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담의 난

1 개요

비담의 난(毗曇의 亂)이란 신라 선덕여왕 때인 647년 1월 초 일어난 귀족들의 대규모 반란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한국 사회에서는 그저 여자가 왕 노릇 하는 꼴을 고깝게 여긴 꼰대들의 발작 정도로 폄하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상은 신라에 대위기를 초래한 희대의 암군 선덕여왕의 연이은 실정과 그에 따라 무너져가는 나라 꼴을 보다 못한 귀족들이 아 씨바 할 말을 잃었다며 들고 일어난 대규모의 항쟁이었다. 발작이라는 것이 살아나고자 하는 발작이었다고 한다면 분명 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이 여자가 무슨 짓을 하고 있었기에 나라 꼴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는 선덕여왕 항목 참고.

주모자는 상대등 비담염종 등이었는데, 비담은 불과 1년하고 조금 전에 선덕여왕이 상대등으로 삼은 사람이었다. 흉흉한 민심을 달래기 위한 나름의 조치였던 모양인데 정말 암군 아니랄까 봐 가는 그 순간까지 또다시 인사 병크가 터지고 만 것이다.

난이 진행되는 와중에 목표였던 선덕여왕은 죽었고[1] 그 뒤 김유신에게 진압당했다. 화백회의를 중심으로 했던 귀족 세력이 몰락하고, 반란 진압 와중에 선덕여왕이 승하하면서 진골 세력인 김춘추진덕여왕 시대를 주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2 과정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비담의 난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선덕여왕 16년 봄 정월에 비담, 염종 등이 말하길, "여자 임금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2]." 고 반역을 꾀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못 이겼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중 선덕여왕 16년(647).

비담 이하 반군은 이들은 경주 동쪽 명활성에 주둔했고, 김유신이 지휘하는 근왕군은 도성에서 농성을 펼쳤다. 반군의 어떻게든 이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구국의 일념과 기세가 어찌나 맹렬하던지, 10일이 넘도록 반군이 왕성 대문을 뚜들겨 대는데 천하의 김유신이 뾰족한 수를 내지 못해 그냥 문 걸어 잠그고 감히 나가지를 못했다.

위에 취소선 긋기는 했는데 실상 비담의 난을 단순히 탐욕스러운 귀족들의 밥그릇 싸움 정도로 치부하기에는 사서에 나타나는 당시 상황이 정말 말도 아니었고 가히 세기말급이었다. 밥그릇 싸움도 일단은 나라가 있고 나서야 볼 일이다. 귀족들 이하 반군 장병 일동이 가졌던 마음가짐은 분명 여느 반군과는 달랐던 것으로 보이며 그래서인지 그 기세가 더욱 맹렬했다.

10일이 되기 전, 한참 싸우던 도중 밤이 되었을 때 큰 이 도성에 떨어지자, 비담 등은 신이 나서 군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들었는데, 떨어지는 별 아래에는 반드시 피 흘림이 있다 하니, 이는 틀림 없이 여주가 패할 징조구나![3]

삼국사기 신라본기 중 선덕여왕 16년(647), 비담.

이에 반군의 환호가 천지에 진동했지만, 김유신은 두려워하는 여왕 앞에서 이렇게 말하며 안심시켰다.

길함과 흉함은 정해진 게 아니라 오로지 사람이 부르는 것입니다[4]. 옛날에 주왕붉은 새가 있었음에도 망했고 노나라기린을 얻었음에도 쇠하였는데, 고종[5]장끼가 우는데도 흥했고 정공(들)이 싸웠지만 창성하였습니다. 그러니 덕이 요사함에 이김을 알 수 있습니다. 별의 변괴라는 건 두려워 할 것이 아니니, 청컨대 왕께서는 걱정하지 마소서.

삼국사기 신라본기 중 선덕여왕 16년(647), 김유신.

그러고선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붙이고 그것을 에 실어 하늘로 날렸다. 그리고는 사람을 시켜 반군에게, "지난밤에 떨어졌던 별이 도로 올라가더라!" 라는 소문을 퍼뜨렸는데 이것이 먹혔는지 반군이 혼란에 빠졌다.

