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문서: 대구광역시
1 삼국시대 ~ 남북국시대
대구의 옛 이름엔 다벌(多伐), 달벌(達伐), 달불성(達弗城), 달구벌(達句伐), 달구화(達句火), 대구(大丘) 등이 있다. 모두 어딘가 비슷한 이름인데 한자의 뜻과는 관계없는 고유어의 음차. 이 가운데 물론 달구벌과 대구(大丘)가 가장 유명하다. 고대 가야연맹의 하나인 다벌국, 혹은 달구벌국(혹은 卓國)이 있던 곳이다. 달구벌이라는 말의 어원에 대한 설명은 매우 다양하다. 그 중에 '달구'의 '달'에 "높다", "크다"의 의미가 있고, 신라의 계림사상에서 기원된 새로움 혹은 철기 문화의 상징인 '닭'에서 유래했다는 연구자료가 있다. 그래서 달구벌은 대체로 '크고 넓은 벌판' 정도로 이해할수 있다. 참고로 대구시를 상징하는 새는 독수리이다.[1]
신라 때 신문왕이 이곳으로 천도를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기존 귀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경덕왕 시절인 757년 전국의 지명을 한자화하면서 대구(大丘)로 개칭되었으나 이후에도 달구벌이란 지명이 함께 쓰인것으로 보인다.
2 고려
대구광역시의 지명 문서들에 가면 볼 수 있는 태조 왕건의 안습한 굴욕사가 펼쳐졌던 곳이다 (...)
대구현 지역은 경산부(현 성주군)에 속했다.
3 조선 ~ 대한제국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한자가 공자의 이름인 구(丘)와 같다고 하여 개칭 떡밥이 생겨났다. 영조 때는 반려되었으나, 정조 초기 1738년 대구(大邱)로 한자를 바꿨는데 이 역시 순조 때까지도 함께 쓰이다가 이후 정착했다고 한다. 현재는 물론 대구(大邱)로만 쓴다.
중국어권에서는 간혹 구(邱)와 구(丘)를 헷갈려 "大丘"로 쓴 사례도 있다. 의도치 않게 대구의 옛 이름을 둘 다 뜻이 언덕인데다 현대 중국어 발음에서도 발음(qiu)과 성조(4성)가 같다. 일본어로는 그쪽의 외국어 표기법에 따라 카타카나로 "テグ(大邱)"로 쓰는데 간혹 일반인의 경우 한자를 헷갈려서 글자꼴이 비슷한 "대저(大邸)"로 쓰는 사례도 발견된다.
대구의 진산(鎭山)인 달성산의 이름은 옛 이름 '달구벌'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대구광역시로 편입된 달성군이 정식 행정구역 명칭으로 남아 있어 도시명의 유래를 잇고 있다.
1466년 대구도호부로 승격되었고 1601년에는 경상감영이 설치되었다. 경상감영은 역사가 참 복잡한데, 조선 초기에는 경주부에 있었다가, 태종 7년(1407년)에 경상도를 낙동강을 기준으로 좌/우도로 나누면서, 좌도는 경주부, 우도는 상주목에서 관할하도록 했다. 그러다 여러가지 부작용 때문에 다시 경상좌/우도를 하나로 합치며 경상감영을 상주목에 두었다. 그 후 여러가지 사정으로 분리됐다 합쳐졌다를 반복하면서 성주의 속현 팔거현(現 칠곡군), 대구부, 안동부 등으로 이전하면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다.(...) 그러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선조 29년(1596년) 대구부에 경상감영이 세워졌는데, 왜군의 침략으로 인해 대구부는 아예 개발살이 나고(...) 감영은 안동대도호부로 옮겨갔다. 그러다 1601년, 안동대도호부가 교통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다시 한번 대구도호부에 세워졌고 그 이후로 경상감영은 쭉 대구에 정착하게 되었다. 역사 한번 참 복잡하다 참고로 대구는 경상도(영남) 전체를 보았을 때 거의 정중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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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대구 일대의 행정구역 상황. 현재의 청도군 각북면, 각남면, 풍각면까지도 대구부 관할에 있었으나, 1906년 청도군으로 편입되었다.
