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리코 단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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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Enrico Dandolo
이탈리아어: Enrico Dandolo

1107(추정)~1205


1 생애

그의 아버지 비탈레 단돌로는 요직에 있었으며 엔리코 단돌로도 공직 생활을 하면서 외교관으로서의 소양을 닦았다. 엔리코 단돌로가 베네치아 공화국의 이익을 챙기기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분노한 마누엘 1세의 의해 실명을 당했다는 말이 있지만 실제로는 머리에 부상을 입어 서서히 시력을 잃었다고 한다. 엔리코 단돌로는 시실리와 페레사와 협력하여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데 성공했고 두 번이나 시칠리아의 베네치아 공화국 대사로 파견되어 외교적 능력을 인정받았다. 1193년 6월 1일 제38대 도제였던 오리오 마스트로피에로가 수도원으로 은퇴하자 엔리코 단돌로는 62세의 늙은 나이로 베네치아 공화국 제39대 도제로 선출되었다.

베네치아 공화국 도제로서 엔리코 단돌로가 취한 첫 번째 조치는 도제의 권리와 의무를 밝힌 '두카의 언약'을 맹세했다. 그는 또한 형법을 개정하고. 또 화폐를 개혁하고 그로소 또는 마타판이라고 하는 은화를 발행함으로써 동방무역을 장려하기 위한 전반적 경제정책의 포문을 열었다. 그로소 주화에 나오는 단돌로의 초상은 망토를 걸치고 왼손에는 두카의 언약, 오른손에는 성 마르코의 깃발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2 제4차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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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는 성지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4차 십자군을 일으켰다. 십자군은 이집트를 공격하기로 했지만 당시 십자군은 자금이 부족한 상황이어서 이집트로 가는 선단을 빌리기 위해 베네치아와 협상했고 엔리코 단돌로는 십자군에게 8만 4천 마르크의 은화를 대가로 선단을 빌려주기로 했다. 그런데 기껏 1년동안 거액의 돈을 들여 열심히 배를 준비해놨건만 출정 때 십자군이 원래 병력의 3분의 1밖에 모이지 않아서 빚을 받지 못했다.

단돌로는 돈을 받지 않는 조건으로 원래 베니스의 도시였다가 반란으로 스스로 헝가리에 편입된 자라를 재탈환할 것을 제안하며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십자군은 자라를 함락시켰고 같은 기독교 도시를 약탈한 것에 분노한 교황은 십자군을 파문했다. 일단 십자군은 교황에게 사절을 보내 자초지종을 설명하여 파문을 풀었지만 자라를 점령한 것으로부터 얻은 이익으로는 부족했고 그러던 중 동로마의 망명 황태자 알렉시오스 4세가 십자군이 큰아버지에게 왕위를 친탈당한 아버지의 복위를 도와주면 십자군을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하여 단돌로는 동로마의 지원을 받기 위해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기로 결심했다.

3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엔리코 단돌로는 십자군에게 이집트로 가는 대신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도록 설득했고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상륙작전을 펼쳤다. 콘스탄티노플은 역사적으로 유래없는 난공불락의 도시였으나 엔리코 단돌로는 늙고 앞이 보이지 않는 몸을 이끌고 전장에서 항상 선두에 섰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할 때는 완전무장을 하고 산 마르코 깃발을 든 채 갤리의 뱃머리에 서서 부하들의 상륙작전을 격려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뒤 엔리코 단돌로는 자기 자신과 후대 베네치아 도제들에게 '제4차 십자군의 맹주이자 동로마 제국 절반의 통치자'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이 칭호는 십자군이 전리품을 분배할 때 베네치아에 할당한 동로마 제국 영토 크기와 꼭 맞는 것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십자군은 알렉시우스 4세와 그의 아버지인 이사키우스 2세를 옹립한 후 알렉시우스 4세에게 막대한 돈을 요구했다. 알렉시우스 4세는 시민들에게 가톨릭교 개종과 돈을 갚기 위한 엄청난 세금을 요구해 시민들의 반란으로 쫓겨났다.