그러는 한편 별이 떨어진 곳에서 흰 말로 제사를 지내고 제문을 읽어 하늘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지금 비담 등이 신하로서 임금을 해치길 꾀하니 아래로서 위를 범하는 것인데, 이걸 이른바 난신적자라 하며 사람과 신이 같이 미워하고 하늘과 땅이 같이 용서치 못한다. 지금 하늘이 이렇게 의식이 없어서 되려 괴이하게 별을 왕성에 비춘다. 이를 신(臣)은 의심스럽게 여기며, 이해하지 못하겠다. 생각컨대 하늘의 위엄으로 사람을 그 뜻에 따르게 하고 선을 착하게 여기고 악을 미워하여 신(神)으로서 부끄러움을 만들지 말라!

삼국사기 신라본기 중 선덕여왕 16년(647), 김유신, 하늘에 대고 제문을 읽으며.

물론 실상은 하늘의 위엄으로 선을 착하게 여기고 악을 미워하여 신으로 부끄러움을 만들지 않고자 신라를 향해 내려주신 하느님의 보우하심이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지만, 그냥 김유신의 소속이 소속이니만큼 그러려니 하자. 그리고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바꾼 사례였으니 과연 새 시대를 열어 젖힌 불세출의 대영웅 김유신의 그릇이 드러나는 일화 중 하나라 하겠다.

그러나 싸움의 와중이었던 1월 8일, 정말로 선덕여왕이 죽었다.[6] 오오 하늘이시여... 만세!

아무튼 사정 모르는 반란군의 사기는 위의 유성 사건을 계기로 크게 꺾였고, 김유신이 병사들을 독려하며 성을 나가 직접 나서 싸웠다. 이때 반군이 크게 패하여 달아났고 비담이 붙잡혔다.

비록 왕은 이미 죽고 없었지만 어쨌든 근왕군의 승리였던 것이다.

3 결과

비어 있던 옥좌에는 사실상 유일한 성골이었던 김승만이 추대 받아 옹립되었고 이 사람이 바로 치당태평송으로 유명한(...) 진덕여왕이시다.

기본적으로 세계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남존여비였던 신라였고 더군다나 선덕여왕이라는 병신 같은 선례가 바로 앞에 있는 나라가 또 신라였음에도 진덕여왕이 보위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순전히 이 여자가 성골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신라에서 골품제가 가지는 그 무시무시한 위상이라는 게 어느 정도인가를 가늠케 하는 사건 중의 하나다.

물론 돌아간 정황은 중종반정과 같았으니, 진덕여왕은 왕이라 해도 실상은 바지사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왕이 즉위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피의 숙청이었다. 바로 그 해 정월 17일, 비담과 그의 일족 30명을 비롯한 9족을 정월 17일에 처형했다.

4 여왕은 정말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는가?

정말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비담의 난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저 여자를 가만히 놔뒀다간 정말로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고 여긴 백성들과 귀족들의 위기 의식에서 비롯된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비담 이하 반군이 내세운 명분이란 "여자 임금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7]." 는 것이었는데, 저때 정말로 그랬다. 왜 그런 건지는 선덕여왕 항목 참고.

다만 저 '여왕'이라는 게 '선덕여왕'만을 가리키는 건지, 아니면 '여자 임금 전체'를 가리키는 건지를 원문만 봐서는 알 수가 없다. 물론 후세인들인 우리는 선덕여왕 여왕이라서 나라를 망친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선덕여왕은 선덕여왕이라서 나라를 망친 것이니까.

한편 주보돈 등 일각에서는 위의 '여자 임금'이라는 게 선덕여왕이 아니라 사실 진덕여왕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재위 초부터 이미 약도 안 드는 중병에 걸려 비실대던 여왕이 올해로 재위 16년에 접어들었는데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결국 후계자를 물색하였고, 그러던 차에 성골의 씨가 마를대로 말라버린 당시 정치적 상황 상 김승만이 다음 계승자로 정해졌으며, 비담을 비롯한 이들은 이 여성 후계자 즉 '여자 임금'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켰다는 주장이다. 실제 선덕여왕은 난이 한창이던 와중에 죽었으니 일단 사건들에 끼워 맞추고 보면 딱히 무리는 없어보이는 주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시 정설은 아니다. '여자 임금'을 선덕여왕으로 놓고 봐도 무리가 없어보이는 건 마찬가지인지라.

