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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 「나헌등전(羅憲等傳)」 | ||||||
나헌 | 등수 | 마륭 | 호분 | 오언 | 장광 |
馬隆
(? ~ 296년 이전)
목차
1 개요
서진(西晉)의 장군. 서진의 대표적인 명장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자(字)는 효흥(孝興)이다.
활동한 시기가 삼국시대 극후반부라서 대중적으로 그리 알려진 인물이 아니고 열전도 짧은 편에 기록된 서적이 신뢰도가 낮기로 유명한 『진서』이다. 그러나 마륭은 이러한 단점에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묘하게 높은 인지도를 자랑한다. 『장감논단』, 송나라때 저술된 『십칠사백장전』, 명나라때 저술된 『광명장전』에서 중요한 명장중 한명으로 수록되며 제갈량과 관우와 이름을 나란히 하는 쾌거를 누린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여러 번 마륭을 언급하며 또한 위서로 판명나긴 했지만 『이위공문대』에서도 제갈량의 팔진도를 다루면서 마륭을 언급한다.
이러한 묘하게 높은 인지도는 마륭이 수레를 쓰는 명장의 대명사의 일종이 되서 그런 면이 있다. 즉, 블루오션을 개척해서 앞서 언급된 단점을 죄다 뒤집은 사례가 되는 셈(...).
그리고 어찌보면 제갈량의 마지막 후계자라 볼 수 있는 인물이다.[1]
2 생애
2.1 초기 생애
동평군 평륙현 사람으로, 젊어서부터 지용을 갖추어 명분과 절의를 세우길 좋아했다고 한다. 젊어서 위의 연주자사 영호우(令狐遇)한테 의탁한 바가 있는데, 영호우는 왕릉의 난에 연루되어 이미 죽었음에도 시체를 꺼내져서 내팽겨쳐지는 형을 당했다. 이에 영호우와 연관되기를 꺼려해 시신을 거두는 자가 없자 마륭은 사재를 털어서 초빈을 하고, 3년간 복상하면서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으면서 온갖 예를 다하며 신세를 갚으니 주(州)에서 이를 미담으로 삼았다고 한다.
당시 삼년상은 엄청난 중노동으로 조선시대만 해도 삼년상으로 체력이 약해져서 줄초상이 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의탁했다지만 부모도 아닌 생판남을 위해 삼년상을 치룬다는 것은 미친 짓에 가깝다. 원소가 의부와 적모를 위한 육년상으로 엄청난 명성을 얻어 곧바로 청류파의 아이돌로 군림하는데 자신의 명성을 위해 가족을 이용했다는게 기정사실인 반면 영호우가 반란에 연루되어 누구도 시체를 거두지 않는 상황에서 삼년상을 치룬 것을 보면 별다른 사심이 있었다고 보긴 어렵다는 점이 더욱 신기하다. 연주에서 이를 미담으로 삼고 훗날 사마독으로 천거된 것은 이 무모하면서도 의리있는 행동이 뒷받침된 것임이 확실하다.
원소와 마찬가지인 셈인데, 제아무리 육년상보다는 짧다해도 삼년상을 치루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체력에 자신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니 선비족 토벌에 나서지
2.2 서방의 위기
「오회(吳會)가 평정되지 않아 용맹스러운 선비를 얻어 무공을 이루어야 하는데, 옛 천거의 법은 수재가 다 없어져 넉넉하지 못하다. 이 넓은 주와 군에는 장대하고, 날래고, 빼어나고, 기이한 재주와 힘이 있는 걸출한 자가 있을 것이니, 모두 그 이름을 듣고 정성으로 발탁하여 기용하라. 진실로 그런 사람이 있다면 뽑아서 기용하는 수와 기한을 제한하지 않는다.」-『진서』 「마륭열전」에 기재된 조서.
태시 연간[2]에 사마염이 오나라를 정벌하기 위한 인재들을 모았는데, 마륭은 연주에서의 추천으로 사마독이 되었다. 270년에 진주자사 호열, 271년에 양주자사 견홍 등이 선비족의 독발수기능에게 전사한 상황에서 서진에서는 크게 걱정했다. 277년에 사마준이 독발수기능을 격파함으로써 20만여 명의 호족들의 항복을 받아내는 등 독발수기능은 약소세력으로 전락했다. 모두가 방심하는 와중 278년에 양흔이 독발수기능과 한무리였던 강족과의 화친을 끊었다. 이 사실을 안 마륭은 말했다.
"양주자사 양흔이 강족과의 화평을 잃었기 때문에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마륭의 예측대로 양흔은 무위에서 강족 약라발능(若羅拔能)과 교전하나 크게 패하여 목숨마저 잃었다. 279년 봄, 약소세력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독발수기능에게 양주가 함락되면서 서쪽 지방은 서진정권과 완전히 연락이 두절되었다. 사마염은 서방상실에 큰 근심에 빠졌고, 이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한 신료들에게 계책을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마륭은 이에 나아가 말했다."폐하께서 신에게 이를 맡기신다면 신이 능히 이를 평정하겠나이다."
황제는 말했다.
"반드시 적을 멸할 능력만 있다면 어찌 맡기지 않겠는가. 생각건대 경의 방략(方略)은 어떠한지 듣고 싶다."
마륭은 말했다.
"폐하께서 신에게 맡기고자 하신다면 신의 말을 들은 뒤에 맡겨 주시옵소서."
황제는 말했다.
"무엇인가?"
마륭은 말했다.
"삼천의 용사를 뽑아 서쪽으로 북을 치며 나아간다면, 폐하께서 위덕으로 여쭐 때 추한 오랑캐들을 멸하기에 충분합니다!"
