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홍수

1 종교나 신화의 대홍수

먼 옛날에 있었다는 엄청난 규모의 홍수와 그에 관련된 떡밥을 칭한다.

거의 대부분의 민족 신화나 이를 다룬 서적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가장 유명한 것은 성경에 나오는 노아방주와 관련된 것. 한국에는 홍수 이야기가 없다며 환빠들이 우리나라는 고대부터 잘났다능 홍수 다 다스리고 그랬다능 이러고 있지만 없긴 왜 없나, 조사하면 다 나오는데.

정확하게는 치수법이 뛰어나, 홍수에 의한 피해를 어느정도 줄이고 그걸 다른 나라에게도 전해줬다는 애기지만 그게 그거려나(…). 선녀와 정을 통해 아들을 낳은 백두산 꼭대기의 박달나무가 천지까지 잠기는 대홍수때 자신의 머리위로 아들을 태워 아들을 살렸다는 박달나무 설화도 있다. 여기에 더하여 대홍수가 나서 최소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죽어버려 짝을 찾을 수 없게 된 남매가 산꼭대기에서 맷돌을 굴려 합쳐지면 결혼하겠다고 하늘에 맹세한 뒤에 굴렸더니 산 아래에서 맷돌이 합쳐져있더란 설화도 있다.

홍수라는 것이 어느 곳에서나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었기에 많은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신화 중 한 가지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대홍수가 전 세계적으로 동시에 일어나지 않았냐는 설.[1]도 제기된 적이 있으나, 실제 지질학 및 문헌 연구 결과로는 큰 홍수 기록이 길면 몇천년까지 차이가 날 정도라서 신빙성은 없다고.

홍수 신화가 각지에 남아있는 합리주의적인 견해로는, 전 세계의 주요 문명권은 수량이 풍부한 커다란 강을 끼고 발달하였고, 따라서 필연적으로 예상을 뛰어넘는 강의 대범람으로 문명이 큰 타격을 입은 역사적 경험을 지닐 수 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어차피 비슷비슷하게 큰 강 주변에 살다보니 자연히 홍수 이야기를 하나씩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견해는 큰 강을 끼고 발달하지 않은 마야 문명이나 큰 강이 흐르지 않는 북유럽 등에서도 홍수 관련 전설이 전해지는 걸 충분히 설명해 주기에 미흡하다.

퇴마록 혼세편의 '홍수' 에피소드가 바로 세계 각지의 대홍수 신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

1.1 유대교와 기독교

노아의 홍수. 노아 문서 참조.

1.2 그리스 신화

그리스 신화의 대홍수 이야기는 성경과 거의 플롯이 동일하다. 성경의 노아와 같은 역할을 하는 데우칼리온이라는 인물이 있다. 자세한 것은 데우칼리온 문서 참조.

1.3 마야 신화

1.4 바빌로니아 신화

우트나피쉬팀 문서 참조.

1.5 한국 신화

한국 신화에도 대홍수와 관련된 설화들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살아남은 오누이.
옛날 이 세상에는 큰 물이 넘쳐 세계는 모두 바다로 화하고 한 사람의 생존한 자도 없게 되었다. 그 때에 어떤 남매 두 사람이 겨우 살게 되어 백두산 같이 높은 산의 상상봉에 표착하였다. 물이 다 걷힌 뒤에 남매는 세상에 나와 보았으나 인적이라고는 구경도 할 수 없었다. 만일 그대로 있다가는 사람의 씨가 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남매간에 결혼을 할 수도 없었다. 얼마 동안을 생각하다 못하여 남매가 각각 마주 서 있는 산봉우리 위에 올라가서 계집아이는 암맷돌(구멍 뚫어진 편의 맷돌)을 굴러 내리고, 사나이는 수맷돌을 굴러 내렸다.(혹은 맷돌 대신 청솔개비에 불을 질렀다고도 한다.) 그리고 그들은 각각 하느님께 기도를 하였다. 암맷돌과 수맷돌은 이상하게도 산골 밑에서 마치 사람이 일부러 포개 놓은 것 같이 합하였다. (혹은 청솔가지에서 일어나는 연기가 공중에서 이상하게도 합하였다고 한다.) 남매는 여기서 하느님의 의사를 짐작하고 결혼하기로 서로 결심하였다. 사람의 씨는 이 남매의 결혼으로 인하여 계속하게 되었다. 지금 많은 인류의 선조는 실로 옛날의 그 두 남매라고 한다.

