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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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국대한민국 임시정부
탐라국
가야
6가야
금관가야대가야아라가야성산가야소가야고령가야
전기 가야연맹 지도
공식명칭가야(伽耶)[1], 임나(任那)
위치지금의 경남, 경북, 전남 일대
인구?
수도연맹국별로 존재.
정치체제군주제
국가원수왕(王)[2]
언어마한어, 가야어[3]
종족예맥, (韓)족 등
종교불교, 토착 신앙
통화덩이쇠
존속기간? ~ 562년[4]
성립 이전변한
멸망 이후백제,신라

1 개요

삼한의 하나였던 변한(弁韓)에서 기원한 한반도 남부의 여러 국가의 총칭. <삼국유사>에는 6개의 나라가, <일본서기>에는 10개의 나라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24개 나라가 거론된다. 2세기경에 발전하기 시작하여 3세기에 무역으로 많은 부를 누렸지만, 차차 중앙집권화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과 달리 멸망할 때까지 하나의 통일된 정치단위를 이룬 적이 없었으며, 5세기 후반 이후에는 강대해진 백제신라 두 나라의 사이에 끼어 결국은 하나하나 신라항복 또는 흡수되었다.

2 명칭

현대에는 대표적인 명칭으로 가야(伽倻)로 알려져 있지만 여러 기록에는 수많은 비슷한 명칭이 등장한다. 한자만 다른 가야들, 가량, 가라, 가락, 가기, 구야, 하라, 임나(任那) 등.

임나일본부설 때문에 임나라는 명칭도 부정적인 단어로 인식되지만 "임나" 역시 원래 가야의 한 구성국 및 더 나아가 가야지역 일대를 지칭하는 단어 중 하나로 추정된다.가야일본부설

王驚喜恨相見之晩問其姓名對曰臣夲任那加良人名字頭王曰見卿頭骨可稱強首先生使製迴謝

왕이 놀라고 기뻐하며 그를 늦게 만난 것을 유감스러워 하였다. 그 성명을 물으니 “신은 본래 임나가량(任那加良) 사람으로 이름은 우두(牛頭)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이 “그대의 머리뼈를 보니 강수선생이라고 부를 만하다.”고 하였다.
- 『삼국사기』 열전 강수

大師諱審希俗姓新金氏其先任那王族. 草拔聖枝每苦隣兵投於我國.

대사의 이름은 심희요, 속성은 김씨이니, 그 선조는 임나(任那)의 왕족이다. 풀에서 성스러운 가지를 뽑았으나 이웃나라의 침략에 괴로워하다가 우리나라에 투항하였다.
- 「진경대사탑비문」

다들 금관가야, 대가야, 아라가야 등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XX가야로 불린건 고려 태조 왕건이 가야지역 일대 호족들에게 XX가야라는 명칭을 부여하면서 옛 가야시대 이름인 양 와전된 것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참조해보면,

5.가야
가락기 찬에 이르기를

"한줄기 붉은 끈이 드리워지며/둥근 달 여섯 개가 떨어졌네./다섯은 각기 제 고을로 돌아가고/하나가 이 성에 머물렀네"

라고 했다. 그 하나가 수로왕이 되고 나머지 다섯은 각기 5가야의 임금이 되었으니, 금관국이 이 다섯 가운데 들어가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본조의 사략에는 금관까지 아울러 그 수에 넣고 왕명을 기록했으니 잘못된 것이다.

아라가야와 고령가야와 대가야와 성산가야와 소가야다.또 본조 사략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태조 천복 5년 경자(940)에 다섯 가야의 이름을 고쳐 1은 금관, 2는 고령, 3은 비화로, 나머지 둘은 아라와 성산으로 했다.

실제로 당시에는 XX국이라는 명칭을 썼으며 그 이름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일본서기, 삼국지 위지 동이전 등의 중국 역사서들에 각각 조금씩 다르게 등장한다.

3 제국설과 연맹설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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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맹설에 근거하여 제작된 가야의 지도.

가야 제국이지만, '황제'의 제국(帝國)이 아니라 '여러 나라'라는 의미의 제국(諸國)이다. 가야에미리트주로 가야 연맹[5]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위치상으로는 현재의 경상남도, 경상북도 서부 일대가 이에 해당된다. 그런데 고고학적으로 최대 영역은 전라도 동부 일부(대략 소백산맥까지)까지로 추정된다. 7차 교육과정의 일부 고교 국사교과서에도 반영되어 낙동강 서부의 경상도 수준으로 나타난 지도보다 많이 확장되었다. 전라북도 남원시에서도 가야의 유적이 나왔는데 이는 후대의 대가야가 백제가 혼란한 틈을 타 차지한 것.