그는 십자군 원정의 가장 유력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무르면서 모든 군사작전을 지휘하는 한편 베네치아의 이익을 추구하여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의 일부를 양도받았다. 그는 베네치아의 카날레 그란데 대운하 주변에 단돌로 가문의 저택을 짓기 위해 값비싼 대리석을 배에 실어 자기 아들 레니에르 단돌로에게 보냈다. 단돌로 저택이 있었던 베네치아의 산루카 구역이 19세기에 발굴 되었는데 무어 양식의 건축물 유적과 녹색 대리석으로 만든 고대풍 기둥 유적이 나왔다고 한다.

4 죽음

십자군은 막대한 문화재, 보물, 성유물을 약탈하고 하기아 소피아를 가톨릭식 성당으로 개조해 버렸다. 이러한 일들을 마친 엔리코 단돌로는 십자군을 이끌고 불가리아를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1205년 노환 때문에 병을 얻어 자신의 고국 베네치아 공화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기아 소피아 2층 전실의 대리석 무덤에 안장되었다. 그의 무덤 위에는 도제의 모자와 산 마르코의 문장을 새겼다.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친구이자 비서였던 게오르기 스프란체스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엔리코 단돌로의 무덤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당시 콘스탄티노플이 투르크인들에게 함락되면서 파헤쳐 졌다고 전해진다. [1][2] 스프란체스에 따르면 엔리코 단돌로의 뼈는 개들이 먹어치웠다고 하는데(..)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사실 투르크인들로서는 그 무덤이 누구의 무덤인지는 관심이 없었고, 그저 무덤 속에 부장품을 노리고 도굴했을 뿐 시신 자체에는 1 밀리 그램의 관심도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약탈 과정 중에 시신이 소실된 것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개에게 먹힌 이야기는... 뭐, 그리스인인 스프란체스가 엔리코 단돌로에게 영 좋지 않은 감정을 갖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니 그냥 이해해 주기로 하자. 현재 하기아 소피아의 동쪽 회랑에 그의 무덤 명판이 존재하긴 하지만, 19세기 이탈리아에서 옛 무덤 자리에 석판을 세운 것에 불과하다.

5 평가

베네치아 공화국의 위대한 애국자, 그러나 동로마 제국을 무너뜨려 이슬람 세력의 유럽 침략을 초래한 눈앞밖에 보지 못한 인물

~동로마빠들의 3대 주적~

엔리코 단돌로는 베네치아 전 역사를 통틀어 가장 놀라운 인물 중 하나로 중세의 베네치아를 빛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엔리코 단돌로가 도제가 되었을 때 베네치아 공화국은 내외적으로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그는 베네치아에 진보적인 민법과 헌법제도를 도입해 내부문제를 해결했으며 아드리아 해와 동방에서 베네치아의 이권을 추구하면서 빈틈없는 상거래를 통해 막대한 영토를 획득했다. 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매장된 것은 베네치아가 부강한 나라로 성장하는 데 콘스탄티노플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상징하고 있다.

엔리코 단돌로의 생년을 정확하게 알 수 없어서 정확한 나이를 알 수는 없지만 십자군 원정 당시 이미 팔순의 노인에다 장님이 된 상태에서 십자군을 이끌고 원정을 떠나 당시 가장 부유하고 큰 도시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동로마 제국의 8분의 3을 소유한 영주라는 위대한 칭호를 받았다. 그럼에도 베네치아 공화국에서는 이 위대한 도제를 기리는 기념물을 세우지 않았는데 이는 공화제의 정신에 해가 가는 일은 어떤 일이든 하지 않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전통에 의거한 일이었다.

