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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이랜드 FC No.63[1] | |
김동진 (金東進 / Kim Dong-jin) | |
별명 | |
생년월일 | 1982년 1월 29일 |
국적 | 대한민국 |
출신지 | 경기도 동두천시 |
포지션 | 풀백 |
신체조건 | 183cm, 74kg |
종교 | 개신교[2] |
프로입단 | 2000년 안양 LG 치타스 |
소속팀 | 안양 LG 치타스 (2000~2003) FC 서울 (2004~2006)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 (2006~2009) 울산 현대 호랑이 (2010) FC 서울 (2011) 항저우 그린타운 (2012~2013) 무앙통 유나이티드 (2014~2015 ) 서울 이랜드 FC (2016~ ) |
국가대표 경력 | 62경기 / 2골 |
2004 K리그 베스트 일레븐 | |||||||||||
FW 나드손 | FW 모따 | ||||||||||
MF 김동진 | MF 따바레즈 | MF 김두현 | MF 김대의 | ||||||||
DF 산토스 | DF 유경렬 | DF 무사 | DF 곽희주 | ||||||||
GK 이운재 |
1 소개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이영표, 장학영, 김치우 등과 함께 한국의 왼쪽 풀백 자리를 풍족하게 만든 주인공이었다.
별명은 강철, 황금 왼발, 샴푸도둑.
2 클럽
2000년 안양 LG에서 데뷔했고 FC 서울로 바뀐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활약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이후에는 풀백으로 고정되었지만 K리그 시절에는 중앙수비수, 윙백, 수비형 미드필더까지 가히 한국의 존 오셔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많은 포지션을 소화했다. 초기에는 적은 경기수에 비해 잦은 포지션 변경으로 적응에 애를 먹었지만 좋은 피지컬과 뛰어난 공간활용으로 이를 극복하고 K리그에서 전도유망한 수비수로 성장했다.[3]
2006 독일 월드컵을 계기로 딕 아드보카트 감독의 눈에 들어 울산 현대의 이호와 함께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의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적했다. 초반 적응기를 거쳐, 2007시즌부터 FC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주전 선수로 뛰며 2007년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 우승에 일조했고, 그 해 리그 최우수 왼쪽 풀백에 선정되며 다시 한번 뛰어난 재능을 각인시켰다.
2007-08 시즌 UEFA 컵에서도 예선전부터 32강 비야레알 CF전과 16강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전에서 각종 골과 어시스트를 기록하는 활약을 보였으나, 이후 부상으로 한동안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레인저스 FC와의 UEFA 컵 결승전에서 아드보카트 감독의 배려로 종료 30초전에 교체 투입되어 제니트의 첫 UEFA 컵 우승을 경험했다. 이호와 함께 차범근 이후 20여년만에 UEFA 컵 우승을 경험한 대한민국 선수. 동료 이호가 벤치만 데우다 한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팀에 남아 유럽 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2007-08 시즌 이후 주전경쟁에서 밀리며 입지가 위태로워졌다. 아직 군문제도 해결하지 못했기에 이래저래 고민이 많다. 광주 상무 입단 가능 연령이 지나서 자칫하면 안산 경찰청 축구단(2군 리그)에서 뛰게 될 판이다.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는 수 밖에 방법이 없는데 그럴려면 일단 3장밖에 없는 와일드카드에 뽑혀야 한다.
2010년 1월말. 뇌혈류 장애로 팀 메디컬 테스트에서 탈락하면서 제니트에서 방출통보를 받았고 2010년 2월 K리그 울산 현대 호랑이로의 이적이 확정되었다. 하지만 서울시절 팀 후배로 자신에게 밀려 자리를 잡지 못했던 최재수에게 역으로 밀리며 주전 자리를 잡지 못했고 2011년 다시 친정팀인 FC 서울로 복귀하였다. 그러나 서울에서도 아디와 현영민이라는 걸출한 경쟁자들이 버티고 있었고[4] 결국 로테이션으로 돌려지다 12시즌 중국 항저우 그린타운으로 이적했다.
2014년 2월 6일 무앙통 유나이티드로 이적하였다. 계약기간은 2016년까지 이다.
2016시즌 서울 이랜드 FC와 계약, 계약기간은 1년이다.
3 국가대표
U-20 대표팀에서는 윙어를 맡았으며 2001년 있었던 아킬레스건이 파열되는 부상 재활 이후, 수비형 미드필더, 윙백으로의 포지션 변경이 되어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대표팀에서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하였으며, 2003년 12월 4일 홍콩과의 경기로 A매치 데뷔전을 치뤘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예선 1차전 그리스전에서 골을 기록하고 3차전 말리전에서 조재진의 두골을 어시스트하며 대표팀의 8강 진출을 이끌었다.