-『진서』 「마륭열전」
아무도 답하지 못하자 마륭은 호기롭게 3천 명의 용사만 있다면 독발수기능의 무리를 평정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놀랍게도 사마염은 이를 허락하면서 토로호군 겸 무위태수로 삼았다. 공경[4]들이 사마염에게 아뢰었다.
"이미 육군(六軍)의 무리와 주·군의 병사가 많은데, 이들을 쓰고 상을 넓게 베풀지 못한다면 법이 어지러워질 것입니다. 어린 장수 마륭은 망설을 하는 것이니 이를 따를 수 없습니다."
즉, 이들은 이미 군대가 존재하는데 이러한 의용병을 고용해 사사롭게 포상을 주면 전후에 기존의 군체제에 편입하기 어렵고 골칫거리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으니 아예 안쓰는게 상책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마륭의 호기로운 제안에 대해서도 "어리다"는 이유로 망설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데 이는 겨우 삼천 명을 대리고 수만 명을 운용하는 적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마륭을 믿지 않는게 도리어 더 상식적일 수도 있었다. 마냥 높으신 분들의 어리석은 지적질로 보일 수 있으나 나름대로 정론을 따르는 바였고 이전까지 아무런 전공을 세우지 못한 듣보잡을 믿지 않는 것은 오히려 현명한 행동이다.
그러나 사마염은 공경의 간언을 듣지 않고 끝까지 마륭을 기용했다. 이는 도리어 사마염의 파격적인 모습이라 할만하다.[5]
마륭은 표지를 세워놓고 4균(筠)의 활을 당길 수 있는 사람과 9석(石)의 노를 당길 수 있는 사람을 모집하면서 시험을 치뤘다. 아침 해가 중천에 이르럿을 때 총 3,500명이 모집되었는데 마륭은 이를 보고 말했다.
"충분하다."-『진서』 「마륭열전」
후일 조선시대 등에서 언급하는 것을 보면 상당한 정예병력으로 평가되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때 편찬된 『임하팔기』에서는 손자병법의 구절중 하나인 "“병력을 동원하면서 정예병을 선발하지 않는 것을 배군(北軍)이라 한다.”의 반례로 곽거병의 정예병과 마륭의 시험을 꼽았다. 양요의 논박문에 의하면 벼슬과 작위를 빌미로 이들을 모집했다고 한다. 그래서 전투력이 굉장히 높았던 듯.
마륭은 병사들에게 무고에 가서 원하는 병장기를 선택하도록 했지만 무고령[6]이 마륭과 분쟁을 일으키고, 어사중승이 마륭을 탄핵하자 마륭은 사마염에게 아룄다.
"신은 목숨을 걸고 싸움터에 나가는데 무고령이 위나라 때의 썩어빠진 병장기를 주려고 하니 이는 폐하께서 신에게 일을 시키시려는 뜻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진서』 「마륭열전」
그러자 사마염은 마륭에게 필요한 물품과 3년치 군자금을 하사하고 마침내 그의 군대를 서방으로 파견했다.
2.3 독발수기능의 난을 평정하다
「마륭은 치우친 군사와 적은 무리로 어려움을 돌아보지 않고 떨치며 나아가 험한 곳을 무릅쓰고 건넜다. 그를 가절(假節)·선위장군(宣威將軍)으로 임명하고 적당(赤幢)·곡개(曲蓋)·고취(鼓吹)를 더한다.」-『진서』 「마륭열전」에 기재된 조서.
마륭은 서쪽으로 진군해서 온수(溫水)[7]를 건너니 독발수기능은 수만[8]을 거느리고 험한 지형에 의지해서 앞을 막으면서 뒤를 끊으려고 했다. 산길이 좁기에 마륭은 제갈량의 전투진법 팔진도에 의거해 편상거(偏箱車-가죽으로 덮은 전차)[9]를 만들어서 나무지붕을 수레 위에 얹어놓아 공격을 막다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1천 리를 진군하니 죽거나 패배한 적병이 아주 많았다. 「마륭열전」에서는 사상자가 총 3천 명에 이르었다고 한다. 이러한 쾌거를 올렸으나 싸우는 와중 마륭군은 궁시가 다하고 시위가 쇠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마륭이 기책을 남발하며 적을 격파하니 선비족에서 대적할 의지를 잃었다고 한다.
『자치통감』에서는 빠진 내용이지만 「마륭열전」에 의하면 마륭의 병사들은 넓은 평지에서는 녹각거(鹿角車)를 운영했으며 좁은 길에서는 목실(木屋)을 수레 위에 얹었다고 한다. 그리고 길에 자석을 뿌려 철갑을 입은 선비족 병사들의 기동을 제하고 무쇠갑옷을 입은 마륭군이 능히 이들을 척살했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사마광이 "마륭 자석전사설(...)"을 『자치통감』에서 배제한 것은 출처 『진서』의 낮은 신뢰도와 아무래도 현실성이 없어 보이는 내용 때문인 듯하다.
마륭이 서쪽으로 진군하고 소식이 끊기자 조정에서 마륭에 대해 매우 걱정했다. 어떤 이는 마륭이 죽었다고 주장했는데, 밤에 마륭의 사자가 도착하자 사마염은 손을 비비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만약에 여러 경들의 말을 좇았더라면 진주와 양주는 없어졌을 것이오"[10]-『진서』 「마륭열전」
사마염은 뛰어난 성과를 포상하기 위해 앞서 서술된 조서를 통해 마륭에게 가절과 벼슬을 내려 선위장군으로 삼았다.
