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서』 「장완비의강유전(蔣琬費禕姜維傳)」 | ||||
장완 | 비의 | 강유 |
목차
1 개요
費禕 (? ~ 253)
삼국시대 촉한의 재상으로 삼국지의 인물. 자는 문위(文偉). 강하군 맹(鄳)현 출신이다.
제갈량, 장완의 뒤를 이어 촉한의 실질적 2인자 역할을 하였으며, 여기에 동윤이 추가되어 촉의 사상(四相) 또는 사영(四英)이라고 불렸다. 호방하고 온화한 성품으로 사람들과 두루 친분도 두터웠으며, 제갈량으로부터 장완과 더불어 직접 탁고를 받은 인물이었다. 또한 촉에서 실질적이자 마지막으로 내정과 군정의 1인자 역할을 겸한 인물이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정사의 기록에 따르면 어릴 적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비씨 집안의 종가라 할 수 있는 비백인[1]에게 위탁되어 성장했다. 더하여 당시 비백인의 고모가 익주목 유장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덕분에 익주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연의에서는 이에 착안하여 유장의 가신으로 있다가 유비에게 투항하는 인물로 소개되지만, 실제 정사 기록에는 유장이 등용했다는 언급이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본격적으로 관직에 진출한 것은 유비가 익주를 장악하고, 한중 공방전에서 승리하여 한중왕에 오른 이후로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촉한 내에서 어느정도 명성은 갖췄지만, 실질적인 지위를 보면 말단 하급관리에 불과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제갈량이 남만정벌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마중나온 여러 관리들 중에서 특별히 비의를 지목하여 수레에 나란히 앉도록 하고, 추후 정세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나누면서 일약 촉한의 주요인물로 성장하게 된다.[2] 이때 공명에게 자신의 충분한 식견을 보여준 비의는 제갈량의 추천으로 오나라에 사절로 파견되었고 손권과 접견할 수 있었다.
그들이 나누었던 대화의 전문이 기록된 것은 아니나, 기록상으로 보면 손권이 이죽거리는 말투로 비의를 자극해 본 모양이다. 그러나 비의 그는 이에 일절 동요하는 모습없이 원만하게 논의를 풀어나갔다. 이러한 비의의 모습에 크게 감명을 받은 손권은 "그대는 천하의 미덕을 갖춘 군자이오. 예상컨데, 틀림없이 촉왕조의 고관(高官)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나라에 자주 오지 못할까 걱정이다."라며 비의를 극찬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인하여 촉에서 오에 사절을 파견할 공무가 생기면 비의가 그 역할을 맡곤 했다.
2.2 제갈량의 북벌
북벌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참모로써 제갈량을 보좌했으며, 황제 유선을 위시한 촉한의 조정의 대신들과 제갈량이 주고받던 서찰을 직접 전달하는 역할이나 오에 사신으로 가는 일을 맡았다. 조운이 죽은지 1년 후인 230년에 조운이 맡던 중호군(中護軍)으로 전임하였다가 뒤에 또 사마(司馬)가 되었다.
당시 촉한 진영에는 위연과 양의의 갈등이란 큰 골칫거리가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치기만 하면 승상이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리낌없이 막말을 해가며 싸울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제갈량도 이 두 사람이 조정내의 분위기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두 사람의 재능을 버리기에는 촉한 내부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 형태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이에 성격 호방한 비의가 나서서 두 사람이 맞부딪히기 시작하면, 그 사이에 끼어들어 뜯어말리고, 두 사람을 찾아가 다독이는 형태로 갈등을 무마시켜 나갔다. 이러한 비의의 행동은 효과가 있어 두 사람이 자주 다투긴 했어도 별다른 돌출행동없이 북벌에 전념할 수 있었다.
분투에도 불구하고 결국 제갈량은 대업을 이루지 못한채 오장원에서 숨을 거두었고, 그의 지시에 따라 촉군의 후퇴를 지휘하는 과정에서 위연이 심상치않은 움직임을 보이자, 자청하여 위연을 찾아갔다. 작전을 조율하기 위해 찾아온 것으로 위장한 비의는, 위연이 양의에 대한 디스를 퍼붓자, 이에 맞장구치는 형태로 그의 속마음을 떠보았다. 덕분에 촉군은 위연의 돌발행동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었고, 잠시 위기가 있긴 했으나 무사히 위연을 제거할 수 있었다.