그의 무덤은 하기아 소피아에 있는데 규모가 작고 평범한 무덤이다. 위의 라틴 제국 제위 문제도 그렇고, 이러한 행보는 엔리코 단돌로가 단순히 물리적, 패권주의적 의미에서의 국익 뿐만 아니라 베네치아 공화국의 공화적 전통과 이념 자체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수호하려고 했던 인물임을 시사한다.

하지만 그의 야심으로 인해 동로마 제국의 많은 위대한 문화유산들이 십자군 약탈자들에 의해 파괴되고 엄청난 문명적 재앙을 겪게 되었다.[3] 따라서 십자군들을 선동하고 지휘한 엔리코 단돌로는 이에 대한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다. 게다가 같은 기독교도 종파로 나누어져 전쟁을 서로 벌이면서 기독교계의 분열을 더 부채질했다. 오죽하면 250년 뒤인 1453년, 오스만 제국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약탈했지만 동로마인들은 그래도 이(오스만)들은 250년 전에 단돌로가 이끈 십자가를 든 기독교 악마보단 낫다는 평을 남겼을 정도였다. 즉, 동로마정교회에선 악마 중 악마 단돌로로 악명을 남겼다.

이는 유럽사에서 미증유한 일이었다. 1차 십자군 출발 당시 교황 우르바누스의 연설이나, 레반트 성지의 십자군 제후국들이 형식적으로나마 동로마 황제의 봉신 자격으로 다스렸던 것만 보더라도 정치적, 문화적 대립과는 별개로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로마의 관계는 적어도 같은 기독교인이라는 최소한의 공감대는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4차 십자군과 이후 라틴 제국의 삽질로 인하여 정교회 동로마-슬라브 세계는 서방을 아예 근본이 다른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다. 다만 같은 종교나 민족끼리도 뒷통수치는게 일상이고 유럽 내에서도 전쟁이 흔히 벌어지던 당대 세계사의 흐름을 생각해 볼때 외국이나 이교에 의한 비난은 큰 비중을 두기 힘들다. 오히려 현대에 와선 엔리코 단돌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로 인한 반달리즘 행위와 그에 따른 문화재 유실로 인해 비판받는다.

정말 엔리코 단돌로의 가장 큰 오점이 있다면 그건 유럽의 방파제였던 동로마를 몰락시키고 그 땅을 차지함으로써 베네치아를 유럽의 방파제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실드가 가능하지만 결정적으로 그 베네치아가 유럽을 지킬 능력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

동로마 제국이 비록 망해 가고 있는 나라이긴 했지만 1204년 이전까지는 이슬람 세력의 공격으로부터 유럽의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었고, 4차 십자군이 건들지 않았다면 아나톨리아 지역을 기반으로 오스만 제국의 공세에 어느 정도 맞설 여력이 있었다. 그러나 제국의 멸망과 함께 이슬람의 군대들은 금각만을 넘어 남유럽과 지중해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몽골 침공으로 이슬람 세력이 몰락하면서 100여 년간은 별 일 없었지만, 그동안 동로마는 서유럽의 야망에 맞선 생존 투쟁으로 이슬람에 신경 쓸 여력 따윈 사치에 불과하였다. 결국 몽골의 침입에서 회복한 이슬람 세계에 오스만 제국이 들어섰고, 육지와 바다 양쪽에서 이슬람 해적들과 오스만 군대를 막아내던 동로마는 이제 수도의 방위에 급급하게 되었다. 이는 1453년 제국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콘스탄티노플을 구원할 군대가 외부에서 들어와야 하는데 그 외부가 오스만 제국의 공격에 완전히 망해 버렸으니 그럴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진짜 문제는 이전에 동로마의 권역이였고 이후 베네치아의 상권이 된 남유럽과 동지중해의 방어는 오롯이 베네치아의 책임으로 떨어졌는데 베네치아가 그 권리를 뽑아 먹을 능력은 있어도, 책임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는 데 있었다.