마륭이 무위에 이르자 선비족 대인 졸발한차만능(猝跋韓且萬能)[11]이 무리 만 명과 함께 항복했다고 한다. 「마륭열전」에서는 이 시점에서 선비족 만 명을 베거나 항복시켰다고 한다. 또한 융적 몰골능(沒骨能)이 마륭과 함께 독발수기능을 상대로 싸웠다고 하는데 마륭의 편에 서서 선비족과 싸워서 그런지 「마륭열전」에서는 선한 인물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다만 『자치통감』에서는 졸발한차만능이 나오나 몰골능에 대한 대목은 짤렸다.
12월에 마륭과 독발수기능이 크게 싸워 독발수기능의 목을 취하니, 이로써 마륭은 10년 동안 농서 지방을 어지럽힌 독발수기능의 난을 평정했다. 독발수기능이 사마준(과 그 휘하의 문앙)에게 큰 피해를 입기는 했으나 양흔을 죽이고 양주를 함락시키는 등 279년 시점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었음은 분명하며, 난을 완전히 평정한 마륭의 공로 역시 크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후일담은 조금 씁쓸한 편인데 마륭의 병사들에 대한 포상을 맡은 관리는 모두에게 벼슬과 작위가 주어저야한다고 아뢰었지만 서진 조정에서는 응하지 않고 오히려 상을 줄였다. 이에 위장군 양요가 논박하며 말하였다.
"전에 정성스럽게 장사를 뽑을 때는 작위를 더하기로 약속하고 적소로 유인했습니다. 이제 마륭이 온전히 홀로 싸워 이기고 서쪽 땅의 편안함을 얻었는데, 이들은 앞서 변방을 주고도 그 뒤의 공을 편히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모두 듣고 허락하여 믿음과 신뢰를 명확히 해야 합니다."-『진서』 「마륭열전」
다만 「마륭열전」에는 이 대목 이후 제대로 된 포상을 받았는지에 대한 대목이 없다. 뉘앙스상 포상을 받았을 여지가 높고 양요 항목에서도 양요의 논박 덕분에 포상을 받았다는 대목이 존재하지만 「마륭열전」만 본다면 확인할 수 없는 사안. 다른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면 추가바람.
2.3.1 마륭이 세운 공의 중요성
사실 마륭의 진정한 공은 큰 전력 차출도 없이 독발수기능 정벌을 오나라 정벌과 거의 동시에 실행할 수 있도록 한 점이다. 사마준이 277년 즈음이 되면 독발수기능을 거의 때려잡은 덕에 양흔이 강족과의 동맹을 끊은 시점에 서진 정권은 독발수기능을 거의 문제로 보지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는 양흔이 강족 약라발능에게 참살당한 이후에도 유지되었는데, 복야 이희(李憙)가 독발수기능 토벌을 요청했지만 모두 선비족이 대단한 근심이 아니기에 반대했다고 한다. 때마침 서진의 정남대장군 양호는 오나라 정벌을 주장하고 사마염이 이에 동의하면서 서진은 모든 전력을 오나라 정벌에 쏟아붓는 총력전을 준비하는데 임했다. 그러나 동오정벌이 시행되기 바로 직전인 279년 봄에 독발수기능이 양주를 함락시키면서 약체세력으로 방심하고 있던 독발수기능은 엄청난 위기로 다가온다. 사마준의 군세가 대부분 건재했음에도 이러한 사태가 벌어지고 함락 이후에도 사마염을 비롯한 조정이 독발수기능을 물리치는데 난항을 겪고 있었던 것은 대부분의 전력을 오나라 정벌을 위해 돌린 것에 원인이 있던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즉, 279년의 사마염에게는 "오나라 정벌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대가로 선비족을 토벌하느냐" VS "선비족은 잠시 보류하고 오나라 정벌에 주력하느냐"라는 어려운 선택지가 주어진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마륭은 자진해서 3500명에 불과한 병력,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군자금과 병장기만을 소모했을 뿐인데도 1년도 허비하지 않고 난을 완전히 평정한다. 덕분에 서진은 대부분 전력을 오나라 정벌에 집중하고 양쪽의 원정을 모두 성공시켰다. 양면작전으로 독발수기능과 오나라를 동시에 대처하거나 오나라 정벌을 미뤄뒀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갑툭튀한 마륭은 독발수기능이라는 골칫거리를 속전속결로 제거해버렸다는 점에서 사마염에게 최고의 해결책을 제시한 셈이다. 사마염이 마륭의 활약을 두고 그리 기뻐한 것은 이런 이유가 있다.
2.4 위엄과 신의로 농서일대를 다스리다
태강 연간[12]에 서평이 황량하기에 마륭을 평로호군에 서평태수로 삼아서 파견했다. 성해매(成奚每)라는 오랑캐가 매번 소란을 피우자 지역의 근심이 되었는데 마륭은 이런 성해매를 격파하고자 했다. 성해매는 험한 지형에 의지해서 수세에 일관하자 마륭은 이에 대응해 농장기를 들고와 농사를 짓는 척을 했다. 처음에 엄산했던 군기를 자랑했던 성해매군은 적의가 없어보이는 침공군을 경시해 시간이 지날 수록 게을러졌다. 마침내 적이 경계를 풀자 마륭은 성해매를 습격해 반란을 평정했다. 그후 서평에서는 감히 도적이 나타나질 않았다고 한다.