2.3 제갈량 사후
본국으로 귀환한 비의는 후군사에 봉해졌고, 제갈량의 유언에 따라 장완이 상서령으로 임명되어 촉한 조정의 실무를 승계받았다. 이 때 중군사로 임명된 양의가 "어떻게 장완이 승상의 뒤를 잇고, 공이 큰 자신은 한직으로 밀릴 수 있냐"면서 불평불만을 늘어놓자, 비의는 그를 직접 찾아가 위로했다. 하지만 양의가 이 자리에서 차라리 그 때 위에 투항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며 선을 넘어버리자, 비의는 즉시 이를 유선에게 상주하여 양의를 숙청했다.
이후 장완의 후임으로 익주자사에 임명되었고, 뚜렷한 활약은 언급되지 않으나, 어수선한 분위기가 수습될 때까지 내부를 단속하였고, 혹시 모를 위의 군사행동에 대비하는 역할과 함께 장완이 북벌계획을 수립하는 동안, 그의 뒤에서 보조해주는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244년에는 위가 10만 병력을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촉을 침공하는 일이 있었다. 낙곡대전이라 불리는 이 전투는 한중방위를 담당하던 진북장군 왕평이 휘하의 3만 병력을 거느리고 지연작전을 펼치는 동안, 유선의 칙령을 받은 비의가 증원부대를 이끌고 나가 왕평을 지원했다. 비의가 전장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위군이 전황의 불리함을 깨닫고 후퇴를 하려던 참이었기에 그 뒤를 추격하여 적을 섬멸하는 전공을 세웠다. 구체적인 전개는 해당 항목에 나와 있다.
이후 장완은 상용 방면으로의 진출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으나, 246년에 지병으로 숨을 거두었고, 비의가 그 뒤를 이어 상서령에 임명되어 촉한 제일의 문관이란 자리에 올랐다. 또한 대장군에도 봉해져 한중에 머무르면서 병사들을 훈련하고 지휘하는 등 제갈량-장완을 잇는 명실상부한 촉한 최고의 문무권력자의 자리에 올랐다.
강유의 북벌을 컨트롤하였고, 강유가 병사를 요청할 때마다 많은 군사를 내주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강유에게 한 말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승상만 못하거니와 또한 많이 뒤떨어지오. 승상께서도 중하를 능히 평정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우리들이겠소! 나라를 보전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며 신중하게 사직을 지키느니만 못하오. 공업을 세우는 것은 능력있는 자를 기다려야 할 것이며, 요행을 바라며 일거에 성패를 결정하려 해서는 안되오. 만약 뜻대로 되지 못한다면 후회해도 다시 어쩔 수 없을 것이오. |
진지를 높이 평가하여, 장완과 같은 해 동윤이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유선을 보좌하게 하였다. 이후 비의 사후에 진지가 촉한의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오르게 되는데, 진지 본인은 동윤보다 뛰어나다는 말을 들었던 만큼 능력이 있었으나, 환관 황호와 친하게 지내는 바람에 황호가 유선 옆 중앙권력에 진출하는 길을 터준 셈이 되어 버렸고, 결국 진지 본인이 사망한 이후엔 황호를 컨트롤 할 수 있는 사람이 촉한 내에 아무도 없게 된다.
2.4 최후
253년 1월 1일 비의는 한수(漢壽)에서 연회를 열던 도중 상당히 취한 상태에서 미처 몸을 방어하지 못하고 위나라 출신 항장 곽순에게 살해당했다. 곽순의 원래 의도는 촉에 항복한 뒤에 후주 유선을 살해하려 했다. 원래 목표대로 되었으면 곽순은 촉의 구국의 영웅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선 주변의 무사들이 가까이 가는 것을 막아 꿩 대신 닭으로 대장군인 비의를 목표로 바꿨다고 한다. 의도와는 다르게 닭 대신 학을 잡았다. 곽순은 얼마 못가 죽임을 당했고, 위에서는 이와 같은 뜻밖의 낭보를 듣고 곽순에게 작위에 시호까지 내렸다. 장억은 비의가 항상 위의 항장을 가까이 하는것에 대해 경고했는데 결국 이와 같이 되고 말았다.
