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만 왕조의 문장 |
1 개요
2 역사
기원은 바이킹(노르만족)의 모험가 롤로. 롤로는 서프랑크 왕국의 샤를 3세에게 신봉하는 대가로 노르망디 지방을 영지(노르망디 공국)로 받았으며 '노르망디 백작'이 된다. 롤로의 후손들은 노르망디 공작으로 승격된다.
노르망디 공 가운데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왕위를 획득함으로서 '노르만 왕조'가 된다.
노르만 정복 이후 잉글랜드는 노르만 문화의 매서운 맹공을 받았다. 그 예로 잉글랜드의 인구를 조사한 둠스데이북이라는 책을 보면 정복 이전에는 2천명이 넘는 앵글로색슨 영주들이 있었는데 정복 이후에는 오로지 3백명 내외의 노르만 영주들만이 존재하게 됐다. 노르만 문화는 잉글랜드 곳곳에 새롭게 지어진 성당과 대륙식 성채들을 기반으로 뻗어나갔으며, 이러한 노르만 문화의 전파는 북유럽 문화권에 속해있던 잉글랜드를 대륙 문화권에 편입시키는 효과를 야기해냈다. 이러한 면에서 본다면 노르만족은 앵글로색슨 현지민들을 매섭게 공격하며 꾸준히 몰아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노르만족은 현지의 앵글로색슨 민중과 공존을 꾀하며 살아갔으며 현지의 풍습, 문화, 법을 존중하고 다수 받아들이면서 그들을 지배했다. 이러한 면에서 본다면 노르만족은 앵글로색슨 현지민들과 공존하며 살아갔다. 실제 노르만 정복 이후의 역사를 본다면 무조건 학살이 있지만도 무조건 공존이 있지만도 않았다. 학살을 통한 공격적 확장과 포용과 수용을 통한 현지민과의 공존이 동시에 존재하며 진행 된 기묘한 상태가 노르만 정복 이후의 잉글랜드라 할 수 있겠다.
정복자 윌리엄이 프랑스 왕의 신하였던 탓에 잉글랜드 왕의 위치는 아리송한 관계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노르만 왕조의 잉글랜드 왕들은 그레이트브리튼 섬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프랑스 왕국 내에서 봉토를 늘리는데 열중하였다, 라고 적혀있었는데 이것 역시 애매하다. 왜냐하면 노르만 왕조는 끊임없이 잉글랜드 본토를 지배하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왕국 내에서 봉토를 늘리는데 열중하였다고 하지만, 잉글랜드 왕국이 프랑스 왕국 내에 많은 봉토를 차지하게 된 것은 헨리 플랜태저넷이 모계혈통으로 이어진 주장권을 가지고 잉글랜드 왕위를 찬탈한 이후의 일이다. 헨리 플랜태저넷은 앙주백으로서 아키텐 공작령의 상속녀 아키텐의 엘레아노르와 결혼함으로서 프랑스 왕국 내에 막대한 봉토를 차지하게 되었고, 그 후 잉글랜드 왕위를 찬탈하자 자연스레 헨리 플랜태저넷의 영지 역시 잉글랜드 왕실의 영지로 포함되면서 잉글랜드 왕실이 프랑스 내부에 막대한 영토를 거느리게 되었다. 노르만 시대에 궁정에서는 프랑스어를 사용하여 영어에 프랑스어의 흔적이 많이 남게 된다. pork(프랑스어로는 porc, 돼지고기), beef(프랑스어로는 bœuf, 쇠고기) 등(...)
일시적으로 노르망디 공국과 잉글랜드 왕국이 분리된 적도 있었지만 재통합 된다. 노르만 왕조의 단절로 노르망디 공국의 지위도 함께 플랜태저넷 왕조로 옮겨졌다가, 플랜태저넷 왕조가 프랑스의 영토를 상실하면서 과거 노르망디 공국의 영지도 거의 모조리 털린다.
하지만 이후로도 역대 잉글랜드 왕은 '노르망디 공작'의 칭호를 지속적으로 유지했다. 다만 이 칭호는 대륙이나 프랑스에서는 인정되지 않는다.
여전히 노르망디 공령으로 아직 남아 있는 지역이 있는데, 바로 채널 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