애초에 그리스의 섬 상당 부분과 남유럽의 영지를 통치하며 세입이 프랑스를 상회한다고 해도, 도시국가 하나가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이란 한정되어 있다. 초기에는 스페인의, 후기에는 신성동맹 전체의 지원을 받아 가며[4] 오스만과 일진일퇴를 거듭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동지중해에서 벌어진 해전과 아드리아해 연안의 육전에 국한되었고, 남유럽 내륙으로 밀려들어오는 오스만 육군을 막을 방법도, 의지도 베네치아에겐 없었다.

오직 세르비아, 불가리아, 왈라키아, 몰다비아 같은 정교회권 슬라브-블라흐계 국가들이 산발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파도에 저항할 뿐이었지만 이들 가운데 오스만과 같은 강대국은 하나도 없었기에 대국적 관점으로 볼 때 거침 없는 파도의 유속을 잠시 더디게 했을 뿐이다. 게다가 이 국가들과의 연계에서도 베네치아 공화국은 자신들의 해외 영토인 스타토 디 마레의 방어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움직임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5].

결국 불가리아를 시작으로 세르비아가 멸망하고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헝가리가 오스만의 신하국이 되면서 베네치아는 오스만의 칼을 정면에서 받게 되었고, 베네치아의 부 자체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을 언제라도 등을 돌릴 수 있는 동맹으로 삼아 가며 대 오스만 항쟁을 이어 나가야 했다.

결국 1645년부터 1669년까지의 크레타 공방전을 기점으로 베네치아는 동로마에게서 얻어낸 그리스의 영토를 전부 빼앗기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지중해의 지배권도, 상권도 빼앗기고, 소모한 국력을 회복하지 못한 끝에 신성로마제국의 꼭두각시로 다뤄지다가 오스트리아의 속국이 되고, 마침내 프랑스에 의해 멸망하기에 이른다. 당대의 베네치아의 영광을 위해 소신했던 엔리코 단돌로의 업적이, 후일의 베네치아의 멸망을 부른 셈이다.

물론 베네치아의 멸망 원인을 엔리코 단돌로 한 명만을 기준으로 하는 것은 지나치게 성급한 평가이고, 실질적으로는 도시국가에서 영토국가로, 순수 민족 및 시민국가에서 거대 국가로 진화하기를 스스로 포기한 베네치아라는 국가 자체의 한계를 반영했다고 볼 수도 있다. 당장 당대 베네치아의 한계를 마키아벨리조차 꿰뚫어 보고 제발 외국인 이민 좀 제대로 받고 사회 혼란도 감수해 보라고 충고해 줬을 정도라면 더욱 그렇다.[6] 하지만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지 않았다면 이슬람 세계와 마주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니, 적어도 언젠가는 이슬람 세계와 마주하더라도 막을만한 여력을 키울 시간 자체를 더 벌 수 있었다.

또한 다른 반론으로, 애초에 오스만의 지중해 진출이 본격화해서 베네치아와 대립하는 시기는 이미 대항해시대 개막으로 지중해 무역이 빠르게 쇠퇴하기 시작할 시점이었다는걸 들 수 있다.[7].

즉, 베네치아는 오히려 엔리코 단돌로의 시대보다 250년 뒤, 콘스탄티노플 함락에서부터 대항해시대 개막 초기까지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에 이르렀다. 이 어마어마한 번영은 후세에도 널리 전해질 정도였고, 이보다 한참 이른 시기에 동지중해 무역 경쟁자인 제노바를 누르고 거의 독점하다시피 해서 가능한 것이었다.

베네치아 몰락의 근본적인 원인은, 동지중해 무역의 쇠락과 지나친 베네치아인 순혈주의로 식민지 인들을 지나치게 차별하고 착취하고 이민에 폐쇄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요인들로 인해 똑같이 도시국가였다가 영토국가로 발전한 로마와는 달리 몸집 불리기 전환이 실패하였다. 사실 오스만에게 잃어버린 식민지들도 따지면 쇠락한 무역로의 거점 역할 이외에 자체적인 가치는 별 볼 일 없는 지역들이라서 베네치아에겐 그다지 타격이 없었다. 아니 오스만에게 이런 도서 식민지들을 빼앗기지 않았다고 해도 이미 영토국가 전환에 실패한 이상 쇠퇴는 필연적이었다. 더군다나 이슬람의 방파제 역할을 혼자서 수행한 것도 아니고 신성로마제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스페인등 오스만 못지않은 국력의 강국들도 나서서 했다.

