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해 해전

영어 : Battle of the Philippine Sea (필리핀 해 해전),The Mariana Turkey Shoot(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1]
일본어 : マリアナ沖海戦 (마리아나 해 해전)

필리핀 해 해전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 전쟁의 일부

공격받는 일본 해군 항모 즈이카쿠
날짜
1944년 6월 19일 ~ 1944년 6월 20일
장소
필리핀 해
교전국미군
미국
일본군
일본 제국
지휘관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마크 미처
오자와 지사부로
결과
미군의 승리
기타
일본 해군의 항공전력 괴멸.
전력정규항공모함 7척
경항공모함 8척
전함 7척
중순양함 8척
경순양함 13척
구축함 58척
잠수함 28척
항공기 956기
정규항공모함 5척[2]
경항공모함 4척
전함 5척
중순양함 13척
경순양함 6척
구축함 27척
잠수함 24척
항공기 750여기
피해규모전함 1척 손상
항공기 123기 손실[3]
40여명 전사
정규항공모함 3척 침몰[4]
경항공모함 1척 침몰
항공기 476기 손실[5]
2900여명 전사

1 개요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중인 1944년 6월 19~20일, 마리아나 제도 부근 해상에서 미국일본 해군 사이에 벌어진 해전.

미군의 진공이 일본의 절대국방권[6]인 마리아나 제도에 도달하자, 일본군은 그 동안의 침묵을 깨고 절치부심해서 재건한 함대항공력을 총동원해[7] 미 함대를 공격한다. 하여 1944년 6월 19일에 미국 해군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 휘하의 태평양 함대 소속 제58기동부대와 일본 해군 오자와 지사부로 제독 휘하 제1기동함대가 필리핀과 마리아나 제도 사이의 해상에서 맞붙었다. 하지만 맞붙기보다는 사실상 미 해군 항공대 & 잠수함대가 일본군을 상대로 벌인 대학살극에 가깝다.[8]

역사상으로는 사상 5번째로 벌어진 함대항공전이자 역대 최대 규모의 함대항공전이며, 동력선이 해군의 주력 장비가 된 이후에 벌어진 해전들 중에서는 사상 3번째로 큰 규모의 해전이다.[9]

이 전투의 결과 일본 해군은 사실상 몰락해버렸고, 미군은 일본 본토침공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이후의 경과를 따져보면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 해군이 주구장창 생각하던 결전과 다를 바 없는 해전이었다.

중요성에 비해 국내에서는 의외로 지명도가 낮은 편이라 미국측이 붙인 별칭인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The Mariana Turkey Shoot)' 또는 일본측 명칭인 '마리아나 해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 필리핀 해 해전이라고 하면 필리핀 탈환전에서 일어난 해전을 말한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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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당시 일본 해군과 미 해군 함대의 진로.

2 전투 발발 전의 상황

2.1 미군의 사정

미드웨이 해전에서 전환점을 맞이하고 과달카날 전투로 대변되는 솔로몬 전역의 소모전 이후로, 태평양전쟁은 줄곧 미군의 일방적이고도 착실한 공세 일변도였다. 과달카날 전투 이후로 쏟아져나온 미국의 물량은 이러한 미군의 공세를 든든하게 뒷받침했다. 게다가 신병기들은 물량뿐만 아니라 질로도 일본군의 그것을 압도했다.

미군의 진격은 크게 두 갈래로 이뤄졌는데, 하나는 미 해군 함대 총사령관 겸 참모총장 어네스트 킹 제독의 중부태평양 돌파이고, 다른 하나는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육군 위주의 뉴기니-민다나오 축선으로의 진격이었다. 전자는 중부 태평양 한가운데의 섬들을 하나하나 점령하여 이를 발판으로 대만과 중국을 거쳐 일본으로 향하는 것이었고, 후자는 태평양 남서쪽에 띠처럼 이어진 섬들을 따라 북상하여 필리핀을 점령하고 여기서 일본으로 진격하는 안이었다. 이 두가지 안은 서로 절충점을 찾지 못했고, 결국 두가지 안 모두 수용하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

그리고, 그 다툼의 와중에 어네스트 킹 제독은 미 육군항공대의 지지를 얻고자 마리아나 제도의 점령을 제시하게 된다. 마리아나 제도는 미 해군 입장에서는 일본 본토 침공을 위한 훌륭한 전진기지가 될 수 있었고, 미 육군항공대 입장에서는 B-29의 안정적인 작전기지[11]가 될 수 있었다.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1944년 6월을 예정으로 마리아나 제도 침공이 결정되었다.

2.2 일본군의 사정

일본군 입장에서는 양갈래로 다가오는 미군의 진공을 막아야 했고, 이를 위해 일선 부대를 보강하고 국지적으로나마 반격을 꾀하기도 했지만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으며 그 와중에 손실은 계속 쌓여만 갔다. 게다가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전선 시찰을 나갔다가 미군에게 전사했다. 전선의 규모가 자신들의 능력을 초과했음을 깨달은 일본은 1943년에 절대국방권을 정하고 방어를 강화하려 했지만, 1944년 초에 이르자 결국 지금껏 누적된 피해를 제대로 보충하지 못하면서 미군과 전력차가 크게 벌어지게 된다. 전선도 밀려나서 마셜 제도가 미군의 손에 떨어졌고, 일본군의 진주만이었던 트럭 환초는 2월 중순에 미 해군 항모전단의 공습에 박살나 버렸다. 연합함대의 주력은 미군의 공격을 간신히 피했지만, 중요 근거지였던 트럭 환초를 버리고 팔라우로 도망가야만 했다. 후방기지인 트럭 환초가 이꼴이 되자 일선 전진기지였던 라바울은 매일같이 미군의 공습에 시달리는 신세가 되면서 기능을 잃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중국 동부와 동남아시아 지역을 여전히 차지하고 있었고, 서태평양 지역의 제해권 역시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본토와 남방 자원 지대 사이의 해상 교통로는 미군 잠수함들의 통상파괴활동에 의해 크게 위축되었다. 이로 인해 본토의 물자 부족, 특히 식량 부족이 점차 가시화되기 시작했으며, 군수품 제작에 필요한 석유, 고무, 철광석, 구리, 주석의 유입도 급감했다. 본토에서 일선부대로 가는 군수품 보급 역시 타격을 입게 되었고, 이는 연합함대를 위시한 일본해군의 움직임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하지만, 일본군의 저항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격전을 거치면서 와해되어 버린 항모 전대를 재건하려는 움직임은 계속 이어져서, 제1기동함대가 재편성되고 그 지휘관으로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이 임명된다. 그는 수상함 경력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항공전력에 관심이 커서, 진주만 공습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의 주역이었던 항모 기동부대 제1항공함대(제1기동함대)의 탄생에 큰 역할을 한 바 있을 정도였다. 연공서열만 아니었으면 태평양 전쟁 발발 당시에 일찌감치 항모 기동부대의 지휘관이 되었을 인물이었다. 또한, 이 항모전대를 지원하기 위한 지상 발진 항공기 부대 제1항공함대를 창설하였다.[12] 지휘관은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미 함대에 끈질긴 공격을 가해 호넷을 격침시킴으로서 미군 장교들 사이에 깊은 인상을 남긴 가쿠다 가쿠지 중장이었다.

