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검열제

1 개요

1961년부터 1997년에 사후심의로 바뀔 때까지 한국에서 시행된 대표적인 만화 탄압 정책이자 간행물윤리위원회가 오랫동안 시행했던 만화 사전심의제도의 총칭. 사후심의로 바뀐 오늘날에도 '청소년 유해매체 표시'라는 이름의 위장된 검열이 행해지고 있다.

이때 일어난 만화 검열제 시행과 1967년에 설립한 합동출판사독점체제 구축이 겹쳐지면서 한국만화계는 큰 타격을 받았다. 당대 만화가들 입장에선 그야말로 내우외환인 셈.(시장적으로만 따진다면 지속적인 성장을 했지만 질적 저하가 가속화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12월에 원로 만화가들과 출판업자들로 구성된 한국아동만화자율회가 세워지면서 부분적으로 만화 검열제도(사전심의)가 도입되었으며 1968년부터 정부는 문화공보부를 통해 아동만화정화대책을 수립하여 만화 사전심의제도 시행, '출판사 및 인쇄소의 등록에 관한 법률' 개정, 아동복리법(현 아동복지법) 개정으로 시작하여 8월 31일에 한국아동만화자율회를 해체하고 명목상의 자율기구인 한국아동만화윤리위원회를 신설한 뒤 내부 강령인 한국아동만화윤리강령, 한국아동만화실천요강을 제정하여 9월 9일부터 사전에 원고를 검열하기 시작했다. 이후로 출판되는 모든 만화는 이 강령에 따라 검열을 받아야 하며, 검열을 통과하지 못한 만화는 연재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명문화되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만화를 내기 전에 원고부터 검열하는 식의 사전심의(검열)이다. 그래서인지 1997년 이전까지 시중에 나온 만화 단행본 표지에는 '심의필' 마크가 찍혀 있다.

이 강령에 따라 만화의 용지와 판형, 편수와 쪽수까지도 포괄적으로 규제하기 시작했다. 이에 의해 1968년 이후 선화지는 갱지로 대체되었고, 국판은 4×6배판으로 확대되었고, 무제한 편수는 상중하 3권으로, 각 권 50페이지는 130쪽 이상으로 규제되기 시작했다. 결국 1권이 50쪽에 불과했지만 수십 권의 시리즈를 이어나가며 긴 이야기를 소화할 수 있었던 60년대의 상황에 비해 70년대 대본소 만화는 불과 390페이지에서 모든 이야기를 마쳐야 되는 기형적인 구조를 갖게 되었다.

이후 한국아동만화윤리위원회는 1970년에 한국도서윤리위원회(이하 도륜), 한국잡지윤리위원회와 통합하여 '한국도서잡지윤리위원회'가 되었고, 1976년에는 '한국도서출판잡지주간신문윤리위원회'로 바뀌면서 조직은 더 거대화되었고, 이로 인해 만윤 시절과 달리 세부적인 내용까지 손대기 시작하면서 심의가 더 구체화되었다고 한다. 당시 도서윤리위는 만화문화의 특질에 이해가 부족한 보수성향의 학계, 문화계 인사들을 심의위원으로 주로 참여시켜 이들로부터 불량만화 관련 문제에 대해 끝임없이 제기케 했다. 게다가 도서윤리위는 '불량만화 시비'의 정당성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각급 사회단체나 초/중등학교들을 동원해 '불량만화 추방' 같은 관제 캠페인을 연례행사처럼 치뤄왔다.

1974년에는 고우영 화백의 <고우영 수호지> 등의 성인 극화만화가 유행하자 그해 3월 7일에 <수호지> 2~3호를, 6월 28일에는 결정문을 통해 장병욱 화백의 <성인극화 대부> 1권을 경고 처분한 뒤 12월에는 성인만화윤리실천요강을 제정하여 성인만화에도 사전심의를 시작했지만, 1977년 1월에 이르러 성인만화에 퇴폐적인 내용들이 실려 있다는 이유로 일제 단속을 실시한 뒤 성인만화윤리실천요강을 폐기한 뒤 성인만화를 심의 대상에서 제외시켜 이후로 나오는 모든 만화들은 아동 및 청소년용으로만 출간해야 했다. 이 때문인지 우석출판사에서 낸 <고우영 삼국지> 등의 고우영표 성인 극화만화 단행본은 초판에 비해 훨씬 더 많은 분량이 아동/청소년 수준에 맞추어 가위질을 당하는 참극을 당했다. 반면 신문만화의 경우에는 1972년 10월 유신 뒤에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상주하여 다른 기사들보다 더 민감하게 신문의 만화를 감시했다.

