野口(のぐち) 英世(ひでよ)
1876년 11월 9일 ~ 1928년 5월 21일
1 소개
일본의 세균학자, 병리학자. 그러나 위인은 커녕 희대의 사기꾼.
기술적 한계로 인한 착오인지, 진짜 사기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그를 옹호하는 이도 있으나, 과시욕과 낭비벽이 심했던 평소 행실이나 비윤리적인 연구활동[1]을 보면 사기꾼쪽으로 많이 기운다. 인품으로 훌륭하고 행실도 단정했다면, 그의 연구업적들이 대부분 허위로 밝혀졌어도 그당시 기술의 한계때문이라는 옹호라도 받을 수 있겠으나, 워낙 천하의 개쌍놈적인 일을 많이 저지른 인간이라...서...
노구치 히데오라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히데요가 맞다. [2] 본 항목은 노구치 히데'오'로 검색해도 연결이 되긴 하지만, 엄연히 틀린 표기이므로 주의할 것.
2 지금까지 알려졌던 날조된 생애
후쿠시마현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히데요가 아니라 세이사쿠(淸作)였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 화상을 입어 손가락이 붙어버리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일본의 전통 가옥은 마루 한가운데에 화로가 있어서 이런 사고가 잦았다. 이 화상 자국 때문에 차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친구들이 돈을 모아서 수술을 시켜줄 정도였으니 차별이 있었다고 하기도 힘들다. 자세한 것은 아래 '동정론' 항목에서 설명. 이후 손의 상처로 인해 의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자신의 손을 수술해준 와타나베 카나에 박사의 조수로 들어가서 어깨너머로 의학을 배우다가, 의학원인 사이세이 가쿠샤(濟生學舍)[3]에 들어갔다. 그 후 20살에 의사면허 시험에 합격하여 의사가 되었다. 공부를 꽤 잘한 편이었다고.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는 <닥터 노구찌> 만화에 따르면, 당시 의사면허 시험에는 '타진' 항목이 있었던듯하다. 애초에 손이 불편해서 필기시험 합격 후 실기에 해당하는 타진 테스트 통과에 애를 먹은 것이다. 만화에 따르면 이후 거듭된 수술로 어느 정도는 화상 입은 손의 기능을 회복한 모양이나… 아래처럼 환자들 눈에 곱게 보일 리는 없었다.
하지만 불구가 된 손으로 인해 환자들이 기피하여 의사로 살기가 힘들자, 눈을 세균과 병리학 쪽으로 돌려 병의 원인을 연구하는 생리학자로 변신했다. 당시 세계적인 생물학자였던 기타사토 시바사부로 박사의 연구소에 취직했는데, 영어를 잘해서 외국 논문들을 번역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이때 미국의 유명한 의사이자 생물학자인 플렉스너 박사의 통역을 했다.
발전된 서양의학을 접한 노구치는 플렉스너 박사에게 편지를 썼고, 그 편지에 감명받은 플렉스너 박사는 노구치를 초청하여 연구원으로 채용한다.
그리하여 1900년에 미국으로 건너가서 플렉스너 박사가 있던 펜실베니아 대학교(유펜)의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이후 플렉스너 박사가 록펠러 의학연구소로 자리를 옮기자 노구치도 이곳으로 따라간다. 록펠러 의학연구소는 現 록펠러 대학의 전신으로, 규모가 작아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생물학에서는 세계에서 수위를 다투는 연구기관이다.
처음에는 뱀의 독 같은 독성학을 연구하다가 이후 진행성 마비를 연구했는데, 마비의 원인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추적한 끝에 그것이 '스피로헤타'라는 세균으로 인한 것임을 밝혀냈고, 또한 스피로헤타의 발생 원인이 매독에 있음을 밝혀내 다시 한번 명성을 날리게 된다.