야마모토의 후임인 고가 미네이치 제독은 제1항공함대의 지원 아래 제1기동함대를 주력으로 삼아 뉴기니 북쪽의 팔라우를 기점으로 미군의 공세에 대비하려 했으나, 일본군의 예상을 훨씬 앞지른 미군은 1944년 3월 말에 팔라우를 공격하며 고가의 시도는 좌절되고 본인마저 실종되고 만다. 그 와중에 고가의 부관이 연합군의 포로로 잡히면서 일본군의 방어계획이 미군 손에 들어갔다.

고가의 후임인 도요다 소에무 제독 역시 위와 비슷한 계획을 수립했으나, 문제는 미군이 어디서 들이닥칠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동년 5월에 연합함대의 주력을 모든 방면에서 대응 가능한 한편, 인근에 질좋은 유전이 있어서 본토로부터의 연료 보급으로부터도 어느 정도 자유로운 타위타위로 옮기게 된다. 이것이 직간접적으로 패착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채...

2.3 맥아더의 어퍼컷과 일본군의 반응

1944년 4월, 맥아더는 서부 뉴기니를 침공했고, 5월말에는 그 인근의 비약 섬을 침공했다. 그러자 일본 해군의 시선은 일제히 팔라우와 민다나우로 집중되었다. 미군의 공세가 이쪽으로 올 것이라 예상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일본 해군은 이 해역에 잠수함들을 집중배치하는 한편, 비약 섬에 항공기를 증원하고 연함함대로 하여금 비약 섬에 지상병력[13]을 증원하는 '혼작전'을 벌인다. 혼작전에 대한 내용은 아오바 항목 참조.

하지만, 이 모든 시도는 결과적으로 마리아나 제도에 대한 방어를 약화시키는데 일조했다.

이 해역에 일본군 잠수함들이 배치된 것을 알아차린 미군은 적극적인 대잠작전에 나서게 된다. 5월부터 7월까지 이뤄진 이 대잠작전에서 일본 잠수함 26척 중 총 17척이 손실되었다. 이 바람에 일본군 잠수함대는 완전히 무력화 되었고, 본 게임인 필리핀 해 해전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14] 이 작전 도중 미 해군 호위구축함 잉글랜드[15]는 12일간 일본군 잠수함 6척을 격침시키고 대통령 표창까지 받게 되며 킹 제독은 이 소식에 '잉글랜드라는 이름은 미 해군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라는 말도 남겼다.

항공기 증원 역시 그대로 손실로 이어졌다. 5월에서 6월초에 비약 섬으로 증원된 항공기는 합계 220여기에 이르렀으나, 대부분 격전 와중에 손실되었다. 이 증원은 제1항공함대가 주력이었는데, 1항공함대는 안 그래도 원래 계획대로 준비되지 않았던데다 맥아더의 공세가 시작되기 전부터 미군의 공세에 대응하려 여기저기 분산 투입되면서 계속 손실이 쌓여가던 참이었다. 결국, 필리핀 해 해전 발발 시점에서 제1항공함대는 제1기동함대에 대해 제대로 된 지원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 항공기들이 비약 섬으로 향하지 않고 마리아나 제도로 배치되었다면 전투 발발 시점에서 지상기지들이 나름 대항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일본 해군/연합함대가 구상하던 미 해군과의 결전 계획은 본 게임이 시작되기 전부터 어긋나 버렸다.

수상함들을 이용한 지상병력의 증원은 미군 잠수함의 감시로 인해 실패하고 만다. 이미 미군은 암호해독을 통해 연합함대의 전반적인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배치된 미군 잠수함들은 연합함대가 타위타위 및 그 일대에 들어서자 연합함대의 일거수 일투족을 낱낱이 감시하여 미군 수뇌부에 보고하고 있었다. 이 잠수함들은 단순한 감시역으로 그치지 않고 여차하면 일본군 수상함정들을 공격하곤 했다. 비약 섬으로 향하던 일본 함대 역시 이들에 의해 낱낱이 감시당했고, 이 정보를 바탕으로 반격에 나선 미군에 의해 쫓겨나고 말았다.

이들 미군 잠수함들의 존재는 타위타위로 이동한 제1기동함대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타위타위에는 지상비행장이 없었으므로 모든 비행훈련이 항공모함에서 이뤄져야 했는데, 잠수함들 때문에 항공모함들은 도저히 출항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일본군이 어퍼컷에 정신이 홀린 사이에 스트레이트가 날아들고 있었다.

3 전투 경과

3.1 서전

1944년 6월 6일, 마셜 제도에서 제 58 기동부대가 출격하여 마리아나 침공 부대가 출발하던 11일경에 마리아나 제도 인근에 도착했다. 58기동부대는 도착과 동시에 마리아나 제도의 일본군 지상비행장들을 쑥대밭으로 만들면서 이 일대 일본군의 항공전력을 일소해 버리고 제공권을 장악했다. 미군의 주장에 따르면 이때 일본군이 입은 항공기 피해는 적어도 150기 정도이다. 이후 사이판 전투가 개시될 때까지 마리아나 제도의 일본군 지상 시설과 해상세력은 일소되었으며, 마리아나 제도 북쪽의 보닌 제도 역시 일부 함대를 통해 무력화시켰다.

일본군은 9일께 58 기동부대의 출격을 파악하고 계속해서 정찰기를 보내 58 기동부대의 위치를 파악하려고 시도했다. 11일에 마리아나 제도가 본격적으로 공격받자 연합함대는 비약 섬으로 보낸 함대를 부랴부랴 불러들였고, 제1기동함대의 출격을 명령했다. 물론 이들의 행적은 미군 잠수함들에게 계속 감시당하고 있었다.

18일께에 이르자 양 측의 정찰기들이 교전을 벌일 수준으로 근접했다. 그리고, 운명의 19일이 밝아왔다.

3.2 일본군의 계획

일본 해군에서도 몇 안되는 유능하고 합리적인 지휘관 중 한 명이었던 오자와 제독은 일본 함재기의 유일한 장점인 항속 거리(100Km 이상 우위에 있었다)를 이용해 미 함재기의 항속 거리 밖에서 치고 빠지는 아웃레인지 공격을 구상했다. 더불어 신중한 스프루언스 제독이 상륙함대의 보호를 위해 상륙지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는 심중까지 정확하게 꿰뚫었다. 그러나 미군의 전력 규모에 대해서는 자신들처럼 항모 3척이 1개 전단을 이룬다고 생각하여 15척이 아닌 12척으로 실제보다 낮게 파악하고 있었으며, 미군 지휘관이 스프루언스 대장이었기에 미드웨이 해전 당시처럼 복수의 기동함대로 분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공교롭게도 스프루언스 대장 또한 이때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일본 함대가 분산되어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에 대응하여 경항모 치토세, 치요다, 즈이호 3척을 중심으로 한 C부대를 전방에 내세우고, 약 190KM 후방에 주력인 A[16], B부대[17]를 통합 운용했다. 이 배치를 한 이유는 전방 C부대의 전함과 순양함의 정찰기 세력을 적극 활용하여 미군을 먼저 찾는 한편, 미군이 공격해올 경우 C부대를 통해 미군의 공격력을 흡수하여 주력을 보호하기 위함이였다.
만약 미군이 실제로 공격에 나설 경우 십중팔구 전방부대와 교전이 발생했을것이고 그동안 후방의 주력부대는 안전한 상태에서 58기동부대를 공격할수 있었을 것이고 설령 미군이 후방의 주력함대를 알아채고 공격대를 보내더라도 전방부대의 요격망을 뚫고 공격해야 하며 돌아오는 길에 다시 전방부대의 요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거기에 괌에 있는 지상발진 항공대 또한 여유있게 미군 함대를 공격할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 진형은 안 그래도 부족한 구축함들을 분산시키는 꼴이어서 대잠에 취약했고 이는 나중에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공세에 나설 때는 복수로 분산(했다고 생각)한 미군의 양동작전에 대비해, B부대의 함재기를 예비로 두고 나머지 병력을 모두 공격에 투입하기로 했다. 다만 이 때 자신의 함재기를 4파로 분리해 제파식으로 출격하게 했는데, 제파공격 자체는 한번에 지나치게 많은 공격기들이 달려나가 몇몇 표적만을 지나치게 집중공격하는 걸 막기 위한 지극히 상식적인 조치였다. 하지만, 숫적 열세와 조종사들의 기량 문제를 정확하게 깨닫지 못한 것이 결과적으로는 실수가 되고 말았다.

