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여말선초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후대에 내려온 사실이자 전설, 야사. 왜 얼핏보면 모순되는 소리가 나오느냐면 현재 전해지는 두문동 72현에 관한 이야기는 사실과 야사가 혼합된 얘기라서 그렇다. 정말 엄밀하게 따지면 아예 없는 사실은 아니지만 대중들이 생각하는 이미지는 전설이나 야사에 가까운 얘기라는 것, 정사 삼국지가 어느새 삼국지평화 급 이야기로 변질된 사건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사극이나 위인전에서 뻥튀기 된 사실을 정사인것마냥 다루어서 두문동 관련된 일들이 실제로 있었던 일인 마냥 생각하는 대중들의 시선이 상당히 많고 몇몇 가문은 아예 족보책 등에 자신들의 조상이 두문동 72현이라면서 자랑스러워하는 모습까지 보이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두문동 72현이 한꺼번에 모여있다가 태조 이성계가 타 죽게 만들었다든지(심지어 몇몇 사극에선 아예 태종이 태조 대신 불 질렀다고 나온다), 황희가 72현의 일원이었는데 유일하게 조선에 출사한 인물이라던지 이 때문에 한식의 유래가 여기서 나왔다던지 여기서 두문불출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든지 하는 이야기는 전부 야사에 가깝다, 그럼에도 오늘날까지 선조들의 공훈을 빛내고 싶어하는 몇몇 후손들이나 여말선초 당시 상황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싶어하는 사극 작가들에게 상당히 자주 애용되는 야사 가운데 하나, 심지어 한국어 위키백과 마저도 이것이 당연한 정사인것 마냥 적어놨었다.[1]
굳이 따지면 현재 두문동 72현이라고 알려진 분들 가운데 확실히 행적이 확인되는 태학생 임선미, 조의생 이 두 사람은 확실하게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2] 애시당초 두문동이 처음 제기 된 영조대에도 이 두 사람의 사적이 가장 분명해서 이들의 후손이 가장 먼저 혜택을 입었고, 혹시나 가문 족보에 이분들의 이름이 있다면 진짜 조선왕조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두문동 충신이라는 소리니 자랑스러워 해도 좋다.
그외 정조와 순조시기에 두문동 표절사(表節祠)에 위에서 언급한 임선미, 조의생, 맹씨성을 가진 사람(혹은 맹호성)외에 추가로 4명이 더 추향되었다고 하는데 각각 직제학 성사제, 찬성사 박문수, 예의판서 민안부, 예의판서 김충한이다. 이상 4명은 개성의 유생들이 두문동 72현이라고 주장하여 배향한 이들이다.
2 언제부터 이런 얘기가 나왔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문동 이야기가 국가의 공식적인 기록에 나오기 시작한건 조선 건국 350년 후인 영조 시대부터이고 그나마도 원래는 72현이 아니었다. 이에 대한 기록은 영조 16년(1740년)부터 나오기 시작하는데 해당 기록은 영조 16년 9월 1일 기사로 다음과 같다.