선덕여왕은 신라 최초의 여왕이고, 한국사에서 기록이 남아있는 최초의 여군주이다.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어 이루어진 일인데, 전례가 없는 일에 대해 반발도 분명 있기는 있었을 것이다[8]. 하지만 그게 그렇게 큰 문제였다기에는 여자의 몸으로 정치한 게 이미 벌써 15년이었다. 신라에서 골품제가 가지는 위상이라는 건 현대인들이 상상하는 그 이상이었던 것이다. 진짜 문제는 여자니 남자니 하는 그런 하잘 것 없는 문제가 아니었고, 그냥 이 여자의 실정이었다. 여자라는 문제는 이 여자를 씹다 보니 입에서 절로 나오는 일종의 덤이었을 뿐이고, 기본적으로는 나라를 망국의 수렁 속으로 몰아 넣어가던 이 여자의 삽질을 지켜보던 백성들과 귀족들의 인내심이 바닥날대로 바닥나고 만 것이다.

삼국유사 등에서 계속 강조되는 여왕의 현명함 등은 재위 내내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선덕여왕의 노력을 어느 정도 설명해주는 부분이 있을 거라는 추론도 존재[9]. 물론 기본적으로는 선덕여왕이 호불군주였기 때문에, 서부 전선이 모조리 다 박살 나고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내몰린 와중이었음에도 불교 측에서 대책없이 쉴드 쳐준 거지만 말이다.

5 비담의 난에 대한 여러가지 견해들

비담의 난의 성격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적지 않게 학계에서 제출되었다. 그런데 사실 정작 비담의 난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 자체는 터무니 없이 적다.

우선 비담의 지위가 상대등이라는 점. 그리고 그 난을 진압하는 주축이 김유신이라는것 자체는 명명백백한 사실이다. 또한 김유신과 김춘추가 깊이 연결되어있는 것도 확실한데, 대체로 김유신은 지방 출신이고, 김춘추는 귀족회의에 의해서 폐립된 진지왕(眞智王)의 손자라는 점,[10] 반란군 측이 내세운 '여군반대'의 명분, 난을 진압한 뒤에 김춘추와 김유신이 실권을 잡고 급속하게 중앙관서조직 확대 등이 일어난 것이 일단 역사적 사실이다. 이를 바탕으로 무엇을 중시하고, 또 무엇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5.1 왕권 vs 귀족 세력?

상대등은 귀족회의 의장으로 여겨진다. 본래 왕(마립간)이 귀족회의의 의장이었는데, 법흥왕(法興王) 시기에 상대등이 설치됨에 따라 왕은 귀족회의의 직접적인 제약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상대등의 설치는 왕권 강화를 나타낸다. 또한 동시에 귀족회의가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국정운영에서 주요 기능을 담당하였다는 데서 상대등의 존재는 왕권 강화의 한계를 나타내는 면을 지녔다. 처음에는 상호보완적 관계였던 왕과 상대등은, 6세 중반 신라의 왕권 강화와 이에 나타난 귀족회의의 진지왕 폐립 사건 등 양자 간에 갈등이 발생하였다.

비담의 난을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이 과정의 연장선 끝에 비담의 난이 벌어졌다는 의견이다.

왕을 관점으로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려는 세력, 그리고 기존의 귀족연합정권적인 성향을 유지하려는 귀족 세력간의 갈등을 축으로 삼아, 신라의 중고기(中古期) 정치동향을 파악하려는 것은 장기적 측면에서 보면 타당성이 있을 것이다. 실제로, 비담의 난 이후 진덕여왕과 태종 무열왕 시기를 거치면서 신라의 중앙집권화는 진전되었고, 그것은 이전과는 다른 정권의 성격을 나타내었다.

그런데 소위 말하는 '귀족세력'이라고 하더라도 그 안에는 여러 분파가 있을 수 있다. 왕권과의 관계에서도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이는 곧 당시 귀족세력의 면모에 대해 더 구체적인 파악이 요구되는 점이다.

그리하여, 귀족세력 안의 여러 정파를 추출해 보려는 시도가 행해졌다. 그 기준으로 제시된 것은 크게 2가지인데 하나는 친족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적 관계이다.

