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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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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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의 평범한 뉴스.jpg 총체적 난국, 이건 1998년부터 1999년 2월까지의 뉴스도 된다. 부도가 30개[1]

대한민국의 대기업인 한보그룹이 파산하기 시작하더니 그 해 연말에는 IMF 외환위기가 터져버렸다. 1996년까지 이른바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아시아의 네 마리 용" (대한민국, 홍콩, 싱가포르, 중화민국(대만))이라며 "기초가 튼튼하다던" 한국이었지만, 타이, 말레이시아를 시작으로 북상하는 아시아 금융위기를 피할 수 없었다. 지못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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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7일, 12.12.5.18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왔다. 법원은 전두환에게 내란반란의 수괴죄로 2심 그대로 무기 징역이 확정되고 추징금 2,205억원을 선고했다. 노태우에게는 내란과 반란의 중요 임무 종사죄로 역시 2심 그대로징역 17년이 확정되고 추징금 2,628억이 선고됐다.[2]

7월 15일, 울산경상남도에서 분리독립하여 울산광역시로 승격되었다. 옛 직할시 명칭이 아닌 광역시라는 바뀐 명칭을 처음 받게 된 지역은 울산이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하다.울산광역시 승격, 1997.7.10 mbc뉴스

한편 문화체육부(현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이 해를 문화유산의 해로 지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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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조차지 홍콩중화인민공화국에게 반환되었다.

그리고 북한에서는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동지인 김덕홍과 함께 탈북하게 되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나게 되어서 남북한과 세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는 북한주체사상을 창시했던 장본인이라 더욱 주목이 갔었던 편이었다. 그리고 1997년 7월 10일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전쟁 준비 남침준비 상황을 구체적으로 폭로하여 전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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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황장엽은 이날 회견에서 북한의 핵무기 보유와 북한의 핵개발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이미 북한 내부에서 핵무기 보유는 상식화되어 있고 지난 85년 소련 측이 핵개발을 문제 삼자 김일성 부자가 이를 무시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혀, 북한의 핵 개발계획이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다고 폭로하여 전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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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7월 16일, 중동부 전선 군사분계선에서 남북한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다. 20여분 포격전 북한 군인이 군사 분계선을 넘어 오면서 비롯된 이날 교전은 곡사포까지 동원돼 남북한간 최악의 대치상황을 실감케 했다. 그날 10시50분,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먹실리 아군 백골부대 지역 비무장지대, 전방을 경계하던 초병북한군 7명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우리 쪽으로 내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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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군인 군사 분계선 침범,아군 초병과 20여분 포격전,mbc
아군 초병은 즉각 군사 분계선을 넘는 것은 중대한 도발 행위이며, 즉시 복귀하라는 경고 방송을 실시했으나 북한군은 경고 방송을 무시하고 계속 군사 분계선을 70m나 넘어왔고 11시2분, 아군은 K-2 소총 100발씩 두 차례에 걸쳐 위협사격을 가했다.
3분쯤 지난 11시5분, 북한군 초소에서 자동화기와 소화기 실탄 7-80발이 날아왔다. 아군 초소를 겨냥한 조준 사격이였고 아군도 즉각 응사했다. 다시 15분쯤 지난 11시21분, 이번에는 아군 초소에 북한군의 포탄 10여발이 떨어지고 아군도 57mm 무반동총으로 응사하면서 교전은 점차 확대됐었다. 개인 화기와 중화기, 야포까지 동원되면서 격렬했던 양측의 사격전은 11시47분 서로 사격을 중지하자는 아군의 방송으로 긴박했던 상황을 끝냈다.

약 30분간의 교전에서 아군의 인명 피해는 없었으며 북한군 초소에는 12시 20분쯤 구급차 한 대가 도착하는 장면이 관측됐다. 군사분계선을 넘어왔던 북한군 7명은 12시3분쯤 되돌아갔다.조준사격 포격 23분간의 전쟁비무장지대에서 포격전