이 외에도 나반과 아만 신화도 있다. 위의 오누이 신화와 비슷한데. 나반과 아만은 오누이가 아니라는점. 신선의 존재가 제법 비중있게 등장한다는 점 등에서 차이가 있다. 대종교에서 제법 비중을 둔다고 하는데, 자세히 아는 분 있으면 추가바람.

한편 지역마다 관련된 설화가 있는 곳도 있다. 예로 전라북도 남원시 대강면에는 고리봉이라는 산이 있는데, 대홍수 때 뱃사공이 배를 걸었던 고리가 있던 산이라는 의미이다.

진천군과 증평군 사이에 끼어 있는 두타산(頭陀山)도 대홍수 설화가 있다. 민족의 시조 단군이 팽우에게 높은 산과 냇물 등 산천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비가 날마다 내렸고, 산천이 모두 물에 잠기게 되었다. 그래서 높은 곳으로 피난을 가야만 하였다. 이때 팽우가 이 산에 머물자, 산꼭대기가 섬처럼 조금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머리 두(頭) 섬 타(陀)를 써서 두타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2 폴란드 역사(the Delu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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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중후반에 걸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쇠퇴와 멸망으로 이끈 전쟁. 좁게는 1655~60년에 있었던 스웨덴과의 북방전쟁만을 가리키지만 보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의미로는 1648년의 카자크 대반란에서부터 1667년에 끝난 러시아와의 전쟁까지의 기간을 모두 포함한다. 대홍수 이전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유럽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2] 강대국이었지만 대홍수의 결과 연방은 인구의 1/3을 잃고 강대국들에게 치이는 약국의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다.

발단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우크라이나 카자크들과 슐라흐타[3]들에게서 터졌다. 당시 카자크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고 경제적 지원까지 해주고 있는 폴란드 국왕에게 맹목적인 충성과 등록 카자크군으로서 복무해왔다. 허나 폴란드 귀족들은 카자크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해왔고 결국 오랫동안 묵은 감정은 루테니아의 봉건 영주이자 카자크 헤트만이였던 보흐단 흐멜니츠키에 의해 대봉기로 발전했다. 이들은 당시 자신들과 적대적이였던 타타르인들 까지 끌여들었다.

당시 국왕이였던 브와디스와프 4세는 자신의 군사적 지도력이 잊어져서는 안된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이들을 이용해 투르크군을 도발할 생각이였지만 어린 아들 지그문트 카지미에쉬를 잃은 슬픔에 그 계획을 잠시 미루다가 카자카자크들의 대봉기에 충격을 받고 죽고 만다... 이후 사태는 성직자로 있다가 환속한 그의 동생 얀 2세 카지미에시가 왕위에 선출되면서 해결해야 할 처지에 놓인다.

일단 반란은 1651년 베레스테츠코 전투(Battle of Berestechko)[4] 기점으로 잠시 휴전이 성립되었으나 165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보호를 구실로 선전포고를 하자[5] 폴란드는 반란군과 러시아군을 동시에 상대해야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후 전쟁은 폴란드에게 불리해져 갔다. 러시아를 견제하던 스몰렌스크마저 러시아군에게 넘어갔고 이후 연합군은 무서운 속도로 리투아니아로 쳐들어 왔고 결과적으로 오르샤같은 리투아니아의 여러 도시들도 함락당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655년 리투아니아 대공국마그나트[6]이자 야전 헤트만이였던 야누쉬 리지비우가 벨라루시에서 반격을 개시해 오르샤를 재탈환을 기점으로 전쟁은 이제 밀고 밀리는 양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에 러시아 차르 알렉세이는 군 지휘관들에게 위협적인 칙령을 내리면서 사기고무를 시켜 결국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수도였던 빌노가 러시아군의 수중에 놓이게 된다.[7] 그리고 보흐단이 이끌고 있는 카자크군은 여세를 몰아 9월에 폴란드인의 도시 르부프를 공격해 루블린에 입성했다.