3 비의와 북벌
비의가 촉한 조정을 이끄는 동안 전임자나 전전임자에 비해 눈에 띌만한 수준으로 북벌이 언급되는 기록이 없기에 상대적으로 북벌에 소극적인 인물이란 평을 듣는다. 하지만 말년을 보면 비의 자신이 총지휘하는 형태로 대규모 북벌이 계획되고 있었다고 여길 만한 내용이 〈비의전〉에 존재한다.
우선 248년에 비의는 한중으로 진출하여 주둔했고, 휘하 강유에게 1만 남짓의 병력을 주어 제한적인 군사행동을 보였다. 그리고 251년 성도로 돌아왔는데, 바로 그 다음해인 252년 후주 유선으로부터 부를 개설하도록 명받았다. 그리고 〈장완전〉을 참고하면, 전임 대장군이자 대사마인 장완 역시 238년에 대장군부를 개설했고, 이때 부서 개설 명령을 내린 유선이 그에게 북벌을 명했다. 또한 253년에 오와 촉의 북벌이 약 3개월 간격으로 연타로 이루어졌다는 점과 함께 〈장억전〉에 나온 기록처럼 비의가 죽자, 촉에서 오의 출병을 말리려 했던 점을 감안하면 오의 태부 제갈각과 함께 촉오동맹이 공동으로 북벌을 추진했을 개연성이 있다. 참고로 비의가 암살당한 한수는 가맹을 개명시킨 이름으로 한중 지역이다. 비의가 죽은 시점이 정월 때의 대연회란 걸 감안한다면 정말로 북벌을 앞두고 한중에서 정월 기념 연회를 하다가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장 위서 제왕기에 이 연회에 대해 '촉나라의 대장군 비의가 많은 군사를 인솔하여 위나라 변방을 침범하려는 음모를 세우고, 한수(漢水)를 지나면서 많은 빈객을 초대하여 연회를 열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렇게 상고해보면 비의가 과연 북벌에 소극적이기만 한 사람이었는가는 의문이다. 이때 대규모 북벌론을 주장하던 강경파 강유를 달래며 '승상도 하지 못한일을 우리가 어찌 하겠는가, 내정을 튼튼히하고 능력있는 인재가 나오길 기다리자'라고 1만명의 군사를 주어 말하긴 했으나 이후에 아예 전쟁을 자제하자고 하는 의견과는 달리 비의는 비록 1만의 한계가 있다고 해도 강유나 요화를 통해 끊임없이 위나라 농서지역의 행정력 확보를 방해하고 해당지역 강, 저족과의 연결을 이끌도록 했다. 비의 사후 제기된 북벌반대론과는 달리 비의시대엔 소규모라도 위나라를 끊임없이 견제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분명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249년 하후패가 귀순하는데 하후패는 위나라 사정에 매우 정통한 인물로 비의 입장에선 본격적인 위나라 정벌에 있어서 상당히 도움이 되었을것이라고 판단했을 공산이 있다. 비의 자신이 언급한 '공업을 세우는 것은 능력있는 자를 기다려야 한다'에 맞는 상황. 하후패 귀순 이후 성도로 돌아가 유선에게 부를 개설하라는 명을 얻어낸것도 이 일원일수 있다. 또 월수태수 장억이 성도로 돌아가기를 여러번 요청하는데 장억은 기록에서도 나오듯이 아픈몸에도 북벌에 나서겠다고 할 정도로 강경한 북벌찬성론자였다. 또 장억이 대장군이 된 비의에게 충고를 하는 부분이 있으며, 강유와 하후패의 귀순 이후 상호 교류 기록이 있다.[3] 북벌에 적극적인 인물들이 비의 주변에서 상호간 교류의 흔적이 보인다는것은 분명 예사로운 일은 아니며 후일 강유의 북벌 전공에 장억과 하후패는 실제로 큰 도움이 되었다. 즉 250년대 초반, 비의는 자신과 강유-하후패-장억등 군부내 북벌 찬성론자들의 연결고리를 강화하고 253년쯤에 역시 북벌을 준비중이던 손오의 제갈각과 연계하여 본격적인 북벌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4]
비의는 제갈량 시대에 오와 교섭을 벌이면서 손권에게 그 역량을 인정받았던 외교관이기도 했다. 비의의 관점에서 볼 때, 촉이 위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제갈량의 5차 북벌 때 처럼 촉오 공동전선을 펴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때 비의가 집권 시절에 상대적으로 소규모 북벌만 벌인것은 당시 동맹인 오나라의 내부사정이 상당히 문제가 있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후 촉오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제갈가문의 제갈각이 손권의 탁고대신이 되어 위와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비의와 강유의 입장에선 이 상황이 시사하는 바가 컸을것이다. 제갈각이 한창 위와 싸우고 있을때 비의의 한수 출병 준비는 분명 예사로운 부분이 아니다.