관직에 십여 년을 머무르자 위엄과 신의가 농우(隴右)에 우레같이 울렸다. -『진서』 「마륭열전」
290년에 마륭은 봉고현후에 봉해지고 동강교위가 되었다. 10여 년 동안 마륭은 농서일대를 위엄과 신의로 다스리고 있었다. 이는 이미 10년 동안 독발수기능이 깽판쳤음에도 통령체제를 어느 정도 회복했음을 시사하는데 마륭이 군사적 재능 뿐만이 아니라 행정능력도 상당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당대에도 이런 명장을 시기하는 사람이 존재했으니 그는 악양태수 풍익 사람 엄서(嚴舒)였다. 엄서는 마륭을 대신하고 싶어서 '마륭이 늙어서 병장기를 들 수 없다'는 소문을 내자, 서진 정권은 마륭을 불러들이고 엄서가 그를 대신해서 진수했다. 그러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이민족이 준동하여 저족과 강족이 서로 연합하고 모여들자 백성들이 매우 두려워했다. 조정은 관농 일대가 다시 시끄러워질게 두려워 엄서를 면직해 마륭을 다시 복직시켰다.
마륭은 끝까지 벼슬을 지내다가 죽었다. 죽은 년도가 알려지지 않았으나 296년 이전으로 추측된다. 296년에 옹주와 진주에서 제만년의 난이 터져서 강족과 저족도 함께 준동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마륭열전」에서 이를 시사하는 기사가 전혀 없다.
마륭의 아들 마함(馬咸)이 대를 이었는데 아버지를 닮아 날래고 용력이 있었다고 한다. 팔왕의 난 당시 성도왕 사마영이 사마예를 칠 때 마함을 응양장군으로 삼아서 하교를 방어하도록 했지만 사마예의 장군 왕호한테 패하여 죽었다. 다른 후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3 제갈량의 마지막 후계자?
연주 출신으로 제갈량과 아무런 연고가 없는 데다가 활동 시기가 전혀 달라서 제대로 만나본 적도 없는 인물이지만, 묘하게 연관되는 부분이 많은 인물이다.
"두헌은 일찍이 팔진을 통솔해 흉노를 공격했고, 진의 마륭도 팔진을 활용해 양주를 다시 찾았다." -『제갈량 평전』
태종이 말하였다. “진(晋)나라의 마륭(馬隆)이 양주(凉州)의 강족(羌族)을 토벌할 때에도 제갈량의 팔진도에 의하여 편상거(偏箱車)를 활용하였는데, 지세가 광활하고 평평하면 녹각거영(鹿角車營)을 만들어 적의 진공에 대비하였고, 도로가 협착하면 수레 위에 판자 지붕을 만들어 덮고 적과 싸우면서 진군을 계속한 바 있소. 그러니 정병은 옛날의 명장들도 중요시하였던 것이기는 하오.” 이정이 말하였다. “지난 번 신이 돌궐을 토벌할 때에 서쪽으로 몇 천리를 진격하였습니다. 그 때 만일 정병을 쓰지 말았다면 어찌 그렇게 멀리까지 원정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녹각거(鹿角車)와 편상거(偏箱車)는 전투에 매우 중요합니다. 군사들의 전투력을 절약할 수 있는가 하면, 전진하면서 적의 공격을 막을 수 있으며, 또한 전진하면서 대오를 정돈시킬 수도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교대로 상황에 따라 시행할 수 있습니다. 이로 보면 마륭은 제갈량의 옛 전법을 많이 응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위공문대』
가장 큰 예로 팔진도가 있다. 「마륭열전」에서 대놓고 팔진도에 의거해 편상거를 만들었다고 서술하는데 사마독이 되기 전까지 일평생 연주에서 살았을 가능성이 높고 삼년상을 치루느라 여행이 여의치 않았을텐데 망한 적국 수괴(...)인 제갈량의 병법에 대해 잘 알고 있던 것을 보면 상당히 신기하다.[13] 하여튼 간에 마륭의 편상거의 성공은 제갈량의 북벌의 실패로 인해 때론 저평가받는 팔진도의 성공적인 실례로 부각된다. 덕분에 제갈량의 후계자로 평가받는 장완, 비의, 강유 중 유일한 군인인 강유보다도 제갈량의 군사적 후계자로서의 면모는 마륭에게서 더 강하게 나타난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이는 강유가 어떠한 전술을 구사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부족하다는 이유도 있지만.
마륭과 제갈량의 유사성은 마륭의 성해매 토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마륭은 성해매를 토벌하면서 병사들에게 농사를 짓게 해서 적의 의중을 변화시키는 전략을 활용한데다가 이는 수세에 일관하는 적을 상대했다는 점에서도 제갈량의 5차 북벌과 비슷하다. 차이점이라면 제갈량의 목적은 둔전을 통해 장기전에 돌입해 수세에 일관하는 사마의를 전장에 이끌어내는 것에 있었다면, 마륭은 수세에 일관하는 성해매의 병사들을 방심케 해서 습격이 용이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유사성을 볼때 마륭이 제갈량의 5차 북벌을 참고해 활용한 듯한데... 이를 증명할 만한 확실한 증거는 없다.
또 다른 마륭과 제갈량의 유사성이라면 이민족을 통치하는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다만 마륭이 이민족을 통제하는 데 성공한 것은 성해매 토벌 같은 군사적 성공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구체적인 행정 체계를 통해 이민족 통치를 시도한 제갈량과는 차이가 있다. 실제로 마륭이 잠시 물러나고 엄서가 농서지방을 맡자 이민족이 준동했다는 점은 마륭 본인의 능력이 대단했음을 시사하지만 반대로 마륭이 농서일대에 부여한 질서는 개인의 능력에 기댄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했다는 점도 보여준다. 실제로 마륭 사후 농서일대는 저족과 강족이 함께 준동한 제만년의 난에 휘말린다.[14] 물론 제갈량에 대해서 연구했다는 것 하나는 확실하니 그 과정에서 이민족을 통제하는 방법에 영감을 얻었다는 것도 재미있는 상상썰이긴하다. 근거가 없고 실제로도 두 인물의 방식 사이에 차이가 존재해서 문제지(...).
