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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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벌어지지 말아야 할 시대의 살인극.

1 개요

... 이어 10시 50분쯤부터 수사관의 신문을 받기 시작, 11시 20분쯤 수사관이 수배된 박 모군(서울대생)의 소재를 물으며 책상을 세게 두드리는 순간 의자에 앉은 채 갑자기 '윽' 하는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는 것이다.

- 경향신문, 1987년 1월 16일

탁 치니 억 죽고 물 먹이니 얼싸 죽고 사람이 마분지로 보이냐?

- 크라잉넛, ‹지독한 노래›의 가사 중에서.

1987년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 학생이던 박종철경찰에 연행되어 남영동 대공분실[1]에서 심문을 받다가 고문에 의해 사망한 사건. 길게는 박종철군 고문 치사 사건이라고 한다.

2 전개

2.1 박종철의 사망

당시는 TV에서 땡전뉴스가 흘러나오던 전두환 대통령의 정권시절이었다. 박종철(1964년 4월 1일 생)은 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의 주요수배자인 박종운의 후배였는데, 박종운의 소재를 알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아무 잘못도 없이 1987년 1월 14일 자신의 하숙집에서 체포영장도 없는 치안본부 대공수사관들에게 그냥 잡혀갔다가 다음날인 1월 15일에 사망한 채로 나오게 된다.

2.2 검찰과 경찰의 대립, 부검

이 때 내무부 치안본부(현재의 경찰청)는 박종철의 사망원인에 대해 “책상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라는 희대의 병맛 개그를 펼치게 되고 이것이 정식 사인으로 언론에 발표된다. 물론 훗날 밝혀진 사인은 물고문에 의한 질식사.[2] 당연히 아무도 믿지 않았고 이걸 수습한다고 신임 내무부장관 정호용이 한 말이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였다.[3] 이걸 해명이라고(...) 들은 여론이 들끓어 오르는 가운데 사건 담당 검사[4]와 부검의(오연상, 황적준)의 노력으로 박종철 군이 고문으로 인해 사망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된다. 이후 전국민적으로 엄청난 반발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저 개드립들은 이후 몇십 년 동안을 하이개그의 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받으며 철저하게 씹혔다.

당시 공안부 최환 부장검사가 청와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부검을 진행하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한 것도 진상을 밝히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최환 부장검사 지휘대로 소견서를 받고 실무를 처리한 것이 안상수 전 한나라당 대표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박종철 기념사업회 측은 오히려 이것을 부정하는 상황. 진실을 밝히는 데 앞장섰던 것은 최환 검사였고, 안상수 전 대표는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사건 은폐를 일삼았다는 것. (2011년 3월 시사인 기사) 여하간 그는 96년까지 한겨레 등에 기고하는 등 인권 변호사로서 이름을 남겼으며 지금도 간간히 책을 내고 있다.

사실 검찰이 부검을 강행한데는 경찰에 대한 악감정이 한 몫 했다는 주장이 있다. 박종철 사건이 발생하기 6개월 전에 발생한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때 검찰은 경찰의 요청에 따라 사건을 은폐해야 했다. 지금 경찰과 검찰의 관계를 봐오던 사람들이 생각해보면 이상하지만, 제5공화국 때에는 경찰이 검찰보다 당연하게도 힘이 셌다. 군사정부는 발로 뛰고 현장에서 직접 사건을 접하는 경찰에 직통 연락을 한 탓. 당시에도 여전히 수사권 및 수사지휘권은 검찰에 있었지만, 29만원이 그랬듯이 법이 정직해봐야 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독재정권 핵심부는 일선에서 반독재민주화세력을 때려잡는 경찰을 훨씬 총애했고, 검찰은 경찰에서 넘어온 사건을 뒤치닥거리하는 수준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당시는 국가안전기획부가 관계기관대책회의를 통해서 경찰, 검찰을 모두 배후조종하고 있었다. 이후 김영삼, 김대중 정권을 거치면서 안기부(국정원)의 노골적인 정치개입과 검찰통제가 사라지고 경찰도 민생치안위주로 재편되면서 생긴 권력의 공백을 검찰이 치고 들어가면서 검찰권력이 현재처럼 비대해졌다.