임금이 연(輦)을 타고 가면서 시신(侍臣)들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부조현(不朝峴)이 어느 곳에 있으며, 그렇게 명명(命名)한 것은 또한 무슨 뜻인가?” 하니, 주서 이회원(李會元)이 아뢰기를, “태종(太宗)께서 과거를 설행했는데, 본도의 대족(大族) 50여 가(家)가 과거에 응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이름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으므로, 또 그 동리를 두문동(杜門洞)이라고 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부조현 앞에 이르러 교자(轎子)를 정지하도록 명하고, 근신에게 말하기를, “말세에는 군신의 의리가 땅을 쓴 듯이 없어졌는데 이제 부조현이라고 명명했다는 뜻을 듣고 나니, 비록 수백 년 뒤이지만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눈으로 보는 것처럼 마음이 오싹함을 느끼게 한다.” 하고, 이어 승지에게 명하여 칠언시(七言詩) 한 구를 쓰게 하니, 이르기를, ‘고려의 충신들처럼 대대로 계승되기를 힘쓰라. [勝國忠臣勉繼世]’ 하였다. 수가(隨駕)하는 옥당과 승지·사관으로 하여금 시(詩)를 이어서 지어 올리게 하였으며, 또 직접 부조현이라는 세 글자를 써서 그 터에다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
영조가 개성에 행차할 때 부조현의 이러한 유래를 듣고 비석을 세워주었기 시작한것이 두문동 이야기의 시작이다. 여기선 72현 같은 얘기는 나오지 않고 과거를 치룬 주체가 태조가 아니라 태종이며 그냥 해당 지역 50여가가 과거를 치르지 않았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흔히 알려져 있듯이 태조가 과거를 열었는데 고려 유생들이 전부가 모여서 조선의 과거를 거부했다[3]는 얘기부터가 잘못된것이다. 애시당초 조선의 첫 과거는 1393년에 있었는데 최초 합격자 99명에 태조가 직접 3명을 추가로 합격시켜 최종합격자는 102명이다. 이 당시 급제자가 태종대의 권신 이숙번이다, 다들 새 왕조에 출사할 사람들은 다 했다는거고 과거 볼 사람들은 다 봤다.[4] 어쨌거나 이 시점에선 분명 72명이라는 명확한 숫자가 나오지 않는다.
두문동 충신이 72명이라는 얘기는 이로부터 10년 후인 영조 27년(1751년)에 나오기 시작한다. 다음은 영조 27년 9월 27일 기사이다.
고려(高麗)의 두문동(杜門洞) 72인(人)의 충신(忠臣)에게 제사(祭祀)를 지내도록 명하였으니, 개성 유수 서종급(徐宗伋)의 장문(狀聞)으로 인한 것이었다. 또 어필(御筆)로서 ‘고려 충신이 지금도 그 명성이 남아 있으니 특별히 그 동(洞)에 세워 그 절개를 표창한다.[勝國忠臣今焉在 特竪其洞表其節]’는 열 네 글자를 써서 내리고 비(碑)에 새겨서 세울 것을 명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두문동 72인 가운데 이제 단지 임(林)·조(曹) 두 성(姓)이 있을 뿐이라고 하니, 매우 개탄스럽게 여기는 바이다. 두 성(姓) 가운데서 직임(職任)을 감당할 수 있는 자는 해부(該府)로 하여금 장문(狀聞)하게 하여 즉시 조용(調用)하도록 하라.” 하였다. |
10여년 사이에 그 지역의 50여가가 시험을 치루지 않았다는 얘기가 어느새 두문동에 충신 72명이 있었다는 얘기로 바뀐것이다. 이 72명이라는 것도 일종의 설정놀음일 가능성을 높여주는 대목이다. 왜냐면 공자의 문묘에 배향된 제자가 72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두문동 충신들을 공자 제자들에 비견하여 현인으로 받들려는 의미가 클 공산이 있다는 것. 임, 조 그러니까 임선미와 조의생 가문 외에는 두문동 72인이 누군지도 아예 알 수 없다고 나오니 의심이 더욱 깊어질 수 밖에 없다. 이래서 영조대에 밝혀진 임선미, 조의생을 제외하면 다른 관련된 인물 전원이 신빙성을 의심받고 있는 것이다. 애시당초 지금 나와있는 이른바 72명의 명단도 각 자료들마다 제각각 다르다.
이후 정조시절에 두문동 고려충신들을 숭절사에 배향하자는 개성유수 서유방의 상소가 나온다. 다음은 정조 7년(1783년) 7월 14일 기사이다.
