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본소

1 개요

貸本所. 쉽게 말하면 도서대여점이다.

대본소의 본(本)은 원래 일본어로 책 혹은 책을 세는 단위. '만화방' 이라고도 한다. 어원은 일본어로 도서대여점을 뜻하는 '대본옥(貸本屋)'에서 유래하였다.

장르로써 '대본소'를 말한다면 일명 '대본소 만화'라고 불리는 것들을 뜻한다. 말 그대로 일반서점에서 파는 목적이 아니라 대본소에서 빌려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찍어내는 책들.

2 대본소 만화의 역사

시장판이나 공원같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좌판을 깔고 푼돈을 내면 만화책을 볼수있게 하는 하는 형태의 만화노점이 시초로 이런 만화 노점이 1950년대 후반에 전문점 형태로 정착되어 이용자 입장에선 만화를 값싸게 볼수있고, 창업자 입장에선 만화책만 구비하면 바로 일정수준의 수익을 얻을수 있다는 점 때문에 등장한지 얼마 안되어 전국적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1950년대 당시에는 잡지-단행본(문고본) 시스템이 일반적이라[1] 서점에서 직접 사서봐야했지만 전쟁 직후라 만화책을 직접 사볼수 있을정도의 형편이 있는 집안이 많지 않았다.[2][3] 이 때문에 만화독자의 수가 한정될 수밖에 없었는데 만화방이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어 만화책를 보다 싸고 다양하게 볼수있게 되자 만화독자들이 엄청난 속도로 늘어나게 되고 이에 따라 만화시장은 이전과는 비교할수 없을정도로 성장했다.[4] 당연히 출판사에선 서점에 책을 공급하는것보다 만화방에 책을 공급하는것을 선호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대부분의 만화책를 만화방에서 봐야하는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이렇게 만화시장이 재편되어 급속하게 성장하자 이 시장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고 이에 따라 여러가지 폐단들(인기있는 만화 표절하기, 저급종이로 찍어내기, 인기있는 만화가 빼돌리기 등등)이 생겨났다. 그리고 60년대 중반 만화시장이 또 한번 재편되는 시기를 거치면서 이런 폐단들이 독점출판사(합동출판사)에 의해 관행으로 정착되었다. 하지만 이 독점출판사를 거치지 않으면 만화방에 만화를 낼길이 없었기에 만화가들은 울며겨자먹기로 합동에 소속되었어야 했다. 1970년대에 이전에 활동을 시작한 한국 만화계의 거장이라고 할만한 고행석, 허영만, 이현세, 고우영, 이두호 등의 인물들이 전부 대본소 출신인건 절대 우연이 아니다.

여하튼 당시 만화방은 오락시설이 별로없던 당시로써는 푼돈으로 값싸게 만화책을 볼수있고, 더군다나 만화방에서 부수입용으로 거금을 들여 TV를 설치하는 경우가 빈번했기에 당시에 쉽게 접하기 힘들었던 텔레비전도 볼수있다는 점[5]에서 아이들과 청소년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고[6] 1970년에 만화방이 1만 8천여곳으로까지 늘어났지만 당시로써는 흔친않던 아이들의 오락장소였다는 점에서 학부모들의 시선이 곱지않았던데다가 만화검열이 심해지던 시절이라서 만화책의 질이 그다지 높다고 할수없었고 더군다나 위에 적혀있다시피 합동출판사에서 만화방 업주를 상대로도 횡포를 부렸고(...) 이에 항의하면 만화책 공급을 끊고 문공부에 신고해도 모른척 해주는 행위가 난무했고, 만화방 업주에 대한 인식도 그리 좋지도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1973년 정병섭군 자살사건으로 인해서 일부 만화방 업주들이 구속당하거나 만화책이 불태워지는 사건이 벌어지며 만화방에 대한 인식은 날라리들이 뺀질나게 돌아다는 곳이나 아이들에게 허무맹랑하고 저질적인 만화책을 보게 만들어서 용돈 낭비를 부추기는 악마의 장소(...)정도로 위상이 추락되었다. 그래도 1980년대 초까지는 오락시설이나 아이들, 청소년을 위한 오락시설같은게 별로 없던때이기에 명실상부한 아이들의 놀이터였지만 오락실이 전국적으로 널리 퍼지게 되고 공포의 외인구단가 히트한 이후로는 만화방에 다녀오는 아이들이 줄고 성인들이 만화방에 뻔질나게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성인들의 수가 많아졌고 이 시기를 전후해서 만화잡지의 시대가 열리고 이에 따라 단행본의 발행량도 늘어나고 해서 아이들의 수가 더욱 더 줄어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이 안왔다면 그건 아니지만