뉴스특보로 보도된 괌 추락참사 장면이다.
1997년 8월 6일, 서울을 떠나서 괌으로 가던 대한항공 801편이 오늘 새벽 1시쯤 괌 공항에 착륙 직전 밀림 지대에 추락하여 탑승객 254명 가운데 228명이 사망하고 26명정도만 살아남은 역사상 최악의 항공참사가 벌어졌다.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를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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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30일, 신한국당, 이회창 신임 총재로 선출로 새로 출범 당시 집권당인 신한국당(현재 새누리당)은 이회창 신임 총재를 선출시키며 9월 30일 mbc 메인뉴스에서 임기말의 김영삼대통령과 이회창후보가 서로 손을 맞잡고 위세를 보이며 그 당시의 집권당으로써의 위세를 국민들에게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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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0월 2일, 북한 주민들의 굶주리는 모습이 미국 CBS방송에 방영되어 전세계인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미국 CBS 방송, 굶주리는 북한의 모습 미국 전역에 방영 당시 북한을 취재한 CBS기자 피터 밴 센트는 북한인구의 5분의 1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고 전하며 미국 기자들은 북한을 돌며 북한의 고난의 행군으로 주민들이 굶어죽어가는 비참한 상황을 촬영하며 전세계인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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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정일 노동당 총비서 취임
북한이 10월 8일, 오후 5시 조선노동당 중앙 위원회와 중앙 군사위원회 명의의 특별 방송을 통해 김정일을 노동당의 공인된 총비서로 추대했다고 보도했다. 북한 당 규약은 당 중앙 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총비서를 선출하도록 규정하고 있어서 오늘 당 중앙위원회의 추대는 곧, 김정일의 총 비서직 공식 승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북한은 지난 9월 21일 평안남도 당 대표회를 시작으로 각 시도와 인민군 각급 주관별 당대표회를 통해 김정일 총비서 추대를 결의하며 추대 분위기를 고조시켜 왔다.
당시 55살인 김정일김일성 종합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뒤 22살이 되던 64년부터 노동당 핵심 부서인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써 후계자 수업을 시작했다. 그 후 권력투쟁을 거쳐 74년 후계자로 추대된 뒤, 80년부터는 실질적으로 당을 장악했으며 90년대 들어서는 최고사령관과 국방위원장에 올라 군권도 장악했다.

1997년 10월 17일, 북한무장군인 12명이 군사분계선을 넘어와서 판문점 대성동 주민 2명을 납치하여 인질로 삼은 사건이 벌어졌다. 북한 무장군인, 판문점 대성동 주민 피랍, 납치된 주민 2명은 4일 후인 10월 21일, 북한의 송환조치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으나 아직도 살벌한 남북한의 대치상황을 절감케 하는 사건이었다. 북한 피납 주민 무사히 귀환

1997년 10월, 외환위기 직전 노동부에 신고된 전국 사업장 체불임금 금액은 6480억원에 달해 수많은 직장인근로자들이 임금도 못받는 상황에 직면해 경제위기 상황을 실감케 해준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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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8일, 당시 임기말의 대통령인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정치권의 허위사실 유포에 엄히 대처하겠다며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한다.김영삼대통령, 정치권 허위사실 유포 엄단 임기말 퇴임을 겨우 몇달 앞두고 IMF사태로 지탄을 받게 되는 임기말의 대통령이 이렇게까지 MBC메인뉴스에서 위세를 보인 것을 보면 그 당시 얼마나 권위주의가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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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9일, 경제가 위기에 빠져들면서 강경식 경제부총리가 물러나고 임창열 통상산업부 장관이 새 경제 부총리로 임명됐다.
환율 변동 폭을 현행 2.25% 범위 내에서 10% 범위내로 대폭 확대한다고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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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11월 21일, 정부가 결국 국제 통화기금 IMF의 구제 금융을 신청하기로 했다.
구제금융 요청 경제 우등생 한국의 신화를 뒤로 한 채 사실상의 국가 부도를 인정하고 국제기관의 품안에서 회생을 도모해야 하는 뼈아픈 처지가 된 것으로 임창열 부총리는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3당 대통령 후보와의 청와대 만찬에 참석해 IMF 구제 금융에 불가피성을 설명한 뒤 밤 10시에 IMF 요청 사실을 공식 발표한다. 임창열 부총리는 그날 우리나라를 방문 중인 스탠리 피셔 IMF 부총재와 티모시 게이디너 美 재무부 차관보와의 잇단 접촉에서 우리나라가 IMF로부터 자금지원을 받는 것이 불가피하다는데 의견을 같이 한 것으로 알려졌다.임창열 경제 부총리와 IMF부총리의 긴박했던 협상