4 조선시대의 마륭에 대한 인식 및 평가
세종 99권, 25년(1443 계해 / 명 정통(正統) 8년) 2월 14일(경자) 3번째기사함길도 도절제사 김효성이 건의한 수레 싸움 법을 받아들이다
‘우리 나라는 산천이 높고 험하며, 도로가 좁고 막히었는데 어떻게 능히 수레 싸움의 법을 쓰겠느냐.’ 하시오나, 이는 신의 아뢰온 근본 뜻이 아니옵니다. 신이 새 고을에 두 번을 가 보았사온 바, 그 땅이 도적의 소굴에 가깝고 구원병의 오기에는 멀므로, 새 고을 성밖의 평탄한 곳에서 수레 싸움의 법을 써서 새로 이사 온 백성들을 안심하게 하고, 점차로 남도에서 방어하러 오는 군사를 줄이고자 할 뿐이오며, 높고 험한 곳에 멀리 몰고 가려 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태공병법(太公兵法)》에 이르기를, ‘무릇 수레의 죽을 땅이 열 곳이 있고 이길 땅이 여덟 곳이 있는데, 장수가 해로운 10군데와 이기는 8군데에 밝으면, 적군이 비록 천 대의 수레와 만 명의 기병으로 포위할지라도 앞으로 몰고 옆으로 달려 반드시 온전하게 이긴다.’ 하였습니다. 그 해로운 10군데 중에 산천의 높고 험함을 역력히 고증할 수 있사오니,진(晉)나라 마융(馬隆)이 양주(涼州)를 토벌할 때 편상거(偏箱車)를 만들어 이리저리 다니며 싸우기를 천리나 하면서도 드디어 적을 이겼사오니, 그 천리 안에 어찌 밭두둑과 울퉁불퉁한 곳이 없었겠습니까. ‘5진(鎭)의 성밑에 비록 1마장이나 2마장의 평탄한 땅이 있다 하나, 그 사이에 어찌 언덕, 골짜기, 밭두둑, 울퉁불퉁한 것이 없으랴.’ 하시오나, 신은 가만히 생각하기를, 5진(鎭)에 사는 백성들이 항상 수레를 사용하옵는데, 이제 조그만 싸움 수레만이 오직 그런 곳에 다니지 못하오리까. ‘이제 야인의 싸움하는 것이 구름같이 모였다가 새같이 흩어진다.’ 하시오나, 신은 가만히 생각기를, 야인이 비록 말에 익숙하여 빨리 싸우는 데에 유리하다 하지마는, 어찌 능히 날아갈 수야 있겠습니까.
숙종 2권, 1년(1675 을묘 / 청 강희(康熙) 14년) 1월 24일(계미) 2번째기사비국을 인견하여 북한 산성의 수축과 삼남에 순무 파견하는 일을 논하다
“부서(扶胥)는 큰 수레이나, 무강(武剛)은 외바퀴이므로 한 사람이 운전할 수 있습니다. 위청(衛靑)은 사차(四車)로 자위(自衛)하였고, 마융(馬隆)은 수레로 식량을 싣고 요새(要塞) 밖 3천 리의 평량주(平凉州)에 나갔는데, 그 만듦새는 길이 좁으면 좁히고 평지에서는 펴니, 그 제도가 갖추어 있어 참으로 행군(行軍)하고, 적을 막는 미기(美器)이나, 신이 한 수레를 만들어 보니, 여드레 걸려서야 끝나고 드는 물력(物力)이 자못 많았으며, 또 여느 때에는 쓸 곳이 없는데 간수하기가 어렵습니다.”
광해 177권, 14년(1622 임술 / 명 천계(天啓) 2년) 5월 1일(병신) 5번째기사비변사가 감군이 요구한 병마, 군량, 배에 대해 어려운 사정 밝힐 것을 아뢰다
우리 나라의 강변 방어는 바로 편두관(偏頭關)에 비길 만하기는 하나 병력은 중국의 한 진(鎭)에도 미치지 못한다. 하수(河水) 굽이에 있는 편두관은 황하가 띠처럼 두르고 있고 옆에는 18곳의 요해처가 있어도 노마(虜馬)가 출몰하면 방어하기 어렵다고 염려하는데 더구나 우리 나라는 북으로는 경흥(慶興)으로부터 서로는 의주(義州)에 이르기까지 이미 황하와 같이 막아주는 강도 없고 또 험한 요해처도 없는데다가 반이(叛夷)의 강함은 서노(西奴)보다도 심하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천 리나 되는 방수 지역을 여름이나 겨울이나 할 것 없이 매양 근 1만 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강변을 지키는데, 형세는 나누어지고 병력은 적어서 늘 근심하며 스스로 보존하고 있다. 평년(平年) 교체할 즈음에 오고 가는 숫자를 합해서 계산해 보면 천경(踐更)과 같이 돈을 주고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는 경우가 있으니, 그렇다면 겨우 1만 명이 되는 숫자 중에 정용(精勇)한 자는 실로 얼마 되지 않는다. 평안도 일대의 수자리 서는 병사의 경우는 그래도 상황에 따라 조발해 모을 수 있지만 북도(北道)의 병사는 조발해 오기가 쉽지 않다. 우리 나라의 경계에 여연군(閭延郡) 등 4군(郡)이 있었는데 백 년 전에 잃어 버려 오랑캐 땅이 되었으니 마치 중국 대령(大寧)의 경계에 있는 삼위(三衛)·선대(宣大) 지역이 요광(遼廣) 지역과 중간이 막혀 서로 소통하기가 곤란한 것과 같은데, 이는 우리 나라의 서북쪽이 양쪽에서 서로 구원해 주는 형세를 잃은 것이다. 군대에는 본래 허장 성세하는 경우가 있으니, 종이에다 쓰는 것은 비록 10만이라 하더라도 무엇이 어렵겠는가. 그러나 위로 성천자(聖天子)에 고하고 아래로 대노야(大老爺)에게 고하는데 어떻게 거짓으로 부풀린 수를 덮어 놓고 올릴 수 있겠는가. 도 군문(陶軍門)이 3만 명의 군사를 보내 도와준다는 설을 갖추어 보고했는데 이러한 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전에 마융(馬隆)이 수기능(樹機能)을 사로잡을 때에는 군사 5천 명을 쓰는 데 불과했고,이정(李靖)이 힐리장(頡利帳)을 칠 때에는 단지 날랜 기병 3천 명만을 데리고 갔으니, 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에는 반드시 병력의 많고 적음에 구애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사세가 크게 달라지자 마음이 조금 달라졌다는 말은 하늘에 해가 있는데 어떻게 이럴 리가 있겠는가. 스스로 충분(忠憤)을 가다듬을 뿐이다.