여러가지 세균성 질환들을 연구하던 끝에 마침내 황열병의 원인균을 찾아내는데 성공했고, 그로 인해 노벨생리학·의학상 후보에도 오르게 되었다. 황열병을 직접 연구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떠난 그는 결국 황열병에 감염되어 1928년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평생 200여편의 논문을 발표하고 여러가지 세균질환을 연구해 원인을 밝혀내는 성과를 거두었는데, 그가 이렇게 연구에 몰입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불구가 된 자신의 손으로 인한 컴플렉스였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한마디로, 컴플렉스로 점철된 생애가 그로 하여금 놀라운 업적을 쌓게 했다는 것이 그의 생전에 알려진 이야기였지만…
3 그러나 진실은
3.1 미국에 가다
노구치가 미국에 가게 된 것은 일본에서는 노구치에 강한 인상을 받은 플렉스너 박사의 초청 때문이라고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그것과 거리가 멀다. 일본에서 기타사토 박사의 연구소를 방문한 플렉스너 박사는 통역해 준 노구치에게 고마움의 뜻에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중에 찾아오라."며 인사치레를 했는데 이게 훗날 화근이 된다. 플렉스너: 그런 말은 하지 말아야 했는데 난 그 사실을 몰랐어
이 후 노구치는 국제방역단의 일본 대표로 청나라에 파견되어 페스트 방역을 했는데, 이 때 선진 의학을 접하고 이를 동경하게 되어 플렉스너 박사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찾아오라"고 말한 걸 기억해내어 "같이 일하고 싶다"고 편지를 보낸다. 그리고 당연히 간단하게 잘렸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할 그가 아니었다.
1900년에 결혼하고 받은 축의금을 모아 미국 가는 여비를 마련했다. 근데 이 결혼 자체가 미국으로 가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한 사기였다는 것이 최근 밝혀졌다. 자세한 것은 아래 '낭비벽' 항목에서 설명. 이렇게 막무가내로 미국에 가서 플렉스너 박사를 찾아가 "그때 그랬으니까 저 좀 넣어줘요"라고 했다. 그러니까 빈말이라도 저런 말은 하지 말자. 그러나 이런 태도에 나름 감명을 받았는지, 혹은 우격다짐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플렉스너 박사는 결국 자신이 교수로 있는 펜실베니아 대학교(유펜)의 연구원으로 노구치를 취직시켜 주었고, 이후 본인이 록펠러 의학연구소로 옮기자 노구치도 같이 이곳으로 데려간다.
즉, 노구치가 미국으로 초청받았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적어도 그가 정말 대단한 양반이라 초청받은 것은 아니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여기까지는 학력위조와 같은 사기라고 보기는 어렵다. 소도 비빌 언덕은 있어야 한다고 자격은 있되 배경과 경력이 없는 사람 입장에서 충분히 시도할 수 있는 일이고, 노구치 히데요는 일단 자격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가 문제였다.
3.2 연구성과 부정
황열병 연구의 경우, 노구치의 발견에 대해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세균학자 맥스 타일러가 조사한 결과 노구치가 발견했다는 병원균은 황열병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세균이었음이 드러났다.
타일러는 이후 연구를 지속해 황열병의 원인은 세균이 아니라 바이러스임을 밝혀냈고, 또한 노구치가 살던 때의 현미경으로는 바이러스를 발견하는게 불가능했기에 노구치의 연구는 조작된 것임을 입증했다.
황열병 연구가 조작으로 드러나자 의학계는 노구치의 연구에 대해 대대적인 검증에 착수했다. 노구치는 생전에 소아마비, 트라코마, 광견병의 원인균을 발견했다고 발표했었으나 결국 이러한 발표들도 모두 검증 불가로 결론내려졌다. 소아마비는 폴리오 바이러스, 트라코마는 인유두종 바이러스, 광견병은 광견병 바이러스가 유발한다. 이러니 원인균이 발견되었을 리가 있나. 바이러스는 병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생명체다.[4]
더욱이 (성과와는 관계없이) 스피로헤타 연구 과정에서 그는 매독균을 미성년자에게 주입하는 생체실험을 자행했다. 이시이 시로나 요제프 멩겔레같이 길가는 사람 아무나 잡아다 하진 않았고, 야매긴 해도 일단 당사자의 동의를 얻었다. 하지만 동의가 있었다고 해서 무조건 정당성이 부여되는 것은 아니며, 당시에는 매독의 치료법도 없었다. 이 생체실험은 노구치 생전에도 비난을 받은데다가, 실험 대상이 된 청소년들의 부모들로부터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다. 노구치 히데요가 바이러스가 원인이라는 것을 알면서, 혹은 발견한 세균이 정말로 병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이런 발표를 했다면 확실히 '조작'일 것이다. 그러나 일단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바이러스라는 개체를 발견 조차 불가능했으며, 결국 노구치 스스로의 실험 설계상 문제 등으로 인해 '세균이 원인'이라는 잘못된 결론에 다다랐을 수 있다. 이는 만화 <닥터 노구치>에서도 제기하고 있는 주장이다. 실제로 당시 노구치 히데요는 자신이 개발한 황열병 백신을 스스로에게 투여했었다고도 한다.