아무튼 검찰 입장에서는 성고문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경찰 뜻대로 기소유예 처분을 내리고 욕은 자기들이 다 먹었다는 분노가 일어난 상황이었다. 결국 이런 분노가 박종철 사건에서의 부검 강행으로 이어졌다는 주장.

2.2.1 언론에서

이 사건의 최초 보도는 중앙일보였다. 기자가 취재거리를 찾기 위해 검사실을 돌아다니다가 어떤 검사가 "경찰들 큰 일이야"라고 운을 뗐고 사건의 냄새를 직감한 기자가 그 사건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척 검사의 말에 맞장구를 쳐서 대충 내용을 빼냈다고 한다.

자세한 비화는 이렇다.(출처 : 박선욱씨의 글)

1987년 1월 15일 아침, 대검찰청 공안4과장 이홍규는 실로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공안부장 티타임에서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어제 아침 대학생이 경찰 수사를 받다가 죽었다는군.”
“네? 그게 정말인가요?”
“이 일은 절대 외부에 발설하면 안 돼. 다들 입 조심해!”
공안부장은 팀원들에게 단단히 함구령을 내렸다. 참석자들은 모두 가슴에 무거운 납덩어리를 매단 듯 중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매일 회의를 겸해 차를 마시는 이 시간은, 지나간 여느 날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날만은 자신이 알 수 없는 진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속도감과 아득함을 동시에 느꼈다. 티타임이 끝난 뒤, 10층 사무실로 돌아온 이홍규 과장은 가슴속 양심의 소리가 격렬히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것을 애써 누르고 있었다.
‘어린 학생의 죽음을 이렇게 덮어두어도 되는가? 그것은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르는 짓 아닌가?’
그는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그동안 검찰이 권력의 눈치를 봐왔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렇게 진실을 묻어둔 채 넘어가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는 윗사람들의 결정에 그냥 따르기가 무척 괴로웠다. 오전 회의를 마친 뒤, 내내 서성이며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1분, 1초가 흐를수록 진실의 무게가 태산처럼 자신의 존재를 압도해오고 있었다.
오전 9시 50분, 중앙일보 사회부의 신성호 기자가 찾아왔다. 이 과장은 차나 한 잔 하라며 자리에 앉혔다. 법조계 출입 6년차인 신 기자는 서소문동 검찰청사를 매일같이 드나들어 이 과장과는 오랜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편이었다.
“경찰들 큰일났어.”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이 과장이 불쑥 내뱉었다. 뭔가 긴급한 일이 터졌다는 느낌이 꽂혔다. 자칫 서두르다가는 줄기를 놓칠 수 있었다. 그는 상황을 알고 있다는 투로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경찰들이 요즘 너무 기세등등했거든요.”
신성호 기자는 이날 그가 딥 스로트(deep throat), 즉 내부 비리를 고발하는 익명의 고발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과장은 어제 경찰 조사를 받던 학생이 죽었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털어놓았다.
“서울대생이라지, 아마? 그 대학생이?”
이어지는 그의 말이 천둥처럼 들렸다. 하지만 신 기자는 태연한 얼굴로 대화를 이어갔다.
“어디서 죽었대요?”
“남영동이라던가?”
말을 마치자, 이홍규 과장은 가슴속 바윗돌 하나를 덜어낸 것처럼 후련해졌다.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신 기자의 눈에 언뜻, 살아 꿈틀거리는 기사의 몸통이 보였다. 남영동은 치안본부 대공분실을 의미했다. 남영동은 이 사건의 뇌관이었다. ‘경찰 조사를 받던 서울대생이 죽었다.’는 게 이 사건의 핵심이었다. 여기에 뇌관을 집어넣으면 어마어마한 메가톤급 문장이 되었다. 그 후폭풍의 범위는 아무도 측량할 수 없었다. ‘남영동에서 조사 받던 서울대생이 죽었다’는 것은 곧 ‘고문에 의한 사망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군사독재 시절의 은유가 직유로 바뀔 절호의 타이밍이었다.