오자와가 선공에 나선 것은 초기 항모전의 상식인 '선빵이 최고다.'라는 사상이 한몫 한 걸로 보인다. 오자와 역시 파일럿들의 기량문제를 완전 모르지는 않았겠지만, 일단 선공을 걸면 미군이 방어측이 되므로 기량차이는 극복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일본군은 해전에 돌입하기 전 수색적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오자와 기동부대가 미군 항모전단을 발견하고 공격대를 띄운 시점에서 미군은 아직 오자와 기동부대의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한 상태였다. 다시 말해서 먼저 보고 먼저 쏜 상황이라고 판단한 것. 게다가 앞서 언급되었듯이 미군의 실제 규모는 파악하지 못한 채 숫적으로 그리 꿀리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도 선제 공격을 결심하는데 한몫했다. 그래서 초반에 오자와 기동부대 참모진들은 꽤나 낙관적인 전망을 갖고 있었다.

문제는, 미군이 일본 함대의 정확한 위치를 찾지는 못했지만 앞서 언급했듯 스프루언스 대장이 이때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일본군이 양동으로 수송함대를 공격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상륙함대의 안전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기에 공격적인 미처 제독을 통제하기 위해서 직접 지휘한다는 것이였다.

3.3 미군의 계획

미군의 경우 전투 돌입 전까지 일본군과의 교전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에 대해 갈등이 있었다.

함대 사령관 스프루언스 제독은 오자와 제독의 예상대로 상륙지의 엄호를 위해 함대가 처음 자리잡은 위치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으려 했다. 그는 일본함대와의 전투보다 상륙함대의 엄호를 우선시했다.

반면 58기동부대의 지휘관인 미처 제독은 적극적으로 일본군을 찾아서 공격하려고 했다. 실제로 17일께에 무선감청과 잠수함의 감시를 통해 일본함대의 존재가 확인[18]되자 그는 휘하의 고속전함들로 하여금 일본함대와 야간전을 벌이고 동이 트면 함재기로 마무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고속전함부대의 지휘관인 윌리스 리 제독[19]이 극구 반대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20]

스프루언스 제독은 상륙부대의 엄호가 우선임을 명확히하면서 적극적인 공세에 나서려는 휘하 항모부대 지휘관들의 반발을 눌렀다. 여기에는 그가 파악한 일본 함대의 위치가 제각각이었던 터라 일본함대가 전력을 분산하여 양동작전에 나서리라고 본 것도 한 몫했다. 자신의 항모전단이 일본함대를 쫓아 상륙부대에서 멀어진 사이, 다른 일본 함대가 상륙부대를 위협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편, 스프루언스는 일본군의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미군이 파악한 오자와 함대의 규모는 '함재기 약 450기에 항모 9척을 중심으로한 약 50척 규모'였는데 실제로도 '함재기 436기에 항모 9척을 포함한 50척'이었다. 후술하다시피 당시 일본군이 투입한 함재기 숫자는 당시 미 함대가 보유한 전투기 숫자보다도 적었다.

따라서 스프루언스는 자신 휘하의 함재기들을 공격에 분산시키지 않고, 오로지 일본 해군 항공대를 요격하는 데에 집중시켰다.

3.4 양자의 전력

3.4.1 미군의 방공망

철통방어.

우선, 각 함대, 함정에 꾸려진 전투정보본부(CIC)는 전쟁 초에 비해 능력이 크게 개선된 대공 레이더를 이용해서 적기를 예전보다도 더 일찍 탐지할 수 있었고, 대량으로 보급된 우수한 통신장비들에 힘입어 아군 기체들을 전장 상황에 맞게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으며, F6F 헬캣이라는 걸출한 함대 방공 전투기는 우수한 조종사들에 의해 운용되면서 일본 함대의 함재기들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 덕분에, 전투기에 의한 함대 방공의 효율성이 전쟁 초기보다 크게 높아져, 이 시기엔 당당히 함대 방공의 한 축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전통적인 함대 방공체계인 대공포화 역시 만만치 않아서, 대공레이더와 전투통제실의 통제하에 VT신관을 사용하는 127mm 양용포 → 2~4연장 40mm 대공포 → 20mm 기관포로 이어진 대공망[21]에는 사각이 없었다. 덧붙여 수많은 실전을 겪으며 완성된 미 함대 특유의 함대원형진의 내공은 전혀 만만하지 않았다. 이렇게 완성된 미국 함대의 대공포화는 이미 태평양 전쟁 중반부터 그 흉악함[22]을 과시하고 있어서, 미 함대 공격에 나선 일본기들이 오로지 대공포화에만 전멸하는 일도 벌어지곤 했다.

3.4.2 양자의 항공기

미 함대는 이미 F4F 와일드캣이나 F2A 버팔로와는 급수가 다른 '지옥에서 온 고양이' F6F 헬캣으로 기종전환을 끝낸 상태였으나, 일본 함대는 전쟁 초기에 비하여 성능 개선이 그다지 이뤄지지도 못한 제로센을 아직도 주력 전투기로 굴리고 있었다. 헬캣은 와일드캣의 후계기로 나온 설계부터 다른 새로운 기체지만[23] 제로센은 말 그대로 개량만 실시한, 후계기가 아닌 기종명의 뒤에 개량됐다는 표지만 붙은 A6M 그대로였다. 쉽게 말하면 계속 울궈먹은 것이다. 급강하폭격기와 뇌격기의 경우 양측 모두 저마다 신형기를 위주로 배치했지만, 일본군의 경우 구형기의 비중이 미군보다 상대적으로 높았으며 그렇다고 신형기의 성능이 뛰어나지도 않다. 오히려 구형기보다 못한 부분도 많은 상황. 그나마도 수량이 부족해 구형 제로센을 전폭기라는 이름하에 폭탄을 장착하여 공격기로 투입했다.

물량으로 보면 더 심했는데, 당시 일본 함대의 함재기 총 숫자(전투기, 뇌격기, 급강하폭격기, 기타 등등을 모두 합쳐서)는 당시 미 함대의 전투기 숫자보다도 적었다. 총수로 보면 435 대 915로, 미군이 일본군보다 2배는 더 많았다.