검열 기준으로는 성적인 내용, 폭력적인 내용, 정치 비판적인 내용 등이 있었으며 이 시기에 만화라는 존재 자체를 뭔가 사회 암적인 것으로 포장하여 '만화는 불량배들이 보는 것' 이라든가 언론에서는 어린이 사고가 일어나면 우선적으로 만화에서 원인을 찾으려 했다. 요새 사고 일어나면 게임에서 원인 찾는것과 아주 비슷하다.[2][3] 헌데 그렇게 만화검열에 극성이셨던 분들이 정작 TV에서 외제 애니가 판치는 상황을 왜 지켜보고만 있었는지 의문이다.[4]

만화 검열제 기간 동안에는 당연히 자유로운 창작 자체가 아예 불가능했기 때문에(심지어 어느 분량까지 그릴 수 있는지도 정했던 적도 있었다. 흠좀무.) '건전한' 어린이 명랑만화, 스포츠 만화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때 작품 중에는 물론 꼽아보자면 명작들도 많고 출판량은 늘었지만 만화의 질은 해방 전보다도 떨어졌다 라고 만화계에서는 자평한다.(이는 합동출판사의 독점도 한 몫했다.)

그렇다고 해서 검열의 기준이 일정했는가 하면, 그 것도 아닌게 기준 자체가 완전 엿장수 마음대로였다. 하단부에 적힌 기준에 걸렸는데도 심의를 통과해 출판된 경우가 꽤 있었고(예: 공포의 외인구단) 심지어 반공만화의 경우 폭력성, 선정성이 엄청나도 멀쩡히 출판되었다.[5][6]

1979년에는 미성년자보호법을 개정하면서 불량만화를 팔면 형사처벌한다는 내용을 담은 제2조 2항을 추가한 뒤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이 실권을 장악한 후 신문사에도 계엄사 소속 검열관들을 상주시켜 신문만화에 가위질을 가했고[7], 이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고 난 뒤 만화계에 사회정화의 폭풍을 일으켜 그해 9월 5일 도서윤리위에서 '만화정화방안'을 마련하여 더 강하게 억압하였고, 그해 11월에는 사회정화위원회가 수많은 만화가들을 '불량만화 작가'라는 딱지를 붙여 검찰에 넘기기도 했다. 1984년에 도서윤리위는 내부 규정인 '아동만화심의기준'을 제정하여 도서잡지윤리강령 및 만화윤리실천요강에 의거 명랑/순정/역사 등 13가지의 만화종류별 규제사항과 대사 및 그림의 묘사, 표지 등에 대해 규제 기준을 시시콜콜 명문화시켰다. 이는 1997년에 청소년보호법에 따라 사전심의가 폐지되기 전까지 만화가들에게 헌법과도 같은 존재였다.

어쨌든 이 말도 안되는 규제는 전두환 정권 때도 한동안 유지되다가 1987년 6.29 선언 이후 정치적 민주화가 이뤄지고 이에 따라 사회 각지에 민주화 바람이 불어 언론기본법이 폐지되면서 신문만화에 대한 규제가 완화된 것을 시작으로 상당 부분에서 규제가 누그러지고 도서윤리위 역시 1989년에 '사단법인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로 바뀐 뒤에도 사전심의는 무조건 받아야 되었으나 어거지를 부리는 수준이였던 심의가 어느 정도 납득이 갈만한 수준(물론 당시 기준으로)으로 변화 한건 사실이다.

어쨌든 심의기준 완화에 따라 이전에는 출간이 금지되었던 정부 비판만화가 당당히 출판되고 성인만화의 수위도 한층 높아졌으며 만화 장르도 늘어나는 등의 여러 긍정적인 변화가 찾아왔으나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와 YWCA 등 시민/종교단체에 의한 민간 차원의 규제가 오히려 대두했고 신문만화 역시 업계 차원에서 규제를 피할 수 없었다.