비의가 죽은 후 이런 북벌 찬성론자들의 입지가 줄고 본격적으로 북벌 반대론이 활개치기 시작한것도 특기할 만한 부분이다. 비의 사후 장익은 강유의 적도 출병을 반대했고 요화는 대놓고 강유의 잦은 북벌을 비꼬았으며 진지와 초주는 구국론을 지어 강유의 북벌을 비판하고[5] 제갈첨과 동궐은 아예 강유를 익주자사[6]로 두어 외정 대신 내정을 관장하게 하여 북벌을 막고 황호를 견제하려고 했다. 이는 그동안 비의가 억눌러왔던 북벌 반대론이 본격적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실제로 장억이 전사하고 하후패도 얼마 안 있어 세상을 떠나자 촉한 군부 내에서 적극적인 북벌을 주장하는 인물은 강유 혼자만 남게 되며 이는 강유의 촉한 정계 내 운신폭을 줄이는데 한 몫을 담당했다. 비의의 내정우선론과 강유 1만명 병사 한정, 그러면서도 끊임없는 위나라 견제를 시도한 점은 이런 북벌 반대론이 내부적으로 본격적으로 나오지 못하는 일종의 회유책을 씀과 동시에 기회가 되면 북벌을 시도할 준비였다는 추측도 가능해 보이는 부분이다.
비의의 북벌 시도가 아쉬운 부분은 제갈량 시절처럼 촉의 문무 1인자가 대규모 북벌을 실행하며 북벌에 많은 부분을 지원할 수 있는 형태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 때문이다. 비의가 주도하는 대규모 북벌이었다면 이후 휘하 실무자인 강유에게도 힘을 실어줄 수 있었을지도 모르고 한편으론 강유를 적절하게 제어할 수 있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비의 자신도 낙곡대전 등에서 상당한 군사적 역량을 보여준 바가 있었고. 또 내정에 있어서 황호 등이 날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선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다. 또 비의의 업무 스타일이 다른 사영들의 업무 스타일과는 달리 과로를 상당히 지양하는 타입이었던걸 생각하면 좀 더 오랜기간 집권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4 기타
삼국지연의 때문에 이런저런 피해를 본 인물이기도 하다. 진수가 편찬한 정사 삼국지와 이후에 편찬된 삼국지 관련 기록에는 모두 이름이 비의(費禕)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나관중이 연의를 집필하면서 비위(費褘[7])로 잘못 쓰는 바람에 이후 나타나는 삼국지 관련 기록에는 비위로 개명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더불어 연의의 경우 북벌 시에는 간간히 이름도 언급되고 하는 역할도 있으나, 제갈량 사후에는 아무래도 강유가 촉의 주인공 격인 인물로 격상되어 초점이 맞춰지다보니 실제 비위의 지위나 능력에 비하면 공기에 가까운 비중을 자랑한다.
