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덕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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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역대 국왕
27대 선덕여왕 김덕만28대 진덕여왕 김승만29대 태종 무열왕 김춘추
시호진덕왕(眞德王)
연호태화(太和)[1]
김(金)
승만(勝曼)
생몰년도음력? ~ 654년 3월
재위기간음력647년 ~ 654년 3월(8년)

1 개요

신라의 제 28대 . 진평의 모제 국반(國飯) 갈문왕의 딸. 연호는 태화(太和). 진평왕의 동생인 갈문왕 김국반과 월평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으므로 선덕여왕과는 사촌 간이다.

선덕여왕과 달리 국서(남편)에 대한 기록이 없다. 진덕여왕대에는 더 이상 성골 남자가 근친을 포함해도 없기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하지 못했다는 연구도 있다. 김서현만명부인, 김춘추문희의 일화에서 나오듯 같은 진골끼리도 가문의 격이 차이가 나면 역사기록에 남을 에피소드를 만들 정도가 아닌 이상 혼인하기가 어려웠는데, 성골과 하위 골품간의 혼인은 더 어려우면 어려웠지 덜했을리는 없기 때문이다.

2 외모

기록에 의하면 자태가 풍만하고[2][3] 아름다웠으며, 키는 7척에 이르러 팔이 무척 길어 무릎 밑까지 닿았다고 한다. 만약 기록의 내용이 진실이라면… 진덕여왕의 실제 모습은 상상에 맡길 뿐이다. 물론 이런 기록은 진덕여왕을 보살과 같이 묘사해서 그녀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였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또한 "팔이 길다"는 것은 덕 있는 이의 상징적인 클리셰이기도 하다. 삼국지의 유비도 키가 7척 5촌에[4] 팔이 무릎까지 내려간다는 묘사가 있다. 다만 체격이 크다는 묘사 자체는 사실일 수도 있는 게, 지증왕[5]이나 진평왕 등 상대 경주김씨 신라왕가는 체격이 크다는 묘사가 있는 인물이 실제로 많은 편이다.

3 재위

647년 1월 비담의 난의 와중에 선덕여왕이 붕어하고, 그 뒤를 이어서 국왕이 되긴 했지만 애당초 선덕여왕이 그녀를 후계자로 지명한것 같지는 않아보여서 일각에선 선덕여왕이 난리 통에 죽고 김춘추김유신이 그녀를 왕으로 추대한게 아닌가라고 보기도 한다.[6]

사실상 진덕여왕의 치세에서 실권은 김춘추김유신에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알천이 상대등이 되고 대아찬 수승을 우두주[7]의 영주로 임명하는등 비담의 난으로 야기된 혼란을 수습하고 치세를 시작했지만, 역시나 백제고구려가 마구 신라를 쪼기(…) 시작한다. 워낙 털리다 보니 당시 일본에서도 신라를 우습게 볼 정도.

즉위 이듬해인 648년, 김춘추당나라로 건너가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선덕여왕 때는 대단히 까칠하게 굴던 당태종은 이번에는 신라와 적극적으로 동맹을 체결하여 나당동맹의 기초가 이뤄졌다.[8]

신라 역시 당나라와의 외교강화로 고구려, 백제의 연합에 대응하고자 했다. 진덕여왕은 직접 비단에 수를 놓고 를 지어 당태종에게 바쳤는데 이것이 바로 치당태평송이다. 그 아첨이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울 지경이라서 일각에선 진덕여왕이 무슨 치어걸이라도 한 거냐고 비판하기도 한다.[9]

일본에도 적극적으로 사신을 파견해 외교를 통한 상황 타개를 노리기도 했다. 652년 6월, 653년 4월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일본서기에 남아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조정에서는 "어차피 쟤네는 곧 망할 나란데 우리가 도와줘서 뭐합니까? 어차피 우리가 전력을 안써도 먹을수 있습니다. 상황보다 신라가 망할때 되면 우리가 낼름 먹어버리죠"[10]라는 반응였기에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했다.

비록 진덕여왕의 시절에 여왕이 한 일이라곤 저 정도뿐이긴 하지만, 이 시기에 신라당나라와의 동맹과 군사력 강화를 통해 삼국통일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 매우 중대한 시기였다.

4 평가

그리 한 일이 많지 않기도 하지만, 어쩐지 신라의 세 여왕 중에서 존재감이 제일 약하다. 투명라인? 바로 전대 왕이 똑같이 여왕선덕여왕이고, 게다가 선덕여왕은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라는 타이틀과 온갖 설화를 더덕더덕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미지를 완전히 잡아먹히고 있기 때문인 듯. 뭐 재정담당 품주를 집사부로 바꿨다 정도. 그리고 뒷날의 진성여왕과 비교해도 진성여왕은 뭔가 막장(?)스러운 이미지로라도 남아 개성이 강한 편인데, 진덕여왕은 그런거 없다. 또한 재위기간도 세 여왕 중에서 제일 짧기도 하고.