또한 망한 무역거점 역할 이외는 가치 없는 변방의 작은 바위 덩어리들에서나 깨작거렸을 뿐 베네치아는 본토와 근해는 아무런 침략 위협 없이 연명하는 데 급급하였다. 정작 진정한 '유럽의 방파제'로서 역할을 다 한 국가는, 핵심 영토라 할 수 있는 발칸반도에서 직접 육군 중심의 대륙 세력인 오스만의 대육군을 받아내며 대결전을 펼쳤던 신성로마제국이나 같이 대육군을 파견해서 오스만의 주력군과 싸운 폴란드이다.

물론 오스만과의 전쟁에 들어간 막대한 전비가 몰락의 원인은 아니나 몰락을 가속화시킨 것은 맞다. 그러나 애초에 베네치아가 4차 십자군으로 인한 동지중해 무역을 장악하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몰락해 버릴 국력과 부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에 명목상으론 동로마의 신하라던 약점 명분이라든지 경제면에서 전적으로 의존하는 동지중해 무역에 손을 뻗기 위해 동로마에게 엎드려 숙이면서 아부해야 된다는 경제적 약점이든지.

군사적으로도 동로마가 압도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다던 군사적인 약점으로 인해서 동로마에게 단순히 휘둘리기만 하던 베네치아였다면, 더 강력한 국력을 지녔고.피레네, 알프스 이북의 유럽 국가들의 지중해 무역로로 베네치아 보다 훨씬 높은 입지를 차지했었고, 서지중해 무역로 장악은 기본이고 십자군 전쟁에 적극적으로 편승해서 동지중해 무역로까지 어마어마한 세력을 떨치고, 심지어 동로마가 뒤에서 밀어주기까지 하는 제노바에게 형편없이 밀려서 별다른 이름도 없는 듣보 도시국가로 남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동로마에게 합병당해 멸망하는 결말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다.

한편 시오노 나나미는 관련 저서들을 통해서 그 시점에서 오스만 제국이 그렇게 성장할 줄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었겠냐고 열심히 실드를 치지만, 단지 오스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가 살았던 수백년 전부터 이슬람의 파도를 막아 오던 제국의 역할을 당대의 모든 사람들도 어느 정도 인정하고, 1차 십자군의 직접적인 원인이 룸 술탄국에 의한 동로마 제국의 압박 때문이었다는 것만 봐도 현재가 아닌 당대의 관점에서도 상당히 근시안적인 발상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할 것이다.

하다못해 1054년 스스로 동로마 교회와의 단절을 선언한 가톨릭 교회조차도 이슬람 세력은 일단 막고 나서 생각해 보자고 말했을 정도다. 즉, 오스만 제국이라는 특정 국가가 성장할 것을 예측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근동의 이슬람 제국이 강력해지면 그 칼끝은 동지중해에서 가장 거대하고 부유한 도시인 콘스탄티노플과 동로마 제국, 그리고 그 너머의 동유럽으로 향하게 된다는 것은 당대에 이미 우마이야 왕조셀주크 제국의 사례로써 증명되어 예측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다는 것.

게다가 이건 이슬람 세력의 문제가 아니라 로마 제국이 성립하기도 이전의 고대부터 이뤄져 온 것이기에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이슬람 세력이 몽골 제국 처럼 갑툭한 것도 아니고, 힘이 되는 대로 꾸준하게 동로마 제국을 압박하던 것을 뻔히 보던 시기 사람들이 이걸 짐작하지 못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며, 오스만 제국이라는 새로운 나라가 아니더라도 이슬람 세력의 중심부를 통일하는 세력이 나오면 동로마가 그 공세를 감당해 줘야 한다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이야기였다.