후자의 견해를 먼저 보자면 비담의 난은 촌락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보수적인 족장층인 비담 등과, 김유신 같은 화랑(花郞) 출신의 진취적 신흥군사귀족의 대결이었으며, 후자가 봉건적인 김춘추를 지원하여 중앙집권적 봉건사회를 구축하는 토대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반란을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과도기에서 나타난 사건이라고 성격을 규정하였다.[11]

당시 김춘추와 김유신 세력이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중앙집권화의 구축이 곧 중세사회의 도래를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각자의 견해가 다를 것이다. 그리고 비담과 김유신, 김춘추가 각각 지닌 세력 기반이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한 것이었는가, 에 대해서도 의문들이 있다.

다른 견해로, 김춘추계를 하급귀족 또는 몰락귀족으로 보고 김유신 세력을 지방 세력으로 파악하여 이들이 왕권 강화를 통해 서라벌의 문벌귀족과 대결을 벌인 것이 비담의 난이라고 파악하는 설이다.

이 설은 신라 중고기 정치정세를 파악하는 기본 틀에서 수긍할 점이 있는데, 지방 출신이나 하급귀족이 왕권과 연결되었고 이들의 뒷받침을 받아 왕권이 강화되는 추세를 보였으며, 그 연장에서 무열왕 이후 중대의 왕실이 성립되었음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정치세력의 분류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위험성이 있다.[12] 구체적으로 김춘추는 어머니가 선덕여왕의 자매이고, 아버지는 비록 폐위된 왕이지만 진지왕의 태자로서 내성사신 같은 고위적을 역임하였던 유력한 진골귀족이었다.

다른 기준으로 제시된 것은 친족관계이다. 즉, 귀족들 간의 세력 결집의 토대가 친족관계와 그것에 바탕을 둔 혈연의식이었다는 주장이다. 계보친족은 세대의 진전에 따라 포괄 범위가 달라지는데, 7세기 중엽 진골 귀족 사이에서 가장 큰 범위의 계보친족(maximal lineage)이 내물왕(奈勿王)을 시조로 한 것이고, 이보다 작은 범위의 계보친족이 지증왕(智證王) 후손들의 그것이며, 하위의 소(小) 계보친족이 태자 동륜계와 진지왕계인데, 내물왕계의 대(大) 계보힌족회의에서 선덕여왕 폐위를 결의하였는데 이를 김유신 등이 반발하여 비담의 난이 발생했다는 설이다. 또한 진흥왕의 두 아들의 후손인 진지왕계와 태자 동륜계 사이의 대립에서 난의 배경을 찾는 설도 발표되었다.

두 설 모두 계보친족 사이의 혈연의식에서 당시 귀족들의 세력 결집의 구체적인 동인을 찾았다는 점에선 동일하다.

원시 및 고대사회에서 혈연이 개인 간의 연결과 결속에 매우 중요한 기능을 미쳤으며, 어느 경우엔 개인의 생존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중고기 신라사회는 이미 고대사회에서 사회분화가 크게 진전되었고 부체제가 해체되는 등 정치구조와 운영에서 새로운 바람이 형성되고 있었다. 그런만큼 혈연적 의식은 그 전대에 비해선 훨씬 약화되었을텐데, 자칫 혈연의식을 정치적 성향과 동일시할 경우, 그것이 실제 상황과 부합할지도 의문이 갈 수있다.

원래 김유신의 집안은 신라에 병합된 김해금관가야 왕실의 후예였고, 진골로 편입되었지만 정통 진골 귀족들에게는 냉대를 받았다.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金舒玄)이 숙흘종(肅訖宗)의 딸인 만명부인(萬明)과 결혼하려 하자 여자 집안의 반대에 봉착하여, 만노군(萬弩郡) 태수로 발령 받은 김서현이 밤에 담장을 넘어 보쌈을 하여 김유신을 탄생시켰다. 게다가 김유신이 자신의 여동생인 문희(文姬)를 김춘추와 고생고생해서 결혼시키는 모습 등은 금관가야 왕족인 김유신 집안이 경주로 이주한 뒤 진골 신분에 편입은 되었지만, 정통 진골귀족사회에서 여전히 아웃사이더 처지였음을 말해주는 일일 수 있다.