5 삼국사기 기록

一年春一月 진덕왕이 즉위하다
一年春一月十七日 비담을 죽이다
一年春二月 이찬 알천을 상대등으로 삼다
一年 당태종이 사신을 보내다
一年秋七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一年 연호를 태화로 바꾸다
一年秋八月 혜성이 나타나다
一年冬十月 백제가 봉산성을 공격해 오자 성주 직선이 이를 물리치다
一年冬十一月 신궁에 제사지내다
二年春一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二年春三月 백제가 서쪽의 변경을 침공하다
二年 한질허를 당나라에 보내다
二年 이찬 김춘추당나라에 보내다
三年春一月 중국의 의관을 착용하다
三年秋八月 백제가 7개 성을 함락시키다
四年夏四月 진골에게 아홀을 갖게 하다
四年夏六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三年 왕이 태평송을 짓다
四年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다
五年春一月一日 백관으로부터 새해 인사를 받다
五年春二月 품주를 집사부로 고치다
五年 김인문을 당나라에 보내다
六年春一月 파진찬 천효를 좌리방부령으로 삼다
六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六年春三月 서울에 큰 눈이 오다
七年冬十一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八年春三月 왕이 죽다

재위 1년차의 기록이 많은 것만 봐도 순조로운 즉위는 아니었으며, 이후에도 당나라에 자주 사신을 보내고 결국 당나라의 의관 착용과 연호를 사용하고, 다음의 치당태평송까지 짓는 등 당시 신라의 급한 사정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5.1 치당태평송

대당 (大唐)은 큰 왕업(王業)을 개창하니
높디높은 황제의 포부 빛나도다.
전쟁을 그치니 천하가 안정되고
전 임금 이어받아 문치(文治)를 닦도다.
하늘을 본받음에 기후가 순조롭고
만물을 다스림에 저마다 빛나도다.
지극한 어짊은 해 달과 짝하고
시운(時運)을 어루만져 태평으로 나아가네.
깃발들은 저다지도 번쩍거리며
군악 소리 어찌 그리 우렁찬가!
명을 어기는 자 외방(外方) 오랑캐여
칼날에 엎어져 천벌을 받으리라.
순후한 풍속 곳곳에 퍼지니
원근에서 다투어 상서(祥瑞)를 바치도다.
사철이 옥촉(玉燭)처럼 고르고
해와 달은 만방을 두루 도네.
산악의 정기 어진 재상 내리시고
황제는 신하를 등용하도다.
삼황오제(三皇五帝) 한 덕(德)을 이루니
길이길이 빛나리 우리 당나라.[11]

정말 그야말로 후빨의 극치로 눈 뜨고 읽기 힘든 시다. 당시 신라의 사정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알 수 있다.

6 기타 매체에서의 등장

6.1 드라마 삼국기

비중이 높은편은 아니지만 당시 상황에 있을 법한 입체적인 캐릭터로 그려졌다.

한 나라의 왕으로서 당나라를 찬양하는 시(치당태평송)을 직접 수를 놓아 바쳐야한다는 사실, 사실상 김춘추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어서 자신은 얼굴마담 수준이라는 사실에 자괴감을 느낀다. 그리고 원래 정치적인 인물이 아닌데도 마지막 남은 성골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즉위했기 때문에 궁궐 생활에 무척 외로워한다. 그런데 원효대사의 설법을 듣고 원효대사에게 반해서 마음을 고백했다가 완곡하게 거절당하고 슬퍼한다. 결국 병에 걸려 승하하게 되는데 자신의 장례식 불사를 원효대사에게 주관하게 하라는 유언을 남겨, 마지막까지 원효대사에 대한 연심을 간직했음을 보여준다.

김춘추를 은근히 싫어하면서도 김춘추의 딸 요석(훗날 원효대사와 이어져 설총을 낳는 요석공주)과는 자매애 혹은 우정 비슷한 감정으로 서로 의지하며 무척 친하게 지낸다. 남편을 잃고 외롭게 지내던 요석도 진덕여왕 옆에서 원효를 만나고 같이 반한다. 마성의 원효대사 하지만 요석은 여왕이 원효를 사랑하는 걸 알고있어서 여왕 생전에는 자기 마음을 내보이지 못 한다. 그리고 훗날 아버지 김춘주가 왕이 된 후에 역사에 기록된대로 원효와 이어진다.