3 대본소의 성립배경

1960년대 한국에서 대본소 만화가 성행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1960년대 군사정권에서 수입품인 펄프로 만드는 만화책을 낭비로 보고 만화 잡지를 폐간시켰기 때문이다.[7] 대신 만화책을 돌려보기 때문에 종이를 아낄 수 있는 대본소 만화는 금지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 만화는 60년대 부터 80년대 후반까지 대본소 중심으로만 발달하게 된다. 물론 당시엔 경제사정이 열악하여 단행본을 내는 것보다 대본소에 책을 내는게 훨씬 이득을 남겼다는 이유도 있었다.

이쪽 만화들의 특징은 우선 판매하는 책이 아니고(=소장을 목적으로 하지 않음) 대량생산을 기본으로 잡다 보니까 질낮은 갱지에 인쇄하고[8] 만화의 캐릭터도 다들 어디서 본것 같은 비슷비슷한 놈[9]이 나오며 스토리도 어중간하다는 점이다.

4 잘못 알려진 점

대본소 만화는 질이 낮다고 생각하기 쉽지만[10], 지금은 고전인 공포의 외인구단, 신의 아들, 별빛 속에, 북해의 별 모두 대본소 만화였다. 그 시절에는 소수의 어린이 잡지 부록과 신문을 제외하고는 만화가로 데뷔하는 방법이 대본소 밖에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두호같은 대가도 대본소가 세력을 자랑하던 시기엔 객주같은 명작을 대본소로 낼수 밖에 없었으며 반대로 대본소의 기세가 약해지던 시기에 적절하게 유혹을 뿌리친 김수정아기공룡 둘리를 만화책 판매업체인 요요 코믹스를 통해 내는데 성공했다.

일본에서도 대본소가 없어서 만화발전이 이루워졌다고 보는 시각이 있지만 사실 일본에서도 1950년대에는 대본소가 주류였다. 다만 일본이 일찍 경제성장을 했기때문에 굳이 만화방에서 만화를 사서보는 매리트가 없어졌기에 일찍 만화잡지-단행본 체계로 전환하여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고 그와 별개로 일본에서도 만화방은 엄연히 존재하기는 하다.

5 대본소 만화의 특징

대본소 만화의 특징 중 하나는 스타 시스템에 있다. 작가의 아이덴티티를 나타내는 주인공 캐릭터가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에 나오는 것으로, 그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에 나온 캐릭터가 다른 작품에도 나오는 등... 극단적인 예로 이현세오혜성이나 고행석구영탄, 이진주(만화가)하니를 들 수 있겠다. 주인공, 여주인공, 악당들이 전부 다 이름, 성격, 역할이 정해져있다. 이는 1960년대 방영진의 <약동이> 시리즈와 임창의 <땡이> 시리즈 등 스타시스템을 체택한 작품이 크게 인기를 끌게되자 관행으로 정착된 것이다. 그림체는 1980년대 이전에는 명랑만화체가 주류였으나 1980년대~90년대 이후 아동독자층이 잡지만화나 학습만화쪽으로 빠져나갔고 그 자리를 성인독자층이 차지하면서 극화체가 주류를 이루고있다. 게다가 한 동안 온갖 표절트레이싱이 넘쳐놨다.

침묵의 함대를 베낀 장훈의 제국의 함대는 신문에서 까며 보도된 적이 있다. 그 밖에 보스의 두얼굴이라든지 엄청 많은 일본만화를 베꼈던 적도 있다. 박인권은 그림체는 물론이고 스토리 마저 일본만화나 외국 영화를 베끼고, 엑스트라나 조연급 인물의 성격이나 캐릭터를 도용하기도 했다.