1997년에 청소년보호법이 제정되고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가 동법 제45조에 따라 법제화되고 사전심의에서 사후심의로 바뀌는 순기능이 있었지만 '청소년 유해매체 표시'라는 또다른 만화 검열제를 만들어 수많은 만화방 업자, 출판업자, 만화가들을 '음란만화 작가'라는 죄로 검찰로 나와 조사받아야 했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이현세천국의 신화 사건 및 스포츠신문 연재 만화가 및 관계자 10여명 무더기 기소 사건이 대표적인 예이다.

1998년 4월 30일에 '출판사 및 인쇄소에 관한 법률' 제5조 2항 5호[8] 중에 '저속한 간행물' 부분이 위헌 판정을 받고 2002년 2월 28일에 구 미성년자보호법 제2조 2항이 위헌 판정을 받은 이후 만화에 대한 규제가 좀 더 완화되어 프랑켄 프랑 같은 것도 무수정/무삭제로 정식 발매될 정도인 것을 생각하면 그 시대와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자유로워졌다. 다만 악습이라고 표현해도 손색없는 만화 검열제의 잔재는 남아서, 아직도 시중에 나오는 만화책들은 간행물윤리위원회라는 중간 단계를 거쳐야만 하며, 사회 역시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애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시선은 강하게 남아 있으며 이는 한국 애니메이션과 만화 산업에 여전히 족쇄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 때 검열을 겪은 경험 덕분에 2012년 한창 학교폭력이 사회문제화 되어 방심위에서 일부 웹툰을 음란, 폭력성 여부로 심의한다고 했을때 만화계와 독자층에서의 반발이 컸다.

게다가 2013년에 한국도, 일본도 아닌 스페인의 역사만화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이 음란성을 이유로 간윤에서 청소년 유해매체 판정을 내리자 원작자인 안토니오 알타리바가 실망을 표하면서 간윤이 재심의를 안 하면 절판도 불사하겠다고 하여 선전포고를 내리고 한국어 판권자를 응원했다. 결국 해당 작품은 간윤의 재심의를 거쳐 8월 26일에 청소년 유해매체 등록이 취소되었다.

그리고 2016년 만화 검열제가 재림할 수도 있다는 논란이 다시 올라오고 있다. 레진코믹스 집단 환불 및 탈퇴 사태웹툰 규제 찬성 운동 항목 참조. 다만 80년대 당시와는 다르게 작가들이 메갈리아를 집단 옹호하고 독자들을 무시함으로서 자초했다는 것이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2 구체적으로 검열에 걸렸던 항목들

1. 국군은 후퇴하면 안 된다 (국군의 명예 훼손)[9]
2. 쿠데타도 부정적으로 그리면 안된다.(박정희, 전두환 시절)[10]
3. 빈민가나 가난한 집안도 그리면 안된다 (국가 명예훼손)[11][12]
4. 아이가 어른에게 반말을 못한다 (예의에 어긋난다)[13]
5. 경찰이 강도에게 서라고 했는데 도망가면 안된다.[14] 아니면 달아나도 반드시 잡혀야 한다. (공권력을 무시하는 행위이므로)[15]
6. 어른에게 불온한 태도를 보이거나 반항, 거역하면 안된다. (강도에게 대드는 것도 안됨)[16]
7. 높으신 분은 떠오르게 그리면 안된다. (대머리도 그리면 안됐다!)[17][18]
8. 어린아이는 불량하게 그리면 안된다.[19][20]
9. 계모가 학대하는 것을 그릴 수 없다.
10. 역사만화에서 의병이나 농군이 죽창, 낫을 들면 안된다 (모두 몽둥이, 아니면 빗자루!!로 그림)[21]
11. 칼이나 창, 도끼같은 흉기들은 사람 몸에 닿으면 안된다.[22]
11. 동물이 말을 하면 안 된다 (허무맹랑하다는 이유)[23]
12. 만화 속 가로선이 얼굴을 크게 주목하는 것도 안된다. 마치 얼굴을 찌를 것 같아 정서적으로 나쁘니까.[24]
13. 만화가의 필명은 사람임을 알수있게 개명해야한다.
14. 만화책은 무조건 2권만 출판해야 한다.[25]
15. 등장인물의 이름은 무조건 사람임을 알수있게 정해야 한다.[26]
16. 남매가 한방에서 자는 장면을 그리면 안 된다.[27]
17. 권력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만화를 그리면 안 된다.[28][29]
18. 연애를 하거나 데이트를 하는 장면이 나오면 안 된다.[30]
이게 무슨 소리야

