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오르기 오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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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기오르기 오르스
(György Orth)
생년월일1901년 4월 30일
사망년월일1962년 1월 11일
국적헝가리
출신지부다페스트
포지션인사이드 포워드
신체조건171cm / 71kg
등번호-[1]
소속팀바사슈(1915)
피사(1916)
MKT 부다페스트(1916-1923)
퍼스트 비엔나(1923)
MKT 부다페스트(1924-1927)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1927-1929)
부다이 11(1929-1930)
국가대표32경기 / 13골(1917-1927)
감독칠레(1930)
콜로콜로(1930-1931)
복스카이 FC(1932)
메시나(1932-1934)
피사 칼초(1934-1935)
제노아 CFC(1935-1936)
뉘른베르크(1936-1938)
FC 메스(1938-1939)
칼초 카타니아(1939-1940)
사보나 SFC(1940-1942)
산 로렌소(1944)
로사리오 센트랄(1945)
CD 과달라하라(1946-1949)
멕시코(1947)
클럽 넥사카(1950-1951)
콜롬비아(1955-1956)
페루(1957-1959)
FC 포르투(1960-1962)

1 생애

1.1 선수 생활

오르스의 첫 클럽은 ILK라는 클럽이었다. 거기에서 유소년 선수로 생활하던 오르스는 15세에 바사슈로 팀을 옮겼고 이곳에서 데뷔를 하게 된다. 하지만 1년만에 팀을 떠났고 MKT 부다페스트에서 본격적으로 선수 생활을 하였다. 당시 MKT 부다페스트는 잉글랜드 출신의 명장 지미 호건의 지도 아래 임레 쉬로서, 알프레드 샤퍼 등 헝가리 축구의 초기 역사를 대표하던 선수들이 즐비한 클럽이었고, 여기에서 1919-20 시즌부터 샤퍼를 제치고 주전 자리를 확보하였다. 그런 MTK를 막을 수 있는 팀은 헝가리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MTK는 오르스가 있는 동안 8연속 우승이라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다.[2]

잠시 외유를 마치고 돌아온 오르스. 하지만 그에게 부상의 악령이 찾아왔는데 1925년 비엔나에서의 친선 경기에서 요한 탄들러와 충돌하면서 무릎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 그는 이 부상으로 1년을 쉬었고 복귀한 이후에도 전성기의 우아한 플레이는 실종되었다. 그 이후에는 프랑스마르세유와 부다이 11 등에서 남은 선수 생활을 보냈다.

1.2 국가대표

오르스는 16살의 나이에 국가대표팀에 데뷔하였다. 데뷔전 상대는 오스트리아였으며 주로 센터 하프 또는 포워드 자리에서 뛰었다. 1924년 올림픽에도 참가하였지만 당시 헝가리는 이집트에게 3대 0으로 패하는 이변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리고 그 빚은 10년 후의 월드컵에서 다소 문제가 많은 방식으로 갚았다 그리고 상술한 무릎 부상으로 인해 국가대표팀에서는 1927년 이후 소집되지 않았고, 통산 32경기에 출전하여 13골을 기록하였다.

1.3 감독

1.3.1 칠레

오르스는 무릎 부상으로 인해 선수 생활이 힘들어진 1920년대 후반 무렵, 베를린에서 스포츠 과학을 공부하였다. 초대 월드컵에서 그는 칠레 대표팀의 감독으로 칠레 대표팀에 선진 축구를 접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다비드 아레야노 이후의 칠레 대표팀에 2-3-5 시스템 위에 여러 전술의 색을 입혔고, 하루 당 5시간의 훈련을 정착시키고 식이요법을 조절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칠레는 1조에서 프랑스멕시코를 꺾는 돌풍을 일으켰으며 13개 팀 중 5위를 차지하여 4강 진출 팀을 제외하면 가장 좋은 성적을 올렸다. 골득실로만 따지자면 3위 팀 미국과 4위 팀 유고슬라비아를 오히려 앞설 정도였다[3]. 칠레의 이 성적은 32년 후의 자국 월드컵의 4강을 제외하면 가장 높은 성적이었다.

29세의 감독으로 성공적인 변신에 성공한 오르스는 월드컵 이후 콜로콜로의 감독을 맡으면서 산티아고에서 체육 교수로도 일을 했다.