동로마 제국과 여러 형태로 알력을 겪었던 프랑크 왕국에서도 우마이야 왕조의 공세를 막아낸 동로마 제국에 축하사절을 보냈고, 1차 십자군이 동로마 제국을 향한 이슬람의 공세 역량을 분산시키는 데에 공헌했음을 생각해 본다면 당시 엔리코 단돌로와 베네치아 공화국은 어찌 보면 수백년 전 사람들보다 더 근시안적이었던 셈. 뭐, 근동에서 강력한 이슬람 국가가 탄생할 것을 어떻게 예측하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분열과 혼란이 정리된 후엔 통일과 단합의 시대가 온다는 것은 상식 아닌가? 당장 십자군 원정 과정에서도 아이유브 왕조가 탄생하자 십자군 국가들이 버텨내지 못하는 것을 뻔히 봤을 텐데?

당장 중국러시아가 이란을 적극 후원하여[8] 이슬람 세력 간의 대결을 유도하고, 미국과 유럽이 그걸 적극적으로 막아서지 못하는 것만 봐도 역사는 반복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6 대중 매체

코에이 징기스칸 4 시나리오 1에 베네치아 공화국의 부하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괜찮은 편이지만 나이가 엄청 많아서 오래 사용할 수 없다. 또 군주인 오리오가 단돌로처럼 나이가 많아서 운이 안 좋으면 오리오 사망 시 단돌로도 사이좋게 같이 사망하기도 한다.(...)

문명 5 BNW에서 베네치아 지도자로 등장한다.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도 베네치아의 도제로 등장한다. 고증대로 Blind 트레잇을 달고 있다.

  1. 이전에는 한국-그리스 친선협회회장이던 유재원이 쓴 터키 관련 책자인 <터키, 1만 년의 시간여행>에 의거해 1261년 라틴 제국이 무너질 당시 동로마인들은 먼저 단돌로의 무덤을 파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내용은 해당 서적의 명백한 오류이다.
  2. 부관참시에 익숙한 한국인으로서는 콘스탄티노플인들이 왜 엔리코 단돌로의 무덤을 직접 훼손하지 않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으나, 이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라는 사실을 주의해야 한다. 콘스탄티노플인들의 관점으로는 엔리코 단돌로가 죽어서 묻힌 이상 심판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신 뿐이라는 것. 덧붙여서 이 사람들은 황제를 쫓아내고서도 계율을 지킨답시고 죽이지는 않고 코를 베고 눈알을 뽑던(..) 사람들이다.
  3. 이 사건으로 동방(동유럽)과 서방(서유럽)의 사이는 결정적으로 파탄났으며 둘이 공식적으로 화해하는데는 800년이 걸렸다. 전전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2004년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에게 원정에 대해 사과함으로서 화해한 것이다.
  4. 명목상으로는 서로 동맹이었지만, 정확히는 베네치아의 넘치는 국부로 신성동맹을 용병으로 삼았다에 가깝다.
  5. 스컨데르베우가 이끄는 알바니아 저항군을 지원한 적은 있지만 알바니아가 생각보다 훨씬 잘 나간다 싶자 알바니아의 등에 비수를 꽂으려고도 했고, 15세기 중엽에 헝가리와 손잡고 오스만에 맞서기도 했지만 당시 베네치아의 지배가 부분적으로 미치고 있던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의 군사활동에 주력했을 뿐 헝가리를 적극적으로 돕지는 않았다.
  6. 로마사 논고 참고.
  7. 특히 베네치아가 세력을 뻗힌 동지중해 쪽이 더욱 심했다. 기존의 대 아시아 무역로이던 동지중해의 역할을 대서양이 대체했기 때문.
  8. 다만 이란이 다른 이슬람권 국가보다 좀 더 합리적이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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