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국


패트리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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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무등산 패트리어트!

광주 FC No.9
정조국 (鄭助國 / Jung Jo-Gook)
출생1984년 4월 23일
국적대한민국
출신지전라북도 부안군[1]
포지션공격수
신체조건186cm, 78kg
소속팀안양 LG 치타스/FC 서울 (2003~2010)
AJ 오세르 (2011)
AS 낭시(임대) (2011~2012)
FC 서울 (2012~2015)
안산 경찰청(입대) (2013~2014)
광주 FC (2016~)
국가대표13경기, 4골
가족배우자 김성은
별명패트리어트, 분유캄프
2003년 K리그 신인상
이천수(울산 현대 호랑이)정조국(안양 LG 치타스)문민귀(포항 스틸러스)
2004년 FA컵 득점상
수상자 없음왕정현(FC 서울)
정조국(FC 서울)
밀톤(전북 현대 모터스)

1 프로 입단 전

U-17 대표팀, U-20 대표팀, U-23 대표팀 등 각급 대표팀을 모두 거치며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대신고 재학 중이던 2002년에는 거스 히딩크 감독의 눈에 들어 연습생 신분으로 최성국, 여효진과 함께 월드컵 무대를 경험했다. 그리고 이 해에 카타르에서 열린 AFC U-19 축구 선수권 대회 결승전인 한일전에서 연장전 골든골을 넣어 1:0으로 한국이 우승하게 한 주역이 되었다.

2 FC 서울 시절

2003년 안양 LG 치타스(후일 FC 서울)에 입단했고, 그 해 12골 2도움을 기록하며 K리그 신인상을 받았다. 이후 FC 서울에서 계속 활약하였으며 2004년 왕정현과 함께 FA컵 공동 득점왕에 올랐다.

그러나 이후 행보는 순탄치 않았다. 2004년 리그 8골을 기록하며 하향세를 보이더니, 2005년에는 3골까지 떨어졌다. 2006년에는 박주영-김은중-정조국-두두로 이어지는 막강한 공격진의 한축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정작 4골에 그쳤다. 새로이 귀네슈 감독이 부임해온 2007년에는 팀 공격수들이 줄부상으로 신음하는 와중에 12경기 2골에 그치며 팀의 무승부 양산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다 2008년 박주영이 떠나고 새로 영입된 데얀 다미아노비치와 호흡을 맞추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살아났다. 2008시즌 시즌 맹활약으로 팀의 14경기 연속 무패를 이끌며 부활했지만, 10월 인천전에서 공중볼 경합 중 안재준의 팔꿈치에 얼굴을 얻어맞아 광대뼈 함몰, 부상으로 이탈했다. 아랍에미리트연합(UAE)과 '2010 남아공월드컵 최종예선' B조 2차전을 앞두고 국가대표 예비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던 걸 고려하면 더욱 아쉬운 부분.

이후 플레이오프 때 복귀해 울산과 준결승, 수원과의 챔피언결정전 2차전에서 골을 기록했지만 팀이 종합스코어 2-3으로 수원에 패하며 빛이 바랬다.

2009시즌에도 그런대로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5월2일 성남과 경기에서 전반 11분 성남 수비수와 안면을 부딪쳐 왼쪽 광대뼈와 턱뼈가 골절되는 부상을 입어 21경기 7골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이 해가 꼭 정조국에게 암울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몸은 고달팠지만 인생의 반쪽을 찾는데 성공한 것이다. 2009년 12월 11일, 탤런트 김성은과 백년가약을 맺으며 운동선수-연예인 커플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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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시즌 전반기에는 3골에 그치며 크게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8월 20일 득남하여 아버지가 되면서 반전이 시작된다. '태어날 아이에게 자랑스런 아빠가 되고 싶다'던 그는 이후 미친듯한 상승세를 보이며 후반기에 8골을 몰아넣었다. 아버지는 강하다라는 말의 산증인.

2003년 데뷔 이후 생애 두번째 두자리수 득점으로 순도도 높아 제주와 치열한 선두다툼을 벌이고 있는 팀에 큰 보탬이 되었다. 2010 시즌 기록은 26경기 12득점 3도움. 컵대회를 포함하면 29경기 13득점 4도움. 챔피언결정전에서도 천금같은 골을 기록하며 팀의 우승에 단단히 한몫했다.