다만 60년대 말에서 70년대까지 합동총판에서 (잡지, 신문을 제외한)만화시장을 독점했을시기 만화가에게 일본만화를 표절할걸 강요해서 어쩔수 없이 표절작품을 내야했던 화가들이 많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80년대 이후에 했던 표절이 정당화 되는건 아니고...이런 만행이 버젓이 90년대나 심지어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으니 더 이상 옹호할 것도 없었다. 박원빈만 해도 90년대말에 연재하던 대본소에서 이카리 신지라든지 여러 일본만화 주인공을 아예 등장시키는 배째라 표절을 저질렀으니.

6 왜 공적으로 낙인 찍혔나?

1980년대까지도 당시 많은 유명 만화가들도 대본소 만화로 작품을 내거나 연재하여 벌어먹던 시절이 있었지만, 대본소를 공적으로 낙인박아 두는 것은 60년대 후반~70년대에 합동출판사가 만들어둔 업보이다. 그리고 현재 진행중이다 한국일보가 신문만화의 형태로 만화시장에 진출하기 전까지 합동총판은 경쟁사를 말려죽이며 만화시장을 독점하여 왔다. 물론 만화방 업주가 특별히 악랄할일은 했다는 얘기까지는 아니다. 간간히 부수입으로 불량식품을 판다거나 하는 업주들은 있었기는 했지만

또한 이 시기 팝픽 착취현황 폭로 사건은 저리가라할 정도로 노동력 착취가 벌어졌고, 이를 전통과 역사랍시고 지금도 강요하고 있는 곳이 상당수라고 한다.

기성 만화가중 유명인인 허영만은 생활고의 문제로 임창과 함께 대본소 만화사업(땡이 출판)을 몇 해동안 하던 적도 있는데 그는 지금도 타임머신이 있다면 가서 말리고 싶을 정도로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라고 치를 떤다. 그래서 그의 만화 식객에서 만화를 그리지 않고 찍는다고 하는 대본소 만화 공장장(?)의 대사를 통해 "만화가 국수냐! 찍게!"라고 대본소 체제에 대한 혐오를 드러냈다.

7 기타

'만화계의 양판소' 정도로 요약 가능하다. 1980년대 중반부터 보물섬, 만화 광장, 아이큐 점프, 소년 챔프를 위시한 잡지만화에게 밀려 차자 세가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설상가상으로 90년대 초반 만화방의 숫자가 줄어들어 만화시장 주도권을 잡지만화에게 완전히 넘겨주고 말았다. 그래도 만화방의 변형판이라고 할수있는 대여점이 2000년대 중반까지 버티기는 했지만 이 역시도 시간을 지나면서 지속해서 줄어들고 있는 상태고, 성인만화를 중심으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 현재는 공장만화라고 불리는 김성모, 박인권, 박봉성[11],박세원 등의 성인만화 계열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이 쪽의 대본소 만화와의 차이점이라면 책의 내구성에 좀 더 신경을 썼다는 정도인데 암만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대본소와 큰 차이가 없다.

액션 계열 외에 순정만화 계열의 대본소 만화도 있다. 이것 역시 단행본 출간 속도가 다른 것들에 비해 무지 빠르다는 점에서 두드러지는데, 다만 극화 계열과 달리 표면상의 작가(황미리,한유랑)를 내세우고 실제 스토리와 작화는 소위 '문하생 집단'이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이 대본소 순정만화 역시 일본 작품의 표절과 혼성 모방으로 시작했다는 원죄를 지니고 있어서 마찬가지로 까이고 있고, 설령 표절이 아니더라도 양산형 인터넷 로맨스 소설의 유치하고 개연성 없는 스토리나, 같은 작가 작품인데 매번 들쑥날쑥한 그림체 같은 이유로 디스 당할 소지가 다분하다.

실제로 2000년 초반 아선미디어(지금은 부도나서 사라짐)에서 내놓은 <내 ID는 성형미인> 이란 만화는 서예린이란 가명으로 내놓은 표절 모음만화였다. 당시에도 욕 신나게 먹었다. 사실 이거 작가 서예린 이름만 보고 여자라고 오해하기 딱이지만 50대 남성만화가로서 대본소 만화에서 순정물로 문하생 생활만 수십여년동안하던 사람이라고 한다(출처는 한국의 만화가 18인.여기선 S라는 이니셜로만 나왔다) 그 밖에도 80년대 대본소 순정만화계에서 인기를 끌던 김영숙도 실은 이런 대본소 문하생들이 거의 그리던 사실 이름만 내놓은 가명의 만화공장장이었다.

