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서아프리카

1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나미비아의 역사
나미비아의 선사시대독일령 남서아프리카남서아프리카 위임통치령
독일제국의 식민지
아프리카위투소말리아동아프리카남서아프리카서아프리카카메룬
토고
오세아니아독일령 뉴기니독일령 사모아
아시아키아우초우
⑴ 키아우초우는 독일 제국이 청나라로부터 임차한 조차지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Deutsch-Südwestafrika
독일 제국의 식민지
국기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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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 ~ 1915
위치나미비아
수도빈트후크
정치체제독일 제국 식민지
지도자독일 황제
언어독일어

1885년부터 1915년까지 독일 제국이 오늘날 나미비아 지역을 식민통치하던 시기이다.

1884년, 독일 제국은 자국의 영향력 하에 있던 나미비아 지역을 보호령으로 선언하였다. 이는 아프리카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대영제국을 견제하기 위한 술수였다. 1885년, 서양 열강들이 아프리카를 분할하기 위해 개최된 베를린 회담을 통해, 독일 제국은 나미비아, 카메룬, 탄자니아를 손에 넣었다. 이 중 나미비아는 남서아프리카라는 이름으로 독일 제국 식민지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독일 제국은 다른 식민지에서 그러하듯 원주민들의 토지를 강매하고, 자국의 민간 기업들을 남서아프리카에 진출시켜 식민지의 경제를 본국에 종속시키려 하였다. 1885년 4월 설립된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식민 회사(Deutsche Kolonialgesellschaft für Südwest-Afrika)'는 독일 제국으로부터 광산 개발 독점권을 부여받았다.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에 개발이 시작되면서 점점 더 많은 독일인들이 이곳에 정착했고, 독일 당국은 본토인과 식민지인들간에 차별적인 정책을 펼쳤다. 1886년 4월 17일 통과된 분리적용법에 따라, 본토인과 식민지인들은 서로 다른 법의 적용을 받았다. 토지 강매와 자원 약탈 역시 자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독일 제국의 악랄한 통치에 저항하기 위해 남서아프리카의 한 부족이었던 헤레로족이 봉기를 일으켰다. 독일군은 헤레로족에게 저항을 중단하라고 경고했으나, 그동안의 식민지인 차별 정책으로 많은 피해를 입은 헤레로족은 독일군의 경고를 무시했다. 식민지의 봉기 소식을 들은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로타 폰 트로타(Lothar von Trotha)를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14000명의 독일군을 병력으로 보내주었다. 그는 헤레로족을 잔인하게 진압하였다.

1904년 1월, 토지와 가축을 빼앗긴 헤레로족은 독일인 이주자 100명을 습격하였고 나마족이 이에 가세하였는데 질적으로 독일군에 상대가 안되는 헤레로족은 자신들이 밀리자 곧장 항복했지만 독일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무참하게 죽였다. 독일군의 진압과정에서 1904에서 1907년까지 8만 5천명이던 헤레로족이 1만 5천명까지 줄었다. 이 학살에 의해 헤레로족의 80%가 몰살되었다. 이후 나마족이 헤레로족과 똑같이 봉기를 일으켰다가 독일군에게 진압당하면서 나마족의 절반이 몰살당했다. 살아남은 부족인들은 노예 수용소에 수감되어 비위생적이고 열악한 복지에 기아나 질병에 시달려서 죽었다. [1] 일부 주동자들은 인체 실험의 대상이 되거나 고문도 받았다.

당시 독일에서 유행하던 우생학의 실험 대상으로 해부되어 죽은 부족들도 부지기수였다. 훗날 나치가 저지른 악행의 전초전이 독일령 아프리카에서 가해졌다고 볼 수 있다. 히틀러요제프 멩겔레 등에게 우생학적 영향을 준 오이겐 피셔(Eugen Fischer) 역시 독일령 아프리카에서 소위 연구활동을 했다. 이는 '나마쿠아 헤레로족 대학살'이라는 이름으로 20세기 최초의 제국주의 국가에 의한 학살로 기록되었다.