“충신을 포양(褒揚)하고 절의(節義)를 권장함은 그 나라의 더없이 큰 국정(國政)인 것이기에, 무릇 전조(前朝)의 사람으로서 병의(秉義)하고 입근(立慬)한 처지에게는 모두 열성조(列聖朝)의 포장(褒奬)하는 은전(恩典)을 입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원사(院祠)의 향사(享祀)와 도설(棹楔)을 세우는 일이 곳곳마다 서로 바라다 보이게 된 것입니다. 특히 두문동(杜門洞) 태학생(太學生) 72인들은 우뚝한 충절이 진실로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 등이 성취해 놓은 것에 부끄러울 것이 없었는데, 그 72인 중에 성명이 전해지고 있는 사람은 조의생(曹義生)·임선미(林先味)와 성이 맹가(孟哥)인 세 사람이며, 맹가는 성만 전해지고 이름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
두문동 충신은 72명이라는데 알려진 사람은 기껏해야 3명이고, 그나마 나머지 한 사람은 이름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다. 당대에 이미 공식기록에서 이랬다고 한다면 지금 나도는 72인의 명단 자체는 저 세 사람 빼곤 전부 알 수 없다는 소리다. 한 마디로 저 셋을 제외하면 나머지 언급되는 인원들의 신빙성은 불명이라는 이야기이고 거기다가 저 사람들은 태학생이라고 명시되어 있는데 그렇다는 얘기는 두문동 일원들이 딱히 당대 고려의 거물급 인사들은 아니라는 얘기다. 두문동 태학생들을 칭찬하는 내용도 그 충절이 정몽주, 길재[5]와 같다는 얘기다. 물론 조선 태조 이성계가 부르지 않아 불을 놓으면 나오겠지 싶어서 불을 질렀는데 아무도 안나오고 타죽었다는 얘기도 나오지 않는다. 어쨌거나 두문동이 처음 공식기록에 나온 영조대부터 사적이 알려진 최초의 두문동 3인이 숭절사, 포절사에 배향될 때 까지 공식적인 두문동 관련 기록은 이렇다. 이후 정조말기에서 순조시기까지 위에서 언급된 4인이 추가로 추향된다.
3 각 가문의 두문동 엮기
1923년에 나온 여조충렬록의 두문동 72현 명단[6]
추가로 표철사에 배향된 직제학 성사제의 경우 조선 순조대에 이 사람의 후손들이 '두문동실기'(1809년에 발행된 책이다.)라고 해서 400여년전 조상이 두문동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두문동 72현이라는 이들의 이름을 몇명 적었는데 오늘날 두문동 72현 가운데 이름이 남았다고 하는 이들은 이 사람들의 이름이 남은 경우가 꽤 된다. 즉 처음 두문동 3인(보통 두문삼절이라 부른다)이 표절사에 배향된 이후 다른 가문 후손들이 자신들의 선조들이 고려말에 뭘 했는지 뒤지면서 '우리 조상님도 두문동에 계셨다'라고 쓴 글들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두문동실기나 송은실기(1909년에 발간된 책이다.)에 있는 두문제현충렬록에서 언급한 사람들도 자세히 살펴보면 조선 건국 이전에 졸했다는 전조생이나(이 사람은 공민왕 5년에 졸했다) 아예 조선조에 출사해서 멀쩡하게 벼슬을 한 곽추[7],김자수[8], 이양중[9], 성부[10], 윤규[11]도 있고 두문동이 아니라 다른곳에서 은거한 맹희도[12], 신덕린 같은 사람도 있다. 차원부처럼 아예 존재 자체가 의심되는[13]사람도 있으니 과연 누가 진짜 두문동에서만 평생 절의를 지키며 살았는지는 미스테리인 셈.
이후에도 각 문중마다 서로 우리 가문 조상님은 두문동 출신이라고 주장한게 하도 많아서(...) 이 이상은 적지 않는다.
다만 각 가문별로 조상의 행적을 두문동과 엮다보니 조선말에 이르면 두문동 출신이라는 사람이 굉장히 많아져서 72명에 맞추려다 보니 명단마다 사람이 달라지는 경우도 생겼고 결국 두문동 72현이라는 명칭이 '어느 한 고을에 머문 고려 충신들'이 아니라 마치 고려 충신 올스타즈(...) 같은 느낌이 생겼다. 당장 위에 언급된 두문제현충렬록에선 아예 124명의 고려유신이 나온다.(...) 이숭인, 정몽주, 길재, 원천석, 문익점, 이색 등 아무리봐도 이전 문헌에선 두문동이랑 별 관계 없는 사람들이 명단에 들어간다던지...황희 같은 경우엔 아예 구한말(1890년)에 황희의 후손들이 '황희 정승도 사실은 두문동 출신이었다'고 문집을 발간한 케이스이다.[14] 그것도 황희를 문묘에 배향해 달라면서 그렇게 썼다.