12월 3일, IMF와의 협상이 최종적으로 발표되었다.
임창열 경제부총리와 캉드쉬 IMF 총재는 협상을 마치고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대회의장으로 나와서 협상의 타결 소식을 전했는데
캉드쉬 총재는 이 자리에서 한국에 지원할 자금 규모는 모두 550억 달러로 결정됐다고 말했습니다.
먼저, 550억 달러의 자금 조달 내역을 보게 되면 IMF가 210억 달러, IBRD 세계은행이 100억 달러, ADB 아시아 개발은행이 40억 달러 등 국제기구에서 350억 달러를 지원하는데 합의했다. 사실상 경제주권을 IMF에 바친 셈으로 그 이후 4년간 한국경제는 IMF의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게 되었다.IMF, 긴급 자금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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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협약 반드시 지켜야
당시 IMF 총재 미셸 캉드쉬는 한국이 국제통화기금의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한다고 대한민국정부를 위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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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대선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광주 유세 12월 16일, 한나라당 이회창후보가 광주광역시를 방문해 광주 송정리역에서 유세를 가지며 광주시민들과 국민들의 지지를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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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0일, 당시 김영삼 전대통령과 당시 김대중대통령 당선자의 협의로 전두환 노태우가 사면되었다.
전두환,노태우사면 특별사면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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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3일, 원달러 환율이 사상 최악으로 2000원대까지 폭등하며 단군이래 최악의 위기상황 IMF를 실감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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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2월 30일, 마지막으로 사형이 집행된 MBC뉴스 장면이다.

이날 23명의 죄수들이 사형당했고 4명은 안구와 사체를 기증했고, "오전 9시부터 시작되어 오후 3시에 모두 끝났으며 정부의 엄정한 법집행 의지를 표명하여 범법자들에게 법의 엄정함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킴으로써 사회 기강을 새로이 확립하기 위하여 실시하였다."고 정부 관계자가 밝혔다. 사형집행은 현 정부 출범 후 지난 94년 15명, 지난 95년 지존파 등, 19명에 대한 사형집행 이후 세 번째이며 긴급조치 시대인 지난 76년 27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된 후 최대 규모였다.[6] 이날 이후 18년간 현재까지 대한민국에서는 단 한건의 사형집행이 이뤄지지 않아 사실상 사형 폐지국으로 분류되고 있다.

게다가 당시 PC통신/인터넷 이용자들은 전기통신사업법 시행령 제16조 2항(일명 통신보안법) 개정 파동과 정통부의 한총련 관련 게시글 및 아이디 무단 삭제, 지오시티 전면 접속 차단, 수사기관에 의한 PC통신 무단감청 증가 등의 온라인상의 표현의 자유 침해로 1996년보다 못한 절망의 시기를 보냈다. 통신연대가 발간한 '97 정보통신 검열백서' 참조. 이러한 검열 문제에 대해 통신연대 측이 유니텔 등 4개 통신사에 질의서를 보냈으나 나우누리를 제외한 3개사가 보안문제 등을 이유로 답변을 거부했다. 게다가 전자주민카드 도입이 빠르게 진전되면서 당시 국민들 사이에서 프라이버시 침해와 정부의 빅브라더화에 대한 우려가 보였다.

이 시기(1997년~1998년) 어린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정도의 입장에서 보면 유년시절이나 학창시절의 그리움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현실을 보자. 1997년 10월, 외환위기 직전 노동부에 신고된 전국 사업장 체불임금 금액은 6480억원에 달해 수많은 직장인근로자들이 임금도 못받는 상황에 직면해 경제위기 상황을 실감케 해준다.[7] 뉴스에서도 나오듯 1997년에는 남북한간 최악의 대치가 여전히 진행중이었고 경제는 최악의 나락으로 떨어지며 결국엔 IMF사태를 맞으며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존망마저 위태로운 시기였으니 말이다. 비록 사고공화국이니 하는 등의 비판도 나왔지만 1인당 GDP가 역사상 처음으로 1만 달러를 돌파하는 등, 지속적인 사회 발전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물론 1년 뒤 그 희망외환위기와 함께 절망으로 바뀌었다. 응답하라 1994응답하라 1997과 같은 작품이 계속 나오는 것도 이 시기의 추억에 대한 나름의 향수 때문일 것이다.

기구하기 짝이 없는 이후 20년의 서곡을 알리는 이 해에 태어난 사람들(+ 1998년 2월생까지)은 7차 교육과정의 마지막 코스를 밟게 된다. 본격 마지노 선 입시 공부 열심히 할래? 아님 내년에 한국사 볼래? 추가로 대부분이 학창시절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의 수학여행 기억을 갖고 있지 않다.[8] 중학교 때도 안 간 사람 많다. 등 여러가지 이유로 97년생 사이에서는 저주받은 해라는 소문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이 모양이니 97년생은 답이 없다. 그리고 만 19세가 되는 해에는 자동차 운전면허도 어려워져서(경사로, T자/S자 코스 부활) 더욱 곤란하게 된 입장이 되었다. 쉬워서 문제라며 거기에 2018 평창 동계올림픽군대크리

이 해에 태어난 연예인들 중 은근 노안이 많은데, 대신 인기는 폭발적이다. 대표적인 사람들을 뽑는다면 한국에서는 여진구와 국악소녀 송소희. 일본에서는 성우 타케우치 슌스케키도 이부키. 가수 마츠이 쥬리나와 배우 시다 유미가 있다.