1.3.2 유럽으로의 귀환

당시 칠레의 경제적 사정으로 인해 그는 유럽으로 돌아왔다. 그는 헝가리 복스카이의 지휘봉을 잡았는데 당시 창단 6년 밖에 안된 신생팀이었다. 4위로 시즌을 마쳤지만 오르스는 감독직을 그만두었고,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세리에 B의 피사 칼초 클럽을 맡았고 여기에서도 4위로 시즌을 마쳤다. 이듬해에 제노아의 감독을 맡았지만 여기에서 팀은 8위를 마크하는데 그쳤고, 독일뉘른베르크에서 새로운 시작을 했다. 당시 뉘른베르크는 독일 전국 대회 우승팀이었고 이 곳에서 오르스는 우승에 대한 기대를 다시 드높였다.

이곳에서 그는 바바리아 주 리그 우승컵을 드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전국 리그에서 샬케에게 일격을 당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이듬해에도 바바리아 주에서 우승은 하였지만 전국 리그 우승컵을 드는 데에는 실패하였고 뉘른베르크를 떠났다.

프랑스의 FC 메스에서도 그다지 성공적인 감독 생활은 보내지 못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그는 이탈리아로 건너갔고, 당시 세리에 B의 카타니아 칼초에서 감독 생활을 했지만 카타니아 칼초의 강등을 막지 못했다.

1.3.3 남미로

오르스는 유럽에서 원하는 만큼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다시 남미로 복귀하였다. 1944년, 아르헨티나산 로렌소와 계약을 맺었지만 4위로 시즌을 마쳤고, 계약을 해지했다. 이듬해에는 로사리오 센트랄과 계약을 맺었지만 로사리오는 11위에 머물렀다.[4]

그런 오르스에게 이번에는 멕시코CD 과달라하라에서 러브콜이 왔고, 멕시코로 떠났다. 1949년까지의 멕시코 생활에서 그는 나름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갔는데 1948년 컵 파이널에서 준우승을 다시 거두었다. 한 편으로는 멕시코 대표팀을 이끌면서 미국과 쿠바를 상대로 승리하며 북아메리카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또한 팀을 우승은 못해도 안정적인 강팀으로 만들었지만 팀과 견해 차이를 보이며 다시 갈라섰다.

그 이후에는 멕시코와 아르헨티나 등지를 떠돌았고, 콜롬비아 대표팀을 맡아 창설 이래 코파 아메리카의 첫 승리를 이끌기도 했다. 1957년부터 1959년에는 페루 대표팀을 맡았는데 여기에서 그는 비록 브라질의 등쌀에 밀려 월드컵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홈에서 잉글랜드를 4대 1로 꺾는 성과를 연출하였다. 이것이 오르스의 국가대표 감독 생활 중 거둔 가장 큰 성과였다.

1960년부터는 포르투갈에서 스포르팅 리스본FC 포르투의 감독을 맡았다. FC 포르투에서는 대표팀 주장 비르질리우 마르케스와 에르나니 페헤이라 다 실바 등과 함께 우승권 근처에서 더 좋은 성과를 만들어가려했지만 오르스는 그 결과를 보지 못했다.

1962년 1월 11일, 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간 그는 심부전으로 세상을 떠났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선수 시절에는 우아한 플레이 스타일을 자랑하는 선수였다. 인사이드 포워드이면서 직접 득점에도 많이 관여하였다.

3 수상

3.1 클럽

  • 헝가리안 리그 우승 8회: 1916–17, 1917–18, 1918–19, 1919–20, 1920–21, 1921–22, 1922–23, 1924–25(MKT 부다페스트)
  • 헝가리안 리그 준우승 1회: 1925–26(MKT 부다페스트)
  • 프랑스 아마추어 리그 우승 1회: 1928-29(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 헝가리안 컵 우승 2회: 1922–23, 1924–25(MKT 부다페스트)

3.2 감독

3.3 개인

  • 헝가리안 리그 득점왕 3회: 1919-20, 1920-21, 1921-22(MKT 부다페스트)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2. 그 우승 행진은 9에서 마감하였다
  3. 미국과 유고슬라비아가 준결승에서 사이좋게 6대 1로 대패하여 골득실을 심하게 까먹은 것도 있다
  4. 반면 전 소속팀 산 로렌소의 순위는 4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