신성호 기자는 대검찰청을 나온 뒤, 데스크인 이두석 사회부장에게 곧장 전화했다.
“이 부장,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이 갑자기 죽었답니다.”
“뭐라고? 그거, 큰일이군. 이봐, 신 기자. 중앙수사부와 서울지검에 가서 고문 사실 여부와 사망자 인적 사항을 철저히 확인해봐.”
전화 통화를 끝낸 두 사람은 바삐 움직였다. 이 부장은 서울대 출입기자와 부산 주재기자에게 각각 학적부 조회, 가족관계 확인을 지시했다. 신 기자는 곧장 중앙수사부 1과장 이진강 부장검사에게 달려갔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대뜸 이 부장검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조사받던 대학생이 죽었다는데, 고문 아닐까요?”
“가능한 일이지만 속단할 수는 없지.”
“다른 데도 아니고 남영동이잖아요.”
“경찰이 쇼크사로 보고했다잖소. 조사를 더 해보면 알겠지.”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이진강 부장검사의 표정에 당황한 기색이 비치며 말꼬리가 처졌다. 중앙수사부 사무실을 나온 신 기자는 서울지검으로 발길을 돌렸다. 서울지검은 공안사건 보고를 받고 처리하는 곳이었다. 그는 최명부 1차장 검사를 만나 따지듯이 물었다.
“젊은 청년이 쇼크사했다는 걸 믿을 수 있어요? 노인도 아닌데요. 고문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 검찰이 직접 수사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최 차장은 난감한 얼굴이었다. 사실 확인을 해주는 대신 굳은 표정으로 한 마디 했다.
“당신, 조금이라도 기사를 잘못 쓰면 곤란해. 책임을 피하기 어려울 걸.”
신 기자는 쐐기를 박는 듯한 최 차장의 말을 어깨로 받으며 사무실을 나섰다. 오전 11시 30분, 그의 다음 행선지는 서울지검 공안부 김재기 검사실이었다. 신 기자는 취재수첩을 펴들고 사망한 학생의 인적 사항 확인에 들어갔다.
“검사님, 경찰 조사를 받다 사망한 서울대생 이름이 뭔가요?”
김 검사는 신 기자가 이 사건에 대해 거의 다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선선히 대답해주었다.
“박종, 뭐라고 했는데…….”
“학과는요?”
언어학과 3학년.”
그는 숨 가쁜 오전 취재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의 손에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진실의 조각들이 쥐어져 있었다. 서둘러 발품을 판 보람이 있었다. 데스크에도 각 주재기자와 출입기자들의 보고가 이어졌다. 학생의 이름은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박종철이었다. 부산 가족들과도 통화가 이루어져 가족관계 확인도 마쳤다. 가족들은 경찰의 연락을 받고 서울로 떠난 뒤라서 부재중이었다. 이제, 신성호 기자의 머릿속에는 조각조각 나뉜 진실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었다. 그는 기사를 작성한 뒤 데스크에 전화했다.
“신 기자, 시간 없으니 기사 쓴 것 지금 불러줘.”
그가 기사를 불러주자 데스크가 받아 적기 시작했다.
“14일 연행되어 치안본부에서 조사를 받아오던 공안사건 관련 피의자 박종철군(21.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이 이날 하오 경찰조사를 받던 중 숨졌다. 그러나 검찰은 박군이 수사기관의 가혹행위로 인해 숨졌을 가능성에 대해 수사 중이다.”