한편 폴란드의 바자 왕가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던 스웨덴 국왕이였던 팔츠 왕가의 칼 10세는 그동안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제 2차 북방전쟁을 일으킨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결속력은 형편없었다. 국왕 얀 2세는 폴란드 슐라흐타들에게 인기가 없을뿐더러 그들의 문화였던 샤르만티즘을 경시했다. 더구나 그는 전직 예수회 수도사에 추기경이기까지 했다. 종교를 핑계로 폴란드 귀족들의 권한을 제한하고 개입하려 했던 말썽 많은 얀 2세에 대한 반발은 귀족들을 스웨덴 국왕 칼 10세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일부 귀족들은 얀 2세의 종제이기도 한 스웨덴 국왕이였던 칼 10세에게 폴란드 국왕이 되기까지 하라는 막장극까지 선보였다. 어째든 스웨덴군은 약체화된 폴란드군[8]을 격퇴하고 결국 무저항 상태의 바르샤바를 함락시키고 말았고 국왕 얀 2세는 실레지아로 도망가고 만다. 그러자 러시아측은 폴란드와 휴전, 곧바로 스웨덴령인 라트비아의 리가를 공격했다.

또 한편 러시아군과 대치하고 있던 야전 헤트만인 야누쉬는 리투아니아의 다른 마그나트들과 함께 폴란드-리투아니아를 해체하기 위해 스웨덴과 결탁해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분리해 두 개의 공국으로 나누어 하나는 자신이 또 하나는 종제 보그스와프 라지비우가 가져 스웨덴을 종주국으로 인정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스웨덴의 속국으로 하는 케다이네이 협정을 맺고 말았다. 한마디로 매국을 한 것이였다.

이러한 리보니아의 복잡한 정세가 멀리 우크라이나의 정정에 악영향을 미쳤다. 연방을 적으로 보는 흐멜니츠키는 스웨덴을 동맹자로 보고 있었고, 이 휴전을 러시아의 배신이라고 생각해 1657년 8월 급사할 때까지 차르와 손을 끊기 위한 계획을 준비했었다. 한마디로 개판이다

그나마 1656년 브란덴부르크까지 폴란드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다. 브란덴부르크선제후였던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폴란드의 속국이였던 프로이센공국의 공작이기도 했기에 이 사실은 그의 심기를 불편하기까지 했을 것이다. 이에 그는 프로이센의 완전 분리를 위해 선전포고를 하고 곧바로 폴란드의 서부로 군대를 파견한다.

일단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돕지 않는 국가는 없지 않았다. 덴마크, 신성 로마 제국네덜란드가 있었으나 폴란드에게 거의 도움도 되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트란실바니아왈라키아, 몰디비아등이 선전포고를 해 오는 등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다.

그러는 동안 조국이 외세에 짓밟히는 것을 본 국민들이 레지스탕스를 조직해 점령군들에게 대항하기 시작했고 1655년 12월 망명 중이었던 얀 2세를 지지하는 티쇼프체 연맹이 결성되었다.

거기에 쳉스토호바의 야스나 구라 수도원에서 소수의 폴란드 군이 거의 10배에 달하는 스웨덴 군의 공성을 격퇴함으로써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레지스탕스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전역에 산재하던 점령군들을 격퇴하기 시작했고 봉기한 군세는 폴란드 야전 헤트만 스테판 차르니에츠키와 리투아니아 대헤트만 얀 파베우 사피에하의 지휘 아래 통합되었을 때 그들은 카를 구스타프에게 충성을 맹세한 세력을 배제한 뒤 공격을 시작했다.

바르샤바 교외의 바르카 전투에서 스테판 차르니에츠키는 스웨덴 군에 대승을 거두었으며, 이후 폴란드 군은 장기간의 공성전 끝에 바르샤바를 재점령했다. 이에 경악한 칼 10세는 대규모의 군세를 이끌고 숫적으로 우세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을 패배시켜서 바르샤바를 재점령했으나 마찬가지로 큰 피해를 입었던 탓에 다시 떠나버리고 말았다. 10월 8일에는 프로스트키 전투에서 스웨덴군이 폴란드 군에 전멸한다. 당시 스웨덴은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폴란드 쪽으로 군대를 더 보낼 수 없었고 이후 1657년 완전히 스웨덴군을 몰아낸다. 이해 야노슈 리지비우가 사망한다.

