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px 신라의 역대 국왕 | ||||||
51대 진성여왕 김만 | ← | 52대 효공왕 김요 | → | 53대 신덕왕 박경휘 |
시호 | 효공왕(孝恭王) | |
성 | 김(金) | |
휘 | 요(嶢) | |
생몰년도 | 음력 | (885년~886년) ~ 912년 4월(27세~28세) |
재위기간 | 음력 | 897년 6월 ~ 912년 4월 (15년 11개월) |
1 개요
신라의 제52대 왕이다. 이름은 요로 헌강왕의 서자다.
헌강왕이 사냥을 갔다가 길에서 자색이 뛰어난 여자를 만났는데 뒤에 헌강왕이 궁을 빠져 나가 야합(...)하여 태어났다. 조금은 석연찮은 출생. 후에 진성여왕이 이러한 사실을 알고 헌강왕의 유일한 혈육이라는 점에서 893년 그를 태자에 봉하였고, 897년에 왕위를 물려주었다.
2 치세
대사면을 내리고, 문무백관의 관작을 한 등급씩 올려준 후, 다음해인 898년 정월에 어머니 김씨를 높여 의명왕태후(義明王太后)로 삼았다. 서불한 준흥(俊興)을 상대등으로 삼고 아찬 계강(繼康)을 시중으로 삼았다. 이찬 박예겸(乂謙)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899년 3월)
하지만 그의 재위시에는 이미 신라는 지방세력에 대한 패권을 잃은 상태였고 궁예와 견훤 두 양대세력이 서로 세력을 다투는 형국이었다. 즉위 후 2년인 898년부터 궁예에게 한주와 삭주의 성을 대거 빼앗기는 기사가 나온다. 899년에는 궁예와 양길이 격돌하여 결국 궁예가 승리했다.
900년에 이미 892년부터 사실상 왕을 칭하던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했고, 901년에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함으로서 이른바 후삼국시대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로 인해 신라는 경주시(금성) 인근의 고읍만 다스리게 되는 소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래도 이건 조금 뒤의 일이고,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대야성 등 경상도 지방은 꽤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901년에는 이미 견훤이 대야성을 공격하지만 지켜낸다. 망국의 징조는 예전부터 보였지만, 이때까진 신라의 힘이 조금은 남아있는 상태였다.
904년, 905년에는 궁예는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고 국호를 마진으로 하였으며 왕건은 금성(나주)를 쳐서 빼앗았다. 905년 8월 죽령 동북쪽까지 궁예의 군대가 이르렀지만, 힘이 없던 신라였기에 고작 "나가서 싸우지 말고 성벽을 굳건히 하여 지키라"라는 명이나 대릴 수 밖에 없었다. 910년의 나주공방 등 이미 상황은 궁예 vs. 견훤이었고 신라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결국 효공왕 역시 자포자기로 사치와 향략을 즐길 수밖에 없었다. 대신 은영이 첩과의 향락을 중지할 것을 간하였으나 따르지 않자 은영이 그 첩을 잡아 죽였다.(…) 왕은 두려워하다가 다음해(912년) 4월에 죽었다. 후사가 없어 원성왕 때부터 피로 이어져 온 왕통은 단절되었다. 동시에 김씨 왕성의 왕위독점이 끝났음을 사실상 고하는 순간이었다. 15년 뒤에 김부가 경순왕으로 등극하긴 하지만 외부 세력인 견훤에 의해 거의 타의로 왕위에 오른데다 신라의 마지막 왕이라는 망국의 군주에 가까우니 사실상 효공왕이야말로 김씨 왕성에서 나온 마지막 임금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처남인 박예겸의 아들 박경휘가 뒤를 이으니 이것이 신덕왕이다. 8대 아달라 이사금 이후 728년만에 박씨 왕조가 되돌아왔다. 다만 이때의 신라는 이미 망국의 테크를 밟는 안습한 상황이었는 데다 기껏 돌아온 박씨 왕조도 겨우 3대 15년밖에 가지 않았다.
여담으로 자연재해가 매우 버라이어티하다. 망해가는 나라 답게 혼란한 시대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듯하다.
3 효공왕 때의 기록
902년 3월엔 서리가 내렸고, 5등급 대아찬인 효종(孝宗)을 시중으로 삼았다.
905년 2월에 별이 비오듯 떨어졌다. 4월에 서리가 내렸다.
906년 정월에 4등급인 파진찬 김성(金成)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3월에 앞서 당나라에 들어가 급제했던 김문울(金文蔚)은 관직이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 기왕부자의참군(沂王府諮議參軍)에 이르렀는데, 책명사(冊命使)에 임명되어 돌아왔다. 4월부터 5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907년 봄과 여름에 비가 오지 않았다. 908년 2월에 살별(=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3월에 서리가 내렸다. 4월에 우박이 내렸다.
911년 정월 초하루 병술에 일식이 있었다.
4 삼국사기 기록
一年冬十二月 효공왕이 즉위하다
一年冬十二月 대사면을 하고 관작을 한 계급씩 더하다
二年春一月 어머니를 의명왕태후로 삼다
二年春一月 준흥을 상대등으로, 계강을 시중으로 삼다
二年秋七月 궁예가 송악군에 도읍하다
三年春三月 예겸의 딸을 비로 삼다
三年秋七月 양길이 궁예를 공격하였으나 패배하다
四年冬十月 청길과 신훤이 궁예에게 투항하다
五年 궁예가 왕을 칭하다
五年秋八月 견훤이 대야성 공격에 실패하고, 금성 남쪽 부락을 약탈하다
六年春三月 서리가 내리다
六年春三月 대아찬 효종을 시중으로 삼다
七年 궁예가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하다
八年 궁예가 백관을 설치하고 국호와 연호를 제정하다
八年 패강도의 10여 주현이 궁예에게 항복하다
九年春二月 별이 떨어지다
九年夏四月 서리가 내리다
九年秋七月 궁예가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다
九年秋八月 궁예가 침략하자 성주에게 수비를 명하다
十年春一月 김성을 상대등으로 삼다
十年春三月 입당 급제한 김문울이 책명사로 귀환하다
十年夏四月 4월에서 5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다
十一年 봄, 여름에 비가 오지 않다
十一年 일선군 이남의 성을 견훤에게 빼앗기다
十二年春二月 동쪽 하늘에 혜성이 나타나다
十二年春三月 서리가 내리다
十二年夏四月 우박이 내리다
十三年夏六月 왕건이 진도군과 고이도성을 함락시키다
十四年 견훤이 나주성에서 후퇴하다
十五年春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十五年春一月 왕의 천첩을 은영이 죽이다
十五年春一月 궁예가 국호를 태봉으로 고치고 연호를 수덕만세라 하다
十六年夏四月 왕이 죽다
효공왕의 치적보다 되려 궁예, 견훤, 왕건의 활약과 기상에 관한 기사가 훨씬 더 많다.
효공왕부터 삼국사기 12권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