창출된 이득은 이영래와 그 수하에게 돌아갔다. 매우 당연하게도 합동의 횡포에 대해 문공부(문화공보부)에 많은 민원이 들어갔지만 문공부에선 이 민원을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가끔 대책이라고 나와봤자 만화책 태우기, 만화검열 강화하기, 저질만화 단속, 만화책 분량제한, 만화방 업주 구속하기(…) 같은 본질을 도외시한 처분 뿐이었다. 이는 이영래가 고위층과 연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치권력과 유착한 이영래는 각종 사건을 이용하여 이에 반발하는 만화가들을 쉽게 만화계에서 내쫓을 수 있었고, 합동에게 항의를 하거나 문공부에 민원을 넣은 만화방 업주들에게는 만화책 공급을 끊어 고사시켰다. 거기에다가 다른 출판사에서 만화방용 만화를 출간했다 하면 원고를 갈취하고 공권력까지 동원해 협박을 가했다. 물론 이런 횡포를 눈뜨고 멍하니 당할 수는 없었기에 여러 출판사들과 만화가들이 힘을 합쳐 합동에 대항하려고 했으나 애초에 연줄 자체가 없는 만화가와 군소출판사들이 합동에게 대항하는건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 것과도 같은 일이었다. 한마디로 정리해, 이영래는 로비력을 이용해 스스로 만화계를 파괴(원고 절도, 협박 및 공갈, 임금체불, 창작의 자유 침해(원고 분량제한과 표절 강요), 뇌물수수)하고 그 왕좌를 차지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천하의 개쌍놈

4 합동과 맞선 출판사들

이 당시 합동출판사에 대항하는 만화 출판사로는 한국일보가 세운 소년한국도서와 만화가 임창이 세운 땡이출판이 있었다. 한국일보는 합동출판사의 눈에 띄지 않게 물밑작업을 하다가 4년후인 1971년 한국일보 만화출판사 창립 기사를 터뜨리고, 만화가 임창의 경우 원래 합동출판사와 노예계약을 하고 만화를 그리던 작가로 "땡이"시리즈로 유명한 인기작가였으나 이건 아니다 싶어 스스로 출판사를 차리고 땡이출판을 세워 독립을 선언한다. 하지만 소년한국도서는 경쟁에서 패해 합동에 백기를 들어 2위 자리를 차지하는 수준에 그쳤고, 땡이출판도 합동의 조직력에 패하여 임창도 다시 합동 밑으로 들어가는 굴욕을 겪었다. 물론 합동출판사도 소년 한국도서 만화가들과 땡이출판 만화가들에게 돈을 쥐어주며 자기쪽으로 끌어들인 건 말할 것도 없다. 결국 소년 한국도서와 댕이출판도 이렇다 할 성과는 못거두고(참고로 당시 한국일보는 동아일보와 함께 발행부수 1, 2위를 다투던 메이저급 언론사였다.) 만화가들은 여전히 합동의 그늘 아래에서 노예나 다름없이 일해야 했다.

이 당시 합동에 맞서다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허영만은 부자사전이란 만화에서 이 때를 회상하면서 '한국만화계는 다시 어둠에 잠겨야 했다' 라고 회고했다.

5 최후

이렇게 공권력까지 동원하고 메이저급 언론사도 백기를 들게 할 정도로 위세(혹은 횡포)가 대단했던 합동출판의 최후는 의외로 허무했다.

우선 1972년부터 만화책을 빌려보는 게 아니라 사게 하고자 고급화를 내세우며 어문각에서 내던 클로버 문고의 등장도 제법 타격을 주었다. 종이질도 합동의 엉망인 만화책과 차원이 다르고 만화가들에게 주는 대우도 훨씬 좋았기에 합동에 이를 갈던 만화가들이 하나둘 클로버 문고로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대본소가 주류였기 때문에 여전히 합동이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80년 내내 계엄사를 동원한 시사만화 가위질과 '만화정화방안' 등으로 만화 탄압 일변도의 정책을 펼치던 전두환 정권은 1981년부터 정권에 대한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3S 정책라는 회유책을 시행하자 만화도 조금씩 음지에서 양지로 풀리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에 보물섬을 위시로 한 만화잡지가 다시 나타나게 되었다.

게다가 보물섬은 '만화를 통한 건전한 아동 문화 육성'을 명분으로 하여 초기부터 양질의 만화들을 실어서 어린이들을 침침한 대본소에서 양지로 끌어내는데 성공한다. 또한 보물섬이 인기를 모으면서 눈치를 보며 만화 부록만 내던 타 어린이 잡지사에서도 만화연재량을 대폭 늘렸고 이는 만화가들을 잡지[5] 쪽으로 몰려나가게 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또한 이들 잡지사에서의 만화가들의 대우가 합동과는 비교도 안 되게 좋았기에[6] 당연히 합동출판사는 세를 급속히 잃었다. 비슷한 시기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크게 인기를 모았던 것도 한몫했다.