팬들은 그의 이런 모습에 '아이 분유값을 벌려는 거 같다'며 네덜란드의 전설적인 공격수 데니스 베르캄프의 이름을 따와 분유캄프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선수 본인은 평소 존경하는 베르캄프에 빗대줘서 팬들에게 고맙다는 뜻을 밝혔다. 광주 이적후 훨훨 날아다니는데 지금은 그러면? 급식캄프

3 해외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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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10시즌의 활약으로 프랑스 리그1의 AJ 옥세르의 눈에 띄어 영입되었다. 이번해 챔피언스리그에도 나섰던 팀이나 공격수들의 부진으로 부진한 시즌을 보내자 영입한 것으로 보인다. 부상 우려로 아시안컵 대표팀 명단에서 빠져서 1월 영입시장이 열림과 동시에 뛰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더불어 전 팀동료인 박주영과의 대결도 기대되는 상태. 군문제는 내년까지 원서를 넣어야 하는 상무를 포기하고 만 30세까지 허용되는 경찰청에 지원할 생각이라고 한다.

그리고 2월 20일, 선발출장하여 0-1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동점골을 어시스트하며 프랑스 리그 첫 공격 포인트를 신고했다.

10-11 시즌 옥세르에서 2골 1도움으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반시즌 동안 선발 1경기를 제외하면 후반 교체로 뛰었으며 기록한 공격포인트가 다 승점을 벌어주는 결정적인 것으로 팀의 강등을 막았다는 점에선 합격점. 다음 시즌을 기대해 볼 만하다.

그런데 11-12 시즌을 앞두고 1년간 AS 낭시로 임대되었다. 정조국을 영입했던 페르난데스 감독이 낭시로 옮기면서 정조국을 같이 임대해 온 것이라 어느 정도 출전을 기대할 수 있을 듯.

10월 16일 리옹전에서 시즌 첫 골을 기록했다.

11월 7일 브레스트전에서 시즌 2호골을 기록했다.

11-12시즌 종료후, 임대 기간이 끝나 낭시에서 AJ 옥세르로 복귀해야 했지만 옥세르 측에서 정조국을 방출하기로 결정, 무소속 신분이 된다.

4 FC 서울로의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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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6일 친정팀 FC서울로의 복귀가 발표됐다. 등번호는 다시 9번.

2012년 11월 4일 슈퍼매치에서 K리그 복귀 골을 넣었다. 이전까지 팀이 수원을 상대로 7연패를 기록하고 있었고, 마침 이날 경기도 1:0으로 지고 있던 상황에서 터뜨린 귀중한 동점골이라 정조국 개인은 물론 팀에게도 의미가 싶은 골이 되었다. 이어서 40라운드 경남전과 41라운드 제주 전에서도 귀중한 골을 터뜨리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특히 41라운드 제주전 골은 3경기 남은 상황에서 팀의 우승을 확정지은 결승골이라 그 의미가 더욱크다. 44라운드 부산과의 경기에선 0-1로 뒤지고 있던 상황에서 동점골을 터뜨려 43라운드에서 포항에게 0-5 참패를 당했던 팀에 유종의 미를 선사했다. 최종 성적은 17경기 4골. 시즌 중반에나 합류했고 폼이 저하되어 골을 기록하는데도 시간이 걸렸지만 라이벌전에서의 연패를 차단하고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 순도높은 골들이었기에 성공적인 시즌이었다.

팀이 우승해 기쁘고 홀가분하다는 심경을 밝힌 후 경찰청에 입대. 13시즌은 K리그 챌린지에서 보내게 되었다. 경찰청에선 주전으로 활약하며 2시즌간 팀의 공격진을 이끌었다. 그리고 14년 9월 26일 전역해 서울로 돌아왔다.