실제 정사에서 남은 기록을 보면 업무 처리 수완이 대단했던 인물이다. 자치통감에는 일을 하면서도 바둑이나 장기를 즐기고, 친한 사람들과 담소와 식사를 하면서도 일에 빈틈이 없고 오히려 남들보다 처리속도가 우월했다고 한다. 평소에 비의가 업무를 느슨하게 처리하는 것 같다며 그를 자주 비판했던 동윤이[8] 비의의 후임으로 상서령에 임명되어 업무를 이어받자, 한 달만에 업무가 꼬이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제서야 사람의 재능이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인가 한탄하며 비의의 능력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 사실 이 일화는 두 사람의 능력보다는 업무스타일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상서령이 지금으로 치면 행정부 수반에 해당하는 위치로 당연히 업무량이 무시무시한 자리다. 호방하고 낙천적인 비의는 윗자리에서 대강 훑으며 아랫 사람들 이용하는 식으로 당연한 듯이 업무를 수행했지만, 반대로 엄격하고 매사에 철저한 동윤은 그 많은 문서를 자기가 하나하나 다 살피면서 처리하려 했으니 못따라갈 수 밖에. 결국 동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관청에 처박혀 쉴틈없이 일하는 것으로 그 무시무시한 업무량을 극복했다. 그리고 겨우 1년만에 사망했는데 과로사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 더불어 이 일화는 제갈량의 놀라운 능력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그는 동윤보다 훨씬 고위직인 승상 자리에 있으면서도, 동윤과 비슷한 방식으로 업무처리를 했다. 그리고 업무 수완은 동윤이던 비의이던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로 뛰어났다.
세설신어에서 위나라의 군대가 흥평에 주둔하자 비의에게 부절을 주어 군대를 이끌고 가서 방어하게 할 때, 광록대부 내민이 비의의 집으로 가 작별하면서 바둑을 두자고 청했는데, 그 때 우격이 빗발치고 수레 채비가 이미 끝난 상태였지만 대국에 몰두하면서 싫증내는 기색이 없었다. 이에 내민이 비의를 보고 잠시 그대를 살피면서 시험했는데, 진실로 합당한 사람이니 틀림없이 적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우한(武漢)의 유명한 명승지 황학루는 비의가 신선이 되어 노닐었다던 자리에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걸 소재로 이백, 육유, 최호 등등 유명한 시인들이 작품을 남겼다.
5 미디어 믹스
5.1 삼국지 시리즈
삼국지 11 |
삼국지 12,13 |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등의 영향으로 문관 정치가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대장군의 지위에 있었으며 실제론 군정 모두의 권력을 지니고 있었던 점을 볼 때 비의를 단순히 문관 정치가로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래도 최근작에선 무력이 낮을 뿐 통솔은 어지간한 무관의 통솔치와 동급이다. 장완의 후임이라 초기작에선 장완보다 능력치가 조금씩 처지는 경향이 있었으나, 최근작을 보면 그렇지도 않다.
삼국지 3에서는 B급 군사정도 된다. 능력치는 육지 23/수지 6/무력 25/지력 75/정치 82/매력 84에 야망 7/운 8/냉정 8/용맹 7로 장완이나 동윤에 비해 통솔과 무력이 많이 떨어지고 어느정도 올리면 군사적 용도로도 써먹을 수 있는 장완과는 달리 비의는 철저하게 내정용이다. 연의의 영향[9]인지 이름이 비위로 나온다. 시나리오 6에서는 분명히 생존해 있을 시기인데도 사망 처리되어 등장하지 않는다.
삼국지 5에서는 이름이 역시 비위로 표기되며 정치력이 무려 96이나 된다. 정치력으로는 전무장 탑5 안에 든다. 비위보다 정치력이 높은 장수는 장소(98), 진군(98), 조조(97) 뿐이고 제갈량(96)과 같다. 55/77/96/81에 학익, 어린, 장사 진형을 들고나와 병력만 있으면 의외로 전장에서도 쓸만하다. 특기는 진립, 화계, 수습, 혼란, 낙석, 침착.
그러나 삼국지 5에서는 높은 정치력을 가진 장수에 대한 체감이 지력 높은 장수에 비해 낮은 편이다. 또한 정치 하나, 지력 하나만 높은 것보다는 지력 90 이상과 정치 80 이상을 동시에 만족하여 군사 신분을 가지는 것이 더 쓸모가 많다.[10] 지력이 낮은 비의는 군사는 당연히 안되고, 무력이 낮고 특기가 좋지않아 용명을 쌓기도 힘든데다가 막상 용명이 높아져서 고위장군직을 주려면 무력 높은 장수들이게 우선 순위가 밀려 이래저래 안습 신세이다. 신선들마냥 차라리 지력만 높으면(지력과 정치가 바뀐다면) 참모로 쓸 가능성이라도 있지...[11] 그렇다고 학소처럼 수행을 통해서 지력 로또 한 번이면 군사로 써먹기를 기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내정셔틀이나 외교담당으로 전락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위에 나열한 정치력 탑 5 중 유일하게 비의만 지력이 90 미만으로 군사가 되지 못한다.