정조 51권, 23년(1799 기미 / 청 가경(嘉慶) 4년) 4월 10일(무술) 3번째기사수원 주위의 4, 5개 군·현을 외영에 이관한 후 생긴 폐단에 대해 서유린에게 유시하다
옛날에 군사를 쓸 적에 모집하는 초기에는 정밀하게 선발하였으니 마륭(馬隆)이 푯말을 세우고 선발 시험을 치룬 것이 바로 이 경우이고, 이미 모집한 뒤에는 규율이 있었으니 마수(馬燧)가 수자리 사는 병사들을 잘 훈련시킨 것이 바로 이 경우이다.
마륭(馬隆)이 서량(西凉)을 토벌할 때에, 산길이 험하고 좁다하여 편상거(扁箱車)를 제작했는데, 나무로 만든 집을 수레 위에다 설치하였던 것이다. 편상거의 제도는 자세히 알 수 없고, 산길이 험하고 좁으면 말도 통행하기가 어려운데 어떻게 수레를 운행할 수 있겠는가? -홍대용의 『담헌집』
다만 위청(衛靑)의 무강거(武剛車)와 마융(馬隆)의 녹각거(鹿角車)는 그 효과가 이미 입증되었으니, 명(明)나라 이현(李賢)과 여자준(余子俊)이 ‘꼴 먹일 필요가 없는 말을 부리며, 발 달린 성을 움직이는 것 같다.’라고 한 말은 참으로 지론입니다. -이현일의 『갈암집』
옛날 승거(乘車) 제도는 지금 비록 갑자기 회복할 수 없는 일이지만 병서(兵書)에서 말하고 있는 무충(武衝)과 부서(扶胥), 또는 진인(晉人)들이 말한, 마융(馬隆)이 만든 편상거(偏箱車) 같은 것들은 지금도 쓸 수가 있고 그것을 만드는 법도 알기 어려운 게 아닌데다, 그것이면 돌진해오는 적군의 말을 막을 수도 있고 화포로 적진을 먼저 쳐들어가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윤휴의 『백호전서』
“대(隊)는 10인이 1대인데 이는 10만 명을 말한 것입니다. 무강거는 《한서(漢書)》에서 이른바, ‘위청(衛靑)이 무강거로 자신을 호위하게 했다.’고 한 것이고, 편(偏)은 수레 열다섯 대입니다. 무강거는 위에 방패를 설치하고 아래에 한 개의 바퀴가 있는데, 이른바, ‘편상거(偏箱車)’라는 것입니다. 진(晉) 나라 때 마융(馬隆)이 이 수레를 사용하여 수기능(樹機能)을 토벌하는 데 있어 천리를 달려가 승리를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지형은 대부분 산악지대이고 도로가 험난하기 때문에 이 수레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여깁니다. 오늘날 북쪽 오랑캐와 교전(交戰)하는 데 있어 이 수레가 아니면 오랑캐 기마병(騎馬兵)의 충돌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니, 이에 신이 이 말을 한 것입니다. ‘장인(丈人)’이란 말과, ‘삼석(三錫)’이란 말은 《주역(周易)》에 나오는데, ‘장인’은 지략과 덕망을 지닌 사람으로서 충분히 삼군(三軍)의 장수가 될 만한 사람을 말한 것이고, ‘세 번 명령을 내린다.’는 것은 은총으로 임명하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리하여 《주역》에, ‘군사를 출동시키는 데 있어 올바른 도리로 해야 하는데 장인이 군사를 거느리게 하는 것이 길하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군사를 거느리는 데 있어 중도(中道)를 지키는 것이 길한 것으로서 임금의 은총을 받게 된다.’고 하였고, 또 ‘임금이 세 번 명령을 내리는 것은 만방(萬邦)의 백성을 생각해서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연(燕)’은 연경(燕京)을 말한 것이고, ‘저들의 등을 치고 목을 조인다.’고 한 것은 우리나라가 저들의 왼쪽에 있는데 우리가 출병하여 요동(遼東)ㆍ계주(薊州)의 길을 끊을 경우, 저들의 등을 치고 목을 조르는 형세를 갖게 된다고 한 것입니다.” -윤휴의 『백호전서』
그리고 신은 또 듣건대, 옛날에 전쟁을 하는 데 있어 수레로 군대를 이룬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헌원(軒轅)의 제도가 중국을 안정시키고 이적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인데, 후대에는 이 제도가 차츰 사라졌으니 중국이 오랑캐들에게 지탱할 수 없었던 것이 실로 이에 연유한 것입니다. 옛날의 병거의 제도를 갑자기 회복할 수 없으나 병서(兵書)에 기록된 무충(武衝), 부서(扶胥)의 제도와 진(晉) 나라 사람이 말한 마융(馬隆)이 만든 편상(褊箱)의 법은 지금에도 행할 수 있는 것이고 그 제도에 있어서도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이 병거야말로 치달리는 오랑캐의 기마병을 상대할 수 있고 화포가 진동하는 위세를 도울 수 있는 것으로서, 신이 전번 상소에 ‘무강거(武剛車) 1천 부대를 편성해야 한다.’