15시즌을 앞두고 박주영과 함께 서울의 공격진을 이끌어줄 자원으로 기대받았으나 시즌 초반 여러차례 선발기회에서 부진한 모습만 보이며 신뢰를 잃어버렸다. 후반기를 앞두고 영입된 아드리아노가 주포로 자리잡고 윤주태가 조커 역할을 해주면서 주전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여담으로 K리그 챌린지의 FC 안양 팬들의 주적이기도 하다. 물론 FC 서울 소속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2004년 소속팀이 서울로 연고지 이전을 할 때 적극적으로 찬성해서 어그로를 끌었다. 이유는 자기 집이 서울이라서. 게다가 연고이전 직후 자신에게 항의하는 안양 팬들에게 물병을(그것도 물이 가득 차있던) 던져버리기도 했다.

5 광주 FC 시절

5.1 2016 시즌

패트리어트 광주에서 부활하다

부활을 넘어서 커리어 하이를 찍어가는[2] 광주FC의 에이스이자 올시즌 k리그 최고의 선수중 한명

K리그의 아리츠 아두리스

2016년 1월 11일 김민혁과 함께 광주 FC로 이적했다.

연습경기에서 8경기 6골 1도움을 기록하면서 광주의 스타일에 순조롭게 맞추어나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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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12일 K리그 클래식 1라운드에서 2골을 넣은 활악을 바탕으로 K리그 클래식 1라운드 주간MVP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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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윗사진과 같은날에 찍은것이 아니다
K리그 클래식 2라운드 제주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송승민의 헤딩패스를받아 깔끔하게 골을 넣으면서 광주FC의 홈 개막전 1대0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2경기 3골로 현재까지는 득점왕 1위에 랭크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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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K리그 클래식 3라운드에서도 득점을 기록했다. 벌써 시즌 4호골그러나 팀은 역전패로 졌다

정조국은 2010년이후 6년만에 3게임 연속 득점에 성공했다.

K리그 클래식 5라운드에서 친정팀인 FC 서울과의 경기에서 몇차례 위협적인 슈팅을 보여줬으나 득점에는 실패했다.


K리그 클래식 7라운드 수원 삼성과의 경기에서 후반88분에 극장골을넣으면서 팀을 패배위기에서 구해냈다.이 골로 시즌 5호골로 아드리아노와같이 득점 공동선두를 달리고 있다.


K리그 클래식 9라운드 상주 상무와의 경기에서 상대수비의 손에 맞음으로써 얻은 PK를 성공시킴으로써 시즌 6호골을 기록하면서 팀의 1대0승리에 기여했다


K리그 클래식 11라운드 수원 FC와의 경기에서 이으뜸선수가 얻어낸 PK를 멋지게 성공시키면서 시즌 7호골을 기록하면서 팀의 3연속 1대0승리에 기여했다.


K리그 클래식 13라운드 제주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그림같은 프리킥을 성공시키면서 시즌 8호골로 2대2동점을 만들었다. 골 동영상카메라가 많이 아쉽다 그러나 팀은 송진형의 결승골로 인해 3대2로 패배했다.


K리그 클래식 14라운드 FC 서울전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 친정팀과의 리턴매치에서 2대1에서 2대2동점을 만드는 득점을 기록했다. 벌써 시즌 9호골을 기록했다. 하지만 친정팀과의 경기여서 그런지 과한 세레모니는 하지 않았다. 비록 팀은 3대2로 패배했지만 90분동안 정말 열심히 뛰어주었고 경기 종료후에도 서울의 팬들에게 큰 박수를 받았다. 그리고 경기 종료 후 인터뷰를 통해 서울 팬들에게 감사를 전했다.


#경기 종료후 박주영과 유니폼을 교환하는 장면이 나왔다.

6월 26일 K리그 클래식 16라운드 전북 현대전에서 김민혁이 얻어낸 PK를 성공시키면서 팀의 1대1 무승부에 기여했다. 이것으로 2010년이후 6년만에 두자릿수 득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6월 19일 성남전에 이어서 전북전에서도 카드를 수집하면서 6월 29일 수원전에는 결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의 경기는...