항모 이외의 수상함정에 실린 수상기들의 경우 일본함대가 미군함대보다 조금 더 많이 갖고 있었지만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정찰뿐이었다.

3.4.3 양자의 파일럿 실력

칠면조와 칠면조 사냥꾼들

일본군의 경우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의 초기 전투 등으로 기량을 쌓았던 베테랑 조종사들은 이미 미드웨이 해전과달카날 전투, 라바울 항공전 등을 거치면서 거의 다 쓸려나간 상태였다. 이 과정에서 항모기동부대 소속 함재기들까지 항모에서 빼내어 투입하다 크게 손실을 입는 바람에, 안 그래도 와해되어가던 항모기동부대는 한동안 재건에만 매달려야 했다. 조종사 양성이 제대로 이뤄졌다면 모르겠으나, 양성기관은 적고 능력은 턱없이 부족했다.애초에 일본군은 단기결전,함대결전 사상에 너무 심취하여단기전이 아닌 장기전으로 가면 무슨 짓을 해도 천조국을 못이기니 당연한걸수도장기전 돌입시 소모될 파일럿들의 보충과 질적향상을 심도있게 고민해본적이 없다. [24]물론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로, 장기전 돌입시 발생할 보급/개발/자원 문제도 심도있게 고민해보지 않았지만. 그 때문에 이 전투에 참가한 일본 해군 항모기동부대의 조종사들 대부분은 실전경험도 없었고, 장거리 항법도 미숙했다. 실제로도 전장까지 항해하던 중 어떻게든 약간이라도 조종사의 실력을 늘리기 위해 비행훈련을 실시했으나, 몇 대 이륙하지도 않았는데 이륙에 실패해서 바닷물에 비행기를 처박는 사고가 계속 발생하니 출격하기도 전에 소중한 비행기와 조종사를 대량으로 상실한다는 항의까지 들어와서 어쩔 수 없이 훈련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던 것만 봐도 그 당시 일본군 함재기 조종사의 실력은 바닥 그 자체였다.[25]엎친데 덮친 격으로 타위타위에 주둔하던 동안에는 미군 잠수함의 방해로 인해 비행훈련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반면 미군 조종사들은 넉넉히 갖춰진 양성기관에서 미드웨이, 과달카날, 라바울을 거친 베테랑 조종사들이 지도하고, 충분한 비행시간을 가진 덕에 임멜만 턴[26]도 가볍게 소화해내는 평균 이상의 기량을 갖고 있었다. 똑같이 싸워왔지만 후진양성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가 있었던 것이다.

단적인 예로, 이 해전에서 일본의 항공모함 히요를 격침시킬 때 미국은 4대의 뇌격기가 좌우로 두대씩 갈라져 한 대는 항공모함을, 한대는 항공모함의 이동경로를 예측해 쏘는 방식을 사용했는데 이는 전쟁 초기 일본의 베테랑 뇌격대가 사용하던 방법과 거의 동일하다.

3.5 위대한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

3.5.1 하늘의 칠면조 사냥

운명의 순간, 일본군 함재기들은 기다리고 있던 미군기와 맞닥뜨렸다. 그리고 칠면조들은 고양이의 사냥감이 되었다.

오전 10시 경에 58기동부대 소속 함선의 레이더가 240km 밖에서 일본 함대의 1차 공격대를 포착하여 약 200기의 전투기들을 출격시켰고, 이중 약 60기가 일본군과 접촉하여 요격하기 시작했다. 일본군 공격대의 일부는 이 요격을 뚫고 미 함대에 공격을 시도했지만, 미 전함 사우스다코타에 타격을 입혀 사상자를 낸 것 외에는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의 함재기 71기 중 42기가 격추당하고 29기만이 살아 돌아갈 수 있었다.
오전 11시 경에는 레이더가 더 많은 109기의 2차 공격대[27]를 포착하고 97km지점에서 70기 이상을 격추시킨다. 살아남은 나머지 공격대는 미 함대에 공격을 시도하나, 이번에도 소수의 사상자를 제외하면 역시 피해를 입지 않았다. 2차 공격대 109기 중 95기가 격추당하고 극소수만이 살아서 함대로 귀환하거나 괌, 로타로 도망갈 수 있었다.
3차 공격대는 47기로 구성되었으나, 목표 선정 과정에서 빚어진 혼선으로 인해 중간에서 세력이 갈라져 버렸다. 약 3분의 2는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가 그냥 귀환했고, 나머지는 미 함대를 포착해 공격을 시도했으나 별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하지만, 미 함대는 앞선 2차 공격대가 벌인 기만책[28]의 여파로 인해 전투기 투입에 신중해졌고, 그 덕분에 3차 공격대는 7기만이 격추당하는 상대적으로 경미한 손실만 입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11시 경에 4차 공격대 84기가 출격했으나 목표의 위치를 잘못 알고 있던 바람에 미 함대를 찾을 수 없었으며, 결국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눠져 20기는 함대로 귀환했고, 나머지는 괌으로 향했다. 괌으로 향하던 공격대 중 일부는 미 항모전단을 발견해 공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이 공격 과정에서 살아남은 잔존기를 포함해서 괌으로 향하던 공격대들은 괌 상공에서 진을 치고 있던 미군 전투기들에 의해 전멸당했다. 한편, 함대로 귀환하던 그룹은 귀환 중간에 미군 정찰대들과 접촉하여 교전했다. 그런데 이 미군 '정찰대'는 정찰 임무를 띈 공격/폭격기와 호위 임무를 띈 전투기가 각 1기 씩 1조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정찰대 치고는 전투력이 상당했고, 결국 귀환하던 그룹의 절반이 격추당해 9기만이 함대로 귀환했다.

이 전투에서 벌어진 함대항공전의 양상은 이전까지 벌어졌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4차례에 걸쳐 투입된 일본 함대의 함재기들은 총 326대. 정찰에 동원한 기체까지 합치면 369대였다. 그러나 이들은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미국 함대로부터 크게 떨어진 지점(평균 100km정도)에서부터 비행대대급 단위로 미리 길목을 막고 기다리고 있는 미군 함상전투기들에게 조직적인 요격을 반복해서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필리핀 해 해전 이전에도 미군 항모를 공격할 때 함재기의 요격을 받긴 했었다. 그러나 이 때는 미군이 보유한 레이더의 성능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데다 이를 운용하는 병력들의 숙련도도 낮았다. 때문에, 일본군 비행기들은 적어도 미 함대가 어렴풋이나마 보이는 지점에서 본격적인 저항에 부딪혔으며 고도와 위치 선점 등의 문제로 인해 미군 함재기들이 일본군 함재기들을 놓쳐버리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본 함대가 보낸 공격대들 중 겨우 1/8정도만이 미 함대 상공에 도달할 수 있었고, 그나마도 미 함대에 확실한 피해는 입히지 못한 채 역으로 대공화망에 털려버렸다. 이들에 의한 미 함대의 피해는 항모 2척, 전함 2척, 중순양함 1척이 '사소한 피해'를 입은 정도에 불과했다.

여기에다 미 함대는 앞서 공격했던 괌을 다시 두들겼고, 이로 인해 미 함대에게서 겨우 벗어나 괌으로 도망친 소수의 기체들 역시 죄다 고철이 되어 버렸다. 이 와중에 다른 기지에서 증원차 괌에 왔던 일본군 전투기들도 같이 휘말려서 섬멸당했다.