데스크에서 기사를 모두 확보한 시간은 오후 12시, 점심시간이었다. 편집국에 비상이 걸렸다. 석간 초판 인쇄는 이미 끝난 뒤였고, 이제 막 돌판(1.5판) 인쇄가 돌아가고 있었다. 인쇄소 안에는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바퀴 소리 같은 규칙적인 기계음이 가득 했다.
“윤전기 세워!”
금창태 편집국장대리가 인쇄소에 직접 가서 지시했다. 윤전기가 일시에 멈췄다. 그는 신성호 기자가 쓴 속보성 기사를 사회면에 2단 기사로 집어넣었다. 윤전기를 돌리라는 그의 지시에 따라 윤전반의 기사들이 신속히 움직였다. 가동을 다시 시작한 윤전기에서 거친 쇳소리가 들렸다.
1987년 1월 15일 오후 3시 30분, 가판대에 쏟아져 나온 《중앙일보》가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특종이었다. 사람들은 커다란 활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死).”
주먹만 한 제목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표정은 경악 그 자체였다. 이 기사는 바야흐로 온 세상을 폭풍 속으로 휘몰아갔다. 국내 신문들이 다투어 후속 보도를 내보내는 사이, 《AP》《AFP》 등 서울발 외신의 긴급 타전이 이어져 박종철 군 사망 소식은 전 세계에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신문이 가판대에 깔린 뒤, 편집국에는 전화가 빗발쳤다.
“기사 당장 안 빼?”
맨 먼저 문공부 홍보조정실 담당자가 금창태 《중앙일보》 편집국장대리에게 전화해 대뜸 욕설을 퍼부으며 항의했다. 문공부는 ‘보도지침’을 충실히 이행하는 정권의 나팔수였다. 강민창 치안본부장도 뒤이어 전화를 걸어 핏대를 세웠다.
“그 기사 오보야, 오보!”

하지만 진실을 언제까지나 은폐할 수는 없었다. 다급해진 경찰은 긴급 대책회의를 연 뒤, 오후 6시에 대국민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러나 그 뒤 중앙일보는 후속 보도에 소극적이었고 동아일보가 사회면에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2.3 수뇌부의 사건 은폐 기도

보도 다음날인 1월 16일 경찰총수인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직접 기자회견에 나와서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라는 희대의 개드립을 날렸으나....

민심이 폭발하자 정권은 겨우 4일만에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는 견해를 뒤집고 고문이 있었다면서 고문 경찰 2명을 구속하고 김종호 내무부장관 및 강민창 치안본부장을 전격 해임하였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일선 경찰들의 의욕이 너무 앞서서 사람을 죽이냐? 매번 일선 반동분자의 짓이라고 하는 어디하고 다를 게 없네 벌어진 과잉행동으로 물타기하면서 고문에 가담한 경찰과 지휘계통을 축소은폐하였다. 그리고 후임 내무부장관으로 군 출신 강경파로 정권핵심인 정호용을 임명해서 이 사건으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2.4 사건 축소 폭로

하지만 당시 수감 중이던 민주화운동가 이부영 (훗날 열린우리당 의장)이 사건이 축소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를 휴지에 적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 전달하여서 외부에 알려지게 된다. 정말 우연히도 이부영이 수감된 교도소 옆방에 고문경찰관 2명이 들어온 것이다. 이부영의 증언에 따르면 옆방에서 계속 우는 소리가 들려서 친분이 있는 교도관을 통해서 알아보니 '사실은 고문경찰관이 더 있는데 우리만 잡혀왔다. 자기들만 모두 뒤집어쓰게 됐다.' 라는 진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당시 군부독재 정권시절에는 교도소에 들어온 반독재민주화운동가들에게 우호적인 교도관들이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 대놓고 표현은 못해도 이런 교도관들이 은근히 여러 가지 편의를 봐주었다고. 그리고 이런 교도관 중에 한명이 사건이 축소은폐됐다는 것을 이부영에게 알려주었고, 이부영이 은밀하게 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문서는 또 다른 교도관 1명을 통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김승훈 마티아 신부에게 전달되었다.[5]

또한 당시 검안의였던 중앙대학교 의과대학 오연상 교수는 박종철이 물고문에 의해 죽었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 박종철은 남영동 대공분실이 아닌 병원에서 숨졌다고 조작하여 은폐하려는 경찰의 음모를 알아채고 중앙대병원 측에 시체를 들어가지 못하게 하라고 요청하였다. 당연히 같은 죽음이라도 고문실에서 사망과 병원 응급실에서 치료 중 사망은 뉘앙스 자체가 다르다. 결과적으로 박 군의 시신은 경찰병원에서 사망판정을 받는다.