이후 같은해 트란실바니아와 브란덴부르크와의 전쟁에서 이겼지만 리투아니아 방면으로 아직 러시아군이 잔재하고 있는 상황으로 결국 폴란드는 브란덴부르크를 상대로 프로이센 공국을 독립시키는 베라우 조약을 맺고 브란덴브르크와의 전쟁을 종전시킨다.

한편 흐멜니츠키가 사망한 후 후계자로 선출된 이반 비호프스키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안에 고립된 스웨덴군을 격파해 국외로 몰아낸 폴란드와 하쟈치의 조약을 맺어 화해하는 것을 선택했다. 이런 사태를 맞이하자 차르 알렉세이는 스웨덴과 자국에 유리한 바리엘사리 휴전을 맺고 1658년 10월 폴란드와의 전쟁을 재개했다. 화평이 보장된 2년 사이에 벨라루스의 귀족과 카자크 지도층은 폴란드 지지로 입장을 바꾸고 벨로루시 지방에서 러시아군을 맞아 싸우는 폴란드를 지원했다. 본격 박쥐 카자크들 어쨌든 폴란드의 입장에서는 숨통이 좀 트인 격이였다.

이후 카자크들은 단독으로 북부에서 빌노를 봉쇄하려고 했지만 유리 돌고르코프에 의해 봉쇄되었고 남부에서도 비호프스키가 이끄는 카자크들은 세레메테프에게서 키에프를 탈환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1569년 비호프스키와 동맹자 크림 칸국은 공동으로 트루베츠코이가 이끄는 군대에게 어마어마한 피해를 주어 괴멸시키고 코노트프 마을을 포위했다.

우크라이나에서 원정이 실패로 끝난 것도 모르고 있던 러시아인들의 불안은 8월 점령지 키에프를 출발한 세레메테프와 그의 휘하 부대에 의해 제거되었다. 비호프스키는 치히린(Chyhyryn)에서 세레메테프에게 패배해 폴란드로 망명하고, 반폴란드 성향의 카자크들은 그를 해임하고 흐멜니츠키의 후예 유리를 새로운 카자크 헤트만에 선출하고 폴란드와의 관계를 끊어버린다. 확실히 박쥐 인증

허나 1660년 얀 2세는 제 2차 북방전쟁을 끝내기 위해 폴란드의 모든 전력을 러시아로 집중시킨다. 이에 1660년 말까지 러시아군을 벨로루시에서 몰아냈으며 계속 러시아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한다. 이 시기 가장 유능한 폴란드 장군은 스테판 차르니에츠키였다. 그는 포론카 전투에서 돌고르코프의 부대를 물리치고, 1661년 빌뉴스를 탈환했다. 기타 리투아니아 대공국내의 여러 도시도 하나하나 폴란드-리투아니아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이러한 반격에 러시아는 스웨덴과의 새로운 전쟁을 회피하고 굴욕적인 카르디스 조약에 서명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발트 지방에서 철수하였다.[9]

1663년 말, 폴란드 왕과 그의 군대는 드네프르 강을 건너 카자크 영역을 포함한 좌안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공을 개시했다. 폴란드군의 진로에 있던 여러 도시는 반란이 진행되는 동안 쇠락해졌기 때문에 아무 저항도 없이 폴란드에 굴복했으나, 다음해 1664년 1월 글루코프 공성전에서 실패해 커다란 희생을 냈고, 노브고로드-세베르스키까지 퇴각했다. 이 전쟁의 최후의 큰 전투는 1664년 여름에 벌어져 러시아군은 비테프스크 근처에서 패배하고 만다.

그뒤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으나 1664년부터 1667년 1월까지 질질 끌면서 시간을 보냈다. 허나 폴란드측에서 다된 밥에 흙이 뿌려지는 사건이 발생하고 만다. 예지 루보미르스키란 자가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폴란드 측에서 급박해져 안드루소보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인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러시아에게 스몰렌스크의 요새 및 키에프를 포함한 좌안 우크라이나로 불린 우크라이나 동부를 할양했다. 다만 카자크들을 공동으로 통제하는 것과 2년뒤 키에프를 반환하는등 폴란드의 요구조건도 잊지 않았다.