위에 나오는 말도 안되는 검열 조항에 반론과 해당 조항에 관한 설명이 매달려 있지만 한가지 알아둘 점은 1968년부터 한국아동만화윤리위원회가 생기면서 나온 '한국아동만화윤리강령', '한국아동만화실천요강', '성인만화윤리실천요강', 그리고 위에서 말한 '아동만화심의기준' 등에서도 나오는 조항들이다. 이는 한국도서출판잡지윤리위원회-한국도서출판잡지주간신문윤리위원회-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로 바뀐 뒤에도 이어지게 되었고, 단행본 쪽 심의는 도서윤리위에서 했지만 만화잡지 등 정기간행물 쪽 심의는 문공부 및 도서윤리위, 신문만화는 문공부와 신문윤리위원회에서 담당했다가 민주화 이후 1997년 청보법 제정 전까지 만화잡지는 공보처가 사후심의했고, 단행본은 간윤에서 사전심의를 했다.

같은 기관에서 했어도 시기에 따라 기준이 달라지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뒷돈을 받는가, 안받는가에 따라서도 기준이 갈리는 등 따로 국밥이었기 때문이다. [31] 비슷한 소재를 사용하고 똑같은 장면을 그려도 어떤 작품은 상도 주고 넘어가지 않나, 반대로 어떤 작품은 강제로 수정당하고 만화가를 소환하여 비난하는 일도 흔했다. 반론이 달려서 저 사항들이 죄다 엉터리 아니냐? 하는 이도 있지만 위에 나오는 모든 사항이 어린 시절을 겪거나 당시 만화를 보던 이들, 언론을 기억하는 이들, 만화가들의 실제 증언, <한국만화통사> 등 한국만화 관련 책자와 검열 당사자인 간윤이 펴낸 <간행물윤리 30년>에서도 죄다 나오는 당당하게 존재하던 실제 검열제다. 이를 계기로 김종래, 김산호, 박기정 등 유명 만화가들이 절필을 한 것도 만화계의 큰 손실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윤리강령 조항들은 <서울 YWCA 만화 모니터 지침서(1992)>, <만화기법강좌(박기준 저. 1987)>에도 나온다. 이러한 책들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돼 있으니 관심 있으면 한번 찾아보자.

거기에 6.29 선언 이후 드디어 말도 안되던 만화규제가 완화되어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나 싶었더니만 사전심의는 아직도 존재했고, 특히 YWCA나 음대협을 위시한 시민단체들이 간윤의 지원/주도 하에 불량만화 추방 궐기대회를 열거나 보고서를 써서 '만화는 나쁘다'는 식으로 여론을 형성한 일[32]과 만화가를 소환하여 비난하는 일을 저지르면서 많은 만화가의 속을 뒤집히게 만든다. 김수정 항목이나 YWCA 항목을 봐도 여기가 받아온 증오는 만화 검열제 및 합동출판사 못지않았다. 이렇게 이런저런 검열에 시달리다 보니 만화가들도 만화를 제대로 그리질 못했다. 그래서 이 시절을 겪은 만화가들은 참다못해 만화계를 떠난 사람도 허다했다. 당연히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한탄하고 그 때 당시의 검열제도를 증오한다. 김수정은 아기공룡 둘리 애장판에서 검열이라는게 단순한 무소불위 권력에 지나지 않았다 라며 분노를 쏟아냈으며 허영만은 이런 검열에 시달리다 보니 나중에 제대로 그리고 싶어도 그릴 수가 없더라, 걸리지 않을까 해서라고 회고했다. 이정문은 2000년대 와서 여자 팬티가 보이고 그리고 가슴이 보이는 한국만화 보면 와 이렇게 그려도 되냐? 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더라. 그땐 절대로 안되던 것들이라...라고 씁쓸하게 글도 남긴 바 있다.