애초에 김유신 집안은 진골신분을 통해보다도 조부 김무력(金武力) 대부터 김서현, 김유신에 이르기까지 무장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통해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로 말미암아 김유신은 사람을 대할 때에 상대적으로 신분보다도 능력을 중시하는 경향에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며,[13] 나아가 이들을 자신의 세력 기반으로 규합하여 국가의 공적 질서에 포괄하기 위해 관료조직의 확충과 왕을 정점으로 하는 집권체제 확립을 지향하였다. 비담의 난도 그러한 과정에서 벌어진 대립과정일 가능성이 있다.

5.2 대당 의존파 vs 자립파?

귀족들 간의 뚜렷한 파별성을 확인하기 힘든 상황에서, 비담의 난의 동인을 내부에서 찾으려는 데 반대하고, 외부의 영향에서 찾으려는 시각이 제기되었다. 이 견해에서 "여자가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반군 측의 구호를 중시하고, 여왕 교체안이 다름 아닌 당태종의 발언에서 제기되었음을 주목하여, 난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대당 의존파와 자립파로 나누고 후자가 왕실을 지지한다는 식이다. 당시 신라가 대내외적으로 곤경에 처해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의 지도력에 대한 신뢰가 크게 흔들리는 상황이었으므로, 여자가 해서 말아먹는다는 논리는 여왕에 반대하는 귀족 세력에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여왕 반대파와 지지파를 대당 의존파와 자립파로 그 성격을 규정할 수 있는 가이다.

여왕에 대한 불만은 그 전부터 있었던것으로 보이며, 국가적 위기는 여왕과 다음 왕위 계승자로서 여왕의 등장 가능성에 반대를 촉발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굳이 여왕 반대파를 '대당 의존파'라고 규정하는가의 문제다. '자립파'라는 세력 또한 당과의 동맹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정책을 전개하였기 대문이다. 따라서 이는 지나치게 외인론에 의거해 신라 정치를 설명하는 주장일 수 있다. 오히려 역으로 비담 일파가 여왕이 친당정책에 반발하여 일어난 것일 수도 있다.

6 의의

비담의 난 후 즉위한 진덕여왕 재위 기간 중에도 딱히 신라가 나아진 건 없었다.

중앙관서조직이 크게 확충되는 등 중앙집권화가 다소 이루어졌다. 진덕여왕 5년인 651년에는 재정 지출을 담당하는 창부(倉部)와 형률과 입법을 관장하는 좌리방부(左理方部)가 창설되었으며, 국가의 기무를 총괄하는 최고집행기구로서 집사부가 개설되었다. 집사부는 왕에 직속되어 정치적으로는 강력한 왕권과 중앙 집권력을 뒷받침하는 기관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고, 선덕여왕의 그림자를 당나라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거두어 내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선덕여왕의 졸렬한 지휘로 서부 전선이 이미 완전히 무너져 내린 가운데 한 번 호구로 찍힌 신라로 몰아치는 고구려백제의 공세, 특히 백제의 공세는 신라를 정말로 멸망의 구렁텅이 그 코앞까지 내몰았으며 신라는 자력으로 이를 극복하는 데에 완벽하게 실패했다.

신라의 대당 의존은 더욱 심화되어 '치당태평송'으로 대표되는 구차한 지경에 이르렀고[14], 연호도, 복식도 모두 버리고 대당 아래 제후국의 정체성을 더욱 강하게 표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중국화는 중앙집권화의 과정이 아니라 순전히 당나라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기 위해 이 악물고 무릅쓴 약소국의 굴욕과 피맺힌 발악이었다.

한편 김춘추와 김유신 세력 등의 진골세력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실제 진덕여왕 다음 왕은 김춘추였다.

7 대중문화에서의 반영

선덕여왕(드라마)에서는 비담(선덕여왕)(김남길 분)과 김덕만(선덕여왕)(이요원 분)의 관계, 특히 미실과의 관계의 연장선상에서 이것이 잘 그려진다. 매우 드라마틱하게 재 해석되어있으니 항목들을 참고할 것. 다만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지 비담이 여왕을 사랑해서 난을 일으키고 어쩌고저쩌고 하는 사람들은... 반면 염종은 쓰레기로 나온다(...) 덕만까지 다섯 발자국!