이 사건 동안 폴란드는 상당한 영토를 상실한다. 일단 프로이센이 독립해버렸으며, 카자크 영역을 포함한 우크라이나 동부지대 전부를 러시아에 할양해야했다. 거기에다가 대러시아 전진기지 겸 방어거점 스몰렌스크도 덤으로 러시아에 할양되었다. 결국 이 전쟁의 결과로 연방의 국력은 결정적으로 약화되었으며, 무엇보다도 러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리고 대홍수 시기 수천명의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카자크들에게 학살되었고 얀 2세의 경우 계속되는 전쟁과 반란에 진절머리가나 왕위에서 퇴위해 프랑스로 망명 그곳에서 생제르맹테프레의 명예 수도원장으로 지내다가 1672년에 죽는다. 또한 연방을 배신했던 리지비우가는 두배신자로 인해 주변에 경멸을 받았고 야노슈의 종제인 보그스와프 또한 멸시를 받게 된다. 그리고 러시아는 2년 뒤 반환될 키에프를 반환하지 않고 계속 힘을 비축해 결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삼키게되었고 브란덴부르크는 프로이센을 손에 넣은뒤 눈에 보이지 않은 성장을 하며 점차 국명을 프로이센 왕국으로 바꾸며 강대국으로 발전하기 시작해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분할 독일 제국의 기틀을 다지게 된다.

카바크들의 경우 좌우로 나누어 러시아령이 된 좌안 우크라이나에서 카자크 헤트만국이라는 자치국가를 세우게되나 결국 18세기 자포로제 카자크가 해체되면서 서서히 자치권을 잃어버렸고 스웨덴은 러시아와의 전쟁 끝에 맺은 카르디스 조약으로 발트해 전체를 석권하나 결국 대북방전쟁의 결과, 표트르 1세의 러시아 제국에 의해 핀란드를 잃고 국왕인 칼 12세가 전사하는등 불운을 겪으며 발트해의 강국의 위치를 잃고 2류 국가로 전락하고 만다. 어째든 이 대홍수를 전후해 유럽의 강대국의 위치가 바뀌게 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2.1 동명의 폴란드 영화

크미치스 문서 참조.

3 여신전생

흔히 신화나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신이 타락하고 더러워진 인간을 정화하기 위해서 홍수를 일으켜 몰살시킨다는 정석적인 방법이다. 이것은 여신전생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진 여신전생에서 더 히어로가 고생고생하면서 악마들을 해치워서 대파괴로 황폐해진 도쿄를 부흥시키고, 인간들로부터 그 사례까지 받고 카테드랄로 왔더니 YHVH 녀석이 이걸 시전하는 바람에 한 방에 도시가 싹 쓸려나가 버린다.

다만 '일어난 이후'만 보여줬고 일어나는 장면은 계속 미궁에 빠져있었는데. 진 여신전생 IMAGINE에서 대홍수 당시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 모습은 가히 기상이변에 인한 종말에서나 나올 법한 광경이다. 대홍수 당시에는 카테드랄을 제외하면 일부 고층 건물 옥상부분 외에는 전부 물에 잠겼다.[10]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미 핵전쟁으로 개망한 인간들에게 대홍수로 대재앙 한번 더 끼얹어주는 더러운 유일신의 심판이다. 그리고 이걸로도 만족하지 않아서 유일신은 다시 한번 인류를 심판하려한다.

4 재난 영화 대홍수(Flood)

1976년작과 2007년작으로 제목이 같다. 다만 76년작은 Flood!, 2007년작은 그냥 Fl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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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년작은 아름다운 호수가 있어서 낚시꾼들이 많이 오는 작은 마을에 한 꼬마가 우연히 댐에 난 작은 구멍을 발견한다. 그 구멍을 유심히 보다가 우연히 지나던 헬리콥터 조종사를 만나고 이걸 말한다. 하지만 마을 시장은 낚시철이라서 마을 경제를 박살낼 것이라면서 꼬마와 조종사가 한 신고를 무시한다. 결국 구멍은 커져서 마을에서 잔치를 열때 재앙이 들이닥치는데... 대지진,포세이돈 어드벤처,타워링과 같은 재난물이 연이어 나오던 70년대 초중반에 나온 영화이긴 하지만 TV 영화라서 이들 영화와 규모가 차이난다. 타워링,포세이돈 어드벤처를 제작한 어윈 알렌이 제작했다. 제작사는 워너브라더스. 한국에서는 90년 초반 주말의 명화로 더빙 방영했고 나중에 SKC에서 비디오로 나왔다.