그런데 웃기는 점은 2010년대에 와서는 기존엔 정부의 지도하에 이루어졌던 만화 죽이기가 해연갤, 여시, 메갈리아등을 필두로한 여초 집단에 의해서 민간인 차원에서 자체 검열 당하고 있다는 것.발암 <결계녀>사건처럼 수없이도 많은 국산 신작 만화들이 여초 집단 회원들의 악의성 제보를 받고 기사를 쓰는 기자들을 등에 업은 여초 회원들에 의해 작품의 질이 떨어지거나 일정기간 연재중단을 하고 작품 전체를 바꾸는 상황이 비일비재해지고 있다.[33]

3 해외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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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에서도 이와 같은 만화 검열이 있었다.(...) 50년대 ~ 60년대에 만화에 대한 규제가 엄격해져서 배트맨의 숙적 조커는 폭탄 테러와 무자비한 살인들 대신 어린애들 성적표를 뺏어서 놀려대고 수돗물을 젤리로 바꾸는 동네 바보 형이 되어 버린 적이 있었다.(...) 존 블레이크항목 참조. 그외에 자세한 내용은 이 곳을 참고. 위 사진은 당시 사람들이 만화점과 가정집에서 가져온 만화책들을 모아 버리는 장면이다. 이 때 당시 시절을 코믹스의 황금기를 뒤따랐다고 해서 실버 에이지(Silver Age)라고 불린다.
  • 그럼 일본이라고 없었을까? 놀랍게도 5~70년대 일본도 한국과 비슷한 만화검열제가 있었다. 만화책을 아카혼(赤本)이라고 부르던 시절, 학부모단체 PTA가 이런 검열을 주도했는데 이 검열에 호되게 당하던 사람이 일본 만화의 전설 데즈카 오사무이다. 소녀가 손이 더러워서 손을 씻고자 하다가 안경을 입으로 물고 있는 장면을 두고 성적 코드가 느껴진다고 삭제 및 수정을 요구한다든지 당시 일본만화에서 속옷 노출이나 여러가진 지금과 전혀 다르게 나오기 어려웠던 시절이 있다. 아예 대놓고 이런 걸 그리면서 PTA와 정면대결하던 게 데즈카 오사무와 나가이 고. 다만 이는 국가에서 직접 진행한 일은 아니고[34] YWCA 서울 모니터회가 했던 짓과 비슷하다. 그렇다고 우습게 볼건 아니라서 일본 만화가들도 엄청 시달려왔고 당시 일본 교육단체이니 정부기관들도 이런 PTA의 행위를 옹호했기에 일종의 검열제라고도 볼 수 있다. PTA항목을 참고하면 데즈카 오사무가 재판 끝에 여길 상대로 법적 투쟁을 벌인 게 나온다. 하여튼 이런 일 때문인지 일본만화 곳곳에서 PTA는 풍자[35]되거나 심지어 에로게 게임에서 성에 굶주리는 단체로 나올 정도로 일본 대중문화계의 증오를 받아왔다.

3.1 그렇다면 왜 대한민국의 만화 검열제는 성공했는가?

하지만 저 두 나라는 그럼에도 만화산업이 끝까지 버텨서 다시한번 황금기를 이루어 냈다는 차이점이 엄연히 존재한다. 이렇게 미국/일본과 한국의 운명이 갈려버린 이유를 몇 가지 들자면 민주주의 체제에 표현의 자유를 더 중시했던 미국과 일본은 순수한 민간 시민단체에 의해 규제와 검열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만화가와 만화 독자층들의 항의를 쉽게 받아줄 수 있었고 1960년대 히피로 대표되는 반문화 운동으로 사회가 급변한 영향을 받은 반면 군사독재정권이었던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만화가가 항의하면 그냥 남산 어딘가로 끌고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리면 그만이었고 데모를 해도 경찰력으로 찍어누르면 장땡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검열, 규제에 항의할 힘이 없었다. 풍자?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국가보안법이라는 높은 벽이 있고 국가가 직접 검열과 규제에 나섰으므로 항의나 풍자는 원천적으로 막혀있었다. 게다가 언론 역시 정부의 보도통제로 인해 만화 검열에 대한 비판이나 만화가들의 고난을 실을 수도 없었다. 이런 연유로 유명 만화가들과 만화방 주인들 역시 매년 어린이날마다 불량만화 추방운동에 동참하는 등으로 양심조차 저버리고 이에 순응해야 했다.

무엇보다 이 당시 대한민국은 저개발국으로 경제사정이 매우 개판이었다.[36] 즉 경제적인 요인, 정치적인 요인, 문화적인 요인 3박자가 아주 제대로 맞아 떨어져 대한민국의 만화 검열제를 비롯한 대다수의 미디어 검열정책은 아주 제대로 성공할수밖에 없었다.