지금까지 가야의 정치 체제로 이병도 교수가 처음 주창한 '연맹 왕국설'이 정설이었다. 여러 작은 나라들이 외부와 공동 대응하는 연합체 정도로 여겨졌다. 하지만 2007년 이후에는 '가야 제국(諸國)설' 쪽으로 정설이 변경되고 있다. 이 학설에 따르면 가야는 여러 소국들이 연맹 형태로 연결된 정치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그냥 이 지역에 속하는 소국들을 총칭하는 이름일 뿐이라는 것. 장기간의 연맹 체계는 불가능하다는 점과 연맹 관계를 뒷받침할 근거가 부족하다는 점을 이유로 등장한 학설이다. 1990년대 이후 고고학적 발견의 진전으로 서서히 학계의 주도권을 장악해 나가고 있다.

4 역사와 특징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변진전에 처음 등장하며, 신라 등의 주변국에서는 이들 나라를 통틀어 가야(加耶) 혹은 가라(加羅)라고 불렀던 듯 하나, 가야는 본래 가락국(駕洛國), 즉 금관국(金官國: 지금의 김해)의 이름임이 확인되고 있다. 참고로 일본어에는 조선이나 한국 등의 한반도 국가를 의미하는 한자인 한(韓)을 から(카라)로 부르는 독법이 있다. 한자의 뜻을 떠나 발음으로만 따진다면, 이를 통해 고대 일본인들이 가야와 한(韓)을 동일시했거나 적어도 연관이 깊은 것으로 간주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이 지역을 통틀어 미마나(任那, 임나)라 부르기도 했다. 임나일본부설 때문에 임나란 말도 한국에서는 금기시 되는 것 같지만, 임나 자체는 단순한 지역명으로 추정된다. 관련되어, 임나가 대마도 등이었다는 설도 있다.

가야의 유적 중에서 대표적인 것으로 제공정이 이루어졌던 유적이 있다. 이것은 동북아에서 가장 오래된 모든 제철과정이 포함된 유적이다. 또한 화폐가 철로 사용되고 중국, 일본 등지에서마저 철을 사러 오는 등 현재의 듣보잡 기믹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천년전 가야의 주요 세력권이었던 김해 평야는 당시 바다와 많은 섬으로 된 다도해였다고 한다.[6] 배후의 산지에서 나는 철과 바다와 인접한 지역적 특성 탓에 가야인들은 손쉽게 철을 해외로 수출할 수 있었다.

철을 수출했고 철기를 다량으로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은 군사력과 경제력이 모두 상당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철을 낙랑군에 팔아 경제력과 군사력을 유지하고 중국으로부터 선진문물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중국을 통일한 서진팔왕의 난영가의 난 콤보로 매우 혼란스러워지고 낙랑군과의 관계가 끊어지다시피 하자 고구려미천왕은 낙랑군을 공격하여 313년에 낙랑군과 314년에 대방군을 멸망시키고 자국영토로 편입했다. 철을 사가던 낙랑군이 멸망하자 가야의 철수출이 막힘과 더불어 가야가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통로도 없어져 결국 이 이후로 계속 쇠락하게 되었다.

풍습으로는 어린 아이가 출생하면 돌로 그 머리를 눌러서 납작하게 만드는 풍습이 있었다. 편두 항목 참조.

와 가까운 지역이기 때문인지 남녀가 문신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삼국지).

고분이 제법 많이 발견된다. 창녕 송현동 고분군에서 발견된 순장된 시녀로 추측되는 여자의 경우엔 152cm에 21인치 허리의 팔등신 미녀다. 수장고에 고이 모셔놓은 실물은 미인이기 보다는 그냥 복원에 충실한 것 같다 신체비율이 8등신으로 보이지 않고 그냥 키 작은 여성 딱 그 사이즈로 정말 정직하게(...) 복원되었다.

김해 대성동, 함안 말이산, 경북 지산동 고분군을 통합한 '가야고분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우선등재 추진대상으로 선정되었다.

가야 연맹이 몰락기에 접어들었을 때 여전사들이 전쟁에 나선 흔적이 있다. 흠좀무. 곽재식의 소설 역적전에 서는 이에 대한 반론을 의식해서인지, 직접 가야 여전사들이 등장하지는 않고 그냥 가야에는 여자들이 배우는 검술이 생겼다더라...하는 식으로 가능성만을 언급하는 식으로 되어 있다.

여담이지만 공식적으로 한국사 최초로 불교를 들인 국가이다.[7]
단,공식적인 기록으로만 따져도 가장 늦게 잡아도 고구려, 백제 다음으로 한국사에서 불교를 정식으로 수용한 3번째 국가다.[8]

4.1 주거

김수로왕 당시에는 수로왕도 초가로 집을 지었다. MBC드라마 김수로의 화려한 궁궐백성들의 초가집은 가볍게 무시해주자. 사실 삼국시대 초기에는 기와라는 것은 새로운 것이었다. 가야에서 기와집이 본격적으로 들어선 것은 가야 말기부터다.