이러다보니 이제는 '다른곳에도 두문동이 있었다더라!'라는 얘기까지 나오는데 실제로 강원도 정선군에 두문동재라는 지명이 존재한다. 그곳에 세워진 비석에는 '고려 두문동 72인이 다 불타죽었는데 그 중에서 7명만 살아서 여기서 살았다고 두문동이라 한다'라는 이야기를 써놨다. 당연히 불타 죽었다라는 건 전설이니 어쩌다가 여기까지 이런 지명이 붙었는지는 불명, 원래는 개성인근 지역명이었던 두문동이 명성을 얻음에 따라 다른 지역 지명으로까지 퍼져나간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4 두문동 야사의 변천과정
우선 두문동 관련으로 나오는 이른바 두문동 불 지르기는 노골적으로 한식의 유래인 진문공과 개자추의 일화를 그대로 따온것이다. 또 두문(杜門)이라는 말 자체가 '문을 닫아건다'는 뜻으로 일단 조선이 건국되기 이전인 고려 고종대의 문신 이규보가 편지에서 ‘두문불출’ 이라는 말을 언급한 적이 있다. 이 말은 당 태종때 편찬된 역사책 진서에도 나오며, 사마천의 사기 상군열전에도 두문불출이라는 말이 기록된 바 있다. 즉 오히려 두문불출이라는 말이 두문동보다 먼저 나왔고 두문동은 두문불출에서 따온 얘기란 소리다.
그러니까 애시당초 어느 고을에 고려 유신 몇명(혹은 두 세명)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몇몇 유생 가문들이 은거하며 태종에게 출사하지 않았고 그런 의미에서 그곳을 두문동이라고 불렸다더라는 그냥 그 당시에는 그런일도 있었다더라 사실이 어느새인가 두문동에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72인의 고려 충신이 살았다라는 이야기가 되고 태조가 개국하고 과거를 열었는데 고려 유생들이 단체로 조선의 과거시험을 거부하여서 과장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더라는 전설로 변질되고 급기야는 두문동에 고려의 거물급 인사 72명이 조선에 항거하여 절의를 지키면서 은거하다가 조선왕조에 의해 불타죽었다라는 신화로 뻥튀기 된 것이다.(...) 여기에 구한말에 추가된 황희도 원래 두문동 72현이었는데 다른 어진 선비들이 황희만은 조선에 출사하라고 권고하여 그만이 살아 나올수 있었다까지 끼워넣으면 딱 우리가 아는 두문동 72현의 이미지가 된다. 이 덕에 황희, 길재, 원천석, 이색, 문익점 등 잘 알려진 여말선초 문신들을 두문동 72현에 맞추기까지 했는데 저 사람들은 각자 고향이나 조용한곳에 은둔하거나 조선에서 벼슬을 하는 등 그 행보가 제각각인 사람들이다.
또 이건 세간에 잘 안 알려진 이야기인데 사실 72명 두문동은 문신만 기거하는 서두문동이고 동두문동이라고 해서 48인의 무인이 따로 은거했다더라라는 얘기도 있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들은 눈치챘겠지만 이 사람들도 조선왕조가 불 질러서(...) 죽였다는 전설이 있다.이쯤되면 이렇게 충신열사가 많았는데 고려가 망한게 신기할 지경
두문동 야사의 변천과정을 설명한 책, 이 항목보다 더 자세히 나와 있으니 참고해 보라
5 두문동 설화가 이렇게 알려진 이유
두문동 72현 이야기가 이렇게 널리 알려지게 된 건 당시 국왕인 영조의 의도가 있다. 영조는 왕위에 오를때부터 경종독살설에 시달렸고 정미환국과 이인좌의 난 등 영조에 반발하는 무리가 즉위 초부터 만만치 않았다. 또 이 이야기가 알려진 영조 16년은 경종 시해 음모죄로 처형된 노론 4대신(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이 무죄이며 영조의 충신임을 선언한 경신처분이 있었다. 즉 영조에게는 일편단심 왕을 따르는 충직한 신하들과 그의 모범이 될 만한 이들이 매우 절실했던 상황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능행길에 두문동 이야기를 끄집어 내어 세상에 알리고, 신하들에게 왕에 대한 충정을 각인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72현까지 배양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두문동 충신들에게 제사가 거행되고 비석을 세워 기념하게 하며, 이들의 후손을 특별히 등용한 것도 모두 영조대에 이르러 시행된 정책이다.