4 관련항목

5 관련 링크

  1. 해외의 경우 참조
  2. 더욱 가관인 것은 전자오락이 발명되기 이전인 수십년 전 주류언론에서는 무슨 사고가 일어나면 당시 태동하고 있던 영화에서 문제를 찾으려 애썼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추세는 당시 영화를 향유하며 불량배 소리듣던 신세대가 나이를 먹고 기성세대가 되면서 사그라들었다. 영화가 예술로 인정받고 각종 영화제가 고풍스러운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현재의 추세를 보면 이만한 코메디도 없는셈. 더더욱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바둑을 비롯한 보드게임이 그 당시 어르신들로부터 지탄을 받는 일도 벌어졌다. 결국 이 모든 비건설적인 세대간 반목행위를 인류는 지금도 세대를 거듭하며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는 것...
  3. 헌데 그 분의 따님이신 현직 대통령분만화를 좋아하셨고 나중에 보물섬이라는 만화잡지도 내셨다. 뭐 이 보물섬에서 박정희 찬양책자 광고도 내걸었지만.
  4. 사실 당대 주요방송사에서 국산애니를 만들려는 시도를 하였지만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취소되거나 연기되었다고 한다. 높으신분들의 애니메이션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시궁창이라서 그런면도 있었고 근데 TBC는 당대 제2재벌의 소유였고 KBS는 1TV도 광고하고 비싸게 컬러TV 시청료를 받아챙기던 시절이었다. 그러니까 자금여유가 없었던게 아니라 제작비 지원이 안됐던 것 그리고 80년대 중반 1TV 블록광고 전후에 방송한 아이캐치도 외제... 그래서 당시 국산애니는 뽀뽀뽀에서 방송되는 단편애니나 극장판 애니메이션 재방, 공익광고 애니메이션 정도가 전부였고, 국산 TV애니메이션은 1987년이 되어서야 (올림픽+시청료 거부운동의 영향) 나왔다.
  5. 북한도 김부자 찬양만화이나 반미만화에선 아무리 허무맹랑해도 설명을 넣지 않지만 타 장르의 만화에선 설명을 넣어야 출간되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6. 그러나 1971년에 도서윤리위의 '반공만화 구성상의 주의환기'에 따르면 "서울이나 대도시에 고정간첩이 '아지트'를 두고 암약하든지, 높은 지식층이나 존경해야 할 인격자(교직자, 의사, 정부기관의 요직자 등)가 간첩으로 활약하면 안 되며(중략), 반공만화를 그릴 시 고정간첩의 활약상을 피해야 하며 간첩활동 대상은 무식층에 해당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7. 당시 <중앙만평>을 정운경과 격일제로 연재하던 박기정 화백은 이 시기에 만평을 그릴 때마다 무수한 협박전화를 들어야 했다고 증언했다.
  8. 음란 또는 저속한 간행물이나 아동에 유해한 만화등을 출판하여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를 침해하였다고 인정되는 경우.
  9. 1968년에 故김종래 화백이 그린 <삼팔선>이 대표적인 예이다. 다만 실제로 벌어진 일이나 비굴하게 후퇴하는 게 아니라면 간간히 봐주기는 했다. 故 신영식(1949~2005)의 무적의 독수리 소대(1980)에서 주인공이던 대위가 중공군의 총격에 헤드샷으로 즉사하고 한국군은 중공군 인해전술에 울며불며(중대장 및 전우들 시체를 놔두고 철수해야했기에) 후퇴하는 장면이 무사히 나온 바 있기도 하다. 그나마 비굴하게 철수한 게 아니며 설명으로 그들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말라는 걸 덧붙여서인지 잘 나오긴 했다. 그런데 사실 이 만화는 이범선 원작소설 <동트는 하늘밑에서>가 원작이다.
  10. 황미나가 이오니아의 푸른 별에서 쿠데타 장면을 그렸다가 고쳐야 했다.
  11. 우리는 길잃은 작은 새를 보았다를 그린 황미나가 작품 내 빈민가 장면들 때문에 엄청나게 시달리던 것도 유명하다