이 전투에서 보여진 일본군 조종사들의 기량은 그야말로 형편없었다. 당시 참전한 미군 조종사의 보고에 따르면 공격기들은 미군 전투기가 뛰어들었다하면 진형을 흐트러뜨리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다니다가 격추당하고, 전투기들은 미군 전투기에 대항하고 아군 공격기를 보호하기는 커녕 도망치기 바빴다고 한다.

기량만 문제가 되었다면 모르겠으나, 장비의 신뢰성 역시 일본군의 패배에 한 몫했다. 특히, 무전기의 성능 및 신뢰성 부족이 가장 큰 문제였는데, 3차 및 4차 공격대의 분산은 이 무전기가 한몫했다. 또한, 점차 열악해지기 시작한 본토의 공업능력은 항공기 자체의 신뢰성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미군에 의한 격추가 아닌 사고로 인해 상실된 기체 중 다수가 기체 이상에 의한 손실로 추정되고 있다.

이 전투에서 미 해군은 헬캣 포함 31대의 함재기를 잃는 데에 그쳤지만 일본 해군의 함재기 손실은 그 10배가 넘는 것으로 알려지자 미국 전역이 떠들썩해졌다. 400대라고도 하고, 386대라고도 하는 등 전과는 들쑥날쑥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훗날 교차검증에 의한 확인된 실제 전과는 239대[29]였지만, 그렇다고 쳐도 당일 일본 함대가 투입한 전력의 약 70%가 단 하루만에 증발한 것이었다. 지상기지의 일본기들까지 합친 미군의 당일 전과는 257대였다. 여기에 미군에 의한 격추가 아닌 사고로 인해 일본군이 잃은 33대를 포함하면, 일본군은 단 하루 일어난 항공전에서 총 290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미 조종사들은 후에 이걸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The Mariana Turkey Shoot)이라 불렀다. 자료에 따라서는 인터뷰를 했더니 '마치 옛날 칠면조 사냥[30] 같았다'라고 한 것에서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이렇게 항공전에서만 패했다면, 본대는 도망쳐서 후일을 기약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3.5.2 바다의 칠면조 사냥

전투 초장부터 몰래 숨어든 미 잠수함의 맹활약에 일본 해군은 항모 두 척을 잃었다.

미 해군 가토급 잠수함의 7번함인 SS-218 알바코어(Albacore)호

19일 오전 8시 16분 제임스 블렌챠드 중령이 지휘하는 미 해군 가토급 잠수함의 7번함인 SS-218 알바코어(Albacore)호[31]가 오자와 제독의 항모전단을 발견하고 가장 가까운 다이호를 공격하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그 순간에 알바코어의 사격 통제기가 고장났고 육안으로 확인해서 어뢰를 발사해야만 했다. 총 6발의 어뢰 중 4발은 빗나갔지만, 나머지 2발 중 한 발은 막 이함하던 고마쓰 상사의 살신성인으로 막아냈으나,[32] 최후의 한 발이 명중하여 항공유 저장고 2개를 박살냈다. 피격 당시에는 대단한 피해가 아니라고 판단했으나, 피해 통제 장교의 미숙한 대처로 인해 연료 배관에서 폭발성 가스가 샌 것을 모르고 있었다.

대사의 태평양전쟁 이야기 블로그에 따르면 일본군도 나름대로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한 개량을 한 덕분에 항공유 저장탱크와 관련배관은 각종 유출방지 및 파손방지 처리를 해놓아서 누출사고가 없었으나, 함정용 연료배관은 그런 조치가 없어서 손상을 입었다고 한다. 평소에 중유같은 것은 누출되도 엄청난 화재가 아니라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아서 항공유 공급계통같이 촘촘하게 일정 구역을 봉쇄처리할 시스템이 없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당시에 사용했던 함정용 연료가 제대로 정제한 경유나 중유가 아니고 이렇다 할 정제를 거치지 않은 원유에 가까운 것이라, 휘발성 물질을 대거 함유하고 있었다. 이 문제의 연료는 타위타위 인근의 타라칸 유전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여기서 얻은 석유는 품질이 아주 좋아, 특별한 정제 없이도 보일러에서 잘 연소되었다. 미군 잠수함 때문에 연료의 해상수송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이러한 특성은 아주 유용했지만, 이 상황에서는 독이 되었다.[33]

결국 폭발성 가스가 격납고에 퍼졌고 폭발성 가스를 뽑아내기 위해 환풍설비를 가동시켰는데, 담당 장교가 해당 구역 내의 환풍설비만으로 가스를 배 밖으로 뽑아내는 게 힘들자 격벽을 개방해 가스를 배 전체에 뿌리고 만다. 가스를 배 전체로 퍼뜨린 후 배 전체의 환풍설비를 사용하면 금방 다 배 밖으로 빼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 결국 그 날 오후 5시 32분, 주 격납고의 발전기에서 불꽃이 튀면서 폭발성 가스가 인화, 폭발하며 격침되었다. 전체 승조원 2150명 중 1,650명이 전사했다.[34]

미 해군 가토급 잠수함 카발라 SS-244

허만 코슬러 소령이 지휘하는 또 다른 가토급 잠수함 카발라(Cavalla) 호는 정오 무렵에 쇼카쿠를 공격할 위치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고, 6발의 어뢰를 발사해 그 중 3~4발이 명중했다.

명중한 어뢰 중 1발이 주 격납고 부근의 전방 항공유 저장고에 적중하여, 재급유를 받고 있던 함재기들이 폭발했다. 또한 새어나온 연료가 퍼지면서 대화재를 일으키고 탄약과 폭탄도 뻥뻥 터지며 쇼카쿠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함선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고, 화재를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다고 판단한 함장은 배를 버리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곧 함 내에 쌓여 있던 폭발성 가스가 항공기용 폭탄의 폭발에 의해 인화, 폭발하여 쇼카쿠는 얍(Yap) 섬 북쪽 230km 해상에서 쪼개지면서 침몰했다. 1263명의 인원이 쇼카쿠와 운명을 같이했다. 일본군 구축함 우라카제와 기타 구축함들이 카발라 호에 100발이 넘는 폭뢰를 투하하였으나 과감하게 한번도 내려가보지 않은 심도 120M까지 잠수하면서 무사히 탈출하였다.

또한 허만 코슬러 소령은 처음 초계에 나서는 함장이였기에 항모부대의 공격에 투입되지 않고 플라잉피시와의 교대를 위해 이동하던중 일본의 급유대를 만나 추적하여 쇼카쿠를 공격해 첫 초계에서 항공모함을 격침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로 인해 일본 함대의 항모 2척과 2913명의 인원, 그리고 24대의 항공기가 추가로 사라졌다. 항공기만 따지면, 함대 전체가 보유한 473대의 함재기/수상기 중 60%가 넘는 314대가 단 하루만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3.5.3 바다의 칠면조 사냥 2탄

그 다음날에는 미군의 반격이 개시되었다. 20일 오후 3시 40분까지 미군은 일본 함대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날 4시 5분, 자세한 보고가 올라왔고 공격을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미군의 공격은 오후 6시 30분이 시작되었는데 미군 함재기들이 처음 발견한 건 유조선 2척이었다. 큰 피해를 입은 이들은 나중에 배에 일부러 구멍을 내어 자침하였다. 항모 히요는 어벤져 뇌격기 4기의 폭탄과 어뢰 공격을 받고 멈춰서 있다가 새어나온 항공유가 인화, 폭발로 침몰했다. 다른 항공모함 즈이카쿠, 준요, 치요다, 전함 하루나는 심한 피해를 입었다.