220px-Flood_%28film%29.jpg 영국과 남아공, 캐나다 합작인 2007년작은 북해 지역에서 엄청난 폭풍이 발생하게 되고, 그로 인해 발생한 해일이 템즈강을 따라 역류하면서 런던을 비롯한 템즈강 유역 지역에 홍수가 발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을 다루고 있다.

참고로 1980년대 초반 바닷물이 역류하면서 템즈강이 범람한 사건이 실제 발생했었다. 이를 막기 위해 영국정부는 템즈강 수문을 건설하였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 영 좋지 않은 위치에 건설이 돼서 역류하는 바닷물이 일정수준을 넘어서면 템즈강 수문따위 있으나마나 망했어요 좆ㅋ망ㅋ이란 주장이 있는데 이것이 2007년작 영화 제작 모티브가 되었다.
  1. 빙하기가 끝나가며 녹아내린 얼음으로 인해 갑작스레 늘어난 수량으로 일어난 전세계적 홍수에 대한 기억이 구전되면서 신화가 되었다는 학설.
  2. 신성 로마 제국이 더 넒기는 했지만 1648년에 끝난 30년전쟁의 결과로 신성 로마 제국은 더이상 하나의 나라로 볼 수 없었다. 사실은 폴란드랑 리투아니아도 내부적으론 거진 따로 놀았지만...
  3. 폴란드의 특권 계급, 즉 귀족. 다른 나라의 귀족들과는 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한 권한을 쥐고 왕까지 뒤흔들었다.
  4. 폴란드군 7만 명이 카자카자크-타타르 연합군 14만 명을 말 그대로 '학살'한 전투이다. 여기에서 폴란드 군은 700명이 전사했다. 많이 잡아봐야 천여명. 반면에 카자카자크-타타르 연합군의 전사자는 3-7만...
  5. 사실 카자크의 수령 보흐단 흐멜니츠키는 외국세력 중 러시아의 차르 알렉세이에게 지원을 얻는데 성공해 그 보증으로 알렉세이에게 신종할 것을 맹세했다. 1651년 러시아 의회였던 젬스키는 카자크들을 모스크바 세력권 안에 편입시켰으나, 폴란드에 적대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망설였다. 확실히 당시 폴란드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 자체가 도박이긴 했다. 차르는 1653년 의회가 우크라이나를 러시아 차르국으로 병합하는 것을 승인할 때까지 분쟁을 일으키는 것을 막았고 다음해 1654년 카자크들이 협정을 비준하자 러시아-폴란드 사이의 전쟁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과는....
  6. 폴란드 귀족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크고 부유한 대귀족. 참고로 폴란드 귀족은 크게 4가지로 나뉜다. 마그나트(Magnate), 부유한 귀족(Szlachta Zamozna), 소작인 귀족(Szlachta Czynszowa), 길거리 귀족인 거지 귀족(Holota).
  7. 이 때 러시아 군은 빌노의 유대인 공동체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8. 사실 카자크 대봉기 당시 폴란드 군이 엄청나게 많이 죽고 폴란드에 대규모 병력을 제공한 카자크가 러시아 쪽으로 이동하고 러시아는 대군을 동원하여 폴란드 군을 공격하는 통에 폴란드 군이 러시아 전선으로 가서 러시아를 막아내는 등 워낙 많이 죽어서 인적 자원이 고갈되고 또 있는 자원은 러시아 전선으로 차출되었던 탓에 이들을 막을 병력은 얼마 없었다.
  9. 러시아로서는 발트해가 북유럽과 교역할 수 있는 유일한 바다였고 이때문에 계속 스웨덴과 충돌하게 되고 결국에 표트르 대제때 발트해를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10. 도쿄가 저러니 딴 곳은 말할 것도... 도쿄는 그나마 피해가 덜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