  12. 그러나 이두호 화백이나 이원복화백의 새소년 연재분을 보면 가난한 집안 이야기가 주구줄창 나와서 하나의 클리세가 되었었다. 이두호 화백의 작품 같은 경우는 아예 아이가 차용증을 모르고 종이비행기로 날려먹는 바람에 집이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는 내용이 그대로 나오기도 했다.
  13. 이 때문에 아기공룡 둘리 초반부의 많은 부분이 수정되었다. 분명 설정상으로 둘리가 고길동 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는데도
  14. 만화가 김수정성공시대에 출연했을 때 이에 대한 언급을 한 적이 있다. 김민이 그린 개그만화에서는 너 같으면 서냐라는 대사가 나오고 도망간다. 운 좋게 검열에 걸리지 않은 듯히다.(...)
  15. 이건 주로 영화 검열에서 자주 나오는 이야기인데. 스티브 맥퀸이 나온 모 영화는 원작 자체가 도망가고 끝나는 것이지만 한국에서 임의로 자막에 그리고 그들은 잡혔다라고 넣을 정도였다. 이런 클리세는 꽤 많은데 살인마 커플이 행복하게 산다는 네츄럴 본 킬러도 끝부분의 행복한 부분이 부분삭제 되었고 대륙에서는 무간도도 다른 결말로 상영되기도 했다
  16. 허나 맹꽁이 서당, 꺼벙이, 코망쇠 같은 명랑만화에서는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고 말썽을 부리는 장면이 필수요소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런 검열로 인해 둘리가 원래 인간으로 나올 예정이었는데 사람으로 나오면 짤릴게 뻔하니까 공룡으로 변형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이상무보물섬에서 1987년 6월호에 그린 만화 <하나 그리고 하나>에서 대기업 회장 아들인 독고탁에게 하청업체 사장(그런데 사실 조폭으로 아주 악랄한 짓을 저지르던 자)이 애원하면서 무릎을 꿇고 빌던 장면이 나오는데 당시 이 부분이 수정되어서 화면에서 사람이 안 보이고 말풍선만 달린 채로 사람은 아예 삭제되었다. 즉 아무리 어른이 잘못했어도 고딩인 아이에게 무릎을 꿇던 게 걸린 거다.
  17. 고바우 영감같이 이전부터 있던 캐릭터도 대머리 강조씬이 검열(그것도 새해를 맞아 인사하는 큰절임에도!?)되었으며 김수정이 대머리 캐릭터 그리고 작품연재 잘린 것도 유명하다. 그나마 그럼 드라마나 여러 프로그램도 대머린 안되냐는 비난에 마지못해 대머리를 그리되 악역은 안된다는 투로 바꿔졌다...
  18. 시사만화에서 높으신 분은 "나으리"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썬글라스"로 그리는건 꽤 많았다. 다만 5.18 전후해서는 "이를테면 광주식당에서 밥을 먹자"거나 "찌개에 산낙지와 별불가사리가 들어 있는거 보고 놀라는" 장면은 모두 검열에 걸렸다. 대머리 관련해서 심의를 피한 만화는 이홍우의 애정물 미쓰 앵두, 여기서 마담 앵두는 애인을 대머리 택시 기사에게 잃어서 대머리 공포증을 겪는 걸로 나온다
  19. 이두호 화백이 70년대 만화로 가난한 집안 아이가 밤늦게 일나간 부모를 기다리다가 밖으로 나와 손이 추워 주머니에 넣는 게 불량해보인다고 검열에 걸렸을 정도이니 말다했다. 알다시피 둘리도 불량아 아이들을 이런 검열때문에 마지못해 의인화하여 그렸다.
  20. 다만 상당수 명랑만화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말썽 수위(...)을 보면 만화장르에 따라 적용기준(...)이 달랐던 걸로 보인다.
  21. 지금은 주로 환빠 만화를 그리는 한재규가 임진왜란 전투에서 창칼 들고 그린 걸 그렸다가 당국에 호되게 비난받아 어쩔수 없이 수정한 다음에 열터진 나머지 한 동안 전투신이 들어간 역사만화을 그리지 않았던 바 있다.
  22. 이 때문에 액션신은 하얗게 가려지기 일쑤였으며 2000년대와서 복간된 박수동 화백의 홍길동과 헤딩박 복간판조차도 원본이 수정당했기에 포졸들이 창을 얼굴에 갖다대고 위협하는 걸 하얗게 칠했다. 이건 1990년대 후반까지 그대로 남아서 위에 나온대로 1997년 청소년 보호법 파동 당시 이두호 화백이 객주에서 악역 길소개 얼굴에 칼이 가까이 닿은 이 장면 때문에 검찰에게 가서 아이들이 보고 따라하지 않느냐는 소릴 듣으며 고생했다!