즉 노구치 히데요가 주장한 대부분의 발견은 당시 기술력 한계로 인한 착오일 수도 있다는 것. 사실 이제는 노구치 히데요가 알고서도 고의적인 거짓말을 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오해한 것인지 정확히 확인할 방법은 없다.
그런데 이 점을 떠나서라도, 노구치 자신이 연구를 성실하게 했다면 병원체를 발견하지는 못하더라도 스스로 황열병 병원체로 지목한 세균이 정말 황열병의 병원체가 맞는지는 당연히 확인할 수 있었어야 했다.
3.3 낭비벽
물론 여기까지는 나름 의욕 있는 학자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가 까이는 진짜 이유는 실제로는 위인에 전혀 걸맞은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업적이 의문시될 뿐만 아니라 개인의 인성도 전혀 본받을 만한 인물이 아님이 밝혀졌다. 사실 그는 주색잡기로 인한 낭비벽 때문에 평생동안 금전 문제가 깨끗하지 못했다. 그의 연구 성과를 조작이라고 의심하는 것도 이런 그의 성품에 기인한 바가 크니, 오류건 주작이건 노구치로서는 오해 받을 근거를 알아서 제공한 셈이다.
노구치가 상경할 때 그의 은사는 자신의 월급을 거의 통째로 건네주었고, 그의 후원자였던 치와키 모리노스케는 교사의 1달 월급인 12엔보다 많은 15엔을 매달 그에게 지급했다. 그러나 자신의 지원금으로 방탕한 생활을 하는 노구치를 보다 못한 치와키는 그 후로 5엔씩 나누어 지급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공부하여 의사가 되는 것에는 어쨌든 성공했지만, 그의 월급은 고작 3엔에 불과했다. 이에 부족을 느껴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방탕한 생활을 버리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닥치는대로 돈을 빌리기 시작한다.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자신의 직장에서 고가의 전문서적을 대출한 후 팔아치우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그 후 츠보우치 쇼요라는 작가가 쓴 책에, 시골에서 상경하여 도시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는 '노노구치 세이사쿠'라는 이름의 등장인물이 나오자,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느껴진 노구치는 이후 이전의 행동을 반성하는 대신 '세이사쿠'였던 자신의 이름을 '히데요'로 바꿨다. 그 개명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처음에는 개명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꾀를 내어, 고향 근처 다른 마을에 살던 '세이사쿠'라는 사람에게 고향의 다른 노구치 가문에 양자로 들어가달라고 부탁해 억지로 '노구치 세이사쿠'라는 동명이인을 만들어냈다. 그 후 같은 마을에 노구치 세이사쿠가 2명 있으니 이상하다는 이유로 다시 개명을 신청하여 합법적으로 개명할 수 있었던 것. 물론 이 과정에 돈이 오고 갔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다 청나라에서 페스트가 번지자 각국은 인도적인 목적으로 의료반을 파견하게 되었는데, 노구치도 여기에 선발된다. 그러나 이때 후원자인 치와키가 여비로 쓰라고 준 거금 96엔(당시 교사 월급 8개월치)을 사치에 다 탕진해 버렸고, 결국 돈이 떨어져서 청나라로 갈 수 없게 되자 치와키에게 울고불고 매달린다. 결국 치와키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내의 옷을 전당포에 맡겨서 생긴 돈 5엔을 노구치에게 줬다. 그러나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노구치는 청나라 및 러시아 정부에서 지급된 돈 2,600엔을 모두 탕진하고 귀국했다.청나라, 러시아 : 그러라고 준 돈이 아니었을텐데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 노구치는 부잣집인 사이토 가문의 딸과 약혼한 다음 처갓집에서 미국에 갈 돈으로 300엔을 지원받았는데, 친구들을 불러 요정에서 호화판으로 놀아서 결국 수중엔 30엔만 남게 되었다. 이미 그 전에 다른 곳에서 지원금 명목으로 200엔도 받은 상태였다. 결국 총 500엔을 미국에 가기도 전에 다 탕진해 버린 것.