왕도 초가집에서 산 만큼 평민들의 주거 역시 그리 발달하지는 않았다. 땅을 파고 들어가 벽 없이 지붕만 덮고 사는 수혈가옥[9]과, 기둥으로 들어올려진 고상가옥을 같이 만들고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서(晉書)>의 <동이전(東夷傳)변진(弁辰)조>에 "여름에는 소거하고 겨울에는 혈처한다(夏則巢居冬則穴處)"라는 글이 있어 소거라는 말이 고상주거함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짐작되며, 실제로 가야지방에서는 고상식 창고 건물 모양의 집모양 토기(가형토기)가 발굴되었다.

5 임나일본부설

일본제국이 한반도 남부를 통치했다(남조선경영론)는 임나일본부설의 핵심이 되는 지역이기 때문에, 광복 이전에는 임나일본부의 입증을 위해서만 연구되었고 광복 이후 80년대까지는 감히 건드리지도 못하는 안습의 시기를 거쳐왔다. 그 과정에서 학계를 지배했던 것은 초기의 김해의 금관국 중심의 연맹체가 금관국 멸망 이후 후기의 대가야 중심으로 이동하였다는 학설이었다. 그런데 90년대 이후 자신감을 다소 회복한 학계에서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한 결과, 이전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발굴 결과가 보고되고 있다. 현재로서는 굵직굵직한 발굴 몇개가 마감될 때마다 학설이 생겼다가 뒤집어지는 양상도 보이고 있다. 대표적으로 대성동 13호 고분에서 일본 지배자들의 무덤에서만 발굴되는 일본계 유물인 파형동기(경남 FC의 엠블럼으로 쓰이고 있다.)가 발굴된 일이다. 심지어는 일본의 파형동기들보다도 훨씬 크다(…) 그래서인지 2011년 현재까지 고대 일본과 가야의 관계에 대해 상당한 논란이 일고 있다. 때문에 아래 각 지역에 대한 소개에도 이전의 학설과 현재 학설이 뒤엉겨 있다. 어느쪽이 옳다고 확실하게 단언하기 곤란한 관계로 약간의 추가는 하지만 삭제는 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최근에는 금관국이 고구려의 침략으로 5세기 초에 멸망했다는 주장에 정면으로 반박되는 유물까지 나왔다. 금관국 유적인데, 5세기 후반부의 것이라고.

다만 어느 쪽이든 일본의 왜국이 임나일본부설의 주장따나 가야를 직접 지배했을 가능성은 낮다. 일반적으로는 백제가 가야를 오랫동안 자신들의 세력권에 넣었고, 같은 백제 세력권이었던 왜가 그 기록을 차용해복사 붙여넣기해서 관계를 뒤집어 일본서기를 꾸몄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일본서기에는 4세기 근초고왕의 시기에 백제의 장군으로 가야를 정벌한 목라근자라는 장군이 나온다. 이 때 가야가 백제의 세력권으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목라근자 기록에서 보이는 남가라는 금관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변진 지역에서 독보적인 국가였던 금관국이 가라라는 이름을 대가야에 넘겨주고 남가라로 통칭되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더 후대의 관념이 부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노중국은 이에 대해서 백제를 중심으로 가까운 고령을 가라로, 먼 김해를 남가라로 생각하는 관점이 반영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후대의 관점이 반영되었다는 것에는 동의하고 있다. (노중국 (2006), 4세기 가야제국과 백제의 관계). 왜국이 이것을 자신들의 기록으로 편입하여 진구 황후의 기록 등으로 바꿨을 수가 있다. 진구황후는 3세기의 인물로 기록되어 있어 시기가 차이나는 것은 고질적인 이주갑인상 문제다. 보통 가야(및 백제-신라 등지)에서 건너가서 일본에 자릴잡은 한반도 출신 이주민들이랑 가야인들의 제휴, 일본인의 집단거주지 및 일본의 가야 외교부 내지는 가야랑 일본이 문화-군사력을 서로 주고받은 전형적인 기브 앤 테이크 관계로 여겨지고 있다. 아주 잘해봐야 일본의 군사적 외교적 영향력이 가야지방에 일시적, 부분적으로 끼쳤을 것이다.

게다가 일본서기에서 보여지는 성왕의 가야에 대한 재건 의지를 보면 6세기 경 가야는 친백제계 지역이었고, 고구려에게 박살난 가야를 수습하여 신라에 연합하여 대항하려던 정황이 엿보인다. 그러나 결국 성왕의 죽음으로 백제는 가야에 대한 주도권을 잃고, 신라가 가야를 흡수하게 된다.