지금도 나미비아에선 이 문제로 이를 갈고 있다. 헤레로 부족은 명확한 사과와 나미비아 내에서 소수 인종인 자신들에 대한 직접 배상을 요구했다. 결국 헤레로족 후손들은 독일 정부와 당시 식민정책으로 이득을 본 독일 기업들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미국 법정에 제출했다. 그에 대해 법률 전문가들은 헤레로족의 승소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고 있으나 인권단체들은 "독일 정부는 이 소송을 자신들의 범죄행위에 대해 값싼 변명을 하는 기회로 삼지 말라"며 배상책임 인정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독일은 "이 사건은 유태인 배상과는 다른 문제"라며 공식 배상을 거부하며 나 몰라라 하고 있다.[2] 홀로코스트와 달리 자기들 책임이 아니라며 도이칠란트 제국에게 따지라는 변명이나 하고 있다. 그야말로 아르메니아 학살을 두고 터키가, 소련 시절 소수민족에 대한 각종 범죄에 대해 러시아가 대하는 태도랑 같기에 독일이 국제적으로 욕을 처먹는다. 게다가 독일은 터키를 아르메니아 학살 일로 비난했다가 터키에게 "늬들이 할 소리 아닌데? 헤레로 족 학살을 두고 우리랑 같은 소리했으면서?" 라고 역으로 까인 적도 있다.

대신 독일은 부족에다 배상은 안하고 국가에다 돈을 줬다. 그나마도 배상이 아닌 경제원조라는 명목이었다. 한일기본조약 아프리카 버젼 1990년 이후 5억유로를 지원해왔으나 2003년과 2004년에는 2천 300만유로로 줄었다. 결국 독일은 배상은 단 한푼도 하지 않았고, 이러한 독일의 학살과 거기에 조금도 책임이 없다는 듯한 과거 식민지배했던 나라들에서 저지른 학살 문제에 대해 사실 인정은 커녕 사과,배상조차 거부하는 미국이나 영국,프랑스,네덜란드 같은 다른 서방 국가들과 다를 바 없는 행패로 나미비아 및 과거 독일의 식민지배를 겪었던 탄자니아, 토고, 카메룬아프리카의 국가에서 독일의 UN상임이사국 진출을 반대하고 있으며 터키의 아르메니아 학살 문제를 두고 유엔에서 결의안을 하려고 하는 프랑스(알제리 전쟁 당시 벌인 알제리 학살) 및 다른 유럽 열강과 같이 비난받고 있다.

다만 2019년에 재건되는 프로이센 왕궁 내에 헤레로족 학살을 비롯한 식민지에서 자행된 만행을 반성하는 전시공간을 마련한다고 하니 아주 나몰라라 손놓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독일과 나미비아 정부가 독일제국 당시 있었던 나미비아 학살 사건을 집단학살(genocide)로 명확하게 규정하는 공동 선언을 놓고 양자 회담 중이며 이를 2016년 연말까지 마무리할 계획이다.

이후 독일령 남서아프리카는 독일 제국이 제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면서 1915년 대영제국의 속해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남서아프리카(나미비아)와 남아프리카 연방(영국 연방 자치국)은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지금의 상호 국력을 비교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1899~1902년까지 치뤄진 보어 전쟁의 여파로 남아공에서 기득권을 잃고 이를 갈던 보어인(네덜란드계 아프리카 거주자들)이 전면 나미비아를 지원했기 때문이다.

남아공에 합병된 이후 1920년에는 이곳이 남아공의 위임통치령으로 지정되었다.

2 남서아프리카 위임통치령

나미비아의 역사
독일령 남서아프리카남서아프리카 위임통치령나미비아
국제연맹 위임통치령
A형 분류시리아메소포타미아팔레스타인 (트란스요르단)
B형 분류레바논동카메룬동토고서카메룬서토고탕가니카루안다-우룬디
C형 분류나우루사모아뉴기니남양군도남서아프리카
영국 ( 호주, 뉴질랜드 삼국 공동) 프랑스 일본 제국 벨기에 남아공
남서아프리카
South-West Africa
국기휘장
1915 ~ 1990
위치나미비아
수도빈트후크
정치체제국제연맹 위임통치
지도자남아공 대통령
언어영어, 독일어
1915년부터 1990년까지 존속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위임통치령이다.