6 결론
결국 영조가 두문동비를 세운 건 맞는데 정말 그 고려 유신 72명이 실제로 불에 타 죽으면서까지 새 왕조에 저항을 했다는 이야기는 후세의 윤색이다. 조선은 왕조에 대한 충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설파,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기들이 섬겼던 왕이 때려죽인 포은 정몽주나 사육신을 추숭하면서 그들의 충성을 본 받으라는 예시로 내세우고 그런 이야기를 지어냈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당장 사육신 이야기만 해도 당대에는 소설로 취급받았던 육신전이 어느새 국가 공인 정사로 취급 받았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조선왕조가 얼마나 충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집착했는지 알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이에 관련하여 두문동 72현 전설에 대한 씁쓸한 얘기 하나로 이 문서를 갈무리한다. 두문동 72현으로 후세에 떠받들여 진 사람 가운데 하나로 조견(趙狷)이라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조선 개국공신 조준의 동생으로 정조실록에 따르면 조준이 태조를 왕위에 올릴 뜻이 있음을 나타내기에 이르자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 집안은 국가의 교목 세가(喬木世家, 여러 대를 중요한 지위에 있어서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는 신하)로 국가가 보존되면 당연히 보존되고 국가가 멸망하면 당연히 멸망해야 합니다. 달가(정몽주)는 국가의 주석(柱石)같은 존재이니 만약 구하는 것이 달가와 다르면, 이는 국가를 해롭게 하는 것이며 국가가 멸망하도록 재촉하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고 하며 조선개국 후 태조가 청계산에 은둔한 조견의 절의를 높게 사서 불렀는데 (백이숙제의 고사를 따라) 고사리 캐기를 원할지언정 새왕조의 백성이 되지 않겠다 하면서 평생 절의를 지켰다 라고 되어있고 심지어는 형 조준과 함께 태조가 직접 은둔한 곳을 찾았는데도 나아가지 않았다 하여 이거 덕에 사당까지 세워져 고려조의 충신으로 떠받들여졌다. 그런데...
실제 당대 실록인 태조, 태종과 세종실록을 보면 이 사람은 조선에 멀쩡하게 출사해서 개국공신[15] 취급에 온갖 벼슬을 다 하고 영화를 누리며 평성부원군에 오르고 세종에게 궤장까지 받은 인물이다. 무슨 두문동 같은 곳에 있다가 억지로 나온것도 아니다, 아예 이성계에게 국새를 들고 왕위에 오르라고 한 대소신료 가운데 하나란 말이다. 아예 세종 실록에 원로대신이라고 졸기까지 기록된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정조 대에 가면 고려조의 충신이라면서 왕한테 화액을 원하니 시행케 하고 절의를 기리는 사당[16]까지 세워진다. 당대에 고려를 무너뜨린 조선의 개국공신이 후대에는 고려의 충신이라고 숭앙받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된 셈이다. 대체 무슨 염치로 이런일을 벌였단 말인가? 심지어 지금도 그렇게 여기는 이들이 있어서 네이버 국조인물고 조견 부분에 댓글로 누군가 '정몽주보다 더한 충신'이라고 써놓을 지경이다.정말 고려에 대해 절개를 지킨 다른 사람들이나 진짜 이름없는 유생으로 두문동에서 절의를 지킨 이들이 본다면 어이가 없어서 웃을일이다.