다만 왜국이 가야와 친밀했던 점은 사실로 보인다. 고고학적으로 봐도 가야에서 건너간 유물이 많이 나오며, 인적 교류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일본부라는 정체 불명의 기관은 같은 세력권이었던 가야와 왜국이 서로 혹은 백제랑 연락하기 위한 외교창구 정도에 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서기는 긴메이 덴노기에서 성왕과 왜국의 관계를 거꾸로 기술하여 일본의 종주권을 강조했다는 의심을 많이 받는다. 당시 정황을 고려하면 실제로는 일본왕보다는 백제왕이 가야제국 모두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타당하기에 왜가 가야를 지배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6 가야연맹 구성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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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진도 12개국으로 되어 있다. 또 여러 작은 별읍이 있어서 제각기 거수(渠帥)가 있다. (그 중에서) 세력이 큰 사람은 신지라 하고, 그 다음은 험측(險側)이 있고, 다음은 번예(樊濊)가 있고, 그 다음은 살해(殺奚)가 있고, 다음에는 읍차(邑借)가 있다. <이저국>·<불사국>·<변진미리미동국>·<변진접도국>·<근기국>·<난미리미동국>·<변진고자미동국>·<변진고순시국>·<염해국>·<변진반로국>·<변진악노국>·<군미국(변군미국)>·<변진미오사마국>·<여담국>·<변진감로국>·<호로국>·<주선국(마연국)>·<변진구사국>·<변진주조마국>·<변진안사국(마연국)>·<변진독로국>·<사로국>·<우유국>이니 '번', '진한'을 합쳐 이십사개국이다. 이 중에 큰 나라는 4~5천호나 되고, 작은 나라는 6~7백호가 되어 총 호수가 45만호가 된다.
-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조

위의 기록에 따르면 변진지역에는 24개 국가가 있었던 듯 보이나, 개중에 '사로국'(신라) 등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볼때 진한의 국가들까지 한꺼번에 센 듯 하다. 일반적으로 앞에 변진이 붙은 12개 국이 초기의 가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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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기 가야 연맹- 김해 금관국(금관가야) 중심이었던 4세기 이전의 가야 연맹.
명칭현재 지명알려진 이름
변진미리미동국(弁辰彌離彌東國)경상남도 밀양시
변진접도국(弁辰接塗國)경상남도 함안군 철원면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東國경상남도 고성군 고성면소가야
변진고순시국(弁辰古淳是國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변진반로국(弁辰半路國)경상북도 고령군 개진면
변진락노국(弁辰樂奴國)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변진미오야마국(弁辰彌烏邪馬國)경상남도 창원시
변진감로국(弁辰甘路國)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변진구야국(弁辰拘邪國)경상남도 김해시금관가야
변진주조마국(弁辰走漕馬國)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아라가야
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부산광역시 동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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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지도의 참고자료 -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김태식 저서, 푸른역사, 2002. 위의 자료도 똑같다.

  • 후기 가야 연맹 - 고령 반파국(대가야) 중심이었던 5세기 이후의 가야 연맹. [10]
명칭현재 지명알려진 이름
가라국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안라국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아라가야
가이기국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다라국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11]
졸마국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고차국경상남도 고성군 고성읍소가야
자타국경상남도 진주시
산반하국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걸손국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임례국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
탁순국경상남도 창원시
탁기탄국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 밀양?)
남가라국경상남도 김해시금관가야

6.1 삼국유사의 6가야

6.1.1 금관국(구야국, 금관가야)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었던 국가. 항목 참고. 4세기 이전에는 명실상부한 변한의 으뜸 국가로 경주시/울산광역시사로국(신라)과도 어깨를 나란히 했던 국가. 가야 후기에 반파국이 주도권을 잡은 뒤에도 이진아시 신화나 '가라'(반파국) - '남가라'(금관국) 등의 이름으로 보아 다른 가야계 국가들과 금관국과의 연결고리는 꾸준히 강조되었다. 이것으로 보아 한동안 가야 국가들 중에서는 무언가 주변에 어필하는 힘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는 대개 2~4세기 낙동강 하구의 매매를 통한 부 축적으로 얻은 권위로 추정한다.

2~3세기에는 구야국으로, 4~5세기에는 가라, 임나, 수내라, 소내라 등으로 불린 것으로 추정되며, 삼국사기에서 금관국이라고 하였다. 금관국은 4세기 이후 멸망 이전의 이름으로 보이며, 가라가 반파국을 가리키는 명칭이 된 이후 '남가라'라고 칭해진 것으로도 보인다.

532년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었다.

6.1.2 반파국(대가야)

지금의 경상북도 고령군에 있었던 국가. 항목 참고. 흔히 대가야로 알려진 국가.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변진반로국'을 이은 국가로 생각되나 확실하지는 않다. 5세기 이후 '가라'의 이름을 금관국에서 탈취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금관국은 일본서기 등에서 '남가라'로 나타난다.