독일 제국제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고, 독일 제국의 식민지였던 남서아프리카는 남아공에 합병되었다. 1920년 국제연맹에 의해 이곳은 위임통치령으로 지정되었다. 이 시기 위임국인 남아공의 정책이었던 아파르트헤이트같은 인종차별 정책의 영향도 받았다.

이후 제 2차 세계대전이 종료하고 국제연맹이 해체, 그 후신인 국제연합(UN)이 탄생하여 기존의 위임통치령신탁통치령으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유엔은 남아공 치하의 남서아프리카 역시 신탁통치령으로 전환하기 위해 남아공과 접촉했으나 남아공은 이를 거부하였다. 남서아프리카(나미비아) 자체도 인구도 워낙 적고 산업도 낙후되어 남아공의 경제에 종속되다시피 했으니 사실 독립을 할 자체적 힘도 부족했다.

그렇지만 남아공이 국제 사회에서 점차 인종차별 정책으로 고립되기 시작하면서 나미비아의 독립운동은 국제적 동정과 지지를 받게 되었다. 유엔은 남서아프리카 건으로 지속적으로 남아공을 압박하였으나 남아공은 이에 반발하였다. 이는 독립을 요구하는 남서아프리카 주민들을 중심으로 남서아프리카 인민기구(South West Africa People's Organization, SWAPO)가 수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SWAPO를 중심으로 남서아프리카를 독립시키위한 무장투쟁은 전쟁으로 발전했다. 1966년 나미비아 독립 전쟁이 발발, 남아공군과 남서아프리카군(나미비아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오고갔다. 이 전쟁은 1990년 3월 2일 남서아프리카가 나미비아로 독립하면서 종결되었다.

이렇게 간단히 적혀있지만, 무려 1966년부터 1989년까지 23간 지속된 지독한 전쟁이였다.

단순히 나미비아 독립뿐만 아니라 현 앙골라인 포르투갈령 앙골라 독립 및 내전문제까지 엮여져 있으며 단순한 독립전쟁이 아니라 소련, 쿠바는 아프리카의 공산화를 돕는 답시고 대규모 파병을 한 대다가 미국이 우파 앙골라 독립군을 뒤로 지원하고 중국이 소련을 통수치고 미국 손을 들어줌으로써 사실상 미국-중국과 소련-쿠바의 대리전으로 흘러갔다. 점입가경으로 포르투갈역시 카네이션 혁명으로 70년대 독재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포르투갈령 앙골라[3]를 안 내놓을려고 파병했으며, 여기에 같은 소수 백인이 지배하는 남아공, 로데시아 등이 파병[4]하는 등 여러모로 아수라장이었다. 뒤로 가면 포르투갈군이 철군함으로써 사실상 남아공 군대 vs 좌파계열 앙골라 독립군으로 압축되는데, 숫자가 달렸던 남아공 군대는 우습게도 흑인들인 우파계열 앙골라 독립군을 돕기 시작한다. UN을 통해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를 비난하던 미국이 남아공 군대와 우파계열 앙골라 독립군을 도와준 건 덤.

독일어 가사의 비공식 국가가 존재한다. 곡명은 Südwesterlied(남서아프리카의 노래). 독일 군가 판처리트의 선율 일부를 차용했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나미비아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

  1. 이 즈음의 나마족, 헤레로족에 대한 대량학살에 저항한 나마족 추장인 ""치프(추장)" 헨드릭 비트보이(?-1905)가 모든 금액의 나미비아 달러에 새겨진, 나미비아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뱀발로, 같은 헨드릭 비트보이인 "캡틴(대장)" 헨드릭 사무엘 비트보이(1905-1978)는 나미비아 사람으로, 남아공의 인종차별 정책에 대항한 인물이다.
  2. 2004년에 최초로 독일의 장관이 나미비아가 사과를 받을 것을 요청했다.. http://www.theguardian.com/world/2004/aug/16/germany.andrewmeldrum
  3. 따른 아프리카 식민지들처럼 포르투갈계 백인들이 국가의 부를 독점한 상황
  4. 70~74년까지 이 셋은 군사적으로 동맹관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