6.2 드라마 선덕여왕

아예 짤렸다.(…)

이 드라마가 선덕여왕이 죽으면서 끝나는 터라 바로뒤에 왕위를 잇는 진덕여왕이 아예 안나온건 좀 부자연스럽긴 했다. 마지막화의 미 방영분 중에 선덕여왕김춘추에게 왕위를 승만공주에게 맡기고 좀더 힘을 기르라는 장면에서 한번 언급이 됐지만 이 장면이 통편집됐다.(...) 뭐, 드라마 내용 기반의 동명소설에선 주요 조연 중 하나로 계속 등장하지만...

6.3 대왕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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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배우는 손여은. 각시탈에서 엄선화역을 맡았던 배우다.

44화에서 김춘추선덕여왕에게 승만공주를 후계자로 지명하라 주청하는 장면에서 최초로 등장했다. 선덕여왕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현재는 여왕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하고 있으며 최근에 알천과 함께 백제에 사신으로 가서 김춘추를 데려왔다.

작중에서는 비담의 난을 진압할때 김유신의 계책을 위해 연을 직접 만드는데에 동참하기도 했다. 다만 즉위한 이후로는 큰 활약 없이 재위기간을 보내고 알천이나 김춘추, 김유신 등의 보좌를 받다가 김춘추가 섭정이 된 후 곧 극중에서 퇴장한다. 작중에서 승하하는 씬은 없이 나레이션으로 승하했다는 언급이 나오고, 바로 김춘추가 무열왕으로 즉위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진으로 보다시피 의외로 사극비주얼이 폭발적이라 당시 인터넷에서 유일하게 대왕의 꿈을 달리던 디시인사이드 kbs 드라마 갤러리에서 캐스팅 반응이 상당히 좋았다.
  1. 진덕여왕 4년부터 당나라의 영휘(永徽) 연호를 받게되면서 독자적인 연호였던 태화연호는 폐지되었다. 즉 신라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사용된 연호.
  2. 여러 매체에서도 진덕여왕은 약간 살이 찐 통통한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3.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글래머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4. 공교롭게도, 진덕여왕과 신장이 비슷하다.
  5. 삼국사기에서는 그냥 체격이 크다고 했고 삼국유사에서는 '그것'도 매우 크다고 나온다. 물론 그것과 전체 체격의 크기는 대체로 비례한다.
  6. 왕위에 오를 만한 성골이 사라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김춘추가 오를 수도 있었지만, 전통과의 급격한 단절로 인한 혼란을 우려한 탓인지 어떻게든 성골을 찾아서 어거지로 왕으로 세운 듯한 느낌이 있긴 하다. 또한 하필 왕위계승서열 2위(!)였던 비담이 난을 일으킨 상황도 의미심장하다.
  7. 오늘날의 춘천, 철원 일대.
  8. 당태종이 나당동맹에 적극적으로 임한 것은 645년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패퇴했던 것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당태종고구려 재침략을 위해서 신라와의 협공이 꼭 필요할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게다가 645년 고구려 침공 당시 당태종은 동맹국이었던 백제, 신라에게 모두 지원군 파병을 요청했는데, 신라가 당의 요청에 응해 원군을 파병했지만, 백제는 그전부터 당이 고구려를 친다면 지원군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제가 말을 바꾸어 지원군을 파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당을 지원하고 있던 신라의 배후를 공격했다. 백제의 배신에 큰 분노를 느낀 당태종은 죽을 때까지 백제의 사신을 받지 않았다.
  9. 나라가 망할 판인데 뭔 짓을 못하겠냐만, 사실 따지고 보면 후대 병자호란 때는 진짜 대세가 뭔지 판단을 못해서 나라를 말아먹었다, 외교가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면서 진덕여왕의 이런 저자세 외교를 비난한다면 모순적이라는 지적이 있다. 굴욕적이라고 해도 삼전도의 치욕에 비할바는 아니지 않겠는가?외교 못해서 백성들 피눈물 흘리게 하는 무능한 왕조들보다야 수백배 낫지
  10. 일본서기 권25 고토쿠 천황 652년 6월 기사.
  11. 원문은 昭我唐家光(소아당가황)이다. 이 시는 5언시로 2-3으로 끊어 읽어야 한다. 다른 모든 구절은 2-3으로 끊어 해석하였으나 해당 부분만 1-4로 해석을 하였다. 2-3으로 해석을 한다면 "우리에게 비추리라, 당나라의 빛이여!" 라는 뜻이 된다. 전후 문맥상으로 봐도 이 해석이 타당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