5세기 들어 성장하기 시작하여 5세기 후반 전남 동부 섬진강 일대로 진출하고 가야 일대의 주도권을 잡은 것으로 보이나, 다시 백제가 국세를 회복하여 섬진강 일대로 압박을 가해오고 6세기 후반 백제와 신라의 힘싸움 사이에 끼여 있다가 결국 이사부, 사다함이 이끄는 신라군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562년 멸망한다. 이 나라가 신라에 정복되는 서기 562년을 일반적으로 '가야'가 완전히 소멸한 해로 파악한다.

6.1.3 안라국(아라가야)

安羅國. 흔히 아라가야(阿那加耶)로도 잘 알려져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이며, 《호태왕비문》과 《일본서기》에는 안라(安羅)로서 등장한다.(호태왕비의 안라인수병 구절을 안라국으로 파악한다면) 《삼국사기》와 《고려사》에선 《가락국기》를 인용해서 아시량국(阿尸良國)이라 기록했다.

위치는 현재의 함안군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다. 금관가야, 대가야의 인지도에 밀려 잘 부각되지 않지만 김해의 금관국이 쇠퇴한 이후 고령의 대가야, 고성과 산청의 소가야 연맹과 함께 가야연맹의 주축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외교적 줄타기를 주도하였으나, 결국은 신라에 정복당했고 그 자리에 성산산성이 축조되었다. 앞서 아라가야 멸망 후 아시촌소경이 되었다고 작성되어 있었으나, 아시촌소경이 설치된 것은 514년의 일로 아라가야가 망하기 전의 일이니 그 위치가 함안이 될 수 없다. 현재는 상주 지역에 있던 아시혜현을 아시촌소경이 있던 자리로 생각하는 것이 지배적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는 금관국과 함께 독자적인 호칭을 가지고 있을 정도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함안의 중심고분군인 말이산 고분군에서는 5세기 이전 분묘 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전기 가야에서 아라가야가 어떤 위상이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하지만 4세기대 조업한 것이 확실한 우거리 토기가마요지에서는 아라가야의 특징적인 도질토기 문화가 어떠하였는지를 알 수 있으며, 황사리 등 함안의 주변 지역에서 이 우거리요지에서 출토된 양식의 토기들이 출토된다.

함안양식 도질토기는 금관가야와 비슷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점에서 구분된다.

원삼국시대 토기인 와질토기에서 도질화(경질화)되는 단경호류에 성형시 승문타날이 가해지고 일정한 간격으로 침선을 돌려 돗자리문양(승석문)이 전면에 베풀어지며 양쪽에 귀가 붙어 있다. 또한 기벽이 대단히 얇으며 구연부나 동체부가 대칭적인데다가 아래에는 토기 종류나 장인들을 구분하기 위해서 시문한 '기호'인 '도부호'가 그려져 있다. 이 기종을 승석문양이부호라고 부르며 아라가야 양식의 특징적인 토기로 본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아무런 조형적인 특징이랄게 없는 단경호인데도 '아! 함안토기다!'라면서 구분이 될 정도이다.

또한 고배는 '工'자 모양의 대각에 삼각형 투공(투창이 아니다!) 뚫린 무개고배가 있으며 이는 단각에 외절구연의 접시가 붙은 금관가야의 이른바 '외절구연고배'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또 파수부가 묻지 않은 노형기대도 금관가야와 구분된다.

이 토기들은 당대 경쟁국가인 금관가야의 대성동 고분군에서도 출토되며, 낙동강 건너 복천동은 물론 대구, 칠곡, 그리고 진한의 유력국이었던 사로국(후에 신라)의 고분군에서도 발견될 정도로 넓은 지역에서 출토된다.

특히 아라가야 양식의 단경호는 4세기 후엽 대구 신당동 요지에서도 모방품이 제작되었는데, 전체적으로 형태는 비슷하지만 기벽이 두껍고 타날 간격에서 차이가 관찰되며 결정적으로 도부호가 시문되지 않은 점이 큰 차이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함안양식 토기들이 단순히 영남지역 전체로 운반되어 부장된 것 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도질토기 생산에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은 금관가야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외절구연고배를 비롯한 파수부노형기대, 단경호 등이 진영분지,창원,고김해만,부산 동래지역 등에서만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것과 대비된다. 즉, 금관가야의 특징적인 양식은 금관가야 권역안에서만 유통된 반면, 아라가야 양식의 토기들은 부산, 김해를 비롯한 경주, 대구, 칠곡 등 범 영남지역에 전체적으로 유통된다. 심지어는 남해안 지역을 따라 영산강유역의 호남지역과 일본열도에서도 반출된다.