오자와의 아웃레인지 덕에 일본함대의 위치는 미 함재기의 행동반경 끝자락에 간신히 걸려 있었다. 거기에다 일몰 직전에 시작된 공격은, 공격을 마치고 귀환하는 미 함재기들에게 연료부족과 야간착함이라는 이중고를 강요했다. 미 함대는 야간등화관제를 깨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함대 상공을 비췄음에도 불구하고 함재기 80대를 잃고 만다. 일부는 비행 갑판에 충돌하기도 했고, 대다수는 바다에 추락했다. 그렇지만 적극적인 구조 덕분에[35] 많은 조종사들이 그 후 며칠 간 구조되었다. 또한 미국은 일본에 비해 손실기를 금방 보충할 여유가 있었으므로, 미 함대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훨씬 적었다. 게다가 그 와중에 우리의 불사함님은 1기를 제외한 모든 함재기가 성공적으로 귀환했으며 그 나머지 한 기도 파일럿 수색에 성공했다.[36]

4 결과

격추 43대, 착함실패/불시착/오인 사격 등으로 87대, 합계 130대의 함재기를 잃었으나 함선 피해는 전무했던 미군에 비해 일본군의 피해는 압도적이었다. 전투 첫 날에는 항모 2척을, 그 다음날에 항모 1척을 또 잃었다. 둘째 날까지 잃은 함재기/수상기는 합계 426대, 지상 항공기는 50여대를 손실하였다. 조종사를 비롯한 항공승무원은 445명을 잃었다. 대형 정규항모쇼카쿠다이호, 정규항모에 버금가는 크기를 자랑하는 개조항모 히요가 가라앉아 버렸고, 즈이카쿠준요도 큰 피해를 입었다. 주력항모로 쓸만한 배가 모두 침몰하거나 큰 타격을 입은 것이다.

이 전투를 끝으로 일본 해군의 함대항공력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전함 야마토를 위시한 수상함 세력은 여전히 건재했지만, 항공 엄호가 없는 함대가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되는지는 일본 해군 스스로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나머지 일본의 수상함 세력은 레이테 만 해전에서 완전히 발리게 된다.

거기에다 이 전투는 그저 일본 함대의 괴멸만을 초래하지 않았다. 일본함대가 사라지자 거칠게 없어진 미군은 사이판 전투를 위시로 하여 마리아나 제도를 장악해 버렸다. 이로 인해 1943년에 일본이 설정한 절대국방권이 박살났고, 그 여파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던 도조 히데키 내각이 무너졌다.

비슷하게도 유럽에서는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벌어진, 영국 스핏파이어 전투기가 독일의 폭격기 슈투카 부대를 박살낸 8월 13일의 신나는 뇌조 사냥이 있다.[37]

5 평가

일본해군의 등뼈(back bone)를 부러트린 전투. 아주 간단하게 이 해전의 의의를 표현해주는 문장이다.

일본 해군은 이제 미드웨이 해전이나 과달카날 전투 이후와는 다르게 해군항공대를 재건하려는 시도조차 불가능하게 되었다. 항공기 손실은 어떤 식으로든 보충할 수 있었지만, 이를 운용할 인력은 더이상 어찌해볼 방법이 없었다. 당시 작전에 참가한 함재기 조종사 및 승무원들 대다수의 기량이 전쟁 초기에 참전한 인원들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악화되어 있었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나마 일본에 남아있던 항공모함에서의 항공기 운용 경험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그런 존재들이 단 한 번의 결전에 싹 쓸려나간 것이었다. 더군다나 제1기동함대 창설과정에서 그나마 잔존한 항모 탑승 경험이 있는 베테랑들을 긁어모아서 중대장급 이상의 지휘관으로 배치했는데, 이들 베테랑들의 손실도 매우 극심했다. 총 35명의 중대장급 이상 지휘관들 중 22명이 전사했고 몇몇은 목숨은 어찌 건졌으나 전선에 복귀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거기에다 위에서 언급되었다시피 절대국방권으로 대변되는 일본의 방어전략이 이 한 번의 해전과 그에 따른 여파로 인해 박살나버렸다. 필리핀 해 해전은 일본해군이 미 해군의 격멸을 목표로 한 마지막 해전이었으나 결국 목표를 이루지 못한데다 태평양에서의 방어전략에 필수적인 요소였던 항모전대를 다 날려버렸다. 비록 아직 일본 해군의 수중에는 즈이카쿠를 비롯한 다수의 항모가 있었지만, 항공기도 그걸 운용할 사람도 없는 항모는 그저 덩치 큰 수송선에 불과했다. 그런 탓에 레이테 만 해전에서는 미 해군과 직접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기껏해야 방어선 돌파만을 노리는 수준으로 비참하게 추락했으며, 그마저도 전 해군의 피해를 감수해야 할 정도로 궁지에 몰리게 된다. 또한 마리아나 제도 상실이 거의 기정사실이 되고 말았다.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연함함대 사령관 도요다 소에무 제독은 아래와 같이 훈시했는데

"이 한 번의 전투에 제국의 흥폐가 달렸다."[38]

결국 그 말대로 되었다. 이 전투를 기점으로 본토가 본격적으로 공격받기 시작했으니까.

이미 저 위에서 언급되었지만, 미군 입장에서 마리아나 제도는 일본 본토 침공을 위한 요긴한 전진기지이자 일본 본토를 신형 전략폭격기 B-29의 행동반경에 넣을 수 있는 항공기지로 안성맞춤이었다. 이 마리아나 제도를 차지하는데 있어서 최대의 걸림돌이었던 일본 해군의 주력을 격퇴함으로서 이후의 작전을 매우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일본 해군이 껍데기만 남았기 때문에 앞으로 미 해군은 행동의 제약을 크게 덜었지만, 미 해군이 이걸 깨달은 것은 레이테 만 해전부터였다. 미 해군이 진작에 일본 해군의 사정을 알았다면 레이테 만 해전에서의 삽질이 조금은 덜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미 함대는 일본 함대를 정보력으로도 압도하였는데, 실질적으로 교전을 실시한 기동부대간의 색적만 보면 일본이 유리하게 시작한 것처럼 보인다. 일본 기동부대는 미 항모전단이 자신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상대를 먼저 발견했고, 상대의 닿지 않는 거리에서 먼저 공격을 가할 수 있었으며, 여차하면 괌의 비행장으로부터 지상 주둔 항공병력의 지원을 받음과 동시에 함재기들이 이 비행장을 활용하여 보다 융통성있는 작전도 가능했다(마지막 부분은 실패였지만).