일본한자능력검정협회가 선정한 1997년 올해의 한자는 '倒(넘어질 도)'였다.

1997년 12월, IMF사태가 터지던 시기의 국내 실업률은 3.1%로 집계되었다.[9]

2 사건

2.1 실제

2.2 가상

3 탄생

3.1 실존인물

3.2 가상인물

4 사망

4.1 실존인물

4.2 가상인물

5 데뷔

5.1 가수

5.2 스포츠

5.3 예능인

6 은퇴

  1. 대우그룹의 부도는 1999년이다. 대우그룹이 지금 망하지 않았다면 재계 3위의 자리는 LG그룹가 아니라 대우그룹의 것이였을 것이다.
  2. 전두환노태우 사건 대법원 최종 판결, 1997.4.17 mbc뉴스
  3. 黃長燁(황장엽)—金德弘(김덕홍) 진술내용 北(북)주민"굶어죽느니 차라리 전쟁을"
  4. 북한 핵무기 소유는 상식화, 1997.7.10 mbc뉴스
  5. 체불임금 6480억원
  6. 흉악범들 사형 집행,4명은 안구와 사체 기증)
  7. 체불임금 6480억원
  8. 2009년 초등학교 6학년 가을에는 인플루엔자 A 대란으로 감염을 우려하여 단체행사들이 족족 취소되었고, 2013년 고등학교 1학년 때는 태안 사설 해병대 캠프 참사로 인해 일부 학교가 수학여행을 취소했으며, 2014년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로 인해 1학기 수학여행 행사가 전체 취소되었다. 2학기 때 간 학교도 있긴 하지만 거의 모두 전면취소. 빠른 98들은 만약 생년대로 입학했다 치더라도 초등학교 수학여행은 갔을 테지만 고등학교 수학여행은 역시나 메르스 사태로 취소크리먹었긴 마찬가지. 하지만 둘 다 간 사람도 물론 있다. 운이 좋게 2009년 1학기에 수학여행을 간 경우라던지, 2014년 4월 16일 이전에 수학여행을 떠난 사람이라던지. 교장선생님을 욕하다 선지자라고 찬양하는 경우도 많았다. 대신 체육대회가 취소된 학교도 있다(가을에 한 경우는 예외) 체육대회가 고1때가 마지막(고3은학교행사참여불가)인 사람도 있다
  9. 지난달 실업률 3.1% 4년 반만에 최고, 실업률 3.1% 최악 수준
  10. 먼저 대한민국으로 망명해 있었다.
  11. 전두환노태우 사건 대법원 최종 판결, 1997.4.17 mbc뉴스
  12. 사회당으로서는 4년만의 제1당 복귀였고, 반면 여당인 우파 정당 공화국 연합(RPR)과 중도 민주연맹(UDF)은 각각 200석대에서 100석대로 의석이 반토박이 났다. 자크 시라크로서는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임기 말에 동거정부의 총리를 역임했기에 2년 만에 거꾸로가 된 격이었다. 극우 국민전선도 최초로 1석을 올렸다. 조스팽은 이미 1995년 대선에서도 1차투표 1위로 선전하는 등 인기가 좋았으나 정작 2002년 선거에서는 후보난립으로 3위로 낙선하게 되어 황당하게 정치인생을 마무리했다.
  13. 북한 군인 군사 분계선 침범,아군 초병과 20여분 포격전,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으나 북한의 이날 도발은 6.25 전쟁 이후 처음이라고
  14. 동방영이전은 1996년 11월경 동경전기대학의 큐산마츠리에서 먼저 공개되었지만, 날짜를 알 수 없으므로 코믹마켓의 정보를 기입한다.
  15. 물론 북한 외교관의 해외 망명은 이전에도 있었으나, 대사급 외교관의 망명은 상당히 이례적인 것이었다.
  16. 북한 무장군인, 판문점 대성동 주민 피랍(10월 17일)
  17. 북한 피납 주민 무사히 귀환, 10월 21일
  18. 당시 일본 증권사의 리더 중 하나였다. 증권사 빅4로 불릴 정도.
  19. 비교적 시차가 빠른 호주, 홍콩,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18일, 미국은 다음날인 19일에, 한국은 그 다음 해 2월 20일에 개봉하였다.
  20. 영화가 개봉되는 2012년으로부터 15년 전이 되도록 수정한 것이다.
  21. 킴 카다시안과는 이부자매이다.
  22. 작중 년도가 정확히 밝혀진 애니메이션판 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