이상 서술하 바가 의미하는 것은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안라국은 구야국(금관가야)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당대의 최첨단 기술인 도질토기 제조기술과 생산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2. 뿐만 아니라 한반도 남부에서 가장 발달된 성형기법을 보유하여 이미 4세기 전반대에 기벽이 대단히 얇은 양질의 도질 단경호를 생산하며, 독특한 스타일의 토기 기종군들도 보유하고 있다.
3. 또 안라국의 토기는 금관가야나 사로국과 같은 유력국을 포함한 영남지역의 여타 소국의 지배계층의 분묘에 부장될 뿐만 아니라, 그곳의 도질토기 생산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4. 고로 3세기~4세기의 아라가야의 위상은 금관가야에 결코 뒤지지 않는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다만, 금관가야는 자기 양식의 토기들이 철저히 자기 권역내에서만 출토되는데 반해 아라가야의 토기들은 광범위하게 분포하면서 모방품 생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는 생산과 관련된 제 기술 및 기술자뿐만 유통망까지도 제어할 수 있는 권력이 금관가야에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되는 점에서 금관가야가 아라가야 보다는 위상이 좀 더 높았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아라가야의 위상은 변한의 국가 중 금관국과 함께 유이하게 마한 왕의 우대를 받은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위상을 가진 국가였기 떄문에 금관가야와 경쟁하던 신라는 그를 견제하려는 목적에서 아라가야와 긴밀히 교류한 것으로 보이며, 4세기 포상팔국의 공격으로 부터 신라의 지원군을 받는 등의 사실도 그를 방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함안 아라가야의 중심 고분군인 말이산 고분군에서의 3~4세기에 해당하는 고분의 조사사례가 없는 것이 연구에 어려움을 겪게 한다. 말이산 고분군에서 5세기 이전 분묘의 조사가 절실히 요망된다고 하겠다.


. 후기 가야 제국(諸國)에서도 대가야와 더불어 높은 위세를 보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영역은 함안을 채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여 안라국이 어떻게 가야 지방에서 주요 국가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는지도 해명해야 할 과제. 안라국이 초기에는 마산 진동에 있다가 점차 함안으로 중심지가 이동했다고 보아 고고학과 문헌 기록 사이의 불일치를 해결하려 하고 있다.(김세기 (2012), 아라가야의 성립기반과 영역의 변천)

포상팔국의 난 해석과 관련해서도 초기엔 안라국이 이들 배후에서 금관국을 공격했다는 설이 다수였으나, 2000년대에는 역으로 금관국과 함께 가야 초기를 주도하던 안라국이 포상팔국의 공격대상이었다는 설이 나오고 있다. 4세기 초반의 화염투창고배의 대유행을 이와 연결시켜 포상팔국의 난이 4세기 초에 발생했고 이를 성공적으로 수습하여 세력을 확장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함안에 거대 수혈식 봉분이 조성되는 건 5세기는 되어서이고 최대 영역은 함안을 넘지 않는다는 것이... 광개토대왕 남정 이후 함안 말산리 말이산 고분이 축조되면서 크게 발전하고, 나중 반파국(대가야)에 대항하는 가야 남부 일대 국가들의 주축이 되기도 했다. 고고자료로 볼때 아라가야 유물과 반파국의 유물은 서로 공존하지 않는다. 역으로 소가야 토기와 창녕양식 토기등은 아라가야 토기와 공존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일본서기》의 기록이라 완전히 신뢰할수는 없지만 안라회의도 안라국이 주도하에 개최한 국제회의할 만큼 후기 가야 연맹에서 강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특이하게 명칭 논란이 많은 곳으로, 아라가야, 안야국, 안라국 등이 대립하고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아나가야', 삼국유사 오가야조에는 아라가야, 일본서기에는 안라와 아라가 같이 사용되고 있다. 최근에는 원삼국시대 명칭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록 된 변진안라국에서 따와 안라국으로, 삼국시대에는 아라가야로 나눠 그 구분하는 경향도 있다.

이곳 블로그 참조.

6.1.4 벽진국(성산가야)

碧珍國. 지금의 경북 성주군에 위치하였던 국가로 비정되지만 고고학적으로는 가야에 속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김세기 (2014), 고분자료로 본 삼국시대 성주지역의 정치적 성격) 《삼국사기》에 "본피(本彼)"라 나오나, 여기에는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 특히나 신라 6부 중 하나인 진지부의 이름이 본피부라 6부의 기원을 진한 소국으로 보는 연구자들은 이 지역을 본피부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6.1.5 고자국(소가야)

古資國. 소가야로 알려져 있는 고자의 나라. 고사포국, 고자미동국, 고차국 등 여러 표기가 있다.

6.1.6 고령가야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 혹은 경상남도 진주시 일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야 연맹의 하나... 지만 6가야 중에서도 가장 실체가 알려지지 않은 나라이다. 고령가야 문서 참조.