결국 노구치는 다시 만만한 치와키의 바지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고, 결국 치와키는 이번에는 사채업자에게서 300엔을 빌려서 노구치에게 준다. 게다가 위에서 언급했듯 결국 약혼녀인 사이토 가문의 딸과는 결혼하지 않고 미국에서 만난 여성과 결혼했다. 한마디로 사기를 저지른 셈이다.
미국에서는 조교가 되었지만 월급은 고작 8달러였으므로 고향에 편지를 보내 또 빚을 지게 된다. 그 후 승진하여 월급이 50달러까지 늘어났지만, 여전히 낭비벽은 사라지지 않아서 급료를 받은 날에 36달러를 써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노구치의 낭비벽은 당시부터 유명했고, 수중에 돈이 떨어지면 금세 빚을 지는 버릇은 여전했기 때문에 결국 누구도 노구치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가 록펠러 연구소에 스카웃되어 연봉이 5,000달러까지 상승한다. 당시 일본 환율로 계산보면 노구치의 연봉은 1만엔이었고, 당시 일본 총리의 연봉은 1만 2,000엔이었다. 당시 미국인의 평균적인 연수입은 약 700달러에 불과했다. 노구치는 이런 고액 연봉을 받으면서도 일본에 상을 받으러 갈 때는 돈이 없어서 일본에 있는 친구로 후에 일본의 저명한 소설가가 되는 호시 신이치의 아버지에게 돈을 구걸했다. 일본에 와서 상금인 1,000엔으로 그동안의 빚을 갚았는데, 빌린 액수에 비하면 한참 부족한 액수였기 때문에 결국 노구치에 대한 고향의 평가는 바닥까지 떨어지게 된다.
그러나 그러고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노구치는 사치를 계속했고, 그 결과 그가 사후에 남긴 재산은 약 13,000달러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가 연봉을 5,000달러 정도 받게 된 것은 1914년이고 죽은 것은 1928년이니 생전에 거의 저축을 하지 않은 셈이다.
4 동정론의 실체
노구치가 명예에 집착하여 연구 성과를 조작한 것은 사실 불구인 왼손 때문에 차별을 받아서라는 동정론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위인전의 날조에 불과하다.
일단 노구치가 의사로서 차별을 받았다는 것은 전부 허구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사실 노구치가 개업의가 되지 않은 것은 환자들이 장애인이었던 그를 꺼렸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개업자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노구치가 개업을 못하자 곧 후원자인 치와키는 노구치에게 다른 직장을 알선해 주었으며, 노구치 그 자신도 어학에 능했기 때문에 통역 등의 일을 맡아 순조로이 진급했다. 이 외에 노구치가 받은 차별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은, 사실 교묘하게 감춘 노구치 자신의 악행에 기인한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애초에 왼손이 불구였다는 것도, 실제로는 치와키의 후원하에 무상으로 수술을 받아서 이후 타진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일본에서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임상시험을 통과해야 되었고, 그 과정에 타진이 포함되어 있었다. 검증이고 뭐고 필요 없는 셈.
따라서 노구치가 받았다는 차별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없었던 일인 셈. 게다가 위에서 언급된 고향의 은사나 치와키 같은 든든한 후원자 덕분에 노구치는 생활에 대한 염려없이 공부를 할 수 있었으며, 어학에 능하다는 이유로 청나라에 파견되거나 미국에 건너가는 등 많은 기회를 얻었던 사실을 생각해보면, 되려 동시대의 다른 의학도보다 훨씬 유복한 환경에 놓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일단 차별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설사 차별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상회하는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평소 품행이 안 좋았기 때문에, 실은 노구치의 생전에도 이미 그의 연구에 대한 의혹이 일부 있었다. 그러나 사이먼 플렉스너 교수가 그런 의혹들을 모조리 일축시켜 버린데다, 노구치의 연구에 대한 열정을 보아 설마하니 전부 오류일까, 라는 생각에 당시 다들 엄밀한 검증을 취하지 못한 게 그가 죽고 나서야 그의 연구 대부분이 검증 불가로 드러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사이먼 교수는 미국의 의학교육 및 의사 제도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한 의학교육을 주장하는 플렉스너 보고서를 주관한 교육가인 에이브러햄 플렉스너의 형이다. 사이먼과 에이브러험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어쨌든 에이브러험은 의사가 아니었으므로 의사이자 과학자였던 사이먼의 의학교육에 관한 견해가 이 보고서에 강하게 반영되긴 했다. 이 플렉스너 보고서는 록펠러 재단이 후원하여 만들어진 보고서로, 당시 의학교육에 자금을 지원하려던 재단이 대체의학과 근대과학적 의학 중 어느 측이 더욱 양호한 의료효과를 보는지를 파악하고 그러한 곳에 자금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했다.