이외에도 문방구(...)와 더불어 90년대의 후기 해적판 일본만화들이 보급되던 첨병중 한곳이기도 하였다.

2010년대 들어서도 몇몇 작품이 나오곤 하지만 위에 서술하는 대로 줄거리나 여러 모로 그저 그런 만화 찍어내기 작품이고 대여점도 많이 죽은 상황에서 얼마 남지 않은 24시간 만화방같은 곳으로 판매하거나 아니면 스포츠신문 만화라든지 그런 쪽으로 판매하여 버티는 중.이런 대본소 만화가였던 이들도 다른 사업하며 벌어먹고 옛 작품을 유료 만화방 판매 수익을 버는 정도이다. 오일룡같이 식당을 하며 재기하려고 했지만 작품연재할 곳이 없어 결국 포기한 경우도 있으니.
  1. 이 시기의 주요 만화잡지로는 <만화세계>와 <만화학생>, <샛볕>, <만화왕>등이 있었다. 어차피 50년대 말 ~ 60년대에 다 폐간되지만...
  2. 그래서 당시엔 베스트셀러라고 해봐야 수천~수만부 수준에 불과했다.
  3. 1950년대 만화잡지들이 살아남지 못한 이유중 하나다. 잡지는 계속 창간되는데 수요는 그에 비례해 늘어나지 않으니 당연히 적자가 쌓이고 또, 이런 적자가 계속해서 누적되다 보니 도저히 버틸수 없는 구조가 되었던 것이다.
  4. 60년대 중반즈음에 만화방 숫자가 3만곳을 넘었고 하루 출판되는 만화편수도 50여편에 달했다. 당대의 경제사정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던 셈.
  5.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서울 정도를 제외하면 TV는 꽤 잘사는 집에서나 있는 귀한 물품이었고, TV가 두세대 있던집은 더더욱 드믈었다. TV가 전국적으로 보급된건 70년대 중후반 와서부터이며 당대에는 출산율이 4-5명대에 달하던 시절인데 반해 한집에 TV가 두대 이상 있는 집은 더더욱 드믈었단 시절이었다 이러니 만화방이 흥하지 않을래야 않을수가 없던것.
  6. 심지어 성인들도 TV를 볼려고 만화방에 드나드는 일이 많았을 정도다. 물론 간간히 사람들이 즐겁게 TV를 시청하고 있을때 경찰들이 공연윤리법에 저촉된다며 만화방 업주들에게 으름장을 놓는 일이 꽤나 있었다고 한다(...)
  7. 다만 만화잡지는 이미 50년대 말부터 하향세였긴 했다.
  8. 대본소 만화는 '일일만화'라고도 한다. 한번 읽고 버리는 만화라는 뜻도 있고 그만큼 수명이 짧은 만화라는 뜻도 있다
  9. 80년대 대본소 만화하면 이현세풍 까치, 오혜성 느낌이 나는 그림체가 넘쳐났다. 이현세가 항의하면 되려 당신 홍보도 되는 거 아니냐며 적반하장으로 화냈다고 한다. 참고로 박봉성이나 여러 만화가들도 초기엔 이현세풍 그림체를 따라하다가 독창적으로 달라진 경우. 허영만은 사랑해에서 짝퉁 까치(오혜성)들을 등장시켜 깐 적이 있다.
  10. 1960~70년대 합동출판사의 독점이 낳은 서글픈 편견이라고 할수있다. 물론 합동 출판사 이전과 이후에도 저질만화는 있어왔긴 하지만...(예를 들어 땡이 시리즈가 인기를 끌자 표절만화를 그린다거나...)
  11. 별세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나온다... 정확히는 아들이 박봉성 프로덕션이란 이름으로 운영하는 것. 비슷한 경우로 무협만화가 이재학이 죽은지 15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아내가 이재학 프로덕션을 운영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