참고로 비의처럼 지력에 비해 정치력만 높아 이래저래 쓰기 힘든 이들[12]로는 종요(지력76 정치92)[13], 동윤(지력84 정치90), 왕윤(지력72 정치92), 사마소(지력87 정치90), 육개(지력71 정치92), 장굉(지력89 정치95)[14], 하후현(지력73 정치91) 등이 있다. 왕루(지력80 정치89), 사마랑(지력67 정치89)도 비슷한 케이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74/22/83/92. 제사가 있지만 무력이 낮아서 위력은 처참하고 내정용으로 굴리다가 필요하면 혼란이나 배반, 고무으로 지원을 해주는 식으로 쓰게 된다. 사실 장완은 투함이라도 있어 수전에서라면 굴릴 필요가 있지만 비위는 인재 많은 촉에서는 전장에서 잘 안 쓰는 무장. 아무래도 내정용으로 많이 쓴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73/29/84/94/83. 여기서도 이름은 비위로 나온다. 무력을 제외하곤(장완 무력은 39) 장완과 거의 능력치가 동일하다. 어짜피 둘다 군사특기, 전투특기가 없어서 전장에서 쓰긴 조금 애매한 것도 동일. 직접 두고 내정셔틀로 쓰던가, 후방지역 태수로 놓고 굴리면 좋다. 특기 개수는 총 12개로 기술특기가 없다는 건 아쉽지만 농업, 상업 특기를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 매력적이며 논파가 없긴 해도 위압, 반론, 반박을 들고 있기때문에 설전에선 나름대로 강력하다. 특이사항으론 호방해서 그런지 문관들중엔 드물게 주호 특기가 있다.
삼국지 11의 특기는 능리이라서 창,노,극을 양성하기 때문에 제갈량 수준인 병기를 많이 얻는다. 친애무장에는 동윤이 있다.
삼국지 12의 일러스트는 조상 침공을 막으러 가기전에 내민과의 바둑을 모티브한 모양이다. 또 전법은 전방어강화.
삼국지 13의 능력치는 77/30/83/92. 중신특성은 농업중시이며 전법은 궁병동요. 병과적성은 창B/기C/궁A 이며 특기는 농업6, 설파6, 교섭5, 언변6 이다. 농업중시가 있고, 정치력도 90이 넘기 떄문에 내정중신으로 상당히 좋다. 외교관으로써도 나쁘지 않은 편 이고 설파와 언변이 모두 있어서 군락회유도 잘 해온다.
5.2 영걸전 시리즈
삼국지 영걸전에선 레벨30의 발석차로 등용할 수 있지만 존재감은 제로. 무력, 레벨[15]이 워낙 낮아서 써먹을 이유가 없다.애초에 방통 등용할때 인재를 찾아다니다가 나오는데 회의장을 나갔다 바로 들어가면 방통이 나오고 이벤트가 진행되기 때문에 얘도 등용가능 했나 하는 사람도 있고...유봉, 이적같이 자동으로 아군이 되는 장수와는 다르게 비의, 장완은 아군으로 등용할지 내버려둘지 선택까지 가능하다.
삼국지 공명전에선 물자대로 등장. 역시 존재감은 없지만 마속을 죽일경우 처음 합류할때부터 레벨이 25인데, 노가다 없이 클래스업 책략인 승격책략을 쓸 수 있기 때문에 돈을 아낄 수 있다. 노가다를 했을 경우라면 기본적으로 여개보다 통솔력이 높고, 내구력도 10 이상 차이가 나며, 책략치 역시 1렙 높은 여개와 동등할 만큼 높기 때문에 갈아타기 괜찮은 장수다. 하지만 노가다를 아예 안 할 경우엔 굳이 물자대를 쓸 하등의 이유가 없으니 역시 버려진다. 여담으로 영걸전,공명전에서 모두 비위로 나온다.[16]
5.3 삼국전투기
비의(삼국전투기) 문서 참조.