하지만, 단순히 일선 부대들 간의 색적을 떠나서 상대의 의중을 파악해 대처하는 부분에선 미군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전투 개시 전에만 해도 일본 해군 수뇌부들은 미군의 공격시기와 공격지점을 헛짚고 있었다가, 미 함대가 예상보다 일찍 마리아나 제도로 몰려오자 부랴부랴 전력을 수습하여 전투에 돌입했다. 자신들이 원하는 시기와 지점에서 전투를 준비할 수 없었다는 것에서 부터 이미 에러.
반면 미군의 경우 일찌감치 일본군의 방어계획을 파악했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군이 어느 정도의 규모로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어디서 자신들과 맞붙으려는지 짐작하고 있었으며 덕분에 미군은 일본 함대를 정박지에서부터 집중적으로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었다. 스프루언스가 자신들의 원래 목적인 마리아나 제도 점령에 집중하면서 일본함대에 대해서는 요격전에만 임할 수 있었던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괌을 비롯한 지상 비행장들을 본 전투 발발 이전에 일찌감치 박살내 놓고, 전투 와중에도 수시로 두들겼던 것도 위에서 언급된 일본군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39]

따라서, 단순히 미/일 양자의 기량이나 기술 수준 차이가 승패를 갈랐다고 볼 수는 없다.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도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대응하다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머지않아 레이테 만 해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6 전후의 이야깃거리

위의 평가에서처럼 실제 결과는 일본해군의 함대항공력을 박살낸 대전과였지만, 적어도 본 해전이 끝난 직후 미 해군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일단 전투의 전반적인 흐름이 미군의 일방적인 수세였고, 해전 규모에 비해 대함전과가 미미했던 것이 그 원인이었다. 이 전투가 끝나고 미군높으신 분들은 물론이고 스프루언스의 지휘하에 있던 58기동부대 지휘관 마크 미처 제독까지도 요격전에만 전념하고 일본 함대 격파에 나서지 않은 스프루언스의 작전지도를 마구 씹어댔다.
하지만, 전후 일본 측 자료가 공개되고 이를 바탕으로 연구한 결과 오히려 그 상황에서는 요격전이 최선이었다는 결론이 나와 스프루언스의 작전 지도가 탁월했다는 평가를 받게 됐다. 그나마 해군 내에서는 비교적 일찍 스프루언스의 공적이 인정되었으나, 일반인들 사이에서 그의 공적이 인정 받은 건 그의 사후에 니미츠 제독의 전기가 출간되고 나서다.

한편, 이 전투에서 구축함 유키카제도 참전했었으나 대잠작전 중 기뢰폭발로 손상을 입어 퇴각해야 했다. 물론 그 뒤에 벌어진 참상을 보면 정말 이 배가 남의 운을 빨아먹는 것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

이 전투에 참전했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한 일본군 조종사는 훗날 "내 평생에 그렇게 많은 구라망[40]은 처음 봤다."면서 당시의 압도적인 전력차에 혀를 내둘렀었다.

윌리엄 홀시 제독이 후일 "내가 필리핀에 있고 스프루언스가 레이테에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이란 말을 남겼는데[41], 파괴하지 못한 전함 세력과 애매하게 살아난 항모전단이 각 지휘관의 특성과 애매하게 조합되어 레이테 만 해전 당시 홀시가 평생까임권을 얻는데 일조했으며, 스프루언스는 이 해전에서 강경하게 밀고나가지 못해 역시 생전에 업적을 인정받지 못했다는 걸 생각해보면 조금 안타까운 부분.