7월 9일 인천전 멀티골을 넣으면서 시즌 11,12호 득점을 성공시켰다!! 이 득점으로 13골을 기록한 티아고를 한 골 차이로 따라붙었으며 아드리아노를 제치고 득점 2위 자리에 올라섰다. 아드리아노가 징계에 의해서 당분간 못나오게 되면서 이제 득점왕 경쟁은 티아고vs정조국의 2파전으로 전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게다가 7월 16일 울산전에서는 PK를 성공하면서 티아고와 같은 13골로 득점 선두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게다가 티아고와 아드리아노가 당분간 출전이 불가능한 상황이라서 정조국이 득점왕 경쟁에서 한 발 앞서갈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

그리고 7월 23일 티아고의 중동 이적이 발표되면서 사실상 단독 득점왕이 되었고 그날 상주 상무전에서 시즌 14호골을 성공하면서 프로 데뷔 이후 개인 최다득점을 기록하게 되었고 단독 득점 선두의 자리에 오르면서 득점왕 경쟁에서 한발 앞서가게 되었다.

8월 10일 인천전에도 득점을 하며 15호골을 기록했다.

7월 26일 정조국의 활약상과 감동적인 인터뷰가 9시뉴스에 나오면서 실시간검색순위 1위를 찍기도 했다.우리 팀 선수가 실검에 뜨다니


8월 27일 울산과의 경기에서 후반 추가시간에 극적인 동점골에 성공하면서 통산 100호골을 달성하게 되었다.[3]

이후 발목 부상으로 인해 33라운드까지 출전하지 못했으나 득점왕 경쟁자들도 많은 득점을 기록하지 못하면서 여전히 득점왕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정조국이 빠진 이후 팀은 1승 1무 3패로 하위스플릿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팀이 하위스플릿으로 가게 되면서 5경기를 상대적으로 약한 팀과 경기하게 되니 득점왕경쟁에서 확실히 유리해진 상황

그리고 약 2달간의 공백 이후 10월 16일 수원FC전에 복귀했는데 복귀하자마자 멀티골을 넣으면서 시즌 18호골로 득점왕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슈감독님 소리아보다 잘하는 공격수 여기 있습니다

6 통산 K리그 기록

2016년 10월 17일 기준

시즌클럽출전도움
2003안양 LG32122
2004FC 서울3082
2005FC 서울2631
2006FC 서울2763
2007FC 서울1951
2008FC 서울2195
2009FC 서울2571
2010FC 서울29134
2012FC 서울1740
2013안산 경찰청2492
2014안산 경찰청1271
2014FC 서울200
2015FC 서울1111
2016광주 FC28181
종합기록30310224

7 플레이 스타일

청대 시절에는 타이밍을 완벽하게 갖고 노는 공격수로 기대를 받았다. 당시 대표급 스트라이커 중에선 꽤 희귀했던 타입. 빠른 발이나 눈을 즐겁게 하는 개인기의 소유자는 아니고 강력한 피지컬로 볼을 따내며 기회를 제공하는 타겟맨도 아니다. 대신 뛰어난 공간 침투 능력과 침착성을 살린 결정력으로 골을 노린다. 그러나 성인무대에 올라오고 나서는 성장이 정체된 모습을 보여 많은이를 안타깝게 했다. 최전방에서 살아남으려면 결국 몸싸움을 이겨내고 압박에 맞서는 능력이 필수인데 이 부분에서 크게 많이 부족한 모습을 보였다.

한때 움직임이 없고 수비가담에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10시즌 이후로는 수비에도 적극적으로 임하는 편이며 데얀와 호흡이 일품. 원톱보다는 투톱에서 제 위력을 발휘하는 공격수. [4]

흔히 치열한 주전 경쟁을 겪으며 발전한다고 하지만, 선수에 따라서 되려 독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정조국은 아무래도 후자가 아닌가 싶다.[5] 아니나 다를까 2016시즌 광주FC로 이적후 주전 스트라이커로 확실히 보장받은이후 다시 좋은 모습 아니 서울시절보다 더 좋은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8 국가대표

잦은 부상과 기복 때문에 국대와는 인연이 멀다. 투톱에서 최고의 폼을 보여주는 플레이 스타일도 원톱을 주로 쓰는 대표팀 스타일[6]과 맞지 않아 더더욱 인연이 멀었을 것.

