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에 일어난 리비아 공습을 찾으시면 오디세이 새벽 작전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1 개요
1986년 4월, 미국이 리비아에 공습을 가한 작전. 작전명은 Operation El Dorado Canyon
1980년대 각종 테러가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미국의 골머리를 썩게 만들었는데, 특히 이스라엘 문제와 관련하여 유럽에서 활동하는 아랍계 테러리스트들이 최대의 골치거리였다. 이러한 아랍계 테러리스트의 배후로는 여러 세력이 있었으나 당시 대놓고 활동하는 거물급 인물로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알 카다피가 있었다. 결국 계속되는 테러 행위에 참다못한 미군이 특허낸 오지랖을 발동하여 연장을 집어들었다.
2 공습 준비
1986년 3월, 일단 시범타로 리비아의 시드라 만에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파견하여 무력시위를 펼쳤으며, 리비아의 해상경계망을 무력화시키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 때문에 소련 함대가 감시하기 위해 지중해로 나오는 등 난리가 아니었다. 이에 카다피의 지원을 받는 테러리스트들이 서베를린의 미군들이 많이 찾는 디스코텍을 폭파시켜 다수의 미군 사상자(3명 사망, 229명 부상)를 내는 것으로 보복을 가해왔다.
보복테러에 빡친 미국은 리비아에 공습을 가하기로 결정하고 벵가지와 트리폴리 지역에서 확인된 테러리스트의 훈련을 돕는 캠프와 카다피가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거처를 목표로 설정하였다. 이 작전에는 F-111F 애드박이 동원될 예정이었고, 대규모 병력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F-111 편대와 이미 배치된 해군 항모 함재기들과 협력하여 목표물에 대한 핀 포인트 타격을 하고 빠지는 형태였다. 공군 F-111 편대는 수도 트리폴리를, 해군 A-6, A-7 편대는 제 2의 도시 벵가지를 공격하기로 임무를 분담했다. 이 공습은 당시 최신예 전투기였던 F/A-18의 첫 실전이기도 했으며, 호넷은 여기서 SEAD를 맡았다.
2.1 우방국에 협조를 요청합니다. 안되잖아?
공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큰 골치거리가 있었다면 유럽 국가들의 비협조였다. 우선 이 작전에 영국 주둔 미 공군을 동원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정작 영국은 보복테러를 우려하여 기지에서 발진만 허가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영국에서 리비아로 날아가기 위한 최상의 경로는 스페인과 프랑스를 비롯한 중서부 유럽국가를 지나가는 것이었으나, 이들은 모두 리비아와 이해관계가 엮여있었고 역시 보복테러를 우려하고 있었던 까닭에 미국의 영공통과요청을 거부했다.
결국 미군은 차선책으로 대서양을 건너, 지브롤터 해협을 경유하여, 지중해를 거쳐서 리비아를 타격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게 예상 왕복비행시간만 13시간, 총 비행거리 약 10,000km의 사상 최장거리 작전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F-111의 항속거리를 감안하면 최소 12번의 공중급유를 해줘야 했는데, 역시 보복테러를 걱정한 유럽의 우방 국가들이 공중급유기 지원을 거절하였다. 결국 작전에 필요한 모든 필요사항을 미국이 알아서 다 해결해야만 했다. 그중에서 압박스러운 점은 급유기들도 연료를 소모하므로 별도의 재급유를 받아야만 했다. 그러니깐 급유기가 급유를 하러 날아가기 위해 다른 급유기로부터 급유를 받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필요했던 것(…). 그나마, 이 공중급유기에 급유를 해주는 역할은 영국에서 해주기로 합의가 되었다.
3 작전 개시
당초 영국에서 이륙한 편대는 공격을 담당할 F-111F 24기와 전자전을 담당할 EF-111 6기였다. 하지만 중간에 문제가 생겨서 F-111F 6기와 EF-111 1기가 귀환하였다.[1] 그래서 실제 공격에 참여한 병력은 F-111F 18기와 EF-111 5기이다. 한편 공군의 움직임에 맞춰 해군에서도 함재기들을 발진시켰는데, 이를 감시하던 소련 함대가 포착하고 리비아에 통보가 되면서 미국의 공습이 임박했음을 눈치채게 되었다. 또한 몰타 총리가 리비아의 화풀이를 두려워해 몰타 상공으로 미군 공습부대가 통과했다는 사실을 카다피에게 통보해 주었다. 이래저래 불안요소가 산재한 상태에서 미군은 리비아 상공에 진입하였다.