대왕의 꿈에서는 세세한 부분은 각색이 많이 들어갔으나 선덕여왕보다는 비교적 역사에 가깝게 묘사한 편이다. 다만 여기서 비담은 자신이 신라의 지배자가 되어 신라 중흥을 하겠다는 야망을 이루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설정. 유성이 떨어지는 것과 김춘추 측에서 연을 날리는 장면도 그대로 나온다. 결국 비담이 김유신의 군세에 패하여 백제 국경까지 밀리게 되고, 신라의 내란을 이용하려는 의자왕의 지시를 받은 계백이 백제로 망명하라고 비담을 설득했으나 비담은 이를 거절하고 마지막에 진 신라무쌍을 찍다가 힘이 다해 김법민의 손에 최후를 맞는다.
  1. 전사인지 자연사인지를 놓고 논란이 좀 있는데 자세한 건 후술.
  2. 원문은 女主不能善理.
  3. 근데 의미심장한 건, 반란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여주 선덕여왕은 정말로 난이 한창이던 와중에 죽었다는 것이다.
  4. 원문은 吉凶無常惟人所召.
  5. 상나라의 제22대 왕인 양왕(襄王) 무정(武丁)을 말한다.
  6. 이걸 두고 여왕이 반군 칼 맞고 가버린 거라는 주장이 있는데, 그렇다면 그런 대사건이 왜 기록에 남지 않았느냐는 반론이 맞선다. 신라는 삼국 중에서도 가장 기록이 풍부한 나라다. 또한 선덕여왕은 즉위 초부터 고령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데다가, 기록에 따르면 약도 안 드는 중병에 걸려 있었다.
  7. 원문은 女主不能善理.
  8. 이미 진평왕 말년인 631년에 일어난 이찬 칠숙, 아찬 석품의 모반 등을 두고 이러한 반발의 일환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사서만 봐서는 선덕여왕과 이들의 모반에 딱히 어떤 연관이 나타나지 않고 있으므로 그렇지 않다는 반론도 팽팽하다.
  9. 보다 보면 이건 여왕이 아니라 무슨 무당 같다(...). 차라리 무당을 하지 그랬어?
  10. 이는 조금 더 생각해 볼 점이 삼국사기에는 진지왕의 폭정이 아니라 국경을 잘 방비하고, 백제의 대군을 물리치는 등의 업적이 더 크게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폐위 된 왕자가 진평왕의 사위가 되는 등 여러모로 단순 폐위라고 보기에는 복잡한 면이 많다.
  11. 『조선통사』 상,pp.83~85, 1956
  12. 정치세력의 분류를 극단적으로 단순화할 경우 나타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면 이덕일 부류를 생각해보자.
  13. 가령, 662년 대고구려 원정에서 돌아온 김유신은 문무왕에게 자신이 임의로 9등급인 급찬의 관위를 수여한 열기(裂起)와 구근(仇近)에게 8등급 사찬을 수여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문무왕이 지나치다며 난색을 표하자 김유신이 "작록(爵祿)은 공기(公器)로서 공로에 대한 보수로 주는 것이온데, 어찌 과분하다고 하겠습니까?" 하자 문무왕이 이를 따랐다. 구근은 지방의 출신이고, 열기는 사서에 족성이 전해지지 않음을 보아 평민이나 하급 귀족 출신으로 여겨진다. 김유신은 평소 이들의 능력을 평가하여 국사(國士)로서 대우하였다. 출신 신분이 아니라 능력을 평가해 포용하고 발탁하는 자세를 견지함에 따라, 김유신의 문객으로 당시 소외되었던 유능한 지방 출신 인사나 하위 골품 출신 인사들이 많이 모여들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한국고대사의 이론과 쟁점, 노태돈.) 대백제전에서 김유신의 수하로 큰 공을 세우고 장렬하게 전사한 비령자(丕寧子)도 그러한 인물이었다.
  14. 이미 선덕여왕 때부터 '대책이 없다'는 소리가 터져 나올 정도로 구차한 지경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진덕여왕 때는 아예 왜국에서도 '우리가 쳐도 금방 망할 것들'이라며 씹히는 지경이었으니 말 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