경찰은 이후 오연상 교수에게 수사관 3명을 붙여 감시하였고, 그 다음날(15일)에도 감시했으나 오 교수는 화장실에서 언론사 기자를 만나서 박종철이 고문으로 죽었음을 알렸다. 소리소문없이 은폐될 수도 있었던 박종철 사건은 한 의사의 양심으로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상황을 알고 싶다면 여기를 클릭.

하지만 오연상 교수는 이후 신길동 대공분실(당시엔 신길산업으로 가장하였음)에서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고 그 옆에서는 비명소리가 연거푸 들려왔는데 박종철을 고문하던 수사관들을 조사하는 소리였다고 한다.

오 교수는 "참 이상한 세상이다. 박종철 군을 고문해서 죽이고 이번엔 그 수사관들이 고문을 받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하였다. 근데 1차로 밝혀진 범인(조한경 경위, 강준규 경사)은 사실 축소된 것이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폭로에서는 마치 1차로 밝혀진 범인들이 기껏해야 방조 내지 감독상 책임이 있을 뿐 고문과 직접 관계 없는 무고한 사람인 것처럼 되어있지만 이것은 이부영의 옥중서신이 1차로 밝혀진 범인들의 고백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후에 그들도 고문에 적극 가담했음이 밝혀졌다. 강진규 경사의 경우 아버지가 '정말 네가 사람을 죽였느냐, 그렇다면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다그치자 변명하기 위하여 '사실은 내가 죽이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고 폭로자 이부영은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 안상수 검사도 "범인 조작은 없었다. 범인이 더 있다면 몰라도"라고 은근히 암시를 했다고 한다.

경찰 및 안기부 상층부는 이들이 고문치사에 책임을 지고 구속되는 것에 불만을 품자 상관인 박처원 치안감을 통해 5,000만 원이 들어있는 예금통장 4개, 즉 2억을 준비해 2개씩 주고 조용히 입 다물고 있으면 2개씩 1억 원을 주고 곧 가석방으로 꺼내주겠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1억원이면 지금도 큰 돈인데 80년대라면? ㅎㄷㄷ.[6] 이 돈의 출처를 묻자 경찰 동료들이 조금씩 모았다고 했다. 누가 봐도 안기부 자금이었지만 믿을 사람은 없었지만 밝힐 사람도 없었기에 그냥 넘어갔다. 어차피 사건의 핵심은 이게 아니다. 그리고 이들을 구속하기 위한 기상천외한 호송작전이 진행되었는데 위장 간판을 단 2개의 미니버스에 20명의 경관들이 똑같은 점퍼를 입고 모자를 깊이 눌러쓴 채 호송됐다. 대공수사관의 얼굴을 북한에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라고 둘러댔지만 믿기에는 판타지 같은 사실이었다.