우선 공군 공격부대에서 3개 편대 9기가 카다피의 거처로 알려진 장소[2]와 테러리스트 캠프등에 대한 공습에 나섰다. 하지만 강력한 방공망으로 인하여 폭탄을 투하할 수 있었던 것은 고작 2기 뿐이었으며, 한 기가 대공미사일에 격추되어 조종사 두 사람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다른 1개 편대 3기는 테러리스트 캠프에 공습을 가하였으며 피해없이 임무를 완수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2개 편대는 트리폴리 공항에 공습을 가하였고 지상에 주기중이던 항공기들을 파괴하고 공항에 큰 피해를 주었다. 한편 벵가지 지역의 테러리스트 캠프와 공항을 공습한 해군 공격부대는, 목표물인 캠프를 파괴하였고 공항에 주기 중이던 항공기들을 파괴하였다.
이 공습은 불과 10분 남짓되는 시간만에 마무리 되었으며 대부분의 목표에 성공적으로 타격을 가하였다. 당시 미국은 AN/AVQ-26 Pave Tack 시스템을 이용하였는데, 간단히 레이저 유도장치와 목표확인용 카메라를 통해서 목표물을 삿대질 지정하면 레이저 유도 폭탄인 GBU-10 페이브웨이가 목표물을 향해 날아가 조져버리는 핀 포인트 타격 방식이었다. 하지만 실제 작전이 끝나고 확인한 결과 성공적으로 투하한 것은 17기 중에서 4기에 불과했고, 7기는 목표물을 명중시키지 못하였으며, 6기는 대공망의 위협을 받아 투하를 하지 못했다. 게다가 투하된 폭탄 중에 일부가 리비아 주재 프랑스 대사관 주변에 떨어지는 바람에 자칫 프랑스 대사관이 명중당할 뻔한 상황도 빚어졌다. 당연히 프랑스는 이 사건에 대해서 미국에 격렬히 항의했고 잠시 외교분쟁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미군은 리비아 상공에서 격추된 1기와 중간에 엔진 고장으로 스페인에 비상착륙한 1기를 제외하면 모두가 무사히 귀환하였다. 미군의 인명손실은 격추된 전투기의 조종사 2명이었다. 공습을 당한 리비아는 최소 40명이 사망하였는데 그 중에는 민간인 피해자가 15명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카다피의 가족 일부(양녀)가 공습으로 사망하였다고 발표되었다. 그외에 최소 IL-76 수송기 3기와, MiG-23 14기, 헬리콥터 2기를 상실하였다.
4 공습 이후
미국에게 크게 한 방 먹은 카다피는 그 보복으로 1988년 12월 21일, 리비아 정보기관 요원들을 동원하여 팬암 항공사 747 여객기를 스코틀랜드 상공에서 폭파, 탑승객 259명과 지상 거주자 11명이 목숨을 잃은 팬암 103편 폭파 사건을 벌였으나, 그 직후 냉전의 종식과 걸프 전쟁을 보면서 이라크군이 미군한테 제대로 아작나는거보고 염통이 쫄깃해져서 테러리스트 지원을 포기하였고 순한 양이 되었다. 그 결과 유럽에서 활동하던 테러리스트들도 버로우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미국은 Pave Tack 시스템이 지닌 문제점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를 열심히 고치고 보완하여 개발한 AN/AAQ-13 LANTIRN 시스템으로 걸프전에서 전투손실 없이 이라크군을 완벽하게 조졌다.
1988년 카다피가 요한 바오로 2세를 통해 전사한 조종사의 시신 송환을 제안하였고, 이에 따라 1989년 폭격수 폴 F. 로렌스 대위의 시신이 송환되었다. 하지만 미군에서 자체적으로 조사한 결과 그 시신은 조종사 페르난도 L. 리바스-도미니치 대위로 확인되었다. 로렌스 대위의 시신은 행방이 묘연하다. 2006년 가족들이 시신을 찾기 위해 리비아에 직접 가기까지 했으나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5 그외 이야기
이원복은 과거에 조선일보에 연재하던 만화에서 이 공습에서 목표하던 카다피 제거에 실패한 게 당시 미군 상층부가 어느 점쟁이에게 의존하여 묻지마 공습한 결과라고 깐 바 있다. 이 만화에 의하면 이 대가로 그 점쟁이에게 수백만 달러나 주고 공습한 게 이런 결과였다고. 하지만 실제론 미군은 애초에 카다피 제거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3] 겁을 줘서 리비아의 테러 지원을 끊으려는 계산이었다. 결과는 위에 나온 것과 같이 리비아 공습 이후 미국을 목표로 한 테러는 지속되었지만 그 횟수는 감소하였으며 게다가 무기 시스템까지 발전시켜 훗날 걸프전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뒀으니 미국은 충분히 성과를 거두었으며 공중급유기와 정밀타격의 중요성을 최초로 알린 공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공습에서 별장이 폭격당했을 때 카다피의 양녀가 사망하였다고 공표되었으나 사실 멀쩡하게 살아있으며 카다피가 반미감정을 격양시키기 위하여 일부러 벌인 정치쇼였다는 보도가 나왔다.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