결국 소위 두문동 72현이라는 명칭은 절대적인 충성을 얻고자 옛 왕조의 충신들을 띄운 조선왕들의 욕망과 선조들의 충절을 띄워 충신의 자손이라는 명망을 얻고 싶어한 후세사람들, 후손들의 욕심이 버무려진 것이라고 밖엔 할 수 없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정말 두문동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절의를 지킨 이름없는 이들을 모욕하는 야사일지도 모른다.- ↑ 한국어 위키백과가 얼마나 엉터리로 적어놨냐면 이성계가 황희를 협박해서(...) 출가
황희가 무슨 절에 들어갔냐?-했다고 나오질 않나, 이성계가 1397년에쓸데없이 연도가 자세하다두문동 선비들을 다 불태워죽였거나 이전에 참살했다라고 써놨는데 거기 적힌 72현 중 1397년 이전 졸하지 않은 사람들도 72현이라고 당당히 적어놨었다. 본 문서 작성 이후엔 고친듯한데 그놈의 다 불태워 죽였다더라는 설은 또 그대로 남겨두었다. - ↑ 사실 한명이 더 있긴 한데 나머지 한명은 이름이 알려지 있지 않고 그냥 맹씨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되어 있어서 사적을 알기 어렵다. 정조실록에는 처음엔 그냥 맹씨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라고 기록하다가 이후 '맹호성'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긴 하는데 순조실록에는 그냥 다시 맹성을 가진 사람(孟姓人)라고 기록해 놓은 것을 보면 당시에도 헷갈린 것 일지도 모른다.
- ↑ 사극 용의 눈물이나 정도전(드라마)등에 나오는 일화로도 유명하다.
- ↑ 실록에 멀쩡이 있는 사실을 무시할 순 없었는지 어떤 책에선 태조때 과거는 조무래기 선비들만 과거를 봐서 급제했다고 나오는데, 다시 부언하지만 두문동 설화는 태종 때 이야기이다.
- ↑ 재밌는 이야기인데 이들도 나중에 두문동 72현 명단에 들어간다(...).
- ↑ 보면 알겠지만 두문동 72현의 명단 가운데 실제로 두문동에 들어갔다고 나오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고 그나마도 72명이 아니라 74명이다. 정몽주, 이색...뭐 이런 사람들은 말 안해도 입 아플 지경이고.
- ↑ 조선조에 예문관 태학사, 의정부 찬성사를 지냈다.
- ↑ 조선이 건국되자마자 절명사를 읊고 자결했다는데 고려사 열전에 대놓고 본조(조선)에 벼슬했다는 얘기가 나오고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다.
- ↑ 조선시기에 일본에 사신으로 간 적이 있다.
- ↑ 조선 초기 문신인 성희안의 증조부로 이방원과 동방이라하여 세종시절에 첨지중추원사에 제수되었다.
- ↑ 두문동은 커녕 이방원하고 과거급제 동기라고 해서 우대받았다.
- ↑ 조선 초기의 문신 맹사성의 아버지로 이 사람은 조선조에 들어서 은거한것도 아니고 공양왕 때 정치가 혼란해지자 관직에서 물러나 충청도 온양에 은거했다고 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도 이 지역의 효자로 나오는데 당연히 두문동 얘기는 없다.
- ↑ 차원부설원기라는 책에 나오는 인물인데 이 책은 위서라는 의견이 있다. 오죽했으면 일성록에 정조가 못 믿겠다고 세번이나 증시를 거절했다는 기록이 있다. 근데 설령 이 책이 맞다고 해도 설명 자체가 위화도 회군을 돕고 조선을 건국한 공이 있다고 하니 실존인물이어도 고려 충신 소리가 나올 인물은 아니다.
- ↑ 여기서부터 '두문동 어진선비들이 황희더러 출사하라고 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 ↑ 한국어 위키백과엔 조선이 개국한 이후엔 태조의 벼슬도 마다하고 평생 은둔했던(...) 조견이 졸할때 조선조에서 내린 벼슬을 비석에 적지 말라고 했는데 후손들이 후환이 두려워 조선에서 내려준 벼슬명을 적었더니 '개국이등공신'만 벼락에 맞아서 무너졌다더라는 전설을 적고 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거 같지 않은가? 택리지에서 이중환이 언급한 정몽주의 비석에 조선조 영의정이라고 써놨더니 벼락을 맞았다는 그 일화를 그대로 따온것이다.
차라리 정몽주는 진짜 고려충신이기나 했지. - ↑ 사당은 이미 숙종조때 세워지고 왕에게 정식으로 화액을 요청한것은 정조 때다, 즉 '조견 고려 충신설'은 꽤 오래전부터 있었단 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