고 한 것인데, 오랑캐를 제압할 수 있는 기구가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병거도 또한 적의 침입을 미리 대비하는 데 있어 매우 중대한 기구인데 이는 미리 만들어 비축해야 하고 갑자기 만들 수 없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일찌감치 계획하고 전력으로 만들게 하여 일을 당했을 때 사용할 수 있게 하소서. 이러한 일들은 국정(國政)을 도모하는 자의 일로서 신이 말할 만한 것이 아닌데 이처럼 길게 말하였으니, 그야말로 급히 달리며 고함을 지르면서 예모를 차릴 여가가 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신은 황공하고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재량하시고 살피소서. -윤휴의 『백호전서』
위청(衛靑)은 무강거(武剛車)로 영채(營寨)를 만들었고, 이릉(李陵)은 대거(大車)로 영채를 만들었으니, 이는 모두 형세에 따라 일시적으로 방편을 취한 것이었다. 만약 그것이 일시적으로 쓴 것이라면, 나무통〔木罌〕을 타고서 몰래 건너간 것이나 담요로 감싸고서〔裹氈〕 험한 길을 지난 것과 다를 것이 뭐가 있겠는가. 마융(馬隆)이 전차를 썼을 때에는 승리하였고, 방관(房琯)이 썼을 때에는 패배하였다. 그런데 가령 마융이 진도(陳濤)에서 싸웠다면 그때에도 반드시 전차를 썼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죽석관유집』
옛날에는 병사를 씀에 있어서 처음에 모집할 때는 잘 고르는 데 중점을 두었으니 마융(馬隆)이 표지(標識)를 세우고 골라 시험하였던 것이 그것이고, 이미 모집하고 나서는 기율(紀律)을 엄격히 하였으니 마수(馬燧)가 잘 조련하여 정예로운 군졸로 만들었던 것이 그것이다.-『홍재전서』
이를 보면 조선시대때도 마륭이 나름대로 잘 알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좁은 길에서 수레를 썼다는 점에서 산악길이 험하기로 유명한 한반도에서 이를 도입할 수 있을지에 대한 기대감과 논박이 반복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특히 윤휴가 저서 『백호전서』에서 마륭의 편상거를 여러번 언급하는데 이때마다 좁은 길에 사용할 수 있고 한반도의 특성과 적합하다고 논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대여론이 없던 것은 아니여서 위에 기제된 『조선왕조실록』의 구절 몇개만해도 그런 수레의 효용성에 반박을 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수레를 제대로 도입하지 않았으니 반대론자들의 승리라 봐도 무방할 듯하다.
5 기타
항목을 읽어보면 알 수 있지만 일생 자체가 서진의 ㅄ스러움과의 사투나 마찬가지다.
진압한 독발수기능의 난 자체가 서진이 진주[15]에 항복한 선비족 수만이 살 수 있도록 놔둔데다가 대사마 진건이 호열과 견홍이 농서지방을 통치하는데 반대했음에도 사마염이 무시해서 벌어진 일이다. 게다가 사마준이 거진 때려잡은 난을 양흔이 병맛 대처로 일키운 것은 덤. 게다가 자진해서 싸우겠다는 마륭의 명을 서진의 황제 사마염이 받아들였음에도 무고령이 분쟁을 일으키고 때맞춰 어사중승이 마륭을 탄핵하는 것을 보면 서진의 제대로 썩은 일면을 볼 수 있다. 그나마 사마염이 보호해줘서 어찌어찌 서량까지 파견나가고 끝내 임무완수에 성공하지만 서진 조정에서는 포상을 줄이려는 궁리나 하고 앉아있다. 서량을 10년 가량 평화롭게 통치하며 잘 풀리나 싶더니만 양서의 모함에 잠시 일에서 밀려났다가 복귀하는 사태를 보면 이런 막장 정권에 마륭같은 인물에 나온 것 자체가 신기하다. 이게 서진이 그나마 멀쩡했던 시절의 모습이었음을 생각하면 매우 소름돋는다(...).
그래도 서진의 막장스러운 대처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실각하고 무명으로 인생을 마칠 수도 있었음에도 사마염이든 양요든 강족과 저족이든(...) 적절한 시기에 쉴드쳐줘서 심한 위기 없이 상당히 성공적인 삶을 살며 후대에도 명장으로 이름을 남긴 것을 보면 전한의 이광이나 이릉처럼 마냥 불운하다고 보기 어렵고 도리어 매우 운 좋은 축에 든다. 다만 아들이 팔왕의 난에 연루되어 정황상 대가 끊긴 것을 봐선 운이 유전되진 않은 모양이다.