더불어 정권 내 알력이 이것의 은폐를 막았다는 견해도 있다. 10월 유신 이후 최종길 교수 의문사나 장준하 의문사 등 숱한 의문사들이 어둠에 묻혀져 경찰은 고문을 마음대로 자행하는 판국이었다. 그런데 당시 2인자이기는 했으나 전두환의 심복인 장세동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과 후계자 경쟁을 해야 했던 노태우 세력은 내각제를 추진해 주도권을 쥐려 했고 장세동 측은 이에 고문사실을 흘려 이를 수포로 돌아가게 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의 파문이 크게 번지면서 오히려 장세동에게 불리하게 작용했고 대국민적 저항을 촉진시키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것이 앞에서 말한 비밀서신을 통해 세상에 은밀히 전해졌고 이를 공개한 사람들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었다. 1987년 5월 18일 5.18 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 미사에서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김승훈 마티아 신부의 폭로로 진상이 드러난다. 처음 제5공화국은 보도지침과 언론통제를 통해 이를 은폐하려고 했다. 현재 네이버의 옛날 신문에서 1987년 5월 19일자 신문을 검색하면 아주 조그맣게 기사가 나온다. 자세하게 들여다보지 못하면 거의 찾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 후에야 비로소 크게 보도가 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궁금하신 분들은 한 번 직접 찾아보시라.

5월 21일, 정구영 서울지검 검사장이 추가적으로 3명의 범인이 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당시 정 검사장의 회고에 따르면 수사 중 3명의 공동정범이 있음을 인지했고 이를 서동권 검찰총장에게 보고했고, 서 총장은 얼굴이 새파래지더니 당분간은 우리만 알고 있자고 했다고 한다. 덮을 생각이 없었고 3명의 사법처리를 타진하고 있을 때,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폭로했다는 것이다. 사실인지의 판단은 알아서.

결국 5월 22일, 경찰은 공동정범 3인을 스스로 연행해 서울지검으로 데려왔고. 공동정범 3명(황정웅 경위, 반금곤 경장, 이정호 경장)이 구속되고 그 뒤 이를 은폐하도록 지시한 상부 간부 4명(강민창 전 치안본부장(현재의 경찰청장)[7], 박처원 치안감, 유정방 경정, 박원택 경정)이 구속된다.

2.4.1 개각 단행

무고한[8] 대학생을 고문해서 죽이고도 모자라, 진실을 은폐하고 사건을 조작하려고 했다는 사실에 일반인조차 분노에 들끓었고, 따라서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전두환 정권은 노신영 국무총리, 장세동 국가안전기획부장, 정호용 내무부장관[9], 김성기 법무부장관, 서동권 검찰총장, 이영창 치안본부장 등 관계자기관장 전원을 경질하는 개각까지 단행하기에 이르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었다. 이후 6월 항쟁이 발발, 제5공화국은 그 명을 끝마치게 된다.

하지만 당시 경질된 고위인사들은 그뒤에도 잘먹고 잘살고 있다. 김성기 법무장관은 대한법률구조공단 이사장, 주택은행 이사장으로 출세했다. 사건 은폐축소를 시도했던 정구영 검사장은 노태우 정권에서 검찰총장이 되었고, 이를 진두지휘했던 서동권 검찰총장은 안기부장으로 3년 6개월 간 재직하면서 정권의 2인자 역할을 하였다. 정호용도 13대, 14대 모두 대구광역시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돼서 정치활동을 이어갔다. 이영창 치안본부장도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경북 경산-청도에서 당선되었다. 박처원 치안감은 출소 후에 고문경찰관들의 대부역할을 하면서 이근안의 은신도피를 지원했고, 단 한 마디 사과도 하지 않았다. 고문치사사건의 담당검사였던 박상옥은 2015년 현재 대법관 후보자로 내정되었고 현재 대법관에 임명되었다. 결국 박종철 군 사건으로 타격을 입은건 말단 경찰관들 몇 명뿐이다.

3 기념비

현재 서울대학교 인문대학과 중앙도서관 사이에는 박종철이 당했던 고문을 형상화한 박종철 열사 기념비와 흉상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월이 흐르면서 새로 들어오는 학생들은 그게 박종철 기념비인지 뭔지 전혀 모르는 상태. 사실 대다수의 학생은 관심도 없을 것이다. 일부 단과대에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으로 학교 탐방을 할 때 꼭 지나가는 코스이기는 하다.