1895년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이 23부제로 개편되었을 때 대구부 소재지가 되었다(대구 지역은 대구부 대구군, 현풍군). 1896년 다시 13도제로 바뀌면서는 경상북도 관찰사 소재지가 되었다. 1906년 풍각면, 각남면, 각북면을 청도군으로 이관했다.
4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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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4월 1일자로 실시된 부군면 통폐합으로 인한 대구부와 달성군의 행정구역 상황.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구부는 현재의 중구 일원만 대구부로 남고, 나머지 영역은 현풍군과 통합하여 달성군으로 분리되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달성군 성북면 남부, 달서면, 수성면이 대구부에 편입되었다. 이 때, 성북면 북부(금호강 이북)는 공산면에 편입되었다. 또한 해안면은 동촌면으로 개칭되었다. 이 때부터 공산면과 동촌면은 달성군의 월경지가 되었다. 다사읍과 하빈면의 월경지 선배들
이 당시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라는 이름에 걸맞게 사회주의운동이 강하게 일어났다.
5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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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시 대구부와 달성군의 행정구역 상황.
해방 이후 1949년 대구부(府)에서 대구시(市)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잠깐동안 임시수도로 격상되어 정부기능이 집중된 적이 있었으나 다부동 전투로 북한군이 대구역에 포격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오자 다시 부산에 임시수도 자리를 내주었다.
1958년 1월 달성군 동촌면, 공산면, 성서면, 월배면, 가창면의 5개 면을 대구시에 편입하여 대구시의 영역이 대폭 확장되었다. 이는 자유당 이승만 정권의 게리맨더링이라 한다. 그러나 5년 후...
1963년 동촌면을 제외한 4개 면[2]을 달성군으로 복귀시켜 대구시의 영역은 다시 쪼그라들었다.(...) 이 때 월배면과 성서면의 경계는 1958년과는 다소 달라졌다.[3] 또한 같은 해 구제(區制)가 실시되어 중구, 동구, 남구, 서구, 북구의 5개 구가 설치되었다. 참고로 공산면은 다시 외롭게 달성군의 월경지가 되었다가 월경지 친구였던 동촌면은 대구시에 그대로 남아서..., 1981년 대구직할시 승격 때 재편입되었다. 1975년 10월 서구 원대동 일부, 노곡동, 조야동 및 동구 신암동 일부가 북구로 편입되었다. 동시에 북구로 편입된 원대동 일부는 노원동이 되었고 신암동 일부는 대현동이 되었다. 달성군 월배면은 1979년, 성서면은 1980년에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다. 한편 1980년 동구 남부가 수성구로 분구되었다. 동시에 남구의 남산동과 대봉동 북부가 중구에 편입되고 남구에 잔류한 대봉동은 이천동으로 개칭되었다.
1981년 7월 대구시의 직할시 승격 당시 행정구역 상황.
1981년 7월 대구시가 대구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달성군 월배읍, 성서읍, 공산면 및 경산군 안심읍[4], 고산면[5], 칠곡군 칠곡읍[6]을 편입했다. 1988년에는 서구와 남구의 각 일부를 분리하여 달서구를 설치했다.
1995년 대구광역시로 개편됨과 동시에 경상북도 관할이었던 달성군을 편입하여 하위 행정구역으로 거느리게 되었다. 이 때 달성군보다 차라리 연담화가 잘 되어 있는 경산시를 편입하는게 더 나았을 선택이라는 말이 있다. 실제로 1995년 칠곡군 동명면, 지천면 편입과 함께 경산시 편입이 거론된 적이 있다.[7] 달성군이 산지가 많고 지리상으로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어서 경산시를 편입했더라면 더욱 좋았을 거라며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당시 경산시는 이미 시가지가 형성되어있어 경산시를 대구광역시로 편입시키기는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