6 미디어 믹스
삼국지 9 일러스트 |
의외로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 좀 호구스럽게 생긴 얼굴로 등장한 바가 있다. 이름은 마륭이 아닌 마융을 따른다.
물론 후반부 인물들이 많이 나온 삼국지 9이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러나 능력치는 활약에 비해서 좀 많이 짠 편이다. 통무지정[16]순으로 77/75/72/71을 마크하는데 모두 최소한 70대라서 좋은 것도 있지만 최대(...) 또한 70대이기에 좀 미묘하다. 그래도 능력치를 대신해서 기병과 궁기[17]의 숙련도가 높은축에 드는 300이고 노병과 공성도 200[18]에 들기때문에 쓸만한 편이다.
게다가 극후반부 인물이기 때문에 찬밥 더운 밥을 가릴 때가 아니고, 처음 등장하는 263년 검각공방과 촉멸망 시나리오에선 강유, 등애 등 당대 명장들이 모두 오늘내일하는 사정이기에 군웅할거 같이 팔팔한 인재들이 많은 시나리오와는 달리 C급이 아닌 A급으로 당당히 활약할 수 있다. 애초에 극후반부에선 인재의 능력치가 아니라 인재의 수가 국력을 좌우하기 때문에 마륭 같은 올라운드 인재는 더할 나위없이 중요하다. 그래도 정사의 활약에 비해서 능력치가 좀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정작 가장 많은 장수가 나온 삼국지 13에선 미출현.
진삼국무쌍 시리즈에서는 당연히(;;) 클론무장으로 출현한다. 특히 진삼국무쌍 7 맹장전 성도탈출전에서 종회의 책략[19]에 속는 장수중 한명으로 나온다(...). 오죽하면 등애왈 "마륭님 같은 지략가가 그런 책략에 속다니..."그래도 제갈량의 재래라고 평가받는데 너무하잖아 코에이... 위의 삼국지 시리즈의 능력치만 봐도 코에이의 마륭에 대한 인식이 다 보인다.다만 격파후 등애의 설득에 잘못을 반성하고 등애와 문앙이 탈출 할 수 있게 도와준다.
- ↑ 물론 마륭이 제갈량이나 촉한과 직접적인 인연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그의 군사 지휘능력이 제갈량의 군사적 유산인 팔진도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 ↑ 서기 265 ~ 274년이다.
- ↑ 구체적인 발언 내용을 담은 『자치통감』과 달리 「마륭열전」에서는 단순히 죽을 것이라고 얘기했다고 서술한다. 묘하게 자치통감에서 더 자세한 것을 보면 사마광이 참고한 또 다른 모종의 자료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 ↑ 삼공과 구경을 뜻하는 말이다. 즉 서진의 높으신 분들.
- ↑ 그러나 독발수기능이 참살당한 후에 마륭의 병사들에 대한 포상을 줄이는 쪽으로 조정이 방향을 바꾸고 사마염이 이에 대한 반대를 안했다는 점에서 공경의 경고한 문제점을 포상을 줄이는 방법으로 풀려던게 아니냐고 볼 여지가 존재한다. 이 해석이 옳다면 사마염의 행동은 상당히 찌질해보인다(...).
- ↑ 대충 무기고의 대빵을 뜻한다
- ↑ 무위현의 동쪽
- ↑ 「마륭열전」에서는 만 명을 거론하는 반면 『자치통감』에서는 수만을 언급한다. 사마광의 감수를 받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숫자가 늘어난 것은 놀라운 점이다. 본문에서는 『자치통감』의 기록을 참고한다.
- ↑ 위의 쇠뇌와 아래의 목실 언급 때문인지 삼국전투기에서는 이를 현대의 전차 비슷한 물건으로 상상하여 표현했다.
- ↑ 다만 사마염이 호열과 견홍을 양주에 배치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한 진건의 간언을 씹은게 독발수기능의 난의 1차적인 원인 중 하나임을 고려하면 사마염 또한 만악의 근원이라 봐도 무방하다(...).
- ↑ 「마륭열전」 번역본의 경우에는 졸발한과 차만능 두명으로 해석하고 권중달역 『자치통감』에서는 졸발한차만능의 한 사람으로 번역되었다. 본 항목에서는 권중달 교수의 번역을 따른다.
- ↑ 서기 280 ~ 289년이다.
- ↑ 이것은 제갈량 사후 그의 전략전술을 사마씨가 연구하고 전승한 결과인 듯싶다. 일례로 사마의가 죽은 제갈량의 진채를 둘러보고 그를 기재(奇才)라 칭찬한 것도 그렇고, 사마염이 근위대장 진협을 시켜 제갈량의 진법을 훈련시키게 했다는 기록을 감안하면 서진에서 군부 내지 국가 단위로 제갈량(또는 제갈량의 병법)에 대한 빠질을 실행하고 있었을 공산이 크다는 것(...)
- ↑ 다만 제갈량은 재상이었던 반면 마륭은 일개 태수에 해봤자 봉고현후에 동강교위에 불과했음을 고려하면 실질적으로 마륭이 뭘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도 존재하긴 하다.
- ↑ 269년에 서진이 관농지방을 개편하면서 세운 또 하나의 주. 옹주와 양주 사이에 있었다고 한다.
- ↑ 삼국지 9에는 매력 수치가 없다.
- ↑ 궁기는 병법이 주사까지 있는 것에 비해서 기병은 돌파밖에 없는 점이 아쉽다.
- ↑ 근데 노병은 병법이 제사까지 밖에 없고, 공성은 아예 없다!
- ↑ 등애가 모반을 꾀한다는 헛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