당시 총학은 NL계열이 주로 장악했었기 때문에 NL계열의 '열사'들만 추모비를 크게 건립하고 박종철은 사안이 중요함에도 PD계열이라 작게 건립했었다는 카더라도 존재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카더라로 서울대학교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서울대 총학은 NL이 약세를 보이는 경향이 있으며 특히나 기념비가 제막된 97년 총학생회는 21세기 진보학생연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전에도 PD와 21세기가 총학을 장악하고 있었다. 규모가 작다고 해도(사실 별로 작은 것도 아니지만) 4.19탑을 제외하면 다른 민주화 관련 추모비는 돌에 이름과 추모사를 적은 단순한 것이 많으며 흉상까지 있는 것은 박종철 열사 추모비 뿐이다. 또한 길가에 있는 추모비는 박종철 열사 추모비 뿐이라 접근성으로 치면 4.19 탑보다 월등하다. 애시당초 박종철 열사는 NL도 PD도 아니었고, 굳이 계파를 구분하자면 지금은 사라진 CA(제헌의회)에 속한다.[10]

모교인 혜광고등학교에도 펜촉 모양의 기념비가 신관과 본관 사이(정확히 말하면 신관과 연결된 본관 출입구 앞)에 펜촉 모양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4 기타 반응

당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께서 정권을 꾸짖었을 적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야훼 하느님께서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시니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고 잡아떼며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창세기의 이 물음이 오늘 우리에게 던져지고 있습니다.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 아들, 너희 제자,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탕'하고 책상을 치자 '억'하고 쓰려졌으니 나는 모릅니다.", "수사관들의 의욕이 좀 지나쳐서 그렇게 되었는데 그까짓 것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 국가를 위해 일을 하다 보면, 실수로 희생될 수도 있는 것 아니오?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우리는 모르는 일입니다."라고 하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

- 故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박종철 열사 추모미사

5 박종철의 죽음 후

크라잉 넛의 노래인 지독한 노래에 나오는 가사 "탁 치니 억 죽고 물 먹이니 얼싸 죽고 사람이 마분지로 보이냐"는 이 사건을 비꼰, 아니 깐 것이다. 참고로 당시 동아일보가 사용한 기사문이라고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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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아트 작가 안수진은 자신의 작품 '스테레오 수조'로 이 사건을 깠다.[1] 수조에 있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Mister Sandman'과 고문당하는 사람을 형상화한 스피커[11]에서 나오는 '몰라, 몰라' 하는 목소리가 대비되는 것이 압권.

안상수 前의원은 당시 이 사건의 담당검사였고, 이후 문민정부 하에서 신한국당(이후 한나라당)으로 자신이 주동적으로 사건 은폐를 막았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조국 서울대 교수는 안상수가 아니라 그 상관인 최환 부장검사가 박종철 시신의 부검을 지시하여 이의 은폐를 막았다고 반박했다.

가끔 이 일을 천하의 개쌍놈이자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떨친 이근안이 했다고 알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이 일만은 정말 이근안과 무관하다. 당시 이근안은 경기경찰청 대공분실장으로 경기지방경찰청 소속이었고 이 사건은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일어났다. 그렇다고 까지 말아야 할 일은 아니다. 더욱 가열차게 까야 하고 해당항목을 보면 더 잘 깔 수 있다.

영화 변호인에도 박종철 군의 추도 사건이 등장하였다. 주인공인 송우석과 박진우가 영정을 들고 최루탄을 맞으며 추도행사를 하는 장면은 영화의 명장면 중 하나. 이후 송우석은 사람들을 선동한 혐의로 구속되지만, 부산에 있는 변호사 142인중 99명이 전부 출석하여 송변호사를 변호하기로 한다. 이 사건은 실제로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있었던 사건이다.[12]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박종철이 고문당하고 죽은 이유가 된 운동권 '선배' 박종운은 놀랍게도 2000년에 한나라당에 입당해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지구당위원장이 되었다. 하지만 박종운은 16대~18대 총선에서 내리 3연패를 하며 '오정의 낙선왕'이라는 야유와 함께 정계를 떠난다.[13]