이렇게 시작된 합동의 몰락에 쐐기를 박은 사건이 일어났으니 1982년 합동에 패해 2등 자리를 차지하는데 그친 소년한국도서가 합동과의 결별을 선언했고, 그 직후, 무협지를 주로 냈던 대룡출판사가 만화 시장에 진출해 만화가들에게 100만원을 선불하겠다는 조건을 내세워[7] 합동에 남아있던 만화가들 대부분을 스카우트해갔다. 이로 인해 만화가 대부분을 대룡에 내준 합동출판사는 왕년의 기세를 완전히 잃어버려서 중소기업으로 전락했고, 80년대 중반에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합동총판에 호되게 당했던 기억을 가진 만화가 박기준은 세월이 어느정도 지난 90년대 초반에 이영래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봤는데, 이영래는 대룡에게 만화시장을 내주고 나서 완전히 몰락했고, 그 후에 부동산 사업 및 주식투자에 뛰어들었다가 큰 실패를 맛보았다고 한다. 이걸 만화가들 모임에서 전해주자 많은 만화가들이 통쾌하여 고소했다고 할 정도였다. 이 여파로 그 고래등 같은 집도 팔아버리고 어디론가 잠적했다는 일까지 들었지만 그 이후로 다시는 어떠한 소식도 듣지 못했다고 한다. 다시는 이 세상에 나타나는 일이 없기를 그러나 지금 그 명성을 이어받은 쓰레기 집단이 활개치고 있다 게다가 정부 부서라서 어떻게 하기도 힘들다

6 기타

1970년대 당시 현역으로 뛰며 대본소를 전전하던 만화가들은 이때를 회상하면 정말 지옥같았다고 한다. 심지어 이영래를 때려죽이고 싶다든가 하는 과격한 표현까지 서슴지 않을 정도다.

만화시장을 독점하고 돈 되는 만화만 그리도록 지시하는 합동출판사로 인해 많은 만화가들이 만화를 그릴 의욕을 잃고 방황하기도 했다. 고우영은 합동에서 "공주 애찌루", "짱구박사" 등의 명랑만화를 그렸다가 이영래에게 밉보여 교과서나 그린다는 비난을 받고 쫓겨나 한동안 연재처를 찾기 위해 고생을 해야 했고, 합동에 맞서다가 좌절한 임창도 다시 독립하려다가 또 다시 좌절하여 70년대 후반에 만화판을 떠나게 되고 이후 1982년 환갑이 조금 안 된 나이에 쓸쓸하게 세상을 떴다. 덤으로 합동이 만화가들의 수익을 잘 챙겨줬냐하면 그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아기공룡 둘리의 작가 김수정이 쥐꼬리만한 돈 받고 일본만화 표절작을 그리라는 합동출판사의 명령에 반발해서 이럴바에는 만화 안 그리고 만다면서 잠시 인두 파는 세일즈맨으로 전업했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더불어 인두파는 세일즈맨 하면서 기본급으로 받던 돈이 합동에서 표절작 그리며 받던 돈 4배나 되었을 정도이니 합동이 만화가들을 얼마나 짜게 착취했는지 알만하다.
  1. 지금이야 코웃음 칠일이지만 1인당 국민소득이 100$대에도 못미쳤던 당시에는 외화 낭비라는 말의 무게가 지금과 많이 달랐다.
  2. 다만 만화잡지 자체는 이미 과도한 경쟁과 독자층 부족으로 50년대 말부터 사양길이기는 했다.
  3. 이상 1960년대 3대 만화출판사
  4. 단 예외적으로 문고본 형식의 만화(단행본)는 발매가 가능했다고 한다. 합동의 조건은 애초에 '대본소 만화'였지 '문고본 만화'가 아니었기 때문에. 하지만 당시 경제사정이 어려웠던 시절이라 제대로 된 소비시장이 형성되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독점구도가 계속해서 유지될 수 있었다.
  5. 그 이전에도 여러 잡지에서 만화를 연재했으나 호당 몇 편정도 싣는 수준에 그쳤기에 많은 만화가를 수용할 수 없었다.
  6. 사실 합동출판사가 만화가들을 사유화해서 노예처럼 부리는게 비정상적인 것이다. 어떤 출판사를 비교하더라도 합동보다는 조건이 좋을 것이다.
  7. 당시 대학등록금이 5~60만원, 소수 하이컬러 계층이었던 대졸 초임이 30만원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