6.2 기타 가야제국

6.2.1 다라국(多羅國)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에 있던 나라. 합천군 쌍책면 다라리가 다라국의 이름을 이은 것으로 비정된다. 옆의 성산리에 있는 옥전고분군이 다라국의 수장급 묘지로 생각된다. 초기에는 창녕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후기에는 대가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 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대가야뿐만 아니라 백제, 신라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옥전고분군에서 대가야 토기와 위세품 뿐만 아니라 백제 관모나 신라 마구와 이식등의 위세품도 출현하고 있어 독자적 세력을 유지하면서 이들과 균형적인 외교를 펼치고, 어느 세력에도 치우치지 않고 독자적 세력을 유지하면서 이권을 챙긴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스위스 같은 포지션...이러한 현상은 합천 지역이 가야, 신라, 백제 이들 세력의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대가야로서는 합천지역이 넘어가면 적이 코 앞에 들이 닥치는 것이기 때문에 국가의 흥망을 좌지우지 되기에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야 하며 신라의 경우 가야를 넘어 전라도 동남부지역의 백제지역으로 진출 할 수 있는 전진기지로 이용 할 수 있다. 백제는 가야를 정복함과 동시에 신라의 서진을 막을 수 있다. 이곳에는 대규모의 철생산 유적 또한 존재하고 있어 의 경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 인 것으로 생각된다.

6.2.2 초팔국(草八國)

지금의 합천군 초계면에 있던 나라. 역시 다라국과 비슷한 시기에 대가야의 영향권으로 들어간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본기에는 원삼국시대에서도 극초기인 파사 이사금 때에 다벌국, 비지국과 함께 정복되었다고 쓰고 있으나, 후대의 일을 가져다 붙인 것으로 보이며 그 기년을 그대로 믿을 수 없다. 한국에서 보기힘든 분지 지형으로 가히 미나스 티리스를 연상시킨다.

6.2.3 비자벌(比自火)

또는 비지국.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불사국(不斯國)"이란 이름으로 나타난다. 원삼국시대에는 후에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되는 진한 소속이었으며, 신라와 가야 분화기에 가야로 넘어와 비화가야로 불리다가 6세기 이후에는 완전히 신라로 편입된다. 《삼국사기》에는 비사벌(比斯伐), 《삼국유사》에는 비화(非火), 《일본서기》신공기에는 "비자발(比自鉢/ひしほ/pisipo)이란 이름으로 나타난다.[12]

지금의 경상남도 창녕군이며, 나라 자체는 듣보잡이긴 한데... 문헌기록에 별로 드러나지 않았으나 문헌기록과 다르게 고고학 자료로 본다면 듣보잡 수준은 아니다. 창녕지역에는 지역군 별로 봉분직경 10m 이상의 고총고분 산재하고 있다. 창녕박물관 뒤에 있는 교동고분군만 가도 그 위세를 짐작 할 수 있다. 게다가 이 정도 급의 고분이 계성고분군, 송현동고분군, 영산고분군등 구역별로 존재하고 있다. 금동관 관모, 금제이식 ,환두대도등의 위세품과 토기류등도 수백점에서 수천점이상이 매납되었다. 현재의 고고학적 연구성과로는 신라가 가야를 정복하기 위한 전진기지로써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창녕지역에 많은 지원을 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 진흥왕이 정복한 뒤 창녕비를 세워 유명하다.

6.2.4 탁순국(卓淳國)

<양직공도> 백제국사 전의 '탁국(卓國)'과 <일본서기>의 '탁순국(卓淳國)'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녹순(㖨淳)이라고도 하는데, 녹과 탁이 통하는 것을 놓고 신공황후 신라정벌 기사의 녹국과는 무슨 관계가 있느냐, 탁순 = 녹순 - 녹국 - 탁기탄 = 녹기탄의 관계는 어떻게 되느냐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1970년대까지는 '달구벌'의 음차라는 설이 주류를 차지하여 대구설이 득세하였으나, 최근에는 창원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고, 일각에서는 의령설을 제시하기도 한다.

시조와 왕들은 알려져 있지 않다. 아리사등이 마지막 왕으로 추정되는데, 숭신천황기의 '도노아아리사등'과의 관계 문제 등으로 인해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 관직명이 아니냐'는 논란도 있다. 4세기의 말금한기(末錦旱岐)를 군주로 보기도 하는데, 이는 가야의 군주명으로 '한기'가 쓰인 데서 유래한 것이다. 한편 '말금'을 '마립간' = '매금'과 통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는 가야의 군주를 일컫던 '한기'를 포함해 일반 군주 칭호만 두 개 이어지는 괴이한 칭호가 된다.