이후 국가대표팀에도 선발되었으며, 2004년 12월19일 부산에서 있었던 독일과의 친선전에서도 골을 기록하며 독일 월드컵 예선에서도 활약하게된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선 경고 누적으로 출장하지 못한 토고전을 제외한 2경기에 모두 풀타임 출전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대표팀에서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해 눈에 안 보인다는 의미인 닌동진이라는 굴욕적인 별명으로 불렸다. 게다가 당시 대표팀 감독들이 김동진을 왼쪽 풀백으로 활용하기 위해 같은 포지션에서 한국 축구 역사상 역대급 활약을 해주고 있던 이영표를 본 포지션이 아닌 오른쪽 풀백으로 돌리는 선수 기용을 해야 했다. 이 때 당시 다수의 축빠들에게 까임의 대상이 되었고 2006년 독일 월드컵이 끝난 이후에도 한동안 이러한 비난은 계속되었다. 이 기용에 대해서는 왼쪽밖에 뛰지 못하는 김동진과 오른쪽도 가능한 이영표를 동시에 사용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는 의견, 그래도 이영표를 활용하고 오른쪽은 송종국이나 조원희를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 김동진이 부상으로 떨어져서 그렇지 사실 당시 김동진의 폼이 이영표를 능가했기 때문에 당연히 왼쪽을 차지한 거고 이영표는 다른 오른쪽 선수들과 경쟁해서 오른쪽을 따낸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5]
게다가 2007년까지만 해도 러시아 리그에 대한 언론의 관심도가 사실상 전무했던 상황이었던지라 당시 유럽에 파견되었던 소수의 객원 기자들을 제외하고는 리그에서 주전으로 활약하고 있던 김동진을 철저히 외면했으며, 이후 제니트가 러시아 리그 우승 가시권에 들기 시작할 때쯤에야 조금씩 관심을 갖는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제니트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대표팀에서의 경기력도 향상되었으며, 자연스레 팬들의 평가도 달라졌다. 이후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와일드 카드로 출전하여 3차전 온두라스전에서 결승골을 기록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대표팀에 선발되었으나 벤치 신세였다. 오른쪽 풀백인 차두리와 오범석이 수비에서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며 김동진-이영표 라인을 재가동하자는 의견이 축구팬들 사이에서 제기되었으나 나이지리아전 교체로 잠깐 뛴 것을 제외하면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이영표가 물러난 시점에서 차세대 왼쪽 풀백으로 꼽히던 그의 부진은 팬들에게 많은 아쉬움을 주고있다. 김동진뿐만 아니라 K리그 최고의 왼쪽 수비수로 꼽히던 장학영은 국대와는 전혀 인연이 없다가 2010년부터 공익근무에 들어갔고 2007년 아시안컵에서 오범석과 함께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기대를 모았던 김치우는 수비력 부족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실상 왼쪽 윙으로 전향했다. 장학영은 핌 베어백 감독이 국대로 호출했으나, 장학영은 부상이라 국가대표에 나갈수 없다며 차출을 고사했다. 그러고서 불과 4일뒤에 있었던 K리그 챔피언 결정전에 출전. 핌 베어벡을 엿먹였고, 이후 장학영은 국가대표와 인연이 멀어지게 된다. 소속팀에 충성심이 굉장히 강해 국대와 인연을 끊었었다.
4 플레이 스타일
체격이 좋고 중앙수비수 경험도 있기에 대인방어 능력이 우수하다. 전성기 시절엔 평범한 기동력을 뛰어난 공간활용능력으로 보완했고 이를 통한 공격력은 대표팀 부동의 주전인 이영표보다 한 수 위로 평가받기도 했다. 그러나 뇌혈류 장애로 인해 파주 NFC에서 졸도한 사건 이후로 폼이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고 현재는 군면제급의 상태라고 한다. 그러니까 폭탄을 달고 축구를 하는 셈. 국대에서도 밀린건 이 영향이 매우 크다.
5 트리비아
환영하는김재성
- 안양 서포터즈는 김동진을 엄청나게 싫어하는데 이유는 안양 LG 치타스가 FC서울로 연고 이전 하던 때 선수단 중 이 선수가 연고 이전에 적극 찬성 이라며 환영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아마도 집이 그나마 가까워서 떼를 부린거겠지(...)[7] 안양공고 출신으로 안양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이영표와 포지션 도 비슷하고 이영표의 이적 이후 김동진이 잘 해주기도 해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선술여서 안양 축구 팬 들의 마음의 상처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 ↑ 오는 4월 태어날 2세를 위해서 ‘2016년에는 세 식구가 파이팅한다’는 뜻을 담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 ↑ 올림픽 축구 대표팀이 부르는 찬양앨범에도 참여하였다.
- ↑ 단순한 멀티플레이어 와는 달리 수비에서의 중앙과 측면은 아주 다르다. 때문에 풀백과 센터백을 동시에 소화하기 위해선 뛰어난 공간활용능력과 축구IQ가 요구된다.
- ↑ 여담으로 현영민과는 제니트 시절 한솥밥을 먹었던 적이 있다.
- ↑ 이런 의견 없다. 어떤놈이 이런 의견을 냈는지 팩트 제시부터 하고 떠들길 바란다.
- ↑ 채팅창에서 질문을 하자 안정환이 대답했는데, 꽃을 든 남자 샴푸였다고 한다.
- ↑ 정조국은 김동진과 달리 안양시와 접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