여담이지만, 여기에서 진실을 밝힌 오연상, 황적준은 장기려박사와는 인연이 깊다. 먼저 오연상 교수는 장기려 박사의 손자가 중앙대 의대 학생이란 점이 있으며, 황적준 교수는 이보다 더 직접적으로 스승이 장기려 박사 제자이기도 한 대한민국 최초 법의학문국진이다. 더욱이 국과수에 들어오기 전에는 장기려 박사가 영향을 많이 미친 고신대 의대에서 있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민주주의 형성에 장기려 박사가 공헌한 숨겨진 업적이라도 있지 않는가란 시각이 존재한다.

모교인 혜광고등학교에 2002년 기념비가 설치되기도 했다.

2012년, 한겨례에서 25주년을 기념하여 그때 그 사람들의 행적을 정리한 기사가 나왔다. 위에 정리된 내용과 거의 유사하지만 참고할 것. #
  1. 이 건물은 대한민국 대표 건축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곤 하는 故 김수근의 '작품'이다. 외관상으로도 보기 좋을 뿐만 아니라 고문 당하는 사람에게 빛이 적게 가도록 5층 창문을 작게 설계한 것부터 시작해서, 고문자/피고문자끼리 마주치지 않도록 방문을 교차 배치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가히 실용적으로 악랄하면서도 예술적으로 아름답도록 설계한 하나의 마스터피스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는 경찰 인권센터로 사용 중. 인권센터가 자리잡은 배경에는 경찰의 인권유린을 반성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상세한 것은 대공분실 항목 참조. 갈월동에 소재하나, 남영역과 가까워서 남영동으로 더 많이 불린다.
  2. 정확히는 물에 의해 죽은 게 아니라 물고문 와중에 목이 욕조에 걸려 사망. 즉, 욕조가 목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3. 참고로 정호용은 29만원의 친구로 하나회의 핵심 멤버이자, 12.12 군사반란의 주역이며 광주학살 당시 공수부대 지휘관이었던 그 사람이 맞다.
  4. 서울지검 공안부장 최환, 서울지검 형사부 평검사 안상수 등.
  5. 이부영은 훗날 인터뷰에서 이 사람들을 알려지지 않은 영웅이라고 표현했다. 이 교도관들의 신원은 혹시 모를 불이익 때문에 비밀에 부쳐지다가 모두 정년퇴직한 2012년에 처음 공개되었다. 처음 이부영에게 사건의 전말을 귀뜸한 사람은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이었던 안유였으며, 문서를 외부로 운반한 사람은 교도관 한재동이었다. 이 2명은 2012년 박종철 25주기 추모식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6. 참고로 80년대 당시 가장 비싸기로 소문난, 그리고 지금도 유명한 압구정 현대아파트 50평대의 매매가가 1986년 기준 1억 정도였다. 기사참고
  7. 다른 사람과 같이 구속된 것이 아닌 후일 구속됐다.
  8. 당시 박종철 군은 박종운의 소재를 묻기 위한 참고인으로 소환됐고 범인도피죄 혐의도 없었다. 즉 무고하다는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다.
  9. 후임 고건 장관
  10. 원래 1987년까지는 NL vs CA 구도였고, 88년이 지나면서 CA가 해체되고 NL vs PD 구도가 된다.
  11. 평상시에는 물에 고개를 처박고 있다가 관람객이 와서 뒤에 달린 발판을 밟으면 고개를 들고 소리를 낸다.
  12. 노무현 전 대통령 본인이 박종철군 추도 행사를 진행한 건 아니다. 다른 사건에 관련해서 재판을 받았다.
  13. 박종운에게 3연패라는 불명예를 안겨준 사람이 학과는 달랐지만 서울대학교 운동권의 대선배이자 풀무원의 창업주이며, 민선 2~3기 부천시장을 지낸 2016년 현재 5선 국회의원 원혜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