일본서기 신공기 46년(366)기사에선 백제가 왜와 교류하기 위해 탁순국이 도와줬으면 한다라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고, 탁순국의 말금한기는 백제 사신에게 왜로 가는 길을 알려주고, 백제 사신의 말을 왜 사신에게 전해주기도 했다. 탁순사람 과고를 보내어 왜국 사신의 시종을 백제에게 안내하기도 했다는 기사도 있고 심지어 신공기 49년(369)년 기사에서 탁순국이 왜군의 집결지 역할을 했다는 기사도 존재한다.

이런 것들로 보아 일본과 백제에게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었지만, 백제와 신라가 강성해지자 백제와는 여러가지로 안좋은 관계가 되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안라회의가 일어나게된 사건을 보게 되면 아리사등이 신라의 스파이들을 모두 내치는 것에서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는 후기 가야연맹에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창원 반계동 고분군이 탁순국과 '관련' 되어 있다. 탁순의 중심고분군으로 비정하기에는 유구의 크기나 유물의 부장량이 적다. 반계동 고분군 보다는 규모와 유물 부장면에서 탁월한 창원 가음정동 고분군이 탁순의 중심고분군으로 설정 되는것이 옳다고 본다. 23호분에서는 고령 양식의 유개대부 장경호, 단추형 꼭지 뚜껑 단각고배 등이 출토되어 대가야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음을 알수 있고 25호분에서 쇠망치, 쇠집계등의 철기들이 출토되어 금관국과 더불어 철기 생산의 요충지 였음을 알수 있다.

7 유물


가야의 토기. 문물을 전파받은 일본의 스에키 토기가 이와 흡사하다. 근데 이거 대가야 토기 아닌가? 스에키 토기는 금관가야 토기를 예로 들어야 할텐데...[13]

파일:Attachment/gaya gold.jpg
가야의 금 장식.


8 트리비아

현대 가야대학교가 금관가야가 있었던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다. 사실 대가야가 있었던 경상북도 고령군에 있는 대학교였는데 김해로 옮긴 것이다. 고령과 김해 둘 다 가야를 대표하는 양대 도시임을 감안하면 적절한 교명.

9 관련 항목

  1. 구야, 가라, 가락 등 당대 별칭도 있음.
  2. 별도로 간지(旱岐)라는 가야 소국의 왕호가 《일본서기》에 등장함.오오 간지
  3.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일본어족에 속할 수도 있다는 가설과 부여어족에 속할 수도 있다는 가설이 있는데 그냥 신경쓰지 말자. 다만 가야랑 무역하면서 거주하게 되었던 극소수 일본인들이나 예맥계, 부여계 이민들이 있었다면 이들의 영향으로 문화가 융화되면서 언어에도 영향이 조금 끼쳤을 가능성이 있다. 가야에서 쓰인 언어는 신라어와 같이 고대한국어에 속했다.
  4. 반로국 도설지왕대 멸망 직후
  5. 연맹일 경우 현재의 아랍연맹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듯하다.
  6. 즉 지금의 부산광역시 강서구에 해당하는 낙동강 삼각주 지역은 대부분 바다에, 지금의 김해 시가지 근처까지 바다가 들어왔고 김해는 남해바다와 접한 항구도시였다.
  7. 인도 아유타(아요디아) 국에서 함께 온 허황옥의 오빠가 불교를 함께 들였다는 이야기가 있고 관련 이야기도 있다.단, 허황옥의 인도 출신 자체부터 논란이 있고 이후 불교를 부각시키기 위해 각색했다는 주장도 많으니 공식적으로 받기는 힘들다.그래서 비공식적이라고 적은 거고....그냥 야사중 하나라고 생각하자.
  8. 질지왕 시절 허황옥의 명복을 빌고자 왕후사라는 절을 세웠다고 기록한다.이때 당시 신라이차돈의 순교가 일어나기 전이다. 왕후사를 세웠다는 기록이기 때문에 수용한건 최소 그 이전이다.
  9. 가야지역 고유의 주거형태로 보이는 평면형태가 타원형을 띄는 집
  10. 고구려와 신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해안 지역에 위치한 금관가야가 약화됨으로써 내륙에 위치한 대가야가 그 대신 가야 연맹을 주도하게 된 것이 원인.
  11. 여기에 합천박물관이 있다. 홈페이지 : [1]
  12. 고대 일본어의 ハ행은 h음이 아니라 p음, 순음퇴화 이후에 지금의 음으로 변화했다.
  13. 사실 도질토기가 일본에 전파돼서 스에키 토기가 되기 때문에 당연하다. 조금 재밌는 사실은 와질토기와 고식 도질토기까지는 가야와 신라의 토기가 거의 차이가 없고, 신식 도질토기에 와서야 둘이 확실히 나눠진다. 그래서 혹자는 사실 신라도 원래는 여러 가야 중 하나가 아니었냐는 추정을 하기도 한다. 추가로 와질토기와 도질토기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다는 지적은 많은데, 아직 대체할 용어가 딱히 없어서 이 용어가 고고학계에서 계속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