  1. 이쪽은 비공식이다. 그런데 이 해전의 경과만 보면 틀린 것도 아니다. 그리고 영국에서는 이름 자체도 발랄한 8월 13일의 신나는 뇌조 사냥도 있다.
  2. 정규항공모함급의 크기인 준요와 히요 포함
  3. 해전 전 기간의 전투 손실 약 40기를 제외하면 아군의 대공포 사격에 휘말리거나 연료 부족, 난이도 높은 야간 착함 실패로 추락한 게 태반이다.
  4. 상술한 히요 포함
  5. 손실기 476기 중 290기 정도가 단 하루만에 손실되었다.
  6. 태평양 전쟁 중반에 이르자 전선의 규모가 자신들의 역량을 벗어났다고 판단, 전선을 축소하고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설정했다. 태평양 지역의 경우 서부 뉴기니 - 캐롤라인 제도 - 마리아나 제도를 잇는 일련의 선이 여기에 해당된다.
  7. 과달카날 전투의 산타크루즈 해전 이후 일본 항모부대가 다시 등장한 것이다.
  8. 기체 이상, 대공포 같은 전투외 추락을 완전히 배제한 순수 공중전에서의 격추비만 단 하루만에 239:31. 거의 8:1에 가까운 격추비다.. 일본 해군 항공기 여덟 기가 격추될 때 미 해군 항공기는 고작 한 기가 격추당한 셈이다.
  9. 1위는 레이테 만 해전, 2위는 유틀란트 해전
  10. 그런데 이것도 알고 보면 일본의 자폭인데, 일본에서 필리핀 해 해전이라 부르는 저 해전에서는 일본군 해군이 그야말로 확인사살까지 당했을 뿐 아니라, 일본군 해군의 병크 of 병크인 카미카제 자살 돌격이 처음으로 나오게 되는 해전이기도 하다.
  11. 마리아나 제도 점령 이전에는 중국에서 B-29를 출격시켰지만, 보급이 쉽지 않았고 작전기지가 일본군의 공격에 노출되는 등의 문제가 있어서 제대로된 작전을 펼칠 수 없었다.
  12. 지상 발진 항공기 부대 편성은 항모 전대 재편성 이전부터 시작되었으며, 최초 목표는 1,500기의 대규모 편제로 주요 거점에 배치하여 항모 전대와 함께 미군의 진격을 저지한다는 것이었다.
  13. 육군이 아니라 해군육전대 병력이었다. 육군은 일찌감치 증원을 포기했다.
  14. 일본해군의 점감요격작전 교리에 따르면 잠수함들은 아군 전방에 나서서 적 함대에 초기 타격을 가하고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적 함대를 괴롭혀야 했다.
  15. 이름이 잉글랜드지만 엄연히 미국 소속의 구축함이다. 해당 항목 참조.
  16. 정규 항공모함인 다이호, 쇼카쿠, 즈이카쿠로 이루어진 핵심전력. 지휘관은 오자와 중장 본인
  17. 개조항모 히요, 준요, 그리고 경항공모함 류호로 이루어졌으며 지휘관은 조지마 다카지 소장
  18. 정찰기에 의한 정확한 확인은 이뤄지지 않았다. 무선감청은 기술적인 문제로 정확도가 낮았고, 잠수함들은 행동의 제약 때문에 실시간 보고가 어려웠다.
  19. 과달카날 해전에서 승리한 그 사람 맞다.
  20. 그 자신이 경험한 미해군의 야간전 능력이 일본군보다 한수 아래였던 것도 있었고, 자신들의 고속전함들은 전쟁기간동안 대공 전투만 줄곧 치뤘지 함정간 교전 경험이 없었던 것도 미처 제독의 구상을 반대한 이유였다.
  21. 미군의 38구경 127mm는 2차대전에서 가장 성공적인 해군 양용포라는 평가를 받고 있고, 40mm 보포스와 20mm 오리콘 대공기관포는 아직도 현역이다
  22. 산타크루즈 해전 당시, 미국은 항모 1척을 잃었고 1척이 지옥문턱을 오갔긴 했지만 오히려 일본측이 함재기를 너무 많이 잃고 재공격을 포기했었을 정도다. 약 180명의 파일럿을 소모했었다는 기록도 있다
  23. F6F 헬캣 항목을 보면 나오지만 처음에는 F4F 와일드캣을 개량해서 만들려 했다가 이도 저도 아닌 옆그레이드가 되자 기체 자체를 완전히 새로 만들었다.
  24. 파일럿 양성기관도 적고,폐쇄적이고 전혀 무관한 이유로 짤리고 정작 일선에서 파일럿들의 발언권은 매우 약했다. 병계급으로 시작하고 심지어 병계급 에이스도 나온다.
  25. 하지만 기본적으로 훈련은 언제나 사상자가 발생할것은 염두해두고 한다.
  26. 임멜만 턴은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1차대전의 독일 공군 에이스였던 막스 임멜만이 고안해 낸 공중기동으로, 조종간과 러더를 이용해 빠르게 다음 목표로 비행방향을 바꿀 수 있는 기동으로 상당히 고난도의 기동이다. 또 하나는 현대의 것을 말하는데, 위의 임멜만 턴에서 이름만 가져온 것으로 간단히 말해 비행하던 상태에서 루프(기수를 들어 크게 원을 그리며 1회전)후 루프의 정점에서 1/2만큼 롤(공중에서 수평방향으로 기체를 1회전)해 기체를 똑바로 세우는 기동이다. 이는 러더 조작이 필요없이 조정간만으로 간단히 할 수 있으며, 원래 임멜만턴과는 달리 기초적인 수준의 기동이다.
  27. 출격 당시엔 130기였으나, 기체 고장이나 함대 전방에 있던 C부대의 팀킬(...) 등으로 인해 수량이 줄어들었다. 그 중 백미는 아래에 언급할 다이호의 격침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28. 2차 공격대 중 일부 기체가 레이더를 기만하기 위한 채프를 살포했고, 여기에 낚인 미군 전투기들은 그대로 허탕치고 말았다.
  29. 일본군 공격부대 220대 + 정찰기 19대
  30. 칠면조는 닭보다 4배는 크고 움직임도 느린 식용(!) 새다. 총으로 사냥하면 거의 정지 타겟과 마찬가지...
  31. 왜 이름이 참치 종류인가 하면, 미군은 원래 잠수함의 이름으로 수생동물의 이름을 주로 사용하곤 한다. 노틸러스 역시 앵무조개라는 뜻이고 노틸러스가 속한 나왈급 네임쉽 나왈도 일각고래라는 뜻이다. 그외에도 블랙피쉬, 바브 등 수생동물의 이름을 사용한 잠수함은 다양하다. 심지어 21세기 운용되는 끝판왕 시울프급은 대서양 울프피쉬(Atlantic wolffish)의 별칭이다.
  32. 420px전투기가 어뢰를 몸으로 막았다. 이 그림이 그것.
  33. 다만 앞 문단에서 언급된 것처럼 항공유 저장소도 2개소 파괴되었고, 폭발 사유 역시 함정용 연료 배관의 타라칸 연료유가 아니라 이때 어뢰 충격으로 파괴된 항공유 저장소에서 기화된 항공유였다는 것이 일본 당국의 공식적인 입장이자 현재의 정설이다.(이 당시의 항공유는 현재의 항공유같은 등유 중심의 혼합유가 아니라 순수 가솔린이었다는 걸 알아두자.) 타라칸 원유가 원인이라는 설은 현재는 소수설이지만, 1960년대 일본에서 발행된 소설 및 각종 문헌에서 타라칸 연료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면서 꽤 오랫동안 정설 대접을 받았다.
  34. 일본군측의 작전 보고서에 의하면 항공유 유출 때문에 이미 처음부터 격납고 전체에 가스가 차 버렸으며, 어떻게든 빼내기 위해 열 수 있는 문은 모조리 다 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어서 부득이하게 엘리베이터를 내리고 격납고 측면 벽을 억지로 뜯어내기까지 했다. 함 전체로 퍼뜨린 게 아니라 격납고 전체에 꽉 찬 휘발성 가스가 제대로 빠져나가질 않은 것. 아예 환기 기능이 제 구실을 못 했거나, 그걸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휘발유가 기화되어 있었던 거다. 애초에 피뢰 충격으로 항공유 저장고와 파이프라인이 파괴된 것도 진수 시점인 1943년 들어 점차 심해지기 시작한 숙련공 부족 사태로 인한 부실공사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일본 측의 분석이다. 즉, 평시에도 가장 중요한 군수지원이라는 후방 지원분야에서 써먹어야 할 숙련공을, 생길 만 하면 알보병으로 징집 → 전장에서 갈아넣어버리는, 상식적으로도 이해 못할 짓을 저지른 일본군 탓.
  35.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 마크 미처 제독은 역사에 길이 남을 한마디의 명령을 내린다. "전 함은 빛을 밝혀라!" 이 함대의 목숨을 건 선택이 수많은 조종사들을 구했다. 호위기가 없는 텅텅 빈 항공모함이 야간에 자기 위치를 광고하는, 말 그대로 함대의 목숨을 건 선택이었다.
  36. Battle 360에 소개된 일화를 따르자면 파일럿 수색에 성공한 구축함이 통신을 보냈는데 "이 파일럿은 아이스크림 몇 갤런인가? 이 파일럿은 비행대 리더이므로 아이스크림을 좀 더 많이 줘야 한다." 라고 협상시도를 했다. 물론 비행대 단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이었던 만큼 아이스크림 요구량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스크림이 언급된 이유는 당시 엔터프라이즈가 포함된 함대를 지휘하던 마크 미처 제독이 파일럿을 구조하는 배에 아이스크림을 좀더 배급하겠다고 선언했었기 때문이다.비행대 리더 아이스크림 이야기 , 미 해군의 아이스크림 공장
  37. 그런데 실상을 알면 격이 다르다. Ju87 슈투카는 호위기(Bf109)가 있어야 하는 급강하 폭격기지만, A6M은 전투기, 그것도 함대 방공전투기다. 즉 뇌조사냥은 호위기가 없는 상황에서 급강하 폭격기를 사냥한 것이고, 이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은 문자 그대로 함대의 호위를 하는 함대 방공전투기를 더이상 제대로 운용조차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38. 쓰시마 해전에서 도고 제독이 이 같은 훈시를 한 이래 태평양 전쟁에서도 주요 격전때 마다 이 같은 훈시가 있었다.
  39. 여담이지만 본 해전 당시 스프루언스가 일부러 정찰 범위를 축소했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 함대의 위치가 정확하게 파악되는 순간, 휘하 항모부대 지휘관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일본함대를 치러 가자고 들고 일어나는 걸 미연에 막고, 자신의 의도대로 전황을 끌고가려던 속셈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사실관계는 명확하지 않으므로 그저 참고만 하자.
  40. F4F 와일드캣F6F 헬캣의 제조사인 그루먼사를 일본식으로 발음한 것으로, 당시 일본군 조종사들이 미군 함재전투기들을 통칭하던 단어이기도 하다. 당시 대부분의 함재전투기는 그루먼사의 작품이었다.
  41. 스프루언스쪽은 반대로 홀시 제독이 레이테 만 해전에서 즈이카쿠를 잡으러 갔을 때 "나였으면 제 위치에 그냥 있었을 것"이라 했다.(실제로 마크 미처 제독의 참모장이었던 알레이 버크 제독은 즈이카쿠를 잡으려 가려던 홀시 제독에게 "즈이카쿠 저거 미끼 같은데, 버리죠?"라 했다.)