이 보고서의 영향력은 매우 커서, 그때까지 미국 의료계에서 한 몫을 하던 동종요법 등 대체의학들은 1920년대까지 모두 퇴출되었다가[5] 20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부활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그나마도 플렉스너 시스템 하에서 육성된 근대과학적 의사들이 주관하는 정도. 게다가 이 보고서는 의학 외 다른 학문에서의 대학교육에도 매우 큰 영향을 미쳐서 결국 미국의 대학교육 개혁과 학문의 진보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어쨌든 이 정도로 사이먼 교수가 의학계에 대단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으니 그가 압력을 넣으면 다른 이는 감히 노구치의 연구를 파헤칠 수 없었던 것. 결국 권위가 만든 병크라고 할 수 있겠다.
5 여담
- 국내 서점에 가면 이 자의 일대기를 그린 위인전이 의외로 많이 출판되고 있다.
- 이 사람의 일대기를 그린 만화 <닥터 노구치>는 1990년대 후반에 한국에서도 정식 발매된 적이 있다. 만화 자체로만 보면 재미도 있고 감동의 쓰나미가 몰려오는 명작이지만, 문제는 그 감동이 '이 만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인식에서 오는 것이라는 점이다. 정작 실상은 바탕이 된 실화가 상기에 서술된 대로 거짓과 왜곡으로 점철되어 있으니… 심지어 이 만화에서 노구치 히데요는 놀 줄도 모르는 쑥맥으로 나온다. 물론 실제로는 인간적으로 본받을 만하거나 엄청난 업적을 남긴 인물은 절대 아니다. 다만 술은 굉장히 좋아하는 것으로 나온다. 툭하면 술독에 빠진다.
그러므로 실화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보자
- 웹툰 작가 개호주가 만화를 통해서 존경한 인물인데, 일본 여행 과정에서 진실을 알고 적지않 게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 말로는 노구치의 동인파락호스러운 모습에 존경했으니 큰 변화는 없을 거라고 한다.(...)
- 구로다 가쓰히로는 <좋은 일본인, 나쁜 일본인>이란 책자에서 "한국 대형서점 문고에서 일본 위인으로 높게 평가한 적이 있다"고 자랑했던 적도 있다.
- 2012년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그의 이야기가 방송되었다.
- Q.E.D. 증명종료에서는 연구 자료가 사라지는 에피소드에서 데이터 조작의 예시로 나온다. 과학이론 등이 중요한 소재인 만화라 그런지 노구치 히데요의 조작에 대해 눈속에 악마가 들어왔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토마도 "일본인은 노구치에 대해 잘 모를 꺼다"라고 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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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이 사람의 명성을 이어줄 여자가 나타난 것 같다 드디어 여자 판 노구치 탄생
- ↑ 치명적일 수 있는 세균을 가지고 결과를 내기 위해 성급히 인체실험을 했다든지...
- ↑ 世(세상 세)의 훈독은 よ이다. 참고로 英(꽃부리 영)은 원래 훈독이 '꽃봉오리'를 뜻하는 はなぶさ이지만, 이 사람의 이름에서는 英을 '뛰어나다'라는 뜻으로 사용하여 秀(빼어날 수)의 훈독 중 인명에서 주로 쓰이는 ひで를 차용한 것으로 추정. 전 야구선수 노모 히데오의 경우도 비슷하다.
- ↑ 이후의 니혼의과대학
- ↑ 일반적으로는 생물학에서 바이러스는 생명체로 분류되지않는다. 왜냐하면 음식을 섭취해 에너지로 바꾸는 능력이 없고 번식에 반드시 숙주세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 ↑ 당시 미국 내 대체의학교육 시스템은 매우 주먹구구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