5.4 진삼국무쌍 시리즈
진삼국무쌍 시리즈에서는 대대로 클론 무장으로 등장. 마속과는 달리 기존 무쌍 무장과의 접점이 거의 없는지라 컷신은 커녕 전장 대사도 없는 신세였으나...
모바일 게임 진삼국무쌍 BLAST에서 추가 무장으로 등장. 촉나라의 말년을 지탱하고 이끌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만약 정규 시리즈에도 추가된다면 가정 전투, 오장원 전투 등의 후반기 시나리오나, 진나라 시나리오에서 적장으로 나올 확률이 높을 듯.
- ↑ 비의 족부 비관이 이 인물과 동일인물인지는 불명이다. 참고로 비관의 자는 빈백이다.
- ↑ 이때 비의의 나이나 관위가 마중나온 대다수의 신료보다 아래였다는 기록이나 비의와 비슷한 시기 태자사인이 된 곽익이 204년생인 제갈교와 친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비의 역시 이 당시 나이는 20대 초중반 정도 되었을 가능성도 없잖아 있다.
- ↑ 비의 사후의 일이긴 하나 하후패가 직접 성도로 귀환한 장억과의 친분을 요청한 기록도 있다.
- ↑ 이렇게 생각하면 왜 뜬금없이 비의가 죽고 얼마 있지 않아 장억이 제갈각의 북벌을 뒤로 미루고자 제갈첨에게 편지를 보내 연락을 시도한것인지 설명이 되는 부분이 있다. 즉, 비의의 북벌에 장억이 그만큼 깊게 관련되어 있다는 정황증거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 ↑ 그렇다고 해도 장익과 요화는 강유의 북벌에 종군했는데 촉군부 상층부나 촉한조정 내부에선 북벌에 대한 인식 차이는 있었어도 어쨌거나 어떤식으로든 북벌을 하긴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느끼고는 있던 것으로 보인다. 초주조차도 '한고조는 포기해도 주문왕은 될 수 있다, 문왕의 고사를 따르자'고 해서, 촉한의 기본적인 노선인 한실부흥과 천하통일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 ↑ 다만 이 익주자사라는 관직은 촉한에서 다른 자사 관직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상이 다르다, 그렇기에 단순히 북벌반대로만은 볼 수는 없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제갈첨 문서 참고.
- ↑ 衣+韋의 형태. 올바른 한자인 禕는 示+韋의 형태이다. 둘 다 '아름답다'의 뜻이 있고 변의 형태가 비슷해서 와전된 듯 하다.
- ↑ 제갈량은 지나치게 호방한 면이 있는 비의와 엄격하고 철두철미한 동윤의 조화를 위해 이 사이에 곽유지를 끼워넣었다. 곽유지는 정사의 별다른 기록은 없지만 성격이 온화하고 화해로웠다는 동윤전의 기록을 미루어봤을때 개성강한 둘 사이에서 조율을 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 ↑ 위에서 '기타' 항목 '연의의 피해자' 부분 참조
- ↑ 이 시스템 때문인지 삼국지 5에는 정사나 연의 아무리 뒤져봐도 정치와 무관하거나 오히려 개판을 쳤는데도 정치가 80이상으로 높은 책사형 문관들이 상당히 많다. 각 세력의 참모급 문관들은 대부분 그러하다.
- ↑ 물론 비의와 궁합이 맞는 유비 세력의 경우는 항상 제갈느님이 계시므로 참모의 임명 가능성도 낮다.
- ↑ 정치력은 90 이상이지만 지력이 90이 넘지 않는 경우로 한정
- ↑ 참고로 종요의 무력은 무려 8로 유선(7)보다 한끗 높다.
- ↑ 그래도 지력이 89이므로 수행을 통해 지력+1 이벤트를 겪고 군사가 될 가능성은 이들 중 가장 높은 편이다.
- ↑ 한참 전에 합류한 제갈량이 이미 레벨 30을 찍는다.
- ↑ 심지어 일본판도 연의의 잘못된 표기를 따라 '費褘(비위)'로 나왔다.
원판이 틀리게 나왔으니 한글판도 틀리게 나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