2006년 1월 18일 아랍에미리트와 친선경기에서 A매치에 데뷔하였다. 이후 핌 베어백 감독이 부임하면서 기회를 얻었다. 2006년 9월 6일, 대만과의 2007년 AFC 아시안컵 예선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여 팀의 8-0 승리를 이끌기도 했다.[7] 하지만 상대가 한국의 고교팀 수준이었던지라 크게 부각되진 않았다.

대표팀 신임 감독이 새로이 중용하는 선수는 으레 그렇듯, 찌라시언론에서는 한때 정조국에게 베어백 호의 황태자 칭호를 붙이며 호들갑을 떨었으나, 베어백 감독 사임과 정조국의 부진으로 흐지부지 끝났다.

이 무렵 이미 전성기를 넘긴 안정환(1976)과, 이동국(1979) 조재진(1981) 또한 대표팀 붙박이로서 2% 부족했던 점을 고려한다면 더욱 아쉬운 부분이다.

최성국(1983) 김동현(1984) 박주영(1985) 이근호(1985) 서동현(1985) 양동현(1986) 신영록(1987) 등 차세대 공격수들이 경합하는 중에 경쟁자보다 한발짝 앞선 고지를 선점했으나 거기서 그치고 말았으니. 거기에 최성국김동현조작질로 한국 축구계에 핵폭탄을 떨구고 튀었다.

2008년 10월, K리그에서 연속 경기 공격포인트를 올리며 9개월만에 국가대표팀 예비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으나 부상으로 하차했다.

2009년 1월, 이란전을 앞두고 허정무 감독이 다시 한번 대표팀에 부른다. 그러다 3월 북한전에선 다시 탈락했다. 5월 다시 부상으로 하차했다.

2010년 12월, 조광래 감독이 2011년 AFC 아시안컵 예비 명단에 넣었다. 그러나 가벼운 부상과 피로 누적을 염려해 최종 명단에서 빠졌고 이 이후로는 국가대표와 인연이 없다. 단 광주 이적 후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상승세를 보이면서 다시 한 번 발탁되었으면 하는 여론도 조금씩 생겨가는 중.일단 소리아보단 잘한다

8.1 통산 국가대표 기록

2016년 6월 16일 기준

연령출전
U - 1733
U - 202015
U - 23103
A 대표134
종합기록4625
  1. 단, 유년시절 이후로는 서울특별시 은평구에서 살았다. 서울갈현초-대신중-대신고 출신.
  2. 시즌의 절반을 넘은 시점에서 이미 본인의 최다골 기록을 넘어섰다
  3. K리그 통산 9번째
  4. 이런 점에서 김신욱과 유사하다
  5. 김은중 또한 마찬가지 경우. 약팀이던 대전 시절 활약상에 비하면, FC 서울 시절 그의 활약상은 팀의 전력을 고려할 때 오히려 불만족스러웠다. 커리어 하이를 찍긴 했지만 그해는 박주영이 한창 슬럼프에 빠졌던 해였고, 제주로 옮기면서 뒤늦게 피어나는 걸 보면...
  6. 월드컵 아시아 예선 정도의 시합이 아니라면, 세계적 수준이 아닌 대한민국 대표팀은 미드필드를 탄탄히 하기 위해 중앙 미드필드에 3명을 두고 원톱을 쓰는 4-2-3-1이나, 측면의 공격력을 포기하고 3명의 중앙 미드필더와 투톱을 쓰는 3-5-2로 나서지 않으면 중원에서부터 압박에 밀려버린다. 예외가 있다면 히딩크 감독의 3-4-3이 있었지만, 이건 애초에 중원의 두 수비형 미드필더가 유상철김남일 이었으며, 3백에서 홍명보의 볼 배급이 있었고, 양쪽 윙에 설기현박지성이 있었기 때문에 굳이 공격형 미드필더 없이도 역습으로 공격전개가 가능했기 때문. 그리고 히딩크 이후 3백을 주 포메이션으로 쓴 국가대표 감독은 없었으며, 가끔 3백을 쓸 때에도 3-5-2보다는 3-4-3을 사용했기 때문에 투톱에 최적화된 정조국은 더더욱 기회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7. 이 경기는 수원에서 열린 2차전이다. 대만에서 열린 1차전에도 출전했고 그때 A매치 데뷔골을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