  23. 이건 1970년대까지 있었다가 1980년대에 해금된걸로 보인다. 아예 공룡이 말도 하고 사기치며 깽판부리는 작품이 나왔던걸 보면... 그래도 김수정이 둘리를 기획할때도 혹시 걸리지 않을까? 우려도 했을 정도로 얼마되지 않았다고 한다. 주로 동물을 의인화하여 그리던 만화가 차평(이 사람 만화인 동물특공대에 어린 시절 김수정이 만화를 따라 그린 걸로 만화에 애독자 특집으로 실린 바 있는데 김수정으로선 존경하던 만화가가 이렇게 떠난 걸 잊을 수 없었다)이 이런 검열에 분노하여 만화가를 절필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역사만화나 일부 명랑만화(예를 들어서 윤승운 만화에서는 지나가던 단역 동물캐릭터들이 가끔 말을 한다.)에서는 허용되었다(...) 하여튼 이랬다 저랬다.
  24. 허영만의 사랑해에서도 나오는 이야기이다.
  25. 이 규제는 1970년대 중반즈음에 풀린걸로 보인다.
  26. 이는 얼마안가 철폐된걸로 보인다.
  27. 이것도 좀 애매한게 당시에 출간되었던 상당수 만화에선 오누이가 같이 자는 장면이 나왓다(...) 하지만 박재동인터뷰에서 이런 규제가 있다고 분명히 말했고 허영만의 부자사전에도 비슷한 대목이 나온다.
  28. 1980년대에 이른바 민중만화라고 해서 사회현실을 고발하고 정부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식의 만화장르가 있었다. 물론 당연하겠지만 이 만화들은 출간되는게 불법이었다, 특히 1987년 6.29 선언 이후 민중만화가 전면적으로 투쟁의 중심으로 나서자 정부는 이를 철저히 탄압했다(이런 민중만화의 발매가 허용된건 민주화 이후인 1988년 <보통고릴라(주완수 저)>부터다.).
  29. 당시 시사 만화가들은 검열관의 눈에 띄지않게 우회적으로 정권을 조소하는 그림을 넣는식으로 검열을 피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안 들키는건 아닌법인지라 삭제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시사만화가들이 신군부 묘사와 5.18 광주민주화 운동이 군부에 의해 진압되는 상황을 우회적으로 나타내는 그림을 연재할려고 하다가 짤린게 그 예)
  30. 당대 출판되었던 순정만화에선 멀쩡하게(?) 염장지르는 장면이 나왔다. 하지만 당시에 출간되었던 명랑만화에선 전혀 나오지 않은걸 볼때 아동만화에 주로 적용된 규제인걸로 보인다.
  31. 이 말도 안되는 검열은 90년대에도 여전해서 90년대 후반에 국내 정발된 듀크 뉴켐 3D는 피도 하얗게 가리고 적을 터뜨리는 것도 삭제되고 여성 알몸도 삭제되고도 연불 등급을 받은 반면에 같은 시기에 정발로 나온 이레디케이터라는 미국 FPS게임은 적을 총으로 쏘면 몸이 피와 같이 퍽 터지는 묘사가 전혀 안 잘리고 그대로 나오고 연불 등급을 받았다! 어느 게임은 죄다 수정,삭제하고도 연불, 어느 게임은 일절 삭제안하고 연불.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웹툰 전설의 주먹을 두고 웹에선 청소년 유해만화라고 하더니만 신문에선 잘도 연재하면서 각 부서가 역시나 따로국밥인 현실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32. 다만 만화책을 잿더미로 만드는 일은 이미 1960년대부터 있어왔다. 당시에는 주관 단체가 경찰이나 한국아동도서협회, 한국대본업정화협회 등 관변 단체가 하거나 만화방 업자들이 자발적으로 한 경우도 있다.
  33. 기성작들의 경우 팬덤이 있기에 효과가 미약하다는 이유(...)로 여초 집단의 공격대상에 들지 않는 경우가 많다. 결국 여초 집단의 목표는 대중들에게 남성혐오와 여성우월주의를 퍼트리기 위함이기 때문.
  34. 물론 항복전에는 영화, 만화, 소설 가릴것 없이 이런식의 검열을 실컷 했었다(...)
  35. KKK처럼 입고 나와 아이들에게 문제가 되는 책을 불태우기도 한다...
  36. 당시